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인데도 장맛비처럼 비가 쏟아진다. 빗속에서 찾은 오죽헌, 입구에 서 있는 검은 대나무는 이 곳이 오죽헌임을 알려준다.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 초기의 별당건축인 오죽헌은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본래 1452년에 등제하여 대사헌까지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고택에 딸린 별당으로, 이이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이름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집으로 대청과 온돌방, 그리고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기둥 윗몸으로부터 쇠서를 내어 결구한 이익공 집이다.

 

쇠서의 밑면은 초각(草刻)되었고 그 끝은 수서로 되었으며, 도리방향으로는 첨차를 놓고 소로를 두어 굴도리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전면은 띠살 창호를 달았으나 측면에는 골판문을 달았다. 간살은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에 걸고, 이 위에 첨차로 된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쳤으며 다시 이 위에 첨차가 있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다.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나 합각머리 밑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조선 초기의 별당 또는 사랑채 건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죽헌은 원래 수재 최응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인 이사온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씨에게 상속되었다.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둘째 딸의 아들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집을 물려받은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죽헌의 유래가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조선전기 주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구조적 가치 외에도, 이 곳 몽룡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남으로써 더욱 유서 깊은 곳이 되었다. 1963년 1월 3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오죽헌 경내에는 문성사, 사랑채, 어제각, 율곡기념관이 있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시호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율곡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어제각이 있었으나 어제각을 북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였다. 어제각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 이이선생 유년기에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 소장각이다. 1788년 정조임금의 명으로 건립되었다가 1975년 10월 오죽헌 정화사업 때 철거되었으며, 다시 1987년에 복원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그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 호를 <율곡>으로 했으며,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강릉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름은 이,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아명은 현룡이다.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의 나이에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어머니의 산소를 지켰으며 이때 불교를 배우기도 했다.

 

 

율곡 선생은 ‘뜻이 서 있지 않고는 원하는 생을 살 수 없고,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며 살았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을 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고 예조좌랑, 이조좌랑, 청주목사,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다. 저서로는 『만언봉사』 『성학집요』 『시무육조』 『격몽요결』 『자경문』 『율곡전서』 등이 있다.

 

큰 변란에 대비해 군대를 양성하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 배치해야한다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와 '기'라는 두 개의 축이라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퇴계 이황과 달리 '이'와 '기'는 하나로 융합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내세웠으며 이로 인해 조선유학은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이후 영남학파는 남인으로 기호학파는 서인으로 맞섰다. 1548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에 묻혔다.

 

 

오죽헌 이곳저곳을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하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관람을 하러 들어온 학생들과 일반인들도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었다. 곳곳마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정겹다. 비 오는 날의 오죽헌은 또 하나의 풍광을 보이고 있고, 나는 색다른 여행을 즐긴 셈이다.

 

수원 곳곳에 세워진 솟대 볼 수 있어

 

무술년 정월 초, 설 연휴에 찾아갔던 수원전통문화관 마당에 서 있는 솟대’. 솟대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상징이다. 솟대 앞에 서 있는 설명문을 보면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물로서 물새들을 장대 위에 세워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습니다. 물새는 예로부터 곡식과 식수가 메마르지 않도록 비를 가져다주며, 마을을 홍수나 역병 같은 재해로부터 구원하는 수호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뒤이어 또한 철새로서의 물새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조로 여겨져 하늘에 인간의 꿈과 소망을 전하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영혼의 전달자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솟대는 단순히 마을의 안녕이나 풍농이나 풍어를 기원하는 것만으로는 솟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 초, 3일부터 정월 대보름 사이와 음력 10월 상달이 되면 길일을 택해 마을의 안녕과 풍농, 풍어 등을 위한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마을대동제를 지냈다. 이는 아주 오래 전 삼한시대부터 전해진 유풍으로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으로 행해진 의식이다.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은 모두 이런 대동의 의식이었다.

 

마을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 집안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는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산신제 등으로 이는 모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모든 이들이 모여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그 대동의식 중 하나가 바로 솟대를 깎아 세우고 정월에 길일을 택해 제를 지내던 거리제였다.

