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를 놓쳐 더 아쉬운 청심루 복원

 

“4대강 정비를 할 때 청심루를 복원했어야죠. 이제 시기를 놓쳐 힘들게 되었습니다. 4대강 개발을 하면서 건설회사 한 곳이 2억을 들여 정자를 하나 여강 가에 지었는데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복원을 해야 할 것은 관심도 없고 말입니다.”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은 기회를 놓친 청심루의 복원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을 써 청심루의 아름다운 절경을 읊었기 때문이다.

 

청심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1200년대 초에 활동하던 이규보의 시에 강루가 나오고 있는 점이나, 1200년대 후반에 고려시대의 문인이자 지도첨의부사를 지낸 주열의 시에 청심루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8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주관아 안에 세운 청심루

 

청심루는 여주 관아 안에 있는 정자로 일반 백성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청심루에 대한 글도 모두 선비들의 작품들이다.

 

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 여주목 청심루 부분에 보면 동헌의 경내 남한강 가에 청심루가 있고, 누각의 양편에는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다. 주열의 시에도 큰 나무가 서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청심루의 운을 써서 짓다(주열 : ? ~ 1287. 번역 조성문)

 

동그랗게 밝은 달이 구름 가에 나타나니

거울 속에서 예부터 친한 얼굴을 만나는 것 같네

쌍으로 선 나무는 보개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고

사화산은 수미의 무리가 드러누운 듯 하네

잉어는 아득한 저 너머로 처소를 전하고

검은 용은 어두움 속에서 명주를 숨기네

오경에 이르도록 시를 읊어도 시 더욱 기절하니

풍물로 인해 잠시라도 한가롭지 못하게 하네

 

여기서 풍물이라 함은 경치를 말하는 것이다. 청심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청심루의 운을 써서 시를 짓는 일이 새벽녘 오경(오전 3~5)까지 이어졌을까? 결국 밤을 새워 청심루의 절경을 읊었다는 것이다. 청심루에서 보이는 절경에 매료되어 글을 지은 사람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역사의 인물들이 즐비하다.

 

 

 

수많은 명인들이 청심루를 시로 읊어

 

이규보, 이집, 이색, 정몽주, 이직, 서거정, 김종직, 성현, 김안국, 주세붕, 서산대사 등의 글에도 청심루의 경치를 노래했다. 가히 남한강 중 제일경이 아니라면, 200여 편이나 되는 청심루에 관한 시가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청심루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역사속의 자료에 남아 있는 청심루를 찾아보면 18세기 중엽에 제작한 해동지도여주목 부분에 청심루가 있다. 청심루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헌의 경내에 자리한다. 그리고 청심루의 양편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주열의 시에 '쌍으로 선 나무'를 뒷받침하고 있다. 1796년 제작한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에도 청심루가 그려져 있다.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은 그의 논문 팔대수와 청심루의 문화생태적 고찰에서 청심루가 지어진 시기를 1235 ~ 1236년으로 유추하고 있다.

 

고려시대 누정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해당지역 관아나 사찰부근에 세워지기도 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여주사람 김약선의 딸이 태자비(뒤에 순경태후)로 뽑히던 1235년이나, 그 다음해인 1236년 충렬왕을 낳았을 때 축하의 의미로 청심루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청심루는 여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누각이었던 것이다.

 

청심루와 관련이 있는 시는 200여 수가 넘게 전해지고 있다. 그 수많은 시 중에는 팔대장림, 신륵사, 마암, 동대, 양섬, 제비여울, 이릉 등 주변의 절경을 함께 그리고 있다. 이러한 청심루는 8.15 광복을 맞이하여 성난 민중들이 일본인 군수의 관사에 불을 놓았을 때, 곁에 있던 청심루까지 소실이 되고 말았다. 남한강 제일경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주 남한강 가에 자리한 청심루 터를 알리는 비.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과거 속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은 맑은 물 위를 한가롭게 노니는 돛배, 아름다운 여강의 낙조, 새벽 물안개 속의 모래톱, 동대의 휘영청 밝은 달, 배안에 떨어지는 신륵사의 종소리. 이런 아름다운 모습들을 읊으면서 저절로 시름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이곳에 다시 청심루를 지을 수만 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찾아들 것인가? 청심루 터를 떠나는 귓전에 서산대사의 시문이 울린다.

