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수원박물관, 광교박물관 등에서 고인돌 만날 수 있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그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처럼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북방식은 땅 위에 넓적한 돌 판석(板石)을 세워 긴 직사면체의 무덤 칸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뒤, 위를 널빤지 같은 큰 돌인 상석(덮개돌)으로 덮는다. 그래서 탁자 모양이라고 해서 탁자식이라고 부른다.

 

남방식은 땅을 파고 그 곳에 돌로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넣는다. 그리곤 그 위에 여러 개의 작은 받침돌을 놓고 다시 커다란 상석(덮개돌)을 얹어 마무리한다. 그 모양이 바둑판과 흡사하다고 해서 바둑판식이라고 부른다. 개석식은 남방식과 비슷하지만 받침돌이 없이 아예 상석(덮개돌)을 직접 올려놓은 것이다. 개석식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 확인된다.

 

 

수원 팔달산에서 만날 수 있는 고인돌

 

고인돌을 흔히 지석묘라고도 부르는데 수원에도 지석묘를 만날 수 있다. 요즈음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부담스럽다면 혼자 조용히 수원의 곳곳에 자리한 지석묘들을 찾아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가장 먼저 찾아가볼 곳은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석묘군이다.

 

경기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팔달산 지석묘군은 수원시립도서관을 좌측에 두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4기가 소재한다. 팔달산 지석묘군 1호와 2호 고인돌은 7미터 거리를 두고 비교적 낮은 구릉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팔달산 정상의 화성이 있는 쪽을 향해 5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오솔길의 왼편으로 3호와 4호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달산 지석묘군은 경기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로 한강 유역의 선사문화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몇 번이고 이곳 지석묘를 찾아가 자세히 돌아았다. 이곳에 지석묘가 소재하고 있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 이곳 인근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점이다.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대부분 강 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팔달산 지석묘군이 소재하고 있는 수원 일대에도 집단 거주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박물관과 광교박물관의 지석묘

 

수원박물관 출입구 앞에 자리하고 있는 금곡동 고인돌은 수원 칠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고인돌로, 잘 다듬은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경기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 고인돌이다. 이 금곡동 고인돌은 권선구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2009년 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금곡동 고인돌은 원형 그대로를 옮겨온 것은 아니다. 복원하면서 원래 있었던 좌우 받침돌과 동일한 형태와 질감으로 앞뒤 받침돌을 모형 제작하여 보완 설치한 것이다.

 

광교박물관에도 야외 측면에 두기의 고인들이 있다. 그 중 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 한 기는 광교박물관 주치장에서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추위가 기시면서 나들이하기에 적합한 날씨다. 코로나19로 인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수원은 메르스 사태부터 방역을 철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들이하기에 좋은 계절, 수원 곳곳에 있는 고인돌(지석묘)을 찾아 청동기시대로 과거 역사를 찾아 떠나보자.

 

이 고인돌이 있던 곳에서도 성돌을 채취했나?

 

쐐기란 커다란 바위나 돌을 쪼개기 위해 깊은 구멍을 낸 것을 말한다. 예전 화성을 축성할 때 커다란 바위를 쪼개 성돌로 이용하기 위해 바위에 줄을 지어 판 쐐기자국이 있다. 이렇게 쐐기구멍을 낸 후 그곳에 바짝 마른 밤나무와 참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놓으면 나무가 불어나면서 그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쪼개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바위를 절개해 낸 선인들의 지혜에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수원의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성돌을 조성하기 위해 큰 바위에 조성한 쐐기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곳에서 바위를 쪼개 화성 축성장으로 옮겨 화성을 쌓았다. 그런데 광교박물관 뒤편에 있는 고인돌을 돌아보다가 그 고인돌 한 기의 받침돌에 쐐기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광교박물관 야외 측면에는 두 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 중 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 한 기는 광교박물관 주치장에서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쐐기자국이 선명한 고인돌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그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처럼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수원에는 팔달산에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팔달산 고인돌군과 수원박물관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금곡동 고인돌, 그리고 광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이의동에서 옮겨온 고인돌 등이 소재하고 있다. 이 세 곳의 특징은 모두 물과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즉 청동기시대 인류의 주거지는 물이 있는 곳이었을 것이고, 고인돌도 물이 흐르는 주면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서 옮겨왔다는 지석묘의 덮개석 옆에 놓인 받침돌에 쐐기 흔적이 보인다. 이 돌이 나중에 고인돌의 형태를 조성하기 위해 딴 곳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덮개석과 재질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하기에 이 고인돌의 쐐기자국은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쐐기자국의 진위 밝혀낼 수 있을까?

