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루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인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에 나오는 누정이다. 수루는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한 사적 제113호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안에 소재한다. 10월 14일 통영유람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로 향했다. 불과 2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들어가면서 바라본 한산만 일대는 작은 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다도해(多島海)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충무공의 유적지를 돌아보다.

 

관람을 할 수 있는 표를 구입한 후 출입문인 ‘한산문’을 통과하여 제승당으로 향했다. 이 곳 유적지는 선조 25년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에서 왜선을 섬멸한 후, 선조 26년부터 30년인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두억포에는 임진왜란 때 전함인 판옥선과 척후선 등 100여척이 정박해 있었으며, 740여명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천천히 바닷가를 거닐어 제승당으로 향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는 늙은 적송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두 병의 모형병사가 문을 지키고 있는 앞에는 우물이 있다.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울화가 치민다. 어떻게 유적지 안에, 그것도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머물 때 1,340일을 사용했다는 우물을 이렇게 쓰레기가 떠다니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계단을 올라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제승당이 보인다. 제승당은 현재의 해군작전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한 전각이다.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음력) 한양으로 압송을 당하기까지 3년 8개월을 이곳에 진영을 설치했다. 장군의 일기인 ‘난중일기’ 1,491일 중, 1,029일이 이곳에서 쓰였다.

 

한산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루

 

사실 수루는 정자가 아니다. 일종의 망루와 같은 곳이다. 장군은 늘 이곳에 올라 한산만 일대의 지형을 살피고, 시간마다 달라지는 조수의 차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곳 일대에는 유난히 많은 암초가 있다고 한다. 그 암초들까지도 일일이 헤아렸을 것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봉화와 고동 연 등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작전을 세운 곳이다. 이곳 수루에서는 한산만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도 없이 지형을 파악하고, 그 지형에 따른 작전을 세웠기에 55척의 배를 갖고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인 ‘한산대첩’을 이루어내지 않았겠는가?

 

고증을 통해 복원한 수루가 시멘트 건물이라니

 

수루의 앞에는 설명을 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에는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을 통해 세웠다고 적혀있다. 양편으로 계단을 내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주변에는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으며, 수루는 팔작지붕이다.

 

 

 

 

수루 위에 올라 멀리 한산만을 바라본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만으로, 이곳은 안쪽은 넓고 입구가 좁다. 이 한산만은 수심이 낮아 소형선박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크고 작은 섬들과 낮은 수심, 여기저기 만과 포구들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한산대첩의 승리를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수루를 둘러보다가 보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칠이 벗겨진 곳에 들어난 부분이 아무래도 나무 같지가 않다. 두드려본다.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듯하다. 어이가 없다. 물론 그 당시에 는 목재를 다듬어 수루를 복원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딴 곳도 아닌 충무공의 유적지 안에, 역사적인 전각인 수루를 시멘트로 조성을 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장군의 혼이 깃든 곳인데, 더럽게 부유물이 떠돌고 있는 우물도 그렇고, 수루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영웅은 사라지고 수루만 남았지만, 그 수루마저 사람을 슬프게 만들다니. 연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유람선을 뱃고동이 더욱 슬프게 들린다.

 

함양 화림동 계곡에 자리한 동호정은 많은 분들이 글로 남겼다.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우리나라 정자 증 한곳이다. 동호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정자와는 다른 면이 있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동호정은 아름답다라는 말로 표현을 해선, 죄스런 마음이 들 것 같은 그런 정자이다. 난 동호정을 보면서 자연 그대로다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함양의 화림동 계곡은 자연이다. 그곳에는 여덟 개의 정자와 여덟 곳의 깊은 물이 있다고 하였다. 그 중 동호정은 가장 큰 정자로 꼽힌다. 정자가 크면 웅장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만 동호정은 절대로 웅장하지 않다. 동호정은 한 마디로 자연이다. 뛰어난 자연의 경치를 느낄 수 있는 화림동 계곡에서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그러한 정자이다.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자리 잡은 동호정은 가선대부 오위장을 지낸 장재헌을 비롯해 장대부, 장서진, 장서부 등이 뜻을 모아 1890년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의 역사는 이제 130년이 되었다. 그러나 1936년 중수를 한 차례 했을 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동호정은 장재헌 등이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 때 임금을 등에 업고 피난 간, 동호 장만리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전하다.

