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는 열녀와 효부, 효자각 등이 서 있어 더 엄숙해

 

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누구는 천년이라고 하고, 누구는 1,200년이라고 한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어 우리나라 최고령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76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수백 년만 되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입을 벌린다. 그 세월이 가늠이 되질 않아서이다. 그런데 1,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는 소리에, 나무가 그렇게 신령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나무의 높이는 29m, 가슴높이의 둘레가 14.5m에 밑동의 둘레는 13.8m에 이른다, 가지는 동서로 22.5m에 남북으로 22m나 된다고 하니 가히 일품이다.

 

답사 길에서 만난 영월 은행나무. 지나는 길에 이정표를 찾아들어간 마을에서 만난 은행나무는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 등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흡사 로또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다. 영월의 은행나무를 보았을 때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처음에는 이곳에 대정사(對井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새롭게 난 줄기가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험한 은행나무로 마을에서 신목으로 제사를 지내

 

이 나무에는 옛날부터 커다란 뱀이 살았어.”

뱀을 보신 분이 있으세요?”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있지

이 나무는 얼마나 살았다고 해요?”

천 이백년도 더 되었다고 하네.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르지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워낙 영험한 나무라, 음력 712일에 이 나무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가 나무 주변에는 가급적이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은행나무에게 불경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나무 주변을 축대를 쌓고 보호를 하고 있다.

 

신령한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그 나무의 수령조차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을주민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로 기억을 하고 싶어 한다. 잎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은 어떠할까? 내년에는 여름철 은행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그것도 음력 712일에. 아들을 점지하는 나무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치성을 드리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변에 효자와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는 뜻 깊은 마을

 

이 나무가 더 신령스러워 보이는 것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하송리 한편에 작은 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온양방씨 열녀각, 경주이씨 효부각, 그리고 김지룡 효자각과 엄윤 효자각이다. 은행나무의 수령만큼이나 오래도록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오랜 세월 효자와 열녀가 없었겠는가?

 

열녀 온양방씨는 17세에 엄병수에게 시집와 4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까지 보양하면서 살았다. 고종 10년인 1873327일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4달만에 남편과 사별했으니 자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까지 조양했다고 하니 가히 그 효성을 어찌 칭찬하지 않겠는가?

 

효부 경주이씨는 김지학의 처로 가족들이 출타 중에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무는 단지요법으로 시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다. 효부각은 고종 4년인 1867420일에 정문이 새워졌다.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네들에게는 단지 옛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 정성이 갸륵하다.

 

효자 엄윤과 효자 김지룡 역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답사길에서 우연히 만난 은행나무와 열녀, 효부, 효자각. 이런 뜻 깊은 것들을 만나면 피곤함이 가시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아 아니라, 아름다운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천은 우리나라의 명창들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란 칭호를 듣던 이동백 명창이 종천면 도만리 출신이며, ‘한국 판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극찬을 한 김성옥 - 김정근 - 김창룡, 김창진으로 이어지는 김문의 소리가문이 장항 빗금내에서 살았다. 이렇듯 우리문화의 보고로 불리는 서천은 마량리 동백숲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는 유명한 동백나무 숲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서천 팔경 중의 한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 5백 여 년이 지난 동백나무 80주 정도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마량리 동백 숲은 3월 하순부터 5월 초순까지 푸른 잎 사이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붉은 동백꽃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동백은 그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 등으로 구분을 한다. 열매는 삭과로 가을에 구형으로 익으며 3갈래로 벌어지는데, 그 속에는 진한 갈색의 씨가 들어 있다. 아직은 파랗거나 붉어지는 열매가 달려있다.

