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떡이며 태봉 마루에 서 있는 명종의 태실을 오르다

 

지금 저 꼭대기를 올라가자는 겁니까? 점심 먹고 이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저곳을 어떻게 오릅니까? 아무리 위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다고 해도 저는 절대 못 올라갑니다. 경사도 장난이 아니구먼?”

 

5일 오후 서산시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은 서산시 운산면 문수골길 94-8(태봉리)에 소재한 명종의 태실 및 비가 서 있는 태봉 아래 주차장이다. 위로 보이는 태봉은 밥을 먹고 난 후 바로 오르기에는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곳 높이야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소화도 되기 전에 오르라고 하면 힘들 것 같다.

 

 

태봉이나 태재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곳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 두는 작은 석실을 말한다. 마을이름까지도 태봉리리고 한다. 그 산 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된 명종의 태실 및 비가 있다. 산 밑에서도 태실 앞에 세운 비의 윗부분이 보일정도이다. 하지만 그곳을 올라야 한다는 데는 쉽게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이곳에 태를 묻은 명종(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다. 중종이 죽고 큰 아들인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를 한 명종 대신 어머니인 문정황후가 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명종은 왕위에 있을 당시 왜의 잦은 침략을 당했고 임꺽정이 혼란한 틈을 타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된 명종 태실

 

명종 태실은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되었다. 정말이지 오르기 싫은 태봉의 가파른 길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 올랐다. 태봉 정상부근까지 가파른 비탈을 따라 오르면 위에는 소방도로가 나 있어 걷기에 편해진다. 산 아래편에는 대밭이 있었는데 이곳 소방도로를 따라 산죽이 양편으로 자라고 있다.

 

태봉 위는 약 40평 정도의 넓이로 조성하였다. 방형의 대좌 위에 태를 넣은 태함을 석종형 부도의 태실로 마련했으며, 그 위에 8각의 옥개석을 놓고 보주형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석종형 부도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의 높이는 90이며, 각 변이 약 2m8각 난간으로 둘러져 있어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태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가 서 있다. 하나의 비에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瑃齡阿只氏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가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다. 이 비는 1538년인 중종 33년에 세운 비이다. 이 비는 태실을 조성하면서 세웠다.

 

그 옆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 비는 명종 1년인 1546년에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안해야 하기 때문에 건립된 비이다. 이 비는 귀부와 이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또 한기의 비는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숙종 37년인 1711년에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라는 글씨를 각인하여 세웠다. 이 비는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 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로 조형하였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명종태실. 태실의 석종형 부도 앞에서 먼 곳을 바라본다. 이곳에 오르기가 그렇게 싫었던 것도 사실은 힘이 든 이유도 있었지만, ‘눈물의 왕이라고 불린 명종의 태실 앞에 선다는 것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54576일 명종이 즉위했으니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황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부터 명종은 그저 허울분인 왕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가차없이 내치는 대비 문정황후로 인해 결국 을사사화까지 일어났지만 명종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어머니 문정황후의 그늘에 가려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을 시작했지만 2년 후인 명종 22(1567) 6,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날이 좋으면 더 멀리까지 보인다네요

답사에 동행한 지인이 하는 말이다. 세상살이에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쪽을 바라보면 속이 트인다고 말하는 지인. 하지만 난 이곳에 오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평생을 어머니 문전황후의 그늘에 가려 마음껏 왕으로서 친정을 펼치지 못한 명종. 그리고 젊은 나이인 34세를 일기로 왕위를 이을 후사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명종. 그의 생에를 알기에 이곳을 오르면 역사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 잉여토기 2018.04.06 15:42 신고

    같은 공간에 올라서 각자 느끼는 느낌이 다 다르네요.

 

정조의 백성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수원화성 구조물

 

