“상차림을 통해 정조대왕의 효심과 애민을 엿보다”
수원전통문화관, 원행을묘정리의궤 속 상차림 특별기획전
수원문화재단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이하여 오는 10월 31일까지 ‘정조,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속 상차림을 맞이하다.’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정조대왕의 화성 8일간의 능행차가 기록되어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를 토대로 궁중음식 상차림을 선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인 한복려 원장의 자문 및 감수를 받아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에게 올려 진 상차림을 재현하였다. 수원시 전통식생활체험관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상차림은 역사 속에서 정조대왕의 효심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전시회라는 생각이다. 넓지 않은 식생활체험관 전시실에 진열된 상차림은 옛 식생활습관과 정조시대의 궁중상차림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정조대왕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받았던 아침 수라상과 주다소반, 정조대왕이 베풀었던 양로연의 상차림을 재현한 모형 3점과 정조대왕의 아침 수라상, 혜경궁의 홍씨의 소별미상과 미음상, 내·외빈, 궁인, 여령·악공, 군인 등이 받았던 상차림 사진 8점이 전시되었다. 이를 통해 정조시대 궁중에서 만들어진 음식과 왕이 받았던 수라상부터 백성에게 베풀었던 상까지 다양한 신분별 상차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
“우리기 흔히 드라마 등에서 보던 상차림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흔히 궁중의 상차림이 대단히 거창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임금이 받은 상차림치고는 상당히 소박하다. 다만 어머니의 혜경궁 홍씨의 상차림이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상차림과는 차이가 있어 역사속의 식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시실에서 만난 관광객 한 사람은 수원을 찾아왔다가 소중한 식생활에 관한 자료를 만날 수 있어 기쁘다고 한다. 상차림 중에서 정조대왕이 8일간의 화성 능행차 중에 윤 2월 14일 낙남헌에서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풀었을 때의 음식에는 두포탕(두부탕), 편육, 흑태증(검은콩찜) 실과 등이다. 이는 어른들에게 부드러운 음식으로 대접한 것이다. 정조대왕은 노인들과 동일한 음식을 받아 상차림에 있어서도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의 아침 수라상은 13그릇 또는 15그릇을 원반과 협반으로 2개의 상에 차린다. 원반에는 유기그릇에 담은 13그릇의 음식을 차리고 협반에는 화기 그릇에 담은 세 가지 음식을 차렸다. 그 외에도 혜경궁 홍씨의 주다소반과는 윤2월 9일 시흥에서 참으로 먹은 음식으로 아침과 저녁 수라상 사이에 점심이나 야참 또는 다과시간에 오르는 음식이다.
반과상 차림에는 주식을 국수로 차리고 만두, 탕, 적, 전유화, 어채, 편육, 증, 회, 다식, 떡, 각색당, 유밀과, 강정, 율란, 조란, 정과, 생과, 수정과, 청(꿀), 장 등을 사기그릇에 담았다. 국물이 없는 음식들은 3~5촌(9~15cm)으로 고이고 상화로 장식하였다.
일찍 남편인 사도세자를 여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조대왕의 효심은 남달랐다. 원행시 정조대왕이 지시한 음식에 관한 지침을 보면 먼 곳에서 진이(珍異)한 음식을 구해다 바치지 말 것, 음식 맛을 일반 시중의 습속에 따라 사미(사치하고 화려함)하게 차리지 말 것, 각 참에서는 절대로 개인적으로 물건을 진상하는 사헌을 금할 것, 왕의 진찬(수라상)은 10그릇을 넘지 않도록 할 것 등이다.