절경에 자리한 동백 숲

 


시원한 서해바대를 바라다보면 앞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멀리 가물거리는 수평선에 떠 있는 무수한 고깃배들을 볼 수가 있다. 조금 가파르기는 해도 계단을 오르면 키가 큰 소나무 숲을 지나 동백 숲이 보인다. 동백 숲을 지나면 그 중간에 당집이 있다. 마량리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동백나무 숲 안에는 풍어제를 지내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으로는 서해안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동백정’이 자리하고 있으나, 현재 동백정은 보수공사 중이다. 이 동백나무 숲은 이곳에서 500m 쯤 떨어진 마을의 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전해지는 이야기는 별로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일설에는 약 300여 년 전 이 지방에 부임한 고을 수령이 꿈을 꾸었는데, 바다 위에 떠 있는 꽃다발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에 가보니 정말 꽃이 있어서 가져와 심었는데, 그 때 심은 꽃이 현재 동백나무 숲이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에 이곳에 모여 풍어제를 올리며, 고기잡이를 나간 어선들이 재앙이 없기를 빌고는 한다.


휘귀한 보호 숲 마량리 동백나무 숲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대만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한다.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동백은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마량리는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상에 자리하고 있어,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높다. 이곳의 동백나무들은 강한 바람을 받아 키가 작은 편이며, 3∼5m에 이르는 나무는 땅에서부터 줄기가 2∼3개로 갈라지면서 곁가지가 발달하여 나무의 모습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철을 기다리고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 정월에 시끌벅적하니 치러지는 풍어제와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 멀리 나가있는 수많은 고깃배들이 만장을 느린 모습들을 그려보면서.

 

천연기념물 제487호로 지정된 1,800여개의 공룡발자국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백아로 2080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87(2007119일 지정). 화순 공룡발자국 화석지는 1999515일 화순온천지구를 답사하던 중 채석장 공사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공룡발자국화석은 주로 해남, 보성 등의 해안지역에서 발견 되었는데 전남 내륙에서 발견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화순 서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지에는 중생대 백악기(85백만 년 전)의 육식공룡(수각류)의 발자국이 많은데, 최소한 5마리 이상의 활동흔적이 관찰되었다.

 

이곳에서는 날렵한 육식공룡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어간 흔적이 단일지역 안에서 매우 길고도 집중적으로 나타나있다. 또한 1마리의 보행렬이 40m거리로 규칙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것이다. 이곳에서 공룡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중생대 백악기 후반기(1억 년 전)로 추정되며, 공룡의 종류는 발자국의 크기가 20~22, 보폭 90로 키가 4~5m로 추정되는 코알라 시우루스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두발이나 네발로 걸어 다닌 초식공룡인 조각류 발자국, 목이 긴 초식공룡인 용각류 발자국 등 1,800여 개의 공룡 발자국과 70여 개의 보행렬이 확인되었다. 이 화석지에는 공룡발자국화석과 함께 식물화석, 생흔화석(동물이 기어다닌 흔적) 등의 화석이 함께 산출되며, 물결자국, 건열 등의 다양한 퇴적구조는 공룡들이 살았던 당시의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잘 알려준다.

 

 

다양한 공룡발자국을 만나다

 

서유리 공룡발자국화석 산지는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서유리 산 147-5번지 일대에 속하는 곳이다. 광주광역시에서 국도 15호선을 따라 동광주 톨게이트에서 호남고속도로 하행선으로 이동하다, 호남고속도로 옥과 인터체인지에서 국도 29호선으로 들어선다. 다시 지방도 887호선으로 타고가면 오른쪽에 화순 서유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가 나타난다. 광주에서 화순 서유리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까지는 1시간 이네의 시간이 소요된다.

 

공룡은 영어의 'dinosaur'는 무서운 도마뱀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부터 유래했다. 이 용어는 일부 공룡이 매우 거대한 몸집을 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공룡은 백악기의 마지막 시기까지 번성하였으며, 그 후 약 100만 년 이후에는 지질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 그 다음의 지층에서는 공룡화석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공룡들이 집단으로 화순지역인 내륙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공룡발자국이 대개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해남, 화순, 보성, 여수, 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유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에는 많은 공룡 발자국이 있다. 종류가 다른 크고 작은 공룡 등이 이곳에서 서식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움직인 보행렬도 발견되어 공룡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성에는 공룡알 화석산지가 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날은 후텁지근한데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한다. 먼 길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비로 인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신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로 향했다. 2000년도에 15,900,000라는 넓은 면적을 지정한 천연기념물 제414호인 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2014년도에 이곳을 들려보았으니, 벌써 5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2004년도에 이곳을 들렸을 때는 차로 공룡알 화석이 있는 바위 앞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을 출입을 통제시키고, 관람로를 따라서만 공용알 화석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방문자 센터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왕복 3km 정도를 걸어야 공룡알 화석을 볼 수가 있다.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의 공룡알 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300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1999년 시화호 간석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삼한염, 중한염, 하한념, 한염, 개미섬, 닭섬 등 67개 지점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되었다.