 

 

 

해질 무렵 여강에 배를 대다(서산대사 : 1520 ~ 1604)

 

落雁下長沙 낙안이 장사에 내리고

樓中人起舞 누 가운데 사람이 춤을 추네

淸秋一葉飛 청추에 한 잎 낙엽이 날리는데

客宿西江雨 객숙 서강엔 비가 내리네

 

남한강의 긴 모래밭에 겨울 철새들이 내려앉고, 청심루에는 어느 사람이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맑게 갠 가을에 낙엽이 날리는데, 나그네가 묵을 여강 서쪽에는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다. 청심루와 남한강의 어우러짐을 그리고 있다. 사라져버린 남한강의 절경 청심루, 그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8, 벌써 며칠째 국민안전처에서 경기도 일대에 폭염특보가 내렸다는 문자가 들어온다. 아침 일찍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로 향했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는 산수유축제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다. 산수유축제를 열 때 찾아갔던 이천시 향토유적 제13호인 육괴정은 백사면 도립리 735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한 여름 녹음이 짙은 육괴정의 모습이 궁금해 그곳으로 향했다.

 

육괴정은 처음 지었을 때가 500년 전이라고 전하는 정자이다. 육괴정 주변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들이 바로 처음 육괴정에 모였던 명현들이 뜻을 모아 심어놓은 나무라고 한다. ‘육괴정이라는 정자의 명칭 또한 이 나무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앞에 작은 연못은 새로 조성한 것이지만, 연못 안에 가득자란 각종 풀들로 인해 볼썽사납다. 장마가 그치고 난 뒤 이렇게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제거했으면 좋았으련만.

 

 

 

 

명현들이 육괴정에 모인 뜻은?

 

지난 427일 찾았던 육괴정이다. 산수유축제를 시작하기 전에 찾아갂던 육괴정 앞에 서있는 보호수인 나무들은 가지들만 앙상하니 내보이고 있었다. 당시 이곳을 찾았던 것도 바로 육괴정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몇 달 전 보았던 육괴정과 지금의 육괴정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무성한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육괴정은 처음에 초당으로 지은 정자였다고 한다. 조선조 중종 14년인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이상정치를 추구하던 세력이 크게 몰락하면서, 난을 피해 엄용순이 이곳 도립리로 낙향해 육괴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500여 년 전 엄용순이 육괴정을 지었을 때는 초가였으나,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육괴정은 당대의 명현인 모재 김안국, 규정 가은, 계산 오경, 퇴휴 임내신, 성두문, 남당 엄용순 등 여섯 선비가 우의를 기리기 위해 정자 앞에 못을 파고 주변에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세월이 흘러도 그 뜻은 느티나무들과 함께 남아

 

폭염이 33도를 웃도는 날 찾아간 육괴정. 이렇게 더운 날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인가? 이곳에는 연인길이라고 하는 산책로가 있지만 그곳을 걸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찜통더위다. 매미소리마저 끊긴 육괴정을 돌아본다. 주변에 당대의 명현들이 심었다는 보호수들이 그나마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들. 엄용순은 기묘사화를 피해 선친의 묘가 있는 이곳 도립리로 낙향한 후, 이곳을 찾아 온 선비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짓기도 했단다. 이 느티나무들은 엄용순을 비롯한 6명의 선비가 우의를 다지기 위해 정자 주변에 각각 한 그루씩 심었는데, 그 중 세 그루가 아직도 나아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들의 수령은 5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니, 엄용순이 정자를 짓고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돌로 기단을 쌓은 위에 마련한 육괴정은 지금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사당형 정자이다. 가운에 두 칸은 누마루를 깔고 양편으로는 온돌방을 들였다.