이렇듯 정조대왕은 늘 자신이 먼저 사미한 음식을 멀리하고 한 자리에 앉은 노인들과 같은 음식을 들 정도로 어진 임금이었다. 수원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정조시대의 궁중음식뿐만 아니라 8일간의 행차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과 백성을 향한 애민정신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세한 사항은 수원시전통식생활체험관 홈페이지나, 수원시예절교육관(http://suwonyejeol.or.kr)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문의전화는 031-247-3762으로 연락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여러분!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비둘기들 화성 일대 피해 입혀
수원 화서문 일대 장안공원과 남수문 일대 지동교와 남수문 등에는 유난히 많은 비둘기들이 모여 산다. 이들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마세요’란 문구를 적은 현수막이 수원천 양편 축대에 걸려있고, 화성을 돌다보면 이런 문구가 적힌 글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면서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자리를 바꾸며 나는 모습에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주는 먹이 때문에 정작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비둘기들이 편하게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 함께 서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이를 주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심지어는 주머니에 모이를 가득 넣고 와서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에 먹이를 던져주고는 해요.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면서 싸대는 배설물로 인해 주변도 더러워지고 심지어는 진열해 놓은 상품에까지 비둘기 배설물이 떨어져 못살겠어요. 무슨 방법을 내던지 해야지.”
비둘기 배설물 피해 심각하다
사람들은 재미삼아 모이를 던져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길들여진 비둘기들로 인해 비둘기들이 몰려있는 주변 사람들은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모이를 받아먹는 비둘기들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그런 비둘기들의 배설물로 인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까지 배설물 천지로 변하고 있다.
2일 낮에 돌아본 화서문 일대와 지동교, 남수문 일대는 비둘기 배설물로 인해 더럽혀져 심각한 수준이다. 명색이 세계문화우산인데 비둘기 배설물로 인해 더렵혀져 보는 사람들이 상을 찡그릴 정도이다. 문화재에 얼룩진 배설물들이 보기에도 더러워 보인다. ‘수원화성 방문의 해’에 찾아 올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도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지방 문화재를 답사하다보면 일부 문화재의 전각에 망을 쳐서 비둘기로부터 보호하고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비둘기 배설물로 인해 문화재가 부식이 온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망을 쳐 놓으면 비둘기들이 앉지를 못해 자리를 옮겨간다고 한다. 화성의 중요 시설물에도 그런 방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비둘기 모이 못주도록 막아야
“선생님 비둘기 모이 그렇게 주시면 안됩니다.”
“왜요?”
“이곳 화서문과 사북공심돈은 모두 보물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저 지붕 위에 비둘기들 보세요. 비둘기들이 배설물로 인해 문화재가 훼손이 됩니다. 비둘기들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죠. 그렇게 모이를 주기 때문에 비둘기들이 이곳에서 서식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요 오늘만 주고요”
말을 하면서도 답답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죄송하다’거나 ‘알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모이 주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데 오늘만 주겠다고 한다. 과연 이란 사람들이 오늘만 주고 말까? 이들은 나름대로 동물을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겠지만 이런 모이를 주는 행동은 주변 문화재에 심각한 훼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왜 모르는 것일까?
화성 인근에 서식하고 있는 수많은 비둘기 떼. 이 비둘기들로 인해 문화재의 훼손은 물론 인근에서 장사를 하거나 삶을 영위하는 주민들까지도 피해를 입고 있다.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행위를 근절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무예24기 시연은 역시 ‘원앙진’이다
시립화 되면서 변한 무예24기 시연
무예 24기는 정조임금이 실전에 맞게 집대성한 것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를 말한다. ‘무예24기(武藝二十四技)’는 조선시대 군사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의 무예로, ‘무예이십사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무예도보통지 속에는 무예이십사기로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각종 외침을 겪었던 조선이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무예 중 정수만을 집대성한 실전무예지이다. 더욱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나라의 무기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던 무기들까지도 그 동작 등을 실어 실전의 교범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가히 당대 최고의 무예지라고 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전하는 무예 24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본국검 2. 예도 3. 제독검 4. 쌍수도 5. 쌍검 6. 마상쌍검
7. 등패 8. 왜검 9. 왜검교전 10. 월도 11. 마상월도 12. 협도
13. 장창 14. 기창(騎槍) 15. 죽장창 16. 기창(旗槍) 17. 당파 18. 낭선
19. 권법 20. 곤봉 21. 편곤 22. 마상편곤 23. 격구 24. 마상재 등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무예를 극대화 시킨 것
명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에 기록된 무예 6종은, 후일 조선에도 전해져 <무예제보>에 실렸다. 이 무예제보의 내용은 이후 <무예도보통지> 까지 이어지면서 조선 무예를 극대화시킨다. 기효신서에는 6가지 무기의 장, 단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장창은 길어 원거리에서 적을 처리하기 좋으며, 낭선은 길이와 더불어 가지의 철붙이로도 공격하니 장창은 낭선을 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낭선은 그 기법이 등패를 뚫지 못하고
등패는 낭선을 이기지만 곤방의 음양수에 당해내지 못한다.