 

 

솟대는 대개 누석탑, 장승과 함께 세워

 

수원을 돌아보면 곳곳에 서 있는 솟대를 볼 수 있다. 천천로 서호천 변에 서 있는 솟대공원, 그리고 수원전통문화관 경내와 평동 오목공원 등 곳곳에도 솟대가 서 있다. 물론 이 솟대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운 것은 아니다. 일종의 교육용 솟대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평동 오목공원에 세운 솟대는 장승과 함께 조성했으며 지난 해 528일 장승과 솟대를 새로 마련하고 상송장승고유제를 열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고유제가 이어질지 기대가 된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장대나 긴 돌 위에 얹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솟대는 대개 마을의 입구에 세워,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미리 예방한다는 뜻으로 세운다. 솟대만을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돌탑, 장승 등과 같이 세우기도 한다. 솟대는 정월 열나흘날 밤에 새로 깎아 세우고, 주민들이 모여 정성스럽게 마을제를 지낸다. 솟대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여 솟대, 짐대, 돛대, 새대, 설대 등으로도 부르고, 그 기능으로 세분하여 수살, 진목, 추악대, 표줏대 등으로도 부른다.

 

이러한 솟대는 참나무나 돌로 만들어 마을입구에 세우고, 그 위에는 오리를 만들어 올려둔다. 대개는 솟대 위에 한 마리를 얹는 수도 있지만, 끝을 갈래지게 해 두 마리를 올리기도 한다. 이 위에 올리는 새는 마을마다 달라, 기러기나 까마귀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새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위에 새를 올리는 것은 멀리 날고, 높이 날 수 있는 새를 올림으로써 먼 곳에서부터 오는 액을 사전에 미리 막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지켜질 때 가치가 있다

 

우리민족이 역사 속에서 그 많은 외세의 압력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동체문화 때문이다. 일제는 그런 공동체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1920년대 문화말살정책까지 행하면서 우리문화를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런 외압 속에서도 우리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온 것은 바로 공동체문화였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 전통을 한낱 박물관에 들어가 있어야 할 것으로 치부하는 문화사대주의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 정월이 되면 일 년의 안녕을 기원하고 10월이 되면 자연에 감사하던 각종 마을의 제의식. 그런 마을제가 다시 되살아나기를 기원한다. 이 나라가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전통문화관 경내에서 만난 솟대를 보면서 무술년 한 해 우리의 것을 되찾고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7년 답사의 끝은 대부도 어촌민속박물관

 

예전처럼 12일이나 23일 등 일정으로 답사를 다니지 못하면서 그동안 찾아보지 못했던 수원 인근의 볼만한 곳을 찾아다닌 지 벌써 6개월 가까이 되었다. 매주 하루 쉬는 날을 이용해 길을 나서는 답사이기 때문에 먼 곳으로 갈 수 없어 인근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작은 행복을 느끼고는 한다.

 

30년 세월을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자료가 쌓여있지만 정작 남들이 큰 관심을 쏟지 않는 우리문화재 등을 주로 취재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중요한 자료지만 내 손을 떠나고 나면 그리 큰 가치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요즈음이야 수원 인근을 다니기 때문에 기사를 쓰고 나면 꼭 필요한 사진만 남겨두곤 삭제를 시켜버린다. 너무 자료가 쌓이다보니 보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24, 남들은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들떠있을 때 난 카메라 한 대를 들고 길을 나섰다. 그동안 수십 차례 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 보지 못한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말 그대로 예전 선감도 일대의 어민들의 생활풍속을 발굴, 보존,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기 때문에 과거 우리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수원은 바다와 접해있지 않지만 예전 수원부지도(1872년 조선왕조가 8도와 그 군현별로 제작한 조선후기 지방지도 중 경기도 수원부 지도로서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일대)를 보면 서해를 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가 수원부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부도 초입 탄도를 바라보는 어촌민속박물관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수원에서 한 시간 거리에 소재한다. 수원을 출발해 화성시 전곡항을 지나 탄도방조제를 건너 안산시 대부도 입구 탄도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아 들어가면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717에 소재한다. 앞으로는 탄도가 바라다보이고 주변에는 탄도항 노을팬션캠핑장이 자리한다.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안산시가 경기도 어촌관광종합개발사업과 연계하여 건립한 민속박물관이다. 2006311일 개관한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2007216일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2008122안산어촌민속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찾아간 날이 평일에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라서인지 박물관안에는 찾아온 관람객들이 보이지 않는다.