 

장재헌은 장만리의 9세손이며, 장대부, 장서진, 장서부는 10세손이다. 동호정의 앞에는 너럭바위라 불리는 차일암이 있다. 한 번에 수백 명이 올라가 쉴 수 있다는 이 너럭바위와 동호정, 그리고 그 앞을 흐르는 물은 그야말로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자연이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된 동호정 주변을 돌아보면 왜 이곳을 자연이라고 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정자 밑에서 바라다 본 차일암에는 비가 와 물이 불었는데도 사람들이 올라 있었다. 평소에는 너럭바위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고 한다. 이 날은 비도 왔지만, 그 전에 내린 비로 인해 길이 물속에 잠겼다. 같은 너럭바위를 보는데도 정자 위로 올라가니 사뭇 그 경치가 달라 보인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누가 감탄을 하지 않을까? 그저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지는 곳이다.

 

 

'사람이 날 그대로 썼으니 나도 닮아질 때까지 사람들의 발길에 머물겠다.' 마치 그렇게 말을 하는 것만 같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쓰고 지나갔을 계단이다. 동호정은 중층 누각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땅에 붙여 지으면 정자라 하고, 밑으로 사람이 다닐만한 공간이 생기면 누각이라 한다. 하지만 동호정은 '동호루'라 불러도 될 것을 정이라고 하였다. 아마 그 이름 속에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계단은 통나무 두개를 도끼를 찍어내어 홈을 파고, 그것을 맞추어 이층 난간에 걸쳐놓았다. 인위적인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켜가고 싶었나 보다. 정자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아도 알 수 있듯, 동호정은 자연 그대로를 최대한 살려낸 아름다움을 지녔다.

 

이른 낮술이라도 먹은 것일까? 정자 위로 올라가니 남자 몇 명이 세상모르게 지고 있다. 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니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계단을 맞댄 쪽을 안으로 들여, 결코 나서려 하지 않는 겸손함을 배우게 하였다. 아마 장만리 선생의 성품을 닮은 후손들의 마음이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백호와 청룡이 난무한다. 양편에 머리를 내민 청룡은 한편은 여의주를 물고, 한편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냇가나 바닷가 등 물가에 세운 용들의 입에는 이렇게 물고기를 물고 있다.

 

동호정을 조금 비켜 선 듯 서 있는 소나무. 암벽 위에 그대로 솟은 소나무 한 그루가 동호정의 극치란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올라 계곡을 흐르는 물과, 너럭바위를 볼 때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한 발 물러선 듯하다. 자연 그대로를 닮아 서 있는 동호정. 이를 제일로 치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자연이기 때문이다.


 

'정자 하나가 고을의 운세를 바꾼다'고 하면 그런 허황된 말이 어디 있느냐고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정자 군자정은, 고을의 운세를 바꾸는 정자로 알려져 있다.

 


  
군자정의 현판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군자정은, 고부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주변이 집들로 싸여 있어, '이 정자가 무슨 고을의 운세를 바꿀만한 대단한 정자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의 모습일 뿐이다.

 

이 고부정은 주변을 둘러 파서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넓지 않은 정자마당에는 각종 비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들은 반 토막이 된 비석들이다.

 


  
군자정은 주변을 파서 연못 가운데 자리한다. 돌 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어갈 수가 있다.


  
군자정 주변에는 토막이 난 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군자정의 원래 이름은 '연정(蓮亭)'이었다고 한다. 정자의 주변이 연못이고 온통 연꽃들이 피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땐가 군자정(君子亭)이라고 바뀌었는데, 연꽃이 '꽃 중에 군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군자정이 왜 마을의 운세를 바꾼다고 전해지는 것일까?

 

이 군자정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조선조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 이후선이 이 정자가 황폐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고, 황폐가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0년 이상이 된 유서 깊은 정자다. 연못을 정비하고 난 뒤에 홍백색 연꽃이 자생 하게 되고, 그때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뒤 두 차례 중건을 해서 오늘에 이르는 이 군자정이다.

 


  
군자정은 가운데 방을 두고, 우편은 마루 위로 누각식의 높은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방의 좌측 마루도 조금 높게 만들어 놓았다. 세심한 배려를 한 정자이다.

