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안 - 고성주로 전승된 재인청 춤의 멋과 흥

 

경기재인청(京畿才人廳) 춤은 운학 이동안 선생 등에게서 많은 문하생들에게 전해진 춤이다. 재인청 춤은 화랭이 계열의 남성춤이다. 재인청 계통의 춤들이 대개 화랭이인 남성 위주로 전승이 된 것도 재인청의 재인들 중 많은 춤꾼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운학 이동안 선생은 용인 재인청 춤꾼인 김인호에게 사사받은 춤이다.

 

재인청 계열의 춤은 경기도를 비롯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도 전승되고 있다. 경기도에서 연희되고 있는 재인청 계열의 춤은 이용우의 진쇠춤과 터벌림춤(경기도당굿 보존회로 전승되었으나 전승 제대로 안됨)을 비롯해 이동안의 진쇠춤과 엇중몰이 신칼대신무, 태평무, 승무와 살풀이(경기도 무형문화재), 안성의 김숙자 가계로 전해진 도살풀이춤(중요무형문화재 지정)과 이정희의 경기도당굿 시나위춤(경기도무형문화재), 충남의 재인 한성준으로부터 전해진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지정)와 살풀이춤 등 많은 춤들이 있다. 그러던 재인청 춤을 여성들이 추기 시작하면서 힘차던 춤은 여성스러운 섬세함이 배가되었다.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화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동안 선생은 용인의 재인청 춤꾼 김인호로부터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는 줄타기를 전수받았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노들강변>, <교방춤> 40여 종에 이른다.

 

 

경기안택굿 명인 고성주에게 전해진 이동안의 춤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어렸을 때부터 춤을 익혀 온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 명인은 매년 거르지 않고 발표회를 열어 선생에게서 배워 온 춤을 지켜가고 있다. 또한 안택굿보존회에 무용분과를 마련해 문하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수많은 문하생들이 수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성주 명인은 어려서부터 이동안 선생에게서 직접 경기재인청 춤을 사사받은 몇 명 되지 않는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지만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의 그 많은 재인청 춤을 제대로 습학한 사람은 고성주 명인이 유일하다. 그런 고성주 명인이 자신의 집(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 지하에 마련된 무용연습실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9일 오후, 재인청 춤을 추고 있는 연습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고성주 명인을 비롯해, 그에게서 경기재인청 춤을 사사받고 있는 김현희, 김미경, 박미애 등이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무용을 어려서부터 배웠지만 중간에 춤을 추지 않다가, 나이가 들면서 춤이 그리워 다시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춤을 춘 햇수가 15년 정도 된 춤꾼들이다.

 

 

재인청 춤 발표회를 보고 재인청 춤에 빠져

 

우연히 만석공원에서 선생님의 재인청 춤 공연을 보았어요. 그동안 전통춤을 추워왔지만 그것과는 다른 우리의 멋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재인청 춤을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죠.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선생님을 찾아가 재인청 춤을 배우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처음에는 허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 겨우 승낙을 받았죠.”

 

그렇게 재인청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성주 명인은 이들은 정말 열심히 춤을 춰요. 그동안 많은 문하생들이 배우고 나갔지만 이들처럼 춤의 기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상당히 애를 먹었는데, 워낙 기본기들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손쉽게 학습을 익혀요. 그래서 더 열심히 가르치고 있고요

 

경기재인청 춤은 어렵다고 한다. 오랜 시간동안 가계로 전해진 춤들이기 때문에 춤마다 각기 다른 깊은 멋이 있다. 그런 춤태를 다 익혀야만 제대로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재인청 춤은 멋과 흥이 다른 것 같아요. 결코 학습이 쉽지 않지만 열심히 익혀야죠.” 경기재인청 춤에 젖어든 춤꾼들. 하루 빨리 무대에서 멋과 흥이 넘치는 춤을 추는 그들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남한산성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에서는 2019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였다. 그중 첫 번째로 기획된 전시는 이번 2월에 진행되는 만해 한용운의 옥중 시 특별전이다. 이 특별기획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민족독립을 위해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자존심을 지킨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옥중시 서예 작품을 전시한다. 본 전시에서는 3.1운동과 조국독립에 앞장 선 후 마포형무소에 투옥되고 난 후, 나라사랑과 민족자주 정신, 항일투쟁 정신이 담긴 옥중 시 및 만해의 옥중 모습이 담긴 사진 등 총 25작품 및 유물을 선보인다.

 

만해 한용운이 옥중에서 지은 시는 자신의 느낌을 적은 한시 13수와 시조 1수 그리고 안중근의 기개와 황현의 충절을 기린 한시 2수를 합하며 모두 16수라고 할 수 있다. 만해의 옥중 한시 가운데 7언 절구 5수는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였으며, 5언 절구 8수 가운데 4수는 그의 선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있으며, 다른 4수는 시간성과 부자유의 문제가 크게 부각된다고 보았다.