 

입구 매표소에서 65세 이상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고 증명서를 보여 달라고 한다. 요즈음 어딜 가나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며 무료관람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그까짓 2,000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수도 없이 돌아다니는 나로서는 일 년 동안 그 돈이 모이면 적지 않다. 그동안 답사를 다니면서 지불한 입장료와 주차료만 해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서해안 생태계와 민속을 돌아볼 수 있는 곳

 

입구서부터 대형 수족관 안에 많은 어종들을 만난다, 모두 3개의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는 어촌민속박물관은 지금은 우리가 만나기 힘든 해안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호감이 가는 곳이다. 각종 조개류를 채취하는 기구부터 어망과 근처를 다니며 패류를 모아들이기 위한 운송수단 등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시화호 주변에 서식했던 공룡들의 발자국 화석과 옛 서해안 바닷가의 가옥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과거 우리네 살림살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찾아온 길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이야 교통의 발달로 먼 길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지만 예전 어민들은 물때를 모르면 작업할 수 없었다. 특히 밀물과 썰물의 차가 있는 서해안에서는 그런 간조시간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어촌민속박물관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라도 내리려는 듯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초겨울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한 여정이라 인근을 들러본다. 탄도로 들어가는 길에(현재는 산책로가 나 있다) 사람들이 바람을 못 이겨 그런지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다는 우리의 마지막 자원이라고 한다.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물이 있는 곳에 집단거주 하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어촌문화가 형성되고 아직까지도 그런 어촌문화가 지속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의 생활에서 만나는 물과 연관이 되는 곳을 모두 돌아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발굴자료 등 알릴 수 있는 전시공간 필요해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는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에 소재한다. 화서2동 주민센터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시가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지역의 비지정 문화재 중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존하는 방법이 바로 향토유적 지정이다.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 서북부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지는 택지개발지구로 예정되면서 1995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으며 1997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에 관한 성격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유적지란 이곳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유구로는 석축과 토광묘, 옹관묘 등이었고, 유물은 토기류와 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 자기류, 청동숟가락, 상평통보, 쇠칼, 각종 제시용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유적지는 초기 철기시대인 BC300~0로 철기 전기부터 조선조까지 제사를 지냈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9일 오후 화서2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꽃뫼 제사유적지를 찾아갔다. 쌀쌀한 날씨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제사유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뒤로 낮은 구릉이 있고, 그 중심으로 오르는 비탈에 펜스가 쳐있다. 유적지치고는 상당히 좁은 면적이다.

 

 

낮은 구릉에 자리한 꽃뫼 제사유적지

 

유적지로 지정해 펜스를 쳐 놓은 곳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이 초기 철기시대의 제시유적지라고 하면 인근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 마을의 형성에는 반드시 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 흐르는 서호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안내판 하나만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구릉 중심에는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줄기 안에 누군가 보도블록을 끼어 놓았다. 도대체 나무에 왜 이렇게 몹쓸 짓을 한 것일까? 철책 안까지 들어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치우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은 이곳을 향토유적으로 지정만 해놓았지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원삼국시대로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이 시대는 서기전 100년경 한반도 북부 및 중국 동북지방 일원에서 고대국가 고구려가 일어나고 한반도 서북부에 낙랑군이 설치된 시기이다. 남부에서 도구용 이 시기에 청동기가 소멸하고 철기가 본격 생산되는 가운데 삼한 소국들이 성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으로는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과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농경(벼농사)의 발전, 지석묘의 소멸과 석곽묘의 발달 등이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 원삼국이 삼국시대로 본격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말하며 문물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제의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제사유적지라고 알릴만한 자료 없어

 

과거 민족은 농사가 시작되기 전과 농사를 마친 후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가졌다. 흔히 맞이굿이라고 부르는 이 제사는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3일간 주야로 쉬지 않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나누는 답지저앙 수족상응의 형태를 즐겼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고구려편에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여는데, 이를 '동맹'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시대의 고구려의 동맹이나 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등은 모두 하늘에 감사하며 사람들이 어울려 춤추고 즐겼다는 것이다.

