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갓바위다. 바위 모양이 갓처럼 생겼다고 해서 갓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바위는 사람이 갓을 쓰고 있는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개의 바위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하나는 중바위, 그리고 하나는 삿갓바위라고 한다. 큰 바위는 8m 정도이며, 작은 바위는 6m 정도다. 영산강 하구를 바라다보고 있는 갓바위. 제대로 보려면 물이 차 있어 배를 타고 앞쪽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럴 수 없어 옆모습만 찍어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갓바위를 가는 길목은 문화의 거리라고 하여서 문화예술회관, 무형문화재전수관, 해양박물관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갓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보편적으로 전설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더해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면서 그럴듯하게 꾸며진다. 입담이 좋은 사람이라면 전해지는 설화에다가 자신의 구비 능력을 더하여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갓바위도 그래서 몇 가지의 전설이 조금씩은 다르게 전해지고 있어 더욱 재미있다.

 

 

제일 처음 전설은 도를 깨친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다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는 전설이 있다. 월출산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 상좌를 데리고 목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영산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따라 온 상좌는 따라서 건너지를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이 돌로 굳어졌다는 설이다. 이 두 번째 전설은 첫 번째보다 조금은 억지스럽다. 축지법을 쓰시는 스님이라도 건넜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다 못 건넜다는 설정이 좀 그렇다. 하지만 이 조금은 억지스러운 전설을 잘 음미해보면 우리네 정서 속에 흐르는 여유를 볼 수 있다.

 

, 혼자라도 갈 수 있을 것을 함께한다는 공동체의 미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 건너지를 못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의 전설은 전해지면서 보태고, 빠지고를 반복하다가 정리가 된 전설이다. 아주 오랜 옛날 목포에는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이는 목포근방을 드나들며 소금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병든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효심이 지극한 젊은이었다고 한다. 젊은이는 늘 생각하기를 아버지께서 아직 병환이 낫지 않으신 것은 나의 정성이 모자라는 것이다.’라며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겠다고 마음을 먹고 갓바위 부근의 부자집에 기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일을 열심히 하던 젊은이는 아버님의 약을 구하기 위해 주인에게 당부를 했다. 머슴살이 세경을 조금 당겨 주십사하는 그런 부탁이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주인은 한 마디로 젊은이의 청원을 거절하고 갓바위가 있는 자리에 와서 먼 산만을 바라다보면 한숨을 짓고 있었단다. 그때 그 곁을 지나가던 스님이 까닭을 물으니 젊은이는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한 달이나 집에 가지를 않았으면 아버님이 어찌 되셨을꼬?’라며 말을 하자, 젊은이는 정신이 들어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이하랴 아버님은 이미 싸늘한 싯긴으로 변해버린 것을. 젊은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님을 양지 바른 곳에 묻기로 하고 갓바위 근처로 관을 메고 올라갔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관을 바위 아래로 떨어트리고 말았단다. 바다로 떨어진 관은 찾을 수가 없었고, 젊은이는 자신은 하늘을 올려볼 수가 없는 죄인이라며 큰 삿갓을 쓰고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단다. 후에 먹지도 않고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빌던 젊은이는 그 자리에 굳어 바위가 되어버렸는데 그 바위는 삿갓바위가 되고, 함께 있던 스님은 중바위가 되었단다. 전설은 슬프게 끝나버렸지만 효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오늘도 갓바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영산강 하구를 바라다보고 있다. 그런 애잔한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갓바위 위쪽으로 올라가니 저만큼 낮은 산봉우리는 돌이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있다. 혹여, 저 바위에도 무슨 전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위에 떠서 미동도 않는 큰 배들 사이로 고깃배인 듯한 작은 배 한척이 고동을 울리며 지나간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2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261호 온달동굴. 단양읍을 벗어나 좁은 산길을 돌아 영춘으로 가면,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된 연개소문의 드라마세트장을 볼 수가 있다. 세트장 뒤편 산 위에는 사적 제264호인 온달산성이 자리하고 있어,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는 관광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연신 주차장으로 차들이 밀려들어온다. 사람들은 드라마세트장을 한 바퀴 돌아 온달동굴로 향하는데, 모든 것을 다 관람할 수 있는 입장료가 성인기준 5,000원이다. 나야 드라마세트장은 건성이고, 온달동굴로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온달동굴은 옛 부터 영춘남굴(永春南窟)로 알려진 석회동굴이다. 또는 성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성산동굴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동굴은 고구려 평원왕 때 온달장군이 성을 쌓은 온달산성 밑에 있으므로 온달동굴로 유명하다. 남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이 동굴 내에 침수하여 훼손된 흔적이 많은 동굴로 석회동굴이다. 하지만 남한강이 수위가 높아지면 물이 동굴로 침수하기 때문에, 2차 생성물인 자연경관은 화려하지가 않다.