 

 

 

 

 

한 겨울에도 이곳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꾸민 집이다. 계단을 오르면 대문 위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엄용순의 손()인 엄유윤의 충신정려가 걸려있다. 단출하니 지어진 육괴정, 그리고 수고가 15m나 되는 당대의 이곳에 머물었던 명현들이 심었다고 하는 느티나무. 세월은 흘렀어도 그들이 마음은 이렇게 남아있다.

 

느티나무 곁에 마련한 쉼터에서 잠시 다리를 쉰다. 무더위에 지쳐 울음소리도 내지 않던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하게 소리를 낸다. 아마 500년 전 이곳에 모였던 여섯 분의 선인들도 이런 여름철을 즐기지 않았을까? 또 다른 육괴정의 모습을 본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현재 남한산성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 정도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는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는 숭열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한 남한산성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한 남한산성.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 등이 있다. 또한 비밀통로인 암문과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이 남한산성의 행궁 앞편 산 중턱에 서 있는 정자가 바로 침괘정이다.

 

무기제작소로 잘못 알려진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침괘정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애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이름을 침과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면 7,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침괘정의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회랑과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뒤편에는 연도를 빼 건물에서 떨어져 굴뚝을 세웠다. 이 침괘정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각으로 보인다.

 

침괘정은 네모난 기둥을 쓰고 있으며, 툇마루는 앞과 뒤, 그리고 측면에도 놓았다. 주초는 커다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사용을 하고 있으며, 7칸 중 두 칸은 전체를 문으로 돌렸다. 이를 보아 이곳이 온돌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침괘정은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아닌 하나의 정자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에 소재한 포천 향토유적 제17호인 금수정(金水亭), 1989년 복원한 정자로 영평 8중 제 2경으로 창수면 오가리 영평천 가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영평천 맑은 물이 흐르며, 주변은 숲으로 쌓여 가히 절경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원래 이 금수정은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정자였다.

 

1608년경에 이곳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두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를 사위인 봉래 양사언(1517(중종 12)~1584(선조 17)에게 주었다고 한다. 봉래 양사언 선생은 정자이름을 금수정이라 하고, 편액도 갈아 붙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대문호를 만들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은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소실로 양민에게 시집을 사는 바람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부친인 양민에게서 어릴 적 부채인 채단을 선물로 받고 끝까지 딴 곳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우겨, 나중에 정실부인이 있는 양민에게 후처로 들어가게 된다. 양민이 죽던 날 양사언의 모친은 정실부인의 소생인 양사준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남편과 같은 날 자결을 해 죽으려고 하니,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 서자라 부르지 말 것을 부탁하고, 스스로 비수로 찔러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이 있어 양사언은 명종 1년인 1546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양사언은 금강산을 자주 들리고는 했는데, 그의 호를 봉래(蓬萊)’라 한 것을 보아도, 양사언이 금강산에 남다른 마음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사언은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직임을 맡았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 삼으며 은거했다.

 

 

선조 15년인 1582년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 변란을 당해 수사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 가서 1584년인 68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양사언은 점복에도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며,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양사언의 숨결을 낚다

 

금수정은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흐르는 영평천의 맑은 물과 숲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곳이다. 안동김씨의 소유로 전해오면서 몇 차례 중수되었으며, 6.25때 완전 소실된 것은 1989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자의 현판은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이며, 정자 옆에는 선생의 시조비인 태산이 높다하되가 서 있다.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정면 2, 측면 2칸이다. 정방형의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기둥의 밑동 위에 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러, 멋진 정자로 지었다. 크지 않은 정자가 숲과 영평천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 봉래선생도 이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절경에 취해 시 한 수 짓지 않았을까? 떠가는 구름조차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절 있는 산을 돌아온 곳(퇴촌)인데