수원화성은 조선조 제22대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긴 후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현재의 장소로 옮긴 후 축성한 성이다. 정조대왕은 부친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천봉하고 난 후 쌓은 성이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요, 후에 이곳을 도읍으로 삼기위한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곳이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축성하였으며, 가장 강력한 군대인 장용외영을 이곳에 주둔시켜 자신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요새로 삼았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20만 덩이의 석재, 53만장의 기와, 69만장의 벽돌, 26천주의 목재, 1845명의 장인이 거중기 등 각종 기구를 시용하여 1794년부터 28개월 만에 완공한 자연친화적인 성이다. 수원화성은 성을 축성하면서 각 공사구간별로 책임을 맡은 모든 장인들의 이름을 기록한 공사실명판을 제작하여 성벽에 부착함으로써, 자신이 축성한 곳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후대에 누가 그곳을 책임지고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화성 시설물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 있어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시설물 중 연도와 굴뚝이 서 있는 곳이 있거나, 곳곳에 눈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19일이 우수인데 16일 아침부터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이 날리기 시작한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눈보라가 치는 날 수원화성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남수문 위에 자리한 동남각루는 지휘소 겸 인근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팔달문과 남공심돈·남암문(두 곳은 현재 유실되었다) 남수문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보라가 몰아쳐 눈을 뜨지 못할 정도지만 남수문에서 동남각루를 항해 걸음을 옮겼다. 눈보라가 치는 중에도 확인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각루는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 역할도 함께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를 돌아보니 연도와 굴뚝이 보인다. 연도와 굴뚝이 있다는 것은 이곳에 온돌방이 있다는 뜻이다. 동남각루를 돌아 뒤편으로 가니 아궁이가 있다. 수원천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으로 인해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 추울 것을 염려해 온돌방을 놓은 것이다. 이런 온돌방은 서북각루에도 굴뚝과 온돌방이 보인다. 수원화성의 구조물들을 돌아보면 이렇게 비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물들이 눈에 띤다.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동남각루를 지나 봉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눈보라가 더 심하게 친다. 며칠 안 있으면 우수인데 꽃샘추위인 듯하다. 항상 입춘이 지나고 나면 한두 차례 꽃샘추위가 닥친다. 동삼치를 지나 공사 중인 동이포루를 지난다. 그리고 봉돈을 앞에 두고 밖에서 인을 들여다본다. 출입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출입이 자유로웠을 때 봉돈 안에도 병사들이 기거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창문은 까치살창을 내어 환기를 도왔다.

 

·포루 등을 거쳐 창룡문을 돌아본 후 동북노대를 지난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곳으로 동북노대는 동장대와 동북공심도 가까이에,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소재한 서장대 뒤편에 자리한다. 동복노대를 거쳐 관람이 중지된 동북공심돈에 도착했다.

 

동장대인 연무대를 돌아본 후 동암문을 지나 높은 곳에서 군사들이 적을 관찰할 수 있는 동복포루에 도착했다. 눈보라가 심하게 치기 때문인가?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다. 동복포루 역시 높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인 동북포루는 정자와 같은 형태로 이층으로 올리고 아래편에는 군사들이 눈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이 공간은 숨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비밀공간이기도 하다.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은 1794(정조 18) 10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인 화홍문 역시 군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했다. 평소 같으면 꼼꼼히 돌아보아도 40분 정도면 충분한 시간인데, 눈보라를 맞으며 걷다보니 한 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바람도 점점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거세진다. 더 이상 돌아본다는 것이 어려울 듯하다.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생각해 본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화성의 시설물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게 만든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날 돌아본 수원화성의 시설물들. 그저 겉으로 보고 걷기보다는 그 시설물에 얽힌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어보자. 정조대왕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기 때문에 그 시설물들이 한결 돋보이는 듯하다.

 

용인에 소재한 한국민속촌을 들어가 좌측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면, 놀이마당 좌측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장승이 서 있고, 무봉산 금련사라고 쓴 현판을 단 일주문이 서있다. 금련사는 대전 유성에 있던 절집을 옮겨다 놓은 사찰이다.

 

금련사에는 일주문과 객사인 하마정(하마정은 현재 민속촌 농악팀이 사용을 하고 있다),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 운판과 목어, 북이 달려 있는 자금광루와 종각, 법문을 펴는 안심료, 칠성당과 산신각, 아미타불이 모셔진 극락보전, 요사채인 염불당과 수광당 등의 전각으로 꾸며져 있다.

 

 

 

해우소가 이렇게 멀어서야

 

수광당과 칠성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공덕암이라는 암자가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는 텃밭과 해우소가 있는데, 이 해우소 역시 한 칸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해우소다. 밖에서 보면 해우소라기 보다는 아름다운 목조건물 같이 조성이 되어 있다. 이외에도 금련사에는 돌장승, 부도, 삼층석탑, 석등, 돌당간, 돌수조, 연못 등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숲길이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져 운치 있는 산길을 만들어 준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일주문은 새 기운을 얻은 듯하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면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이 있다. 외국에서 찾아 온 젊은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본다. 험악한 모습 안에서 보이는 미소가 또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은 아닐는지.

 

 

 

 

사천왕문을 지나서 만나는 넓은 앞마당. 이곳에도 이제 얼마 후면 봄이 다가올 것만 같다. 계단을 올라 있는 정자가 자금광루다. 자금광루 안에는 목어와 운판, 북 등이 걸려있다. 이곳의 북은 특이하다. 구부러진 통나무를 속을 파내고, 가죽을 양편에 대어 만든 북이다.