 

 

 

 

형성시기가 최장 45천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 온달동굴. 입구에는 반드시 안전모를 착용할 것을 권유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안쪽이 지대가 높은 온달동굴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동굴 입구 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시냇물이라도 흘러내리는 듯 하다. 이렇게 흐르는 동굴내부의 물이 윤달이 드는 해 2월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니, 그 또한 기이한 현상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동안 보아왔던 동굴들보다는 경관이 빈약하다. 그리고 천정이 낮은 곳이 많아 몸을 낮추어야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동굴이다. 이 온달동굴은 1966년에 최초로 동굴학술조사를 실시하고, 1975년에 일반에게 잠시 개방이 되었다. 그 후 다시 폐쇄를 하였다가 1997년부터 전면 개방을 한 동굴이다.

 

 

 

 

총 연장이 약 800m에 이르는 온달동굴은 입구에서 동쪽으로 길에 뻗어나갔다. 관람시간은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안으로는 주굴이 있고, 다섯 갈래의 지굴이 있으며, 여섯 곳의 광장이 있다. 여러 가지의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있으나, 화려하지가 않다. 한 바퀴를 돌아보니 땀이 흐른다. 사계절 동굴내부의 온도가 16C 정도를 유지한다고 하는데, 그 온도보다는 구부리고 다니는 곳이 많아서 힘이 들었는가 보다. 땀을 닦으며 나오니 동굴 밖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오늘 자연의 신비를 또 한곳을 접하면서, 갈길이 점점 바빠짐을 느낀다.

 

령 천년 반룡송의 위엄과 매애보살의 자비를 만나다

 

그동안 한참이니 잊고 있었던 문화재답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인지 모처람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봄까지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문화재답사를 했지만 근 1년 여 동안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지 못했다. 328일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마을에 산수유가 피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 명이 함께 길을 나섰다.

 

도립리는 46일부터 산수유축제를 열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있다. 남들보다 먼저 산수유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인 듯하다. 산수유마을을 돌아보고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을 찾아갔다.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인 반룡송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찾아보는 나무지만 올해 나무는 그동안 보던 때와는 다르다. 생육이 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벌써 반룡송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룡송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국사의 속성은 금씨이며 통일 신라 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반룡송을 도선국사가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 등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그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미 이 소나무의 수령은 1,100년이 지났다는 것을 뜻한다. 반룡송은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소나무의 껍질이 마치 용비늘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만년을 산다는 뜻으로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불러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몇 번이고 이곳을 찾아 반룡송을 보았지만 올해처럼 솔잎이 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반룡송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고 생각한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은 대개 나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반룡송 또한 구전에 의하면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그렇기에 아무도 반룡송에 해를 가하거나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반룡송의 솔잎 색이 푸르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것을 뜻한다. 함께 답사에 동행한 사람이 묻는다.

선생님은 왜 같은 문화재를 반복해서 답사하세요?”

