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까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을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세월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얼마 전 문을 만들어 달아놓아 완벽한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에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90년 만에 복원된 남수문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에서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는 아마도 북수문인 화홍문과 더불어 물길을 지켜낼 수 있는 남수문이었을 것이다.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는데,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전국 유일의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그런데 북수문이 일곱 개의 수문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아홉 개의 수문을 낸 것일까?

 

 

왕권의 상징이었을 남수문

 

아마도 남수문에 아홉 개의 문을 낸 것은 왕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9는 양수 중에서 가장 큰 수이며 꽉 찬 것을 의미한다. 왕의 복장 중 가장 품격이 높은 것이 구장복이고 보면 남수문은 왕권을 상징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북수문은 상류의 물이 유입되는 곳이지만 남수문은 팔달산 등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합쳐지기 때문에, 그만큼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공간 확보가 더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든다.

 

"남북 수문의 터는 동서로 38, 남북으로 51보를 파내서 터를 닦고 땅을 14척 깊이로 판다. 모래에 진흙을 섞어서 다져서 쌓은 후 전을 2중으로 깔았다. 다리의 안팎에도 넓게 고기비늘처럼 전을 깔고 그 끝에 장대석을 물리어 굳혔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수문의 설명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조형한 수문이다.

 

남수문은 화강석으로 수문을 쌓고 쇠살문을 달았으며, 수문 위의 구멍을 통해 쇠사슬로 수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9개의 수문 구간 위에는 다리의 넓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에는 사람을 통행하게 하고, 다리의 길이인 동서 약 28.6m에 남북 3.6m의 검은색 벽돌로 꾸민 포사(舖舍)’를 길게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사에는 세 개의 문을 내어 짧은 시간에 많은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장을 검은색 벽돌로 쌓아 57개의 총안을 내었다. 이 총안 구멍이 수문을 향해 공격을 하는 적을 향하고 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여장 역시 구간수문의 아치형에 어울리게 무지개형으로 조성하였다.

 

수원천과 어우러진 화성의 수문

 

이러한 남수문 주변이 홍수로 떠내려 간 뒤 90년이 지난 2012년 복원되었다. 남수문이 다시는 홍수피해의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몰시간이 지난 다음 남수문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구간에서 형형색색의 조명이 남수문을 화려하게 만든다.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잠시 동안 촬영하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조형미술이라는 화성, 그 중에서도 과거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한 곳이었던 남수문의 야경이다.

 

촬영을 하다 불현 듯 생각을 한다. 만일 저 앞에 분수라도 설치해서 그 분수에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참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수원천의 물길이 화홍문을 통해 유입되어 남수문을 통해 서해로 흘러가 듯, 수문을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도 물길과 같이 막힘이 없다.

 

수원 화성은 적의 침공에 대비해 놀랄 만큼 정교하게 모든 것이 잘 조성되어 있다. 화성은 단순히 전쟁에 대비한 하나의 성곽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화성은 효와 충, 그리고 자연사랑과 기록정신, 과학정신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 시대의 가장 정교하고 가장 자연과 동화된 축조물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난 역사학자도 아니고, 축성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깊이를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화성을 꼼꼼히 살펴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보면 볼수록 참 대단한 성곽이기 때문이다. 성벽은 밑 부분은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르면서 점점 돌이 작아진다. 틈이 없이 정교하게 쌓여진 것은 적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성벽은 위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어가게 해 철저하게 무너짐에 대비를 했음이 알 수 있다. 더구나 성돌보다 큰 적심이라는 길고 큰 돌을 축성에 사용해 성벽을 강하게 쌓았다. 성벽 위 여장에는 몇 개의 총안을 내고 사이에는 비스듬히 뚫린 구멍이 있어 성벽에 적이 달라붙으면 뜨거운 물이나 기름등을 부어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숨겨져 있는 중요시설

 

화성은 은밀한 곳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암문이다. 암문은 숨어있다는 소리인데 화성에는 모두 5개소의 암문이 있었다. 암문은 좁게 만들고 지형을 이용해 교묘히 숨겨 놓았는데 이는 전투 시에 물자를 적이 모르게 은밀히 수송하거나, 병력을 이동시켜 적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5개의 암문은 그 위치에 따라 동암문, 서암문, 북암문, 서남암문, 남암문으로 불렀는데 현재 남안문은 남공심돈과 함께 복원을 하지 못해 4개소의 암문만이 존재한다.