곤방은 장도를 당해내지 못하며
장도는 당파를 당해내지 못한다.
당파는 길이에 있어서 장창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렇게 장창과 낭선, 등패, 곤방, 장도, 당파의 무기들의 장, 단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로 모아 진으로 구성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병력을 극대화 시킨 것이 바로 ‘원앙진’이다.
서로를 보호해가면서 적을 공격하는 원앙진
‘원앙진(鴛鴦陣)’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고안한 진법이다. 원앙진이라 함은 진형을 이룬 형세가 마치 원앙의 모습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원앙은 암수 한 쌍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가 따라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앙진은 12명이 1대를 이룬다. 우선 등패와 요도를 든 등패수 2명이 앞에 서고, 그 뒤로 10명의 갖가지 무기를 든 병사가 2열종대로 진을 갖춘다. 이 원앙진은 명나라 중기 절강성을 비롯한 동중국해 연안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만든 진법이다.
하지만 명군이 원앙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병학지남연의>라는 병서에는 원앙진의 위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명나라 군대가 평양으로 진입한 다음 먼저 화포를 발사하고 이어서 화전을 발사하니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 듯했다. 화포와 화전의 공격에 왜적들은 기가 꺾였다. 적이 먼저 돌진해오면 낭선부대를 집중시켜 대기하고,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등패수들이 먼저 공격해 들어간다. 왜적이 패하여 도망가니 가히 천하무적이다’
12명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
원앙진은 6가지 무기를 장비한 12명을 1대로 편성한다. 한 대에는 지휘자인 대장 1명과 등패와 표창을 가진 등패수(이하 요도수) 2명, 낭선을 가진 낭선수 2명, 장창을 든 장창수 4명, 당파와 화전(火箭)으로 무장한 당파수 2명, 그리고 취사 등 잡일을 담당하는 화병(火兵) 1명이 편성되어 있다.
전투시에는 12명의 군사 중에서 화병은 빠지고 대장을 선두로 하여 등패수-낭선수-장창수-당파수의 순으로 서서 적군을 향해 나아가 낭선, 장창, 당파 등을 이용하여 격투를 벌이게 된다. 접전시 진형은 2열 종대로써 등패와 요도로 무장한 요도수 2명이 장창 4명을 보호한다. 좌측의 요도수는 작고 둥근 등패를, 우측은 대형방패인 장패를 들고 표창이나 요도로 접근을 차단한다. 낭선수는 적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한다. 대열 후미에는 당파를 든 당파수가 화전을 이용하여 마찬가지로 근접하는 적을 막는다.
21일 오전 11시가 넘어 화성 행궁 신풍루 앞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오전과 오후에 시범연희를 하는 무예24기 때문이다. 쏘고 찌르고, 베고 자르는 실전부터 원앙진의 시범까지 고루 보여지는 이 무예24기 시범에 관람객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2016년은 ‘수원화성 방문의 해’이다.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수원으로 몰려든다.
이들은 그 중 가장 보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화성과 행궁, 그리고 볼만한 구경꺼리로 무예24기를 관람할 것이다. 무예24기 시범단은 시립화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시범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좀 더 예전 정조대왕이 가장 신임하는 친위군사인 장용외영의 무사들과 같은 기백이 넘쳐야 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동작만이 아니라, 그 속내까지도 올곧은 진정한 무사로 말이다.
지키지 못할 공기는 왜 정해놓았나?
동남각루에 이어 창룡문도 공기 어겨
지난 해 12월 9일부터 올 4월 7일까지 보수공사를 마치겠다고 약속을 하고, 화성 동남각루 전체를 펜스로 막아놓았다. 그런데 공사 완공을 약속한 날짜가 이미 6개월이 더 지났는데도 동남각루는 아직도 공사를 위해 막아놓은 펜스를 철거하지 못하고 있다. 공기를 이미 놓친 동남각루는 화성의 자랑이 아니라 화성의 꼴불견으로 전락을 한 것이다.