문화제는 늘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해요. 계절별로 다르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지니까요

그렇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요?”, 신경을 쓰면 쓸수록 문화재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니까요

 

30년 세월 문화재답사를 하고 다니면서도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했다. 지난번에 멀쩡하던 문화재가 길지 않은 시간 돌아보지 않아 훼손된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는 지나칠 때마다 쉬지 않고 찾아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 문화재를 온전히 지킬 방법이기 때문이다.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을 다시 만나다

 

반룡송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 마애보살의 뒷면에 음각으로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고려 경종 6980)'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경우이다 조성년대를 확실하게 기록해놓아 명마애보상좌상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장암리)에 소재한 고려 때 마애불인 보물 제982호인 이 마애불은 큰 길에서 안으로 들어가 논길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쪽 논을 마을 사람들은 넘어새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큰 바위를 미륵바우라 부른다,

 

마애불은 바위의 한 면을 음각으로 깎아내 부조로 조성하였다.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마애보상좌상은 인근의 누군가 관심을 갖고 돌보고 있는 듯하다. 갈 때마다 주변정리가 잘 돼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문화재담당부서나 관리청보다 오히려 지역에서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 보존에 대해 더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화강암의 재질에 조형된 이 마애불은 도드람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물 제982호 마애보살좌상은 이 바위에 옅은 부조로 새긴 3.2m의 보살좌상이다. 동행한 일행들에게 마애보살좌상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없음에 마음 한편이 아쉽다. 많은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봄날 산수유 꽃을 보기 위해 떠난 길이 답사가 되었지만 예전처럼 혼자가 아닌 일행이 함께였다는 점에 마음이 들뜬다. 앞으로 더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대문이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어떤 공룡인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일대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14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를 처음 찾아갔던 것은 2004년으로 기억난다. 이곳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주말이면 공룡알 화석을 보기 위해 어린이를 동반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9일 번잡한 때를 피해 고정리 화석산지를 찾아갔다.

 

넓은 공룡알 화석산지는 사람하나 찾을 수 없다. 공룡알 화석산지 입구에 마련한 방문자센터에도 근무자를 제외하면 관람자는 우리 일행뿐이다. 방문자센터도 4년 전 방문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변했다. 외관부터 새롭게 조형을 하고 화석산지는 철제문을 달아놓고 시간을 정해 사람들에게 개방을 한다는 안내표시를 걸어놓았다.

 

  

 

한반도 최초의 뿔공룡이 발견된 화석산지

 

화성 고정리는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다. 옛 지도를 보면 송산면 천등산까지는 육지였고 현재는 육지로 연결된 우음도와 닭섬 등은 섬이었던 곳이다. 이런 곳이 시화호 물막이 공사가 끝나고 난 뒤 공룡알 화석산지가 육지가 된 곳이다. 물막이 공사를 마치고 난 뒤 이곳에선 현재까지 공룡알 200여개와 둥지 30여개가 9개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는 20003월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고정리의 공룡알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300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이전에는 섬이었던 곳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으나 고정리처럼 많은 공룡알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뿔공룡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고된 뿔공룡이다. 2008330일 화성 전곡항에서 열렸던 제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던 중 화성시 공무원인 김경하에 의해서 화석이 발견되었고 화성에서 발견된 한국 뿔공룡이란 뜻에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중생대 백악기인 약 11000년전에 한반도에 살았으며 전체길이는 1.7~2.3m 정도로 추정된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이족보행에서 사족보행으로 진화과정을 거친 뿔공룡으로 꼬리뼈에 척주뼈보다 5배나 긴 신경배들기와 독특한 모양을 가진 복사뼈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뿔공룡의 넓적한 꼬리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찬바람을 맞으며 화석산지를 걷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진 주말이다. 방문자센터를 돌아보고 난 뒤 화석산지로 향했다. 벌써 10여 번 이상을 들러본 화석산지이다. 화성시는 화석산지를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위해 방문자센터에 간단한 소개책자를 마련해 관람자들을 돕고 있다. 너른 벌판에 갈색으로 물든 풀들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잎을 한편으로 뉘이고 있다. 조형으로 만들어 놓은 공룡 한 마리가 찬바람에 더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다.