 

시조 1무궁화 심으과저19229개벽26호에 실린 작품이다. 무궁화의 의미는 애국혼이며 달과 쇠창살을 대조시켜 자유와 비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또한 이미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 강조한 바와 같이 자유를 만유의 생명으로 인식한 자유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인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존을 지켜내려는 국민적 염원을 담고자 노력하였다. 민족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옥중 한시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우리 문화예술의 역량을 한층 더 강화시킬 것으로 본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정신과 독립의지는 지금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데 정신적인 지표로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기약되기를 바라며 이 특별기획전을 준비하였다.

 

조국 광복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21세기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애국지사들의 희생과 그 고귀한 애국 애족 정신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생각해본다.

 

남한산성 만해기념관에서 이 특별전을 준비하여, 31100주년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이 사회를 이끌어갈 우리들에게 만해 한용운 선생의 민족독립운동 정신과 역사의식을 만나는 소중한 기회로 삼고자 한다.

 

전시명 :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 기획 만해 한용운의 옥중시 특별

전시기간: 2019.02.01.()~02.28.()

전시장소: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주관 및 기획: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리 춤을 알리기 위해 땀 흘리는 춤꾼 안유상씨

 

장터에는 언제나 볼 것이 많다. 하기에 사람들은 장터를 찾아온다. 물론 볼거리만이 아니라 먹을거리와 즐길거리도 있다. 하지만 장터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생각지도 않은 즐거움을 보면 괜히 횡재라도 한 듯하다. 그런 즐거움을 주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의 장터이다. 장을 찾아가면 각종 즐거움을 주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예전에 장은 우리놀이문화가 많지 않을 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연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가끔은 남사당패나 솟대쟁이퍄, 각설이패 등이 장으로 찾아들어 즐거움을 주곤 했다. 지금도 장터를 찾아가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각종 공연과 각설이패 등의 신바람 나는 놀이판이다. 그래서 장터는 늘 시끌벅적하고 흥이 넘친다.

 

19, 수원화성 팔달문 앞에 자리한 남문시장을 찾았다. 남문시장 고객지원센터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듯하다. 한 사람이 검을 들도 춤을 추고 있다. 입은 의상을 보니 수원 무예24기 시범단이 무예시범을 보일 때 입는 옷과 흡사하다. 그런데 무예시범이라고 하기에는 몸이 너무 경쾌하다. 비약을 해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것이 흡사 풍물패들이 하는 자반뒤집기를 연상케 한다.

 

 

30년 동안 춤을 춘 춤꾼 안유상의 버스킹

 

저는 우리 한국 전통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렇게 남문시장을 찾아와 춤을 추고 있습니다. 우리 춤도 알리고 늘 무대에 서야하는 제 자신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많은 관객들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담력도 얻으려고요. 오늘 제 춤을 보시고 많은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남문시장 고객센터 앞에서 혼자 우리 춤으로 버스킹을 연 사람은 ()제일기획 삼성무용단 소속의 안유상(, 45)씨이다. 안유상 씨는 벌써 춤을 춘지 30여 년이 되었으며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고 한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승무와 살풀이의 예능보유자였던 고 정재만 선생의 제자이기도 하단다.

 

저는 지난 10월부터 우리나라의 장터와 번화가 등을 찾아다니면서 혼자 버스킹을 하고 있어요. 오늘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230분까지 계속할 생각입니다. 중간에 잠시 쉬기는 하지만 한 가지 춤이 아닌 많은 춤을 보여주려고요. 지난해부터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버스킹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사람을 찾아다니는 춤꾼 안유상

 

혼자 춤을 춘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 것을 마다하지 않고 전국의 번화가와 장터를 찾아다니면 혼자 춤을 추고 있다는 안유상 씨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다. 의상도 편리하게 차려입는다. 그리고 사용하는 소품도 간단하다. 승무를 추면서도 틀에 북을 매달 수가 없어 북을 바닥에 놓고 앉아서 법고놀이를 한다.

 

승무, 검무, 한량무 등을 추면서도 간단하게 도포만 갈아입거나, 부채를 손에 들었을 뿐이다. 검무를 출 때도 장검 한 자루 손에 들면 준비가 끝난다. 장비도 간단하다. 반주 음악을 저장해 놓은 휴대폰과 촬영을 할 수 있는 작은 카메라, 그리고 검무를 출 때 사용하는 장검 등이 준비물의 모두이다.