 

암문이란 성의 숨겨진 시설물이다. 주로 으슥하고 후미진 곳에 축조하여 적이 모르게 양식이나 무기 등의 물자를 반입하거나,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할 수 있게 만든 비밀통로이다. 하기에 암문에는 누각도 없거니와, 문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이렇게 숨겨진 암문은 전투시에는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암문이 있는 곳의 지형을 보면 후미진 곳에 두어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또한 암문이 있는 곳의 지형이나 성곽을 보면 적이 은밀히 공격을 해올 만한 장소라는 점도 눈에 띤다. 결국 적은 이 곳으로 침입을 했다가 암문을 이용해 순식간에 병력이 이동되어 전, 후에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동암문은 전으로 홍예를 쌓고 위에는 원여장과 평여장을 쌓아 만들었다.

 

서암문은 서장대 남쪽 약 52m거리에 있는 성곽 시설물이다. 서암문 역시 전돌로 홍예를 물렸는데 안쪽 너비 1.7m, 높이 2.33m이고, 바깥쪽너비 1.24m 높이 2.18m이다. 안팎에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문은 산허리에 있으며, 길은 성 위로 났기 때문에 문안의 돌층계는 네모지고 움푹하게 되었다. 돌층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위가 적으로 길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보이는 길과 암문의 길을 통하게 하였다.

 

암문은 4대문과 중요시설물이 있는 곳 주변에 있으며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가축, 수레를 통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암문 역시 후미진 곳에 있으며 서장대가 가까워 적이 한꺼번에 공격을 할 것에 대비하여 암문 안쪽에는 계단을 양편으로 두고 그 위에 다시 길을 내어 공격을 할 수 있는 방어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화성은 아무리 보아도 참 대단한 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보면 볼수록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세계 어느 곳에 이렇게 완벽한 성이 있겠는가?

 

 

용도의 출입문이기도 한 서남암문

 

암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곳은 역시 서남암문이다. 서남암문은 팔달문에서 성곽을 따라 오르면 팔달산의 등성이로 오르게 되는데 그 곳에 위치한다. 서남암문은 다른 암문과는 다르게 암문위에 포사를 두고 있다. 유일하게 암문 중에서 문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문의 크기는 겨우 말 한 필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문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이 서남암문은 170m 길이의 용도가 시작되는 곳이며, 또한 서남각루인 화양루에 이르는 통로의 문이다. 서남암문 앞으로 난 용도는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는 적에 대비해 양편으로 성곽을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쌓았다. 이 용도가 끝나는 곳에서 산등성이도 끝나게 되며 그 끝에는 화양루가 있다. 화양루는 병사들이 쉴 수도 있는 누각이지만 적을 관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적은 숨어서 공격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서남암문을 나서면 용도로 이어진다. 용도는 화성을 방비하기 위한 구조물 중 성 밖에 설치된 화성의 또 다른 성 길이다. 산등성이에 마련한 용도는 성에 조성한 암문을 이용해 길게 뻗어있으며 그 끝에 화양루를 두어 적의 침입을 사전에 간파하거나 병사들이 쉴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암문은 이와 같이 수원화성의 시설물 중 성을 보호하기 위한 구조물이지만 각 암문의 형태가 다 달라 화성이 얼마나 치밀하게 조상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암문 중에서 가장 눈에 띠는 북암문

 