공사 시행처가 공기를 정하고 안내판에 공사기간을 공개하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다. 공사안내판에는 각 공정의 편수들의 이름까지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약속기일이 다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담당부서에서 제대로 일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던지 공사기간을 지켜야 하는 것은 수원 화성을 찾고 아끼는 많은 사람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공사기간을 적지 말았어야 했다. 공사기간을 버젓이 밝혀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낸 꼴이다.
이번에 창룡문까지 공기 어겨
올 여름날씨가 한창 무더울 때 창룡문 역시 공사 펜스로 가려졌다. ‘수원 화성 창룡문 옹성 보수공사’라는 공사명으로 시작한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보수공사 기간은 7월 13일부터 10월 9일까지로 명시가 되어있었다. 그 동안에 가설공사, 여장해체설치공사, 전벽돌교체공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화성의 중요 시설물의 보수공사를 담당하는 부서나 공사담당자들이 약속한 날짜를 어긴다는 것은 무슨 이유로던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시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공사기간을 훌쩍 뛰어넘어 10개월 가까이 볼썽사납게 펜스로 막아놓은 동남각루도 그렇지만, 창룡문 역시 제 날짜에 개방을 하지 못했다.
10월 9일이면 화성문화제 기간 중이다. 이 공사 안내판을 보면서 “설마 화성문화제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를 마칠 수 있겠지”란 생각을 했다. 화성 문화제때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화성을 관람하러 온다. 더구나 개회식이 동장대(연무대) 앞과 칭룡문 주변에서 열렸다. 그렇기에 그 이전에 공사를 마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공기 지키지 못한 관리부서 책임 물어야
공기를 발표한다는 것은 시민들과의 약속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화성을 걷고, 주말이 되면 외지의 많은 관광객들이 화성을 찾아온다. 하지만 두 곳이나 되는 구조물을 가리고 있는 공사를 위한 펜스가 여간 보기 불편한 것이 아니다. 동남각루 보수공사를 마치겠다고 약속한 4월 7일은 벌써 6개월이나 지났다.
그런데 동남각루는 공사를 하는 것인지 그저 방치를 한 것이지 알 수가 없다. 지나다니면서 돌아보아도 공사를 하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 가을이 되면 동남각루 성벽 아래 억새가 하늘거리는 것이 여간 아름답지 않다. 늘 가을이 되면 그 모습을 사진을 담아 올리고는 했는데, 더렵혀진 펜스로 인해 점점 흉물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12일 오후 퇴근을 하는 길에 창룡문을 돌아보았다. 공기를 적어 놓은 날짜를 흰 종이로 가려놓았다. 동남각루도 똑 같은 짓을 했었다. 가정집을 짓는 것도 아니고 명색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보수 공사하는 것이다. 펜스 일부에 유리로 안들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투명한 곳을 통해 보았더니 전벽돌교체공사를 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공사기간을 명시를 했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화성문화제 기간 중에도 공사를 마치지 못해 펜스를 치고 있는 창룡문. 무슨 이유로든지 공사날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한다. 그리고 얄팍하게 완공날짜나 종이로 가려놓은 이런 행동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성돌을 떠내 산이 낮아졌을까?
‘부석소(浮石所)’라고 쓴 작은 돌로 조형한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250-1 일대에 자리한 숙지산. 화성을 축성할 때 수원의 인근 네 곳에서 성돌을 떠왔다고 한다. 이곳 숙지산도 그렇게 성돌을 뜬 곳 중 한 곳이다. 정조대왕의 명을 받아 화성을 축성하는 시기인,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숙지산 일대에서 성돌을 뜨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원래 이 자리가 좀 높았다고 해요. 그런데 바위산인 이 숙지산에서 성돌을 뜬다고 바위를 하도 많이 채취를 해가 이렇게 낮아졌다고 합니다. 숙지산 일대를 돌아보면 여기저기 성돌을 떠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어요.”