 

 

천안에서 전철을 이용해 올라왔기 때문에 무거운 장비를 옮길 수 없어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비만 챙겼다는 안유상 씨는 혼자 이렇게 버스킹을 다니는 이유를 묻자 공연장에 찾아오는 분들은 대개 마니아이거나 춤을 전공한 분들이죠. 우리 전통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 춤을 추는 것이 가장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들어서 지난 10월부터 시작했어요.”라는 대답이다.

 

주말에 남문시장을 들렸다가 생각지도 않은 우리 전통춤 버스킹 공연을 만난 사람들도 연신 휴대폰을 꺼내 촬영하기에 바쁘다. 춤꾼은 공연을 마칠 때마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있어 혼자 춤을 추어도 외롭지 않을 듯하다. 우리 춤을 알리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장터와 번화가를 찾아간다는 안유상 춤꾼. 올 한해 어딜 가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춤을 보고 큰 박수로 힘을 더해주기 바란다.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 10주기 추모행사 열려

 

‘Mr. Toilet 심재덕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우리 곁에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만큼 그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2009114일은 전립선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그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 날이다.

 

고 심재덕 수원시장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0.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생을 기리기 위해 10주기가 되는 2019114일 수원SK아트리움 대공연장에 모였다. 1층과 2층 객석을 빈틈없이 채운 많은 사람들은 모두 평소에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날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평소에 인연이 있어 재능기부로 무대를 마련했다. 살아생전 고 심재덕 수원시장의 인간적인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는 현장이다.

 

잘 계신지요

그곳 날씨는 어떠신지요

이승의 누가 제일 보고 싶던가요

아직도 여쭤보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동안 일어난 일 말씀 드릴 것도 적지 않고요

, 이 사람아 어여 한잔 쭈욱 들이켜

그 목소리 들으며 장안문 근처 중국집에서 불휘도 한 잔 하고 싶습니다.

 

김우영 시인의 ‘안부편지라는 고 심재덕 시장에게 드리는 추모시의 첫 부분이다.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기에 10주기를 맞이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평소에 그를 기리는 말을 하고, 그를 기억 속에서 다시 불러내어 그와의 지난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행사 전부터 모여든 많은 사람들

 

그동안 매년 114일이 되면 추모행사를 해왔다.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가 주최·주관한 10주기 추모공연은, 수원시와 세계화장실협회, 특수법인 한국화장실협회, 수원문화원, 행복을 뿌리는 판, IBK기업은행 등이 후원했다. 그 외에도 고 심재덕 수원시장을 기억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 시간 전에 SK아트리움을 찾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모여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오후 7시가 되기 전 대공연장으로 자리를 옮겨 객석을 채웠다. 이날 행사는 1그를 회상하다로 제일먼저 손녀 심화인의 바이올린 연주(피아노 정현지)로 시작했다.

 

그리고 추모시가 읊어지고(나레이션 정의갑), 바리톤 박무강(피아노 김서영)이 선구자를 불렀다. 뒤 이어 열린 출판기념회에서는 현 수원시랍합창단 기획팀장인 하지영의 사회로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기념사업회 선정선 회장, 미스터토일렛 심재덕의 평전 저자 한신대 교수 김준혁, 국회의원 김진표, 염태영 수원시장 등이 무대에 올라 고 심재덕 수원시장과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심재덕 전 수원시장님이 문화원장 시절부터 그 분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면서 지금 나는 심 시장님의 그런 열정을 따라갈 수 없다. 다만 그분이 평소에 이루어 놓은 것을 뒤 이어 이루고자 노력할 뿐이라고 했다. 염태영 시장은 고 심재덕 전 시장과의 인연을 회상하던 중 목이 메기도 했다.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전 수원시장 기리는 행사 계속돼

 

행사는 2그의 여정을 그리다로 정의갑의 그를 그리워하다’,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수원시립합창단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소프라노 이영숙의 그리운 금강산’, 베이스 송필화의 산아’, 카운터테너 루이스 초이의 거리의 노래로 이어졌으며, 3해우재와 함께하다에서는 장사익의 아버지’ ‘찔레꽃등을 피아노 배소희와 해금 하고운이 함께했다. 유가족대표 장영찬의 감사메시지와, 전 출연진이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며 추모행사의 막을 내렸다.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전 수원시장은 1939년 이천시 마장면 도드람산 외가 뒷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명을 개똥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마 그의 성장과정에서 화장실에 많은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1987년부터 수원문화원장을 역임한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전 수원시장은 생전에 수원문화를 극대화시킨 장본인이다.