북암문은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의 동쪽 40보 되는 거리에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6촌 높이가 6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 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북암문을 조성한 곳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수원화성에 조상한 암문 중 가장 눈에 띠는 곳이 바로 북암문이다. 북암문 곁에는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 있고 그 옆에는 북수문인 화홍문이 자리한다. 이곳 역시 수원화성의 시설물 중에 중요한 곳이다. 북암문은 남문 위로 길을 내어 언제라도 병사들이 이동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암문의 위는 둥그렇게 아치형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암문은 비상시에 군사들의 빠른 이동 과 식량의 운반 등을 고려해 만든 성문이다. 더 견고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저렇게 문 위에 아치형으로 벽돌을 쌓아야만 했을까? 물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아치형으로 쌓아올린 벽돌의 쓰임새는 더 중요한데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적이 문을 공격해 오면 아치로 된 벽돌을 무너트려 성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아치형의 구조물이 이런 쓰임새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감히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암문의 중요성은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얼마나 많은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어느 곳 하나를 보아도 철저하게 방어를 위해 시설물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화성은 최고의 공격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계 최고의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축성된 성이다. 그야말로 과학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어떠한 칭찬의 말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화성을 한 바퀴 돌다보면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바로 화성장대라 불리는 서장대이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서장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굽어보면 사면팔방으로 모두 통하는 곳이다. 석성산의 봉화와 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는 곳이다.

 

서장대, 한 때 어느 취객에 의해 웅장한 서장대가 불에 타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찾았다. 그 문지방 위에는 정조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인 [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정조 이산의 꿈은 무엇일까?

 

정조임금은 이 장대에 올라 장용위 군사들을 호령했다. 이산은 이곳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강력한 왕권을 갖고 북진을 하여, 옛 고토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 장대 위에서서 사면팔방을 바라보면서, 막힘없이 달려가는 병사들의 무한한 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장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사랑을 엮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깃든 이산의 꿈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난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생각을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정조임금의 꿈을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알려줄 수만 있다면, 저마다 큰 꿈을 키워나갈 수가 있을 텐데. 늘 그것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장대에는 모두 네모난 벽돌을 깔고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각각 7척이고 이것을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받치었고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5촌이다. 위층은 한 간인데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아래층의 반자가 되었다. 그 서북쪽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다.

 

 

다연발 화살을 쏘아대는 노대

 

서장대의 뒤에는 서노대가 자리한다. 원래 노대는 <무비지(武備志)>에 설명하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전붕과 같이 하고, 안에는 화살을 쏘는 노수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노대의 설명을 보면 현재의 노대는 그 제도를 본떠서 짓되 약간 달리 하였다. 집을 얹지 않고 대를 8면으로 하되 깎아지른 듯이 우뚝 서있게 지었다. 면마다 아래 너비 각 85, 위의 줄어든 너비 각 각 65, 높이 12, 지대 위에 체벽으로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위에는 장대를 얹고 모양의 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장대 쪽으로는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부를 둘러 총안을 낸 여장을 둘러놓았다. 대 위에는 네모난 전돌을 깔았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쇠뇌를 쏘았을 것이다. 쇠뇌란 다연발로 발사하는 화살을 말한다. 쇠로 된 발사 장치를 갖고 있는 이 쇠뇌는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임금 이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사방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서 군사들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정조는 더 강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군사들의 위용을 보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도 살펴보았을 것이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이산의 꿈을 지금 이 땅의 젊음에게 전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철모르는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한 젊은 연인이 조금은 아쉬운 까닭이다.

 

쐐기흔적을 찾아내다.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보았다. 무심히 지나쳤던 화성 서장대의 밖의 성벽. 참 어지간히 바보라는 생각이 든다. 성벽 위 여장에 난 총안이 아니라 성벽에 총안이 있다. 총안마다 네모나게 단단히 총안 주변을 돌을 쌓았다. 그리고 이곳의 여장에는 틈이 없다. 여장을 붙여 설치를 했다. 중요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서장대 바깥은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바위를 절개한 흔적으로 보니, 이곳에서도 화성을 쌓을 때 돌을 뜬 곳이다. 수십 번을 이곳을 지나치면서도 돌을 떴다는 생각만 했지, 화성을 쌓을 때 돌을 떠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흔적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중으로 쌓은 화성을 보고난 뒤, 이곳에도 쐐기를 박았던 흔적이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이 여기저기 살펴보기 시작했다.