얼마 전인가 이곳에 취재를 들어갔다가 마침 산길을 걷고 있는 어른신 한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하긴 많이도 떠갔을 것이란 생각이다. 부석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만 보아도 짐작을 할 수 있다.
가을에 만나는 숙지산 숲속에서 숨을 몰아쉬다
숙지공원에는 늦은 가을이라 날씨가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있다.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듯. 숙지공원 안쪽으로는 노천극장이 마련되어 있고, 그 옆으로 산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일부러 숙지화장실 앞 공터 옆으로 난 오솔길을 택한다.
이 길은 항상 고즈넉하고 조용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한다고 숲을 이용한다. 오히려 숲길에서 만나는 인파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고 한다. 숙지산은 123m의 높지 않은 산이다. 그저 아이들도 편하게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하지만 숙지산의 가을은 색다르다.
낙엽이 잔뜩 쌓여있는 좁은 길로 들어선다. 계절이 늦어서인가? 낙엽을 밟아도 ‘바삭’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저 푹신한 느낌이 든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이보다 좋은 길이 없다. 숙지산 길은 딱히 이 길이 정답이라고 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오솔길이 수도 없이 나 있다. 하기에 어느 길을 택하던지 그저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이 산길 정말 조용하고 좋아요. 요즘 이런 산에 가면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복잡한데, 이곳은 정말 좋은 사람하고 데이트하기에 딱 좋을 것 같아요.”
숙지산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만큼 늦가을의 숙지산은 한적하다. 그리고 숲속으로 들어서면 바로 짙은 숲 냄새를 맡을 수가 있다.
얼마나 많은 돌을 떠냈을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오솔길 중앙에 있는 소나무 숲에 닿는다. 키가 훌쩍 자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은 넓은 공터가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 의자들이 놓여있어 책 한 권 들고 올라오면,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면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는 곳이다. 그 한 옆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 바위가 보인다.
낙엽이 쌓인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니 높이가 5m가 넘을만한 바위가 보인다. 그런데 그 한 면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다. 그리고 바위 한편에는 성돌을 뜨기 위해 쐐기를 박으려고 파 놓은 구멍들이 일렬로 나란히 파여져 있다. 그 자리를 보면서 생각한다. 아마도 이 커다란 바위의 앞에도 더 큰 바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 바위를 이렇게 쐐기구멍을 낸 후 그곳에 바짝 마른 밤나무와 참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돌을 떠냈을 것이다. 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바위를 절개해 낸 선인들의 지혜에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숙지산 오솔길은 계절이 없다.
돌을 뜬 곳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낙엽을 떨군 나무들이 조금은 을씨년스러워 보이지만, 오히려 가을을 느끼기에는 그보다 좋은 곳이 없을 듯하다. 봄이 되면 진달래가 피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있어 좋다. 초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고, 늦은 가을에는 이렇게 쌓인 낙엽을 밟을 수가 있어서 좋다.
숙지산 오솔길에는 계절이 없다. 그저 언제나 찾아와도 조용한 숲이다. 이 높지 않은 산이 왜 이렇게 깊은 숨을 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일까? 숙지산 오솔길은 늘 그렇게 쌓인 낙엽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발길에 챈다.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굳이 숙지산이 아니지 않은가?
마치 미로처럼 이리저리 오솔길이 나 있는 숙지산. 아마도 200년 전 수많은 돌을 뜨던 선인들도 이렇게 여기저기 길을 내면서 다니지는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을 오솔길. 그 길에서 만추의 행복함에 젖어 있다가 보면, 어느새 해가 설핏 저물어간다.
“숙지산은 겨울애도 아름다운 산예요. 이쪽 산에는 소나무들이 많아 눈이 내리면 눈꽃이 정말 아름다워요. 이 조그마한 산이 사시사철 아름다움은 혼자 다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정조대왕이 팔달산 서장대에 올라 이 산을 바라보면서, “이미 우리가 저 산을 다 알고 있으니 ’숙지산(熟知山)‘이라고 부르라”고 명하셨던 것일까? 늦은 가을에 만난 숙지산 오솔길에는 계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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