바람에 연기는 상방으로 접하는 구나

옛날에 놀던 곳은 뒤섞이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은 본래 많이 바쁘다

 

고요한 방에 중과 이야기하기 아주 알맞으며

가을 등불 밝은데 빗소리에 밤은 깊어지는 구나

이어 생각하여도 보진자만 생각하니

밝은 시대였는데 역시 깊이 숨어 살았구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세심정에 남긴 글이다. 이식은 본관 덕수이며, 자는 여고, 호가 택당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일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정구,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으며,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과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세심정은 양평군 지평에서 341번 도로를 따라 용계계곡 방향으로 가다가, 덕촌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펜션들이 들어서 있으며, 다리를 건너 우측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양평군 항토유적 제2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137번지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 찾은 세심정

 

육각형으로 지어진 세심정, 2평 남짓한 세심정은 49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이다.

세심정에 걸린 현판. 용문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길에서 몇 번이나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답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미 세심정이 가까운 곳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지만, 세심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다. 몇 번을 물은 끝에 겨우 세심정으로 향했다.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세심정이다.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 세심정을 올려다본다, 눈발이 점점 세차진다. 마음이 바빠 낙엽 쌓인 돌계단을 오른다. 벌써 낙엽 위로 쌓인 눈이 미끄럽다. 세심정 위로 올라 정자를 본다. 이렇게 작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난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냈을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490년 전에 지어진 작은 정자 세심정

 

처마를 길게 빼낸 세심정은, 육각형의 기둥으로 처마를 받쳤다


세심정은 명종 16년인 1521년 조선조 중종과 명종 때의 학자이며 정암 조광조의 수제자로 명성을 얻은 조욱(1498 ~ 1557)이, 기묘사화로 정암과 그 문하들이 화를 당할 때 화를 면하고 낙항하여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욱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용문산중에 복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퇴촌(退村)이라 하고, 이 정자를 지어 세심정이라 이름하고, 당호를 스스로 '세심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정자는 6각형으로 지어졌으며, 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인지 고졸하다. 이곳에 은거한 후로 사람들은 조욱을 '용문선생'이라 칭했다고 한다. 야산 기슭에 이 세심정을 지어놓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는 조욱. 세심정 안에는 현판이 몇 개 걸려있다. 아마 선생의 평소 학문을 그리던 나그네들이 지어놓은 글일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세심정 기>를 비롯한 몇기의 게판이 걸려있다.


연당과 아우러진 세심정의 조화

 

세심정은 육각형의 정자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일곱 개의 주추 위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정자의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난간 밖으로 다시 툇마루를 깔았다는 점이다. 따로 입구를 내지 않고, 여섯 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는 점도 특이하다. 정자는 야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과 고목들이 정자를 쌓고 있다. 그리고 앞쪽 계단 밑으로는 연당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연당은 석축으로 주위를 쌓았다. 정방형으로 조성한 연당은 정면이 16m에 측면은 11,5m 정도의 연못이다. 가운데는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펜션들로 들어찼지만, 처음 이 세심정이 지어졌을 때는 앞면이 트여있어 경관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세심정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했다. 마음이 급해 더 이상은 지체를 하지 못하고, 정자를 내려와 돌아가려다가 안내판을 본다. 안내판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두른 후, 다시 툇마루를 내었다

세심정의 앞에 자리한 연당. 중앙에는 섬을 만들고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조욱은 1498년 8월 21일에 태어나, 1557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경양, 호는 우암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를 하고도 벼슬에 나아기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조욱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를 '용문선생'이라 불렀다. 후일 명종 때 현사로 뽑혀 벼슬을 하면서, 이황, 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내판에 적힌 연대가 맞질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이런 일이 허다하다. 글자가 틀린 안내판, 연대가 맞질 않는 안내판. 찢기고 더럽혀진 안내판, 외국어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내용이 안맞는 안내판, 딴 때 같으면 한 마디 하겠지만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씼었는데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저 허~ 웃고 떠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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