 

8일 오후, 광교박물관 2층에 자리한 사운 이종학 선생의 자료를 찾아보기위해 방문한 광교박물관 야외에서 만난 고인돌. 위편에는 무수한 성혈의 흔적이 있는 이 고인돌 한 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덮개석 옆에 놓인 돌에 쐐기흔적. 이 흔적이 쐐기흔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후일 누군가에 의해 조성이 된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그 쐐기흔적 하나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일은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고인돌 쐐기자국에 대해 질문을 해봐야 할 듯하다. 역사란 밝혀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우연히 찾아본 고인돌 쐐기자극 하나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 듯하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답사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14일 오후 찬바람이 불어 옷깃 안으로 싸한 바람이 스며드는 날 오산시 외삼미동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211호인 고인돌을 찾아 나섰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주변을 정리해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고인돌이 소재한 앞에는 차들이 주차할 수 있도록 주차시설까지 갖추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까지 제공하고 있다. 한 기의 고인돌이 소재한 곳치고는 주변 환경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는 곳이다.

 

외삼미동 고인돌은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 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이었던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여 밝혀졌으며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중앙을 손질한 듯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 누워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주변 경관 잘 정리된 외삼미동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은 경수도로에서 통탄 방향으로 나가다가 북오산IC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곳 입구에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우측 길로 접어들면 지하차도가 나온다. 지하차도를 벗어나면 바로 좌측에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곳에 고인돌이 자리한다.

 

고인돌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고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오산은 몇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곳으로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고인돌군은 대개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인돌 군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산이라는 지역이 예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오산 인근인 수원, 화성, 용인 등에도 골고루 고인돌 군이 조성되어있어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소재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앞으로 지역의 문화유산에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오산을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그저 웃는다. 오산을 자랑하라고 하면 한 시간 넘게 자랑을 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빠트리지 않는 것은 백제 때부터 우리고장을 지켜온 독산성을 든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적을 물리친 지혜가 서린 세마대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다음을 궁금해 한다. 그 크지 않은 도시 오산에 무슨 자랑꺼리가 있겠는가?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산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 한 마디로 한양을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남대문의 문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산은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 오산을 사람들은 자랑을 하지 못한다. 왜 그런 것일까?

 

 

 

 

오산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고인돌 공원.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상한 고인돌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인 이곳 일대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근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취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금암리 지석묘군 인근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한편 야산을 끼고 조성된 고인돌 공원이다.

 

이곳을 공인돌 공원이라고 명칭을 붙여 사람들이 우리 선사유적과 함께 힐링의 공간으로 삼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선사유적지이다. 공원이기 보다는 사적 등으로 지정을 했어야 마땅한 곳이다. 하지만 주변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이곳에서 건강과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하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찾아와 높지 않은 산을 돌아보면서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거기다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곳. 더구나 우리나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어 이곳에서 문화재 사랑과 우리 옛 풍속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처럼 자랑할 만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고인돌 공원에는 현재 개석식 고인돌 9기가 소재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고인돌 형태로 보이는 돌들이 있어, 앞으로 더 정밀발굴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 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금암리 고인돌의 형태를 보면,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형태이다. 그렇기에 그 아랫부분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바위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난 이곳을 자랑하고 싶다

 

26일 지난 밤 내린 비가 그친 후 금암동 고인돌 공원을 찾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덮여있는데, 공원 안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근처 어디 유아원에서 바람을 쐬러 온 모양이다. 고인돌 공원 안쪽에 커다란 할아버지 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뒤편에 몇 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보인다.

 

2호 지석묘 상단에 성혈이 있다고 하여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동안 풍우에 씻긴 듯 식별할 수가 없다. 4호 고인돌을 촬영을 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높게 자란 숲으로 인해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숲길에는 시원한 바람마저 분다. 아이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산길을 내려오는 모습에서, 이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숲길 가에도 지석묘와 같은 돌 한 기가 놓여있다. 근처에 표지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확인이 된 것은 아닌 듯하다. 산길을 걷다가 숲속에 놓인 쉼터 안에 다리를 뻗는다. 초가을 오전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도심 인근에 아파트촌과 학교, 그리고 숲에 쌓인 고인돌 공원. 어찌 이 좋은 곳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공존을 하고 있다. 이런 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다. 15일 일찍 오산을 찾았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보고 난 후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성한 오산금암리 지석묘군을 찾아보았다.

 

이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 일대는 주변에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도로가 뚫려있지만, 아파트까지 인 듯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돌 공원이라고 명명한 공원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누구나 돌아보기 좋게 조성을 하였다.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이곳을 나와 한 바퀴 돌아보고 갑니다. 공기도 좋고 아이에게 잘 모르는 것이지만 자료를 보고라도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기도 하죠. 우선은 역사적인 곳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뒤편 휴먼시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아무개(, 38)씨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 하는 말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돌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고인돌공원

 

고인돌을 촬영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낮은 목책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아 밖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개석식 고인돌이라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촬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작 외형만 촬영을 할 것을 안으로 들어가 공원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사람들을 그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공원을 와도 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가 무슨 큰일이나 치르는 양 덮개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꼭 저렇게 촬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왔을 때는 모두 11기의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덮개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9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여기저기 만들어진 정자, 그리고 수로와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경관 등 참 좋은 공원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오산 금암동 고인돌공원.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원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이 공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지석묘군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 혹 이 바위로 인해 금암리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서면서 초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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