 

화성행궁복원, 수원화성 유네스코 등재, 한 여름 밤의 음악축제 개최, 수원사랑 발간, 수원천 복개공사 철회, 월드컵 대회 수원유치, 한국화장실협회 창립,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총회 및 초대회장으로 선출, 변기모양의 집 해우재 준공, 고인의 유지에 따라 해우재 수원시에 기증, 그리고 2010년 수원시는 화장실문화관을 개관했다.

 

수원문화원장과 수원시장,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수원시를 전국 최대, 세계 최고의 화장실문화를 선도하는 고장으로 만든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 오늘 우리가 그를 기리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은 그의 생 자체가, 오직 전 세계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원을 문화예술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그를 기억해내다

 

내가 미스터토일렛 심재덕 전 수원시장을 처음 만난 것은 현재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19에 소재한 수원가족여성회관 문화관에 수원문화원이 자리하고 있을 1993년경이었다. 당시 수원문화원장이던 심재덕 원장으로부터 수원의 민속을 발굴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원장치기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수원, 화성, 용인, 오산 일대를 조사해 집필했다.

 

나는 당시 대전에서 방송 일을 하고 있을 때라 주말을 이용해 수원으로 올라와 수원농고(현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을 지도해, 10회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1995년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후에도 경기도의 민속으로 인해 그 인연을 이어갔다.

 

알고 보면 심재덕 전 시장과는 많은 대화를 했고, 오래기간동안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다. 수원에 올라와 해우재 행사 때마다 찾아가 기사를 썼던 것도 알고 보면 심재덕 전 시장과의 인연 때문이다. 10주기 기념행사장을 찾아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두 시간이 넘도록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공연장 2층 객석 맨 뒤에 서서 숨죽이며 관람을 하면서, 지난 날 심재덕 전 시장과의 인연을 생각한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수확은 후손들이 할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을 기억하며, 그와의 지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를 찾고, 작품의 길을 찾아야 하는 방향이 고민

 

저는 작품활동을 하면서 늘 고민을 합니다. 비로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야 하고, 내가 어떤 작품을 그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합니다. 결국 그런 고민이 바로 소재를 찾아 여행을 하는 것이죠. 작가가 작품을 찾아서 늘 고민하지 않으면 발전을 이룰 수가 없으니까요

 

11일 오전, 행궁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자경 작가. 그동안 남문로데오갤러리와 행궁동 대안공간 눈의 전시실에서 작가의 작품은 몇 번 마주한 적이 있다. 그런 작가를 만나 작가가 그려내는 작품세계와, 작가가 갖고 있는 작품에 대한 이야길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자경 작가는 숙명여자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작가가 유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고 한다. 그 기회를 자신이 살아가는데 있어 변환의 계기로 삼았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서울이 고향인 작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가다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마산리 서해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7년 전에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그리기 시작한 유화에 반하다

 

정말 우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화성시 마을 문회센터에서 요가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 문화센터에 유화반이 있는 거예요. 어릴 적 부친이 유명한 화가였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늘 보아왔는데, 부친의 반대로 그림을 전공하지 못하고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죠. 그래도 늘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자경 작가의 부친은 부천미술을 일군 동창 이경훈 화백이다. 이경훈 화백은 1943년 동경제국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52~1953년에는 전라북도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1980년 부천예술문학상, 1985년 부천시 문화상 예술부분 수상, 1986년 경기도 문화상 예술부분 수상을 하기도 한 원로화백이다.

 

그런 부친을 늘 보고 생활했던 이자경 작가는 그림을 절대 가르치지 않겠다는 부친의 만류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자연과 접하면서 자연히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작가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선천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주 활동무대가 수원인 이자경 작가는 벌써 문하생들을 키워 문하생들이 20184월 남문로데오갤러리에서 제1회 초대전으로 유화향기전을 열었으며, 로데오거리 스트리트 갤러리 등에서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그동안 작가도 5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수많은 단체전과 아트페어 등에 참여했다.

 

 

문하생들을 지도하며 작품소재 찾아 여행 떠나

 

아마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셨던 것은 아버지가 처음 그림을 배우실 때 독학을 하셨다고 해요.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이 혼자 공부를 하셨으니 상당히 힘드셨을 거예요. 그런 고생스러움을 아시기 때문에 저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자경 작가는 이제 ()한국미협과 화성사생회, 화홍작가회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유화강사로 문하생들을 키워내고 있으며, 방과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단다. 뒤늦게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그런 열정도 부친인 동창 이경훈 화백의 따님이기 때문에 부전여전(父傳女傳)’이라는 생각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은 구도자의 자세란 생각이다. 이자경 작가는 여행을 하는 것이 작품의 소재를 찾기 위함도 있자만, 자신의 작품세계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신이 그린 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자경 작가. 자신이 그린 부친의 모습 속에는 작가가 찾아 떠나는 그의 작품세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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