 

 

작은 돌 하나에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은 자욱이 그렇게 남아있다. 서장대 바깥의 성벽은 멀리가지 않고 바로 밑 바위를 쪼개 쌓았다는 것이다. 하긴 이 꼭대기까지 어떻게 큰 돌을 날라다가 성벽을 쌓았을까? 그 흔적 하나가 화성의 또 다른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화성은 100바퀴를 돌아야 전부를 알 수 있다

언젠가 화성을 답사하다가 만난 어르신의 말씀이다. 그 때는 속으로 ‘100바퀴씩이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화성은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알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이제야 그 어르신이 정말 화성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원팔경 중에는 용지대월이 있다. 바로 이 용연 위에 달이 떠 비치는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다. 동북각루에 걸린 편액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으며, 참판이었던 조윤형이 썼다고 한다. 화홍문에서 용연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다보면,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를 설치하였다. 이는 용연에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낼 수가 있는 시설이다.

 

용연은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했다. 둘레가 210, 깊이 6척이고, 못의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다. 못 위 성의 모퉁이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일몰 후 14분이 지나면 화성은 온통 불빛으로 아름답게 채색을 한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건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관망하는데 있어 어느 한 곳도 빠트리지 않도록 축조한 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8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9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정자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쫒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 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단의 벽돌담으로 쌓은 위에 지은 정자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에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의 기단을 오르면 정자가 한편으로 서 있게 된다. 정자는 남쪽은 쪽문의 위까지 돌출이 되고, 북쪽은 중앙으로 돌출을 시켜 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했다. 그저 넘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이 된 아름다움이다. 일단의 기단 위 공백은 네모난 흑색으로 된 돌을 깔았다. 그런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방화수류정이다.

 

아마 방화수류정만큼 많은 용두가 지붕 위에 올려 진 건물은 없을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정자가 여기저기 돌출이 되어있고, 그 돌출이 된 곳의 지붕이 서로가 엇물려 있다. 그 양편에 모두 용머리를 올렸다. 또한 한 가운데는 절병통과 같은 모양도 있다. 이렇게 많은 용머리를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수원 팔경의 하나인 '용지대월'이 용연에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님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멋진 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강릉 경포호에도 있다. 그러나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그것과는 뜻이 다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이 용연은 화성의궤에 나타난 용연과는 다르다. 지금의 용연은 당시의 용연보다 많이 형태가 달라졌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는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연못보다 오히려 크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용연이 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도 한결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찬바람도 마다않고 찾아간 곳에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잃어버렸다.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 몇 개소가 자리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한 때는 화성관람을 하는 일반인들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개방을 해놓았기 Eians에 당시의 자료를 이용하여 봉돈을 돌아본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6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을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됐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단 한 개의 화구를 이용해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것과는 달리 화성 봉돈은 숫자부터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올린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횃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하기에 화성의 봉돈은 와전히 독립괸 구조물로 치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화성을 구경하러 와서 안으로 돌아본다. 물론 시설물 등을 보기 위해서는 안으로 돌아보아야 맞다. 하지만 성이라는 것이 안보다 밖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성은 밖으로 겉돌아보아야 진가를 알 수가 있다. 밤에 만나게 되는 화성, 그것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봉돈에 봉화라도 보였으면

 

봉돈은 돌로 쌓아올린 성의 치 위에, 다시 벽돌로 높게 쌓은 구조물이다.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온 봉돈은 마치 치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 너비 54척이나 된다. 봉돈은 그 봉화의 숫자로 신호를 하게 된다.

 

봉돈은 안에서는 또 하나의 작은 성처럼 견고하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봉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걸작이다. 성밖에서 봉돈을 관람하고 있는데 봉돈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사람들의 발이 보인다. 저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도 장용영의 군사들이 성벽으로 달라붙으려는 적들을 향해 화살과 총을 쏘아댔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또 다른 독립공간인 봉돈. 지금은 연기도 피우지 않아 안내판을 보고서야 봉돈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수원화성문화제 때 봉돈에 불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생각이 난다. 봉돈에 다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불을 올릴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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