 

 

지금은 이상한 돌로 땅위에 솟아오른 이 섬들은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곳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더욱 이 곳에서는 공룡의 뼈 조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도 해, 전문가들은 시화호 일대가 약 1억 년 전 공룡의 주요 서식지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동안 영화나 책을 총해서만 만났던 공룡들. 그들이 살던 공룡서식지를 돌아본다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다. 올 여름에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공룡관련 서식지를 돌아보아야겠다. 공룡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말이다.

 

 

문화재는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문화재는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 자리에 서 있다고 해도 언재나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문화재 중에서도 천연기념물은 항상 그대로 있을 수가 없다. 일기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중에는 재난을 당해 지정 해제가 된 것들이 많다. 그것은 나무가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백송은 흔치 않은 나무다. 중국 북부가 원산지이고 동남아에 퍼져있는 소나무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몇 그루만이 생육하는 희귀종이다. 하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은 지나칠 때마다 돌아보곤 한다. 백송은 그 껍질이 약재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사람들에게 수난을 당하기도 해 그만큼 보존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253호 이천 신대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천 신대리 백송’ 16일,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에 생육하고 있는 백송을 찾아 나섰다. 몇 번인가 신대리 이천 백송을 만났지만 늘 궁금하다. 잘 자라고 있는지? 생육에 문제는 없는지? 혹 주변에 이상한 건물이라도 들어서 나무에 피해를 주지는 않고 있는지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봄날 만난 백송, 당당함이 깃들다

 

이천에서 여주 금사면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좌측으로 신대리 이정표가 나온다. 마을 안길로 조금 들어가면 이천 백송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백송을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초행길인 사람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찾아본 백송이지만 갈 때마다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는 했다.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면서 흰빛으로 변하기 때문에 백송 또는 백골송이라고 부른다. 이천 신대리 백송은 마을 한편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우산처럼 생겼다. 위는 좁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우산처럼 퍼져있다. 이 나무는 조선시대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의 할아버지인 민달용의 묘소에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령은 약 23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신대리 백송은 다니면서 본 백송 중 생육상태가 가장 좋은 나무로 보인다.

 

이천시 백사면 신대리 산 32에 소재하고 있는 신대리 백송은 나무의 높이는 16.5m 정도이고 가슴높이의 둘레는 2m 정도이다. 이천 백송은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는다. 백송의 중간 가지들은 구불거리면서 자라고 있어 마치 용이 승천하기 위해 용틀임을 하는 것 같다. 멀지 않은 곳에 자라는 이천 반룡송의 나뭇가지도 마치 용처럼 휘감아 뻗었는데 이 백송 역시 가지가 많이 구불거리고 있어 이천이라는 곳이 나무가 생육하기에 적합한 토양인 듯하다.

 

 

 

 

 

용틀임이 일품인 이천 백송

 

이천 신대리 백송을 찬찬히 살펴본다. 밑동은 조금 위로 올라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나무의 줄기는 번성하여 어느 백송보다도 힘찬 모습이다. 위로 오르면 나무의 줄기가 점점 더 하얗다. 눈이라도 온 듯 맑은 흰색에 검은 무늬가 옅게 드리워져 있다. 봄날 만난 나무의 솔잎도 싱싱하다. 밑동 쪽에는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이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더욱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종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아래쪽으로 난 가지도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꽤나 신령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한 때는 백송의 껍질이 약재로 사용된다고 해서 나무껍질을 사람들이 벗겨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고도 한다.