 

크진 않아도 고루 갖춘 절 금련사

 

자금광루와 마주한 대웅전인 극릭보전. 안에는 아미타불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극락보존 앞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자금광루의 옆으로는 종각이 있다. 한 무리의 외국 여행객들이 주말을 맞아 찾아 온 금련사. 활기가 넘치는 경내에는 어느새 저만큼 봄이 다가와 있다. 자금광루 좌측으로는 법문을 펴는 인심료와 수광당, 그리고 칠성각이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으며, 좌측으로는 요사인 염불당이 자리하고 있다.

 

 

 

 

 

수광당과 안심료 뒤편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에 얼음이 녹아 봄이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푸른 대나무 잎들도 물이 오르는지, 잎이 점차 푸르게 변한다. 연기를 내뿜고 있는 굴뚝이 오랜만에 찾은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듯하다.

 

산길을 올라 만나는 공덕암. 한편은 마루로 트여져 있어. 한 여름 이 마루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다면,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공덕암 앞에 텃밭은 벌써 정리가 되어있다. 해우소가 마치 목조 전각이라도 되는 양 보인다.

 

 

 

 

 

민속촌 안에 있는 아름다운 절 금련사. 사시사철 그 풍광이 달라 자주 찾는 곳이다. 아마 천년 시간은 보내지 못했다고 해도, 그만큼 고풍스런 멋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주말에 금련사를 찾아, 깊은 산 속에서 느껴볼 수 있는 정취를 맛보기를 바란다.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지난 3월 말경 오후 6시. 이제 30~40분 후면 일몰시간이라 사진조차 찍을 수가 없다. 당황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당성을 찾아보기 위해, 늦은 시간이지만 당성으로 향했다. 올 들어 첫 황사가 심하게 끼는 날이다. 설상가상으로 화성은 서해와 인접해 딴 곳보다 황사가 심하다. 온통 시야가 뿌옇게 보일 정도이다.

 

 

 

이런 날 산성 답사라니...

 

당성 입구에 도달했는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카메라의 배터리 양을 나타내는 표시가 깜빡거린다.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몇 번을 벼르고 별러 찾아온 곳인데, 그리고 이제 얼마 후면 해도 떨어질 텐데 정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동행을 한 아우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밭 옆에 서있는 전신주로 가서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다행히 가방 안에 항상 충전기는 지니고 있어, 전신주에 있는 계량기 안에 코드를 연결할 수가 있었다. 배터리를 충전시키면서 기다리는 10여 분이 여삼추다. 벌써 날이 점점 어두워온다. 10여 분을 기다리면서 충전을 해 성으로 올랐다. 저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는,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비탈길에 조

 

 

 

성한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다리도 뻐근하고 숨도 차다. 이렇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마시는 황사의 먼지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정말로 내가 문화재 답사에 미친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이렇게 황사가 심한 날, 숨 가쁜 산성 답사를 할 일이 없을 듯하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2k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벌써 날이 컴컴해진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다 되어 있다.

 

당성을 한 바퀴 다 돌아 내려오니 기진맥진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보다. 앞에까지 가서 성을 돌아보지 못할까봐 맘을 졸인 것이, 한꺼번에 피로를 몰고 온다. 삼국이 번갈아 가면서 차지했던 당성. 그만큼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당성의 마른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았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다.

 

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시설은 성 5곳에 조성한 '포루(砲樓)'이다. 화성의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놓았다. 이는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춰 두었다가 위·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해 모두 5개의 포루(남포루·서포루·북서포루·북동포루·동포루)를 조성했다. 이 중 서포루는 약간 작고, 남은 네 곳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포루는 3층으로 축조되었는데, 지대 위에는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인 '혈석(穴石)'을 전면에 2, 좌우에 3개씩 놓았다.

 

지대 위에는 벽돌을 쌓고 안쪽으로는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했다. 또한 포루에는 총혈 15개를 만들었는데 지대 위에 뚫은 혈석은 포루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맨 위에는 성안에서 들어갈 수 있는 높이로 세 칸의 문루를 만들어 총안과 전안을 뚫어 놓았다. 문루 바깥 면에는 짐승그림을 그려놓아 위엄을 표했으며 처마는 납도리 홀처마에 우진각 지붕이다.