 

이곳 꽃뫼 제사유적지가 당시 하늘에 감사하던 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발굴된 것들을 사진자료나마 보여줄 수 있는 안내판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떤 것들이 발굴당시 발견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보니 단지 이런 것들이 발견되었고 이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제사가 이루어졌다는 꽃뫼 제사유적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진열해 놓을 수 있는 작은 전시관 하나라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순히 제시유적지라는 소개만으로는 이곳이 문화재적 가치가 중요한 곳임을 알리기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이곳이 사람들이 살던 군락지임을 알리는 제사유적지의 가치는 상당하기 때문이다.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요지까지 찾아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상갈동)에 소재한 경기도박물관. 한 때는 이곳을 매주 드나들던 때도 있었다. 모 무형문화재 단체를 관리하면서 이곳 공연마당에서 매주 공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랬던 곳을 일부러 찾아간다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는 것이 바쁜지, 아니면 문화재에 대한 열망이 식어서인지 모르겠다.

 

지난 22일 경기도박물관을 찾았지만 아침부터 비가 내린 날이라 카메라를 소지하고 찾아가질 못했다. 날이 궂으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메라 때문에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6일 다시 찾아간 경기도박물관. 이곳을 찾아가면 평소 내가 좋아하던 장승이며 탑비, 고인돌, 초상 등 많은 문화유적의 진본 및 모형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하지만 이번에 경기도박물관은 찾은 것은 용인시 서리 백자요지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나는 도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도공들이고 그들에게 들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공부도 할 겸 경기도박물관과 용인시 이동면 중덕로7(서리 산23-1)에 소재한 사적 제329호 용인서리 백자가마요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광교산 창성사지가 가마터를 돌아보게 된 이유

 

예전에는 곳곳에 가마터가 있었다. 사찰 등에서는 사찰 한편에 가마를 만들어 그곳에서 직접 기와 등을 구워내 절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꽤 많은 가마터를 만나고 다녔지만 그 중 가장 큰 가마터가 바로 용인시 이동면에 소재한 서리백자요지라는 것이다.

 

사실 가마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됐다가 31년 만에 경기도 기념물로 승격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창성사지를 돌이보고 난 후부터이다. 이곳을 찾아갔을 때 유난히 많은 와편과 도자조각들을 보면서이다. 수원시는 한신대박물관과 함께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지 발굴조사를 했으며 지난해 12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본 수원 창성사지의 역사적 가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연구원들은 고려말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가 있었던 터를 확인했고 중심 건물과 부속 건물터, 고급 청자와 백자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욱 경기도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만난 서리백자요지의 모형을 보고나서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직접 가마터를 돌아보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서리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고 한다.

 

더욱 이 가마터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마터로는 가장 큰 대형가마이고 서리 백자요지를 찾아가면 옛 가마모형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에 한 번에 돌아보리라 미음 먹고 길을 나선 것이다. 날은 바람이 불고 쌀쌀한데 가마터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남의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가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광교산에도 가마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용인은 일찍부터 요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인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전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의 가마터 72기가 용인시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으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는 19개소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는데 서리일대의 중덕 가마터와 호암미술관 근처의 상반 가마터 등 여러 곳의 가마터가 발견되어 이 지역이 고려시대 백자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의 출토물로는 백자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완층이 발견되어 이곳에서 고려청자의 생산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가마터의 발견으로 인해 고려청자가 10세기 후반에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마터가 놓였던 자리에는 많은 자기편들이 보인다.

 

우리나라 청자와 백자를 주도했던 용인시. 하지만 현재 용인은 우리 도자사에 기록될 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도자축제 등에서는 빠져있어 안타깝다. 수원 창성사지에서도 많은 고급 청자와 백자 등이 발굴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 이곳 광교산 어디엔가 가마터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년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광교산 일대를 돌며 가마터를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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