 

화석산지 관람은 정해진 관람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은 아직도 더 많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관람로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게 공룡알 화석을 만날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3개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룡알 화석산지 관람은 방문자센터 - 전망데크를 1구간으로, 전망데크 - 상한염 - 중한염 - 누드바위를 2구간으로, 누드바위 - 래식동굴 - 하한염 - 무명섬을 3구간으로 정해놓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곳이 없는 공룡알 화석산지를 찾을 때는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두툼한 외투는 필히 갖추어야 한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걷기조차 힘든 날이다. 그래도 이왕 이곳을 찾았으니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 때문에 화석산지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주변경관과 방문자센터가 예전보다 관람자를 위한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늘었을 뿐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자료를 남기고 시간이 얼마간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가는 것은 문화재보존에 필수과정이란 생각이다. 그렇게 비교함으로써 훼손이 된 곳은 없는지 문화재 보존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남겨놓은 자료가 후일 정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기에 문화재답사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할 나의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문화재는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문화재는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 자리에 서 있다고 해도 언재나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문화재 중에서도 천연기념물은 항상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일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재난을 당해 지정 해제가 된 것들이 많다. 그것은 나무가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백송은 흔치 않은 나무다. 중국 북부가 원산지이고 동남아에 퍼져있는 소나무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몇 그루만이 생육하는 희귀종이다. 하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지나칠 때마다 돌아보곤 한다. 백송은 그 껍질이 약재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에게 수난을 당하기도 해 그만큼 보존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53호 이천 신대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천 신대리 백송’ 16일,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에 생육하고 있는 백송을 찾아 나섰다. 몇 번인가 신대리 이천 백송을 만났지만 늘 궁금하다. 잘 자라고 있는지? 생육에 문제는 없는지? 혹 주변에 이상한 건물이라도 들어서 나무에 피해를 주지는 않고 있는지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봄날 만난 백송, 당당함이 깃들다

 

이천에서 여주 금사면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좌측으로 신대리 이정표가 나온다. 마을 안길로 조금 들어가면 이천 백송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백송을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초행길인 사람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찾아본 백송이지만 갈 때마다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는 했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면서 흰빛으로 변하기 때문에 백송 또는 백골송이라고 부른다. 이천 신대리 백송은 마을 한편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우산처럼 생겼다. 위는 좁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우산처럼 퍼져있다. 이 나무는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의 할아버지인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령은 약 23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신대리 백송은 다니면서 본 백송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나무로 보인다.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 산 32에 소재하고 있는 신대리 백송은 나무의 높이는 16.5m 정도이고 가슴높이의 둘레는 2m 정도이다. 이천 백송은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백송의 중간 가지들은 구불거리면서 자라고 있어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는 것 같다. 멀지 않은 곳에 자라는 이천 반룡송의 나뭇가지도 마치 용처럼 휘감아 뻗었는데 이 백송 역시 가지가 많이 구불거리고 있어 이천이라는 곳이 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토양인 듯하다.

 

 

 

 

 

용틀임이 일품인 이천 백송

 

이천 신대리 백송을 찬찬히 살펴본다. 밑동은 조금 위로 올라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무의 줄기는 번성하여 어느 백송보다도 힘찬 모습이다. 위로 오르면 나무의 줄기가 점점 더 하얗다. 눈이라도 온 듯 맑은 흰색에 검은 무늬가 옅게 드리워져 있다. 봄날 만난 나무의 솔잎도 싱싱하다. 밑동 쪽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이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더욱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종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아래쪽으로 난 가지도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꽤나 신령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한 때는 백송의 껍질이 약재로 사용된다고 해서 나무껍질을 사람들이 벗겨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고도 한다.

 

모처럼 찾아간 백송의 주변은 철재 울타리를 쳐놓았다. 보호를 하기 위한 방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던 몇 그루의 백송들이 지정 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이천 백송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몇 년 만에 만난 이천 신대리 백송. 천연기념물치고는 수령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지정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들려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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