 

 

포루는 벽돌을 사용해 조성했는데 아래 넓이나 위의 줄어든 넓이가 모두 옛날 제도의 재돌(再突)하는 형세를 따랐다. 안쪽은 성탁(城托)에 의지해 전부를 돌로 쌓고 그 위에 판문을 설치했다. 문지방 안의 청() 끝은, 사방 4척쯤 비워서 별도로 덮개판을 설치했다. 이는 문을 밀고 당겨 여닫게 한 것이다. 거기에다 나무 사닥다리를 대어서 아래쪽 공간으로 통하게 만들어 놓았다.

 

검은 벽돌로 성에서 돌출시켜 쌓아올린 포루. 포를 쏘는 구조물인 포루는 성의 몸체에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그 위에 포사를 3층으로 지은 구조물이다. 포루는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며, 그 안에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게 하였다.

 

이런 설명만 갖고는 포루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포를 쏘는 포루가 있는데 관리를 위해 모두 잠가놓았다. 하기에 포루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포루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포루의 형태는 같게 생겼지만 크기는 조금 다르다.

 

 

3층으로 된 포루, 위용이 대단해

 

화성의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다. 맨 위에 총안을 낸 문은 판문(板門)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포루의 책임자가 있어 적을 향해 공격을 지시하게 된다. 성 밖에서 보면 3층의 구조로 되어있지만, 성 안에서 보면 맨 위의 전각만 들어난다. 이 포루 안에는 몇 명의 군사들이 들어가 있었을까?

 

화성박물관 관계자는 포루의 병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포루 안에 병사들이 몇 명이나 들어가서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포루는 3층으로 되어있는데, 그 규모 등으로 볼 때, 한 층에 대략 5~6명 정도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2층 상설 전시관에는, 화성문화실에 포루의 한 면을 절개한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는 포루 안의 생김새와 그 안에 병사들의 모습이 모형이로 만들어져 있어, 포루의 대략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과거 성벽 위에 있는 여장의 한 타에 5~6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던 것을 보면, 아마도 포루의 한 층에 그 정도 인원이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모형을 보면 맨 위층인 전각에는 포루 안에서의 전투를 지휘하는 무장과 총수들이 있고, 1층과 2층에는 불랑기를 가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임진왜란 전부터 사용한 불랑기자포

 

홍이포, 신기전, 녹로 로 등과 함께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이 많이 사용했던 불랑기자포는 현재 보물 제86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 861-1호는 육군박물관에 3점이 있으며, 861-2호는 서울역사박물관에 1점이 지정이 되어있다.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발사시키는 화기로는 조선시대 유일한 후장식 화포이다. 불랑기는 15세기 포르트칼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조선 선조 25년인 1592년에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졌었으나, 이미 그 이전인 명종 때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불랑기자포에는, 자포 포신 표면 우측에 <가정계해 지통중칠십오근팔냥 장김석년(嘉靖癸亥 地筒重七十五斤八兩 匠金石年)>이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자포가 1563년에 제작되었으며 중량이 758냥이고 장인 김석년에 의해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랑기로 무장한 장용영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던 화성과 포루. 아마 당시 이들의 화력은 막강했을 것이다. 그러한 포루를 돌아보면서 과거 정조의 꿈이라는 화성이 더욱 달라져 보인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난 포루 하나로만도 가슴이 벅찬 이유이다. 역사 속의 산물이라는 존재는, 늘 그렇게 세월이 지나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다스리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5곳에 마련한 화성의 포루

 

[동포루]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있다. 치성의 발전된 모습인 포루는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정조 20년인 1796716일에 완공된 동포루는 동문인 창룡문과 봉돈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남포루] 남포루는 팔달문에서 화양루(서남각루)에 이르는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현재 팔달산 남쪽 중턱에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을 따라 오르다 보면 그 중턱에 돌출된 남포루를 만나게 된다. 남포루는 용도로 올라가는 적과 팔달문을 공격하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물이다.

 

[서포루]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있다. 정조 20년인 1796530일에 완공된 서포루는, 화성의 전투 지휘소인 서장대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5개의 포루 중 가장 중무장한 포루다.

 

[북서포루]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아 치성과 같이 성 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했다.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춰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을 가까이 두고 있다.

 

[북동포루]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북동포루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북문인 장안문의 사이에 자리한다. 북동포루는 장안문과 수문인 화홍문으로 밀려드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곳이다.

 

적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공격소인 포루. 5곳에 설치한 포루는 삼면으로 포를 발사할 수가 있어, 주변의 중요한 시설물을 보호하고 밀려드는 적을 향해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어느 곳으로 적이 밀려들든지 화성은 적들을 향해 강력한 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된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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