 

모처럼 찾아간 백송의 주변은 철재 울타리를 쳐놓았다. 보호를 하기 위한 방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던 몇 그루의 백송들이 지정 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이천 백송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몇 년 만에 만난 이천 신대리 백송. 천연기념물치고는 수령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지정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들려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목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갓바위다. 바위 모양이 갓처럼 생겼다고 해서 갓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바위는 사람이 갓을 쓰고 있는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개의 바위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하나는 중바위, 그리고 하나는 삿갓바위라고 한다. 큰 바위는 8m 정도이며, 작은 바위는 6m 정도다. 영산강 하구를 바라다보고 있는 갓바위. 제대로 보려면 물이 차 있어 배를 타고 앞쪽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럴 수 없어 옆모습만 찍어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갓바위를 가는 길목은 문화의 거리라고 하여서 문화예술회관, 무형문화재전수관, 해양박물관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갓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보편적으로 전설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더해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면서 그럴듯하게 꾸며진다. 입담이 좋은 사람이라면 전해지는 설화에다가 자신의 구비 능력을 더하여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갓바위도 그래서 몇 가지의 전설이 조금씩은 다르게 전해지고 있어 더욱 재미있다.

 

 

제일 처음 전설은 도를 깨친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다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는 전설이 있다. 월출산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 상좌를 데리고 목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영산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따라 온 상좌는 따라서 건너지를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이 돌로 굳어졌다는 설이다. 이 두 번째 전설은 첫 번째보다 조금은 억지스럽다. 축지법을 쓰시는 스님이라도 건넜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다 못 건넜다는 설정이 좀 그렇다. 하지만 이 조금은 억지스러운 전설을 잘 음미해보면 우리네 정서 속에 흐르는 여유를 볼 수 있다.

 

, 혼자라도 갈 수 있을 것을 함께한다는 공동체의 미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 건너지를 못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의 전설은 전해지면서 보태고, 빠지고를 반복하다가 정리가 된 전설이다. 아주 오랜 옛날 목포에는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이는 목포근방을 드나들며 소금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병든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효심이 지극한 젊은이었다고 한다. 젊은이는 늘 생각하기를 아버지께서 아직 병환이 낫지 않으신 것은 나의 정성이 모자라는 것이다.’라며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겠다고 마음을 먹고 갓바위 부근의 부자집에 기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일을 열심히 하던 젊은이는 아버님의 약을 구하기 위해 주인에게 당부를 했다. 머슴살이 세경을 조금 당겨 주십사하는 그런 부탁이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주인은 한 마디로 젊은이의 청원을 거절하고 갓바위가 있는 자리에 와서 먼 산만을 바라다보면 한숨을 짓고 있었단다. 그때 그 곁을 지나가던 스님이 까닭을 물으니 젊은이는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한 달이나 집에 가지를 않았으면 아버님이 어찌 되셨을꼬?’라며 말을 하자, 젊은이는 정신이 들어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이하랴 아버님은 이미 싸늘한 싯긴으로 변해버린 것을. 젊은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님을 양지 바른 곳에 묻기로 하고 갓바위 근처로 관을 메고 올라갔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관을 바위 아래로 떨어트리고 말았단다. 바다로 떨어진 관은 찾을 수가 없었고, 젊은이는 자신은 하늘을 올려볼 수가 없는 죄인이라며 큰 삿갓을 쓰고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단다. 후에 먹지도 않고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빌던 젊은이는 그 자리에 굳어 바위가 되어버렸는데 그 바위는 삿갓바위가 되고, 함께 있던 스님은 중바위가 되었단다. 전설은 슬프게 끝나버렸지만 효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오늘도 갓바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영산강 하구를 바라다보고 있다. 그런 애잔한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갓바위 위쪽으로 올라가니 저만큼 낮은 산봉우리는 돌이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있다. 혹여, 저 바위에도 무슨 전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위에 떠서 미동도 않는 큰 배들 사이로 고깃배인 듯한 작은 배 한척이 고동을 울리며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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