 

지금은 주변 연못이 그저 정자를 겨우 감싸고 있을 정도다. 아담하게 지어진 군자정은 가운데 방을 두고 있다. 우편은 마루 위로 누각식의 높은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뒤편에는 여닫이문을 달아 주변 경치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높은 곳에서 연못을 둘러보기 위해서인가 보다. 좌측에는 마루보다 조금 높게 단을 만들어 역시 문을 달았다. 그저 평범한 듯한 정자지만, 하나하나 세심한 배려를 한 정자다.

 


  
조선조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 이후선이 이 정자가 황폐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쳐지었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을 문으로 처리를 해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둘러보다가 혼자 피식 웃는다. '고부마을에서 요즈음은 장원급제를 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를 않겠구나'하는 객쩍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자정 한편 처마 밑에 커다란 스피커가 달려 있다. 아마 마을에서 무엇을 알리기 위해 사용을 하는 스피커인 것 같다. 저 스피커가 군자정에 달려 시끄러우니, 장원급제자가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혼자서 수많은 곳을 답사를 하면서 생긴 이상한 버릇이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이런 버릇들이, 십년 넘게 답사를 다니면서 어느 새 버릇으로 굳어버렸다.

 


  
인재를 배출헤 마을의 운세를 바꾼다는 군자정

 

한때는 마을의 운세를 뒤바꿀만한 정자로 유명세를 탔던 군자정. 이제는 그 화려하게 피었던 연꽃의 잔치도 줄었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던 옛 기운도 사그라진 듯하다. 그러나 저 조졸하기만 한 군자정이, 언제 또 다른 인재를 배출할지 기대를 해본다. 이런저런 사유를 갖고 있는 것이 정자이기 때문에.

 

진안군 마령면에서 만난 수선루가 눈에 선해

 

난 이 계절이 되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 3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면서 만난 많은 문화재와 절경 등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곳 중에 아직도 눈에 선한 몇 곳의 정자 등은 후에 책을 한권 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암굴을 이용해 중층누각으로 지은 수선루라는 조선 후기의 정자이다.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57번지. 이곳에는 지은 지가 333년이 지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인 수선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선루는 조선조 숙종12년인 1686년에 연안 송씨의 사형제인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이 힘을 합해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선조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누각은, 그 뒤 고종21년인 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였고, 연재 송병선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안군지>에는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다. 수선루 사변에는 '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사형제가 우애와 학식이 두텁고 효심이 지극하며, 마치 신선이 노니는 것 같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 4형제는 나이 80이 넘어서도 이 정자에 올라 학문을 논하고, 바둑을 두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바위 암벽을 이용해 축조한 정자 수선루

 

수선루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고, 2층의 중앙에는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수선루를 오르는 길은 우측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좌측으로는 섬진강 줄기가 흐른다. 돌 축대를 쌓은 곳을 오르다가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어떻게 이런 곳에 누각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2층으로 지어진 수선루는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이곳 수선루를 찾아갔을 때는 수선루 위에서 내다보이는 앞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갈 철이었다. 앞으로는 나무들이 가려 밖에서는 수선루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이 누각을 찾아왔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그렇게 헛걸음을 친 덕에 이곳을 다시 찾았을 당시에는 사전에 수선루에 대해 조사를 하고 온 길이라, 머뭇거림 없이 수선루를 찾을 수 있었다.

 

자연암벽을 이용해 지은 수선루.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밖에서 보는 경치만으로도 절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암벽을 이용해 정자를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열려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머리에 닿을 듯 누마루의 바닥이 위에 놓여있다. 바위를 주춧돌로 이용해 멋대로 늘어선 기둥들. 그 또한 세상 격식에 매이지 않은 송씨 4형제의 마음을 닮았다.

 

 

한 철을 이곳에서 머물고 싶다

 

정자의 보이지 않는 뒤편은 바위 면과 처마가 맞닿을 듯하다. 그래도 꾸밀 것은 다 꾸며놓았다. 비스듬히 깎아진 바위 면에도 송씨수선루라고 음각을 해놓았다. 그 밑으로는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고여 있다. 물을 떠 입안에 넣어본다. 싸한 기운이 목을 타고 흐른다. 이 물을 마시면서 4형제는 이곳에서 신선과 같은 생활을 한 것일까?

 

아마 나라도 이곳에서 떠나기 싫었을 것이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누렇게 익은 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누각이, 그 위로 오르면 이런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 내다니. 이곳이야 말로 비경이 아니겠는가? 한 철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수선루가 그리워진다. 그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돌아보지 못했던 전국의 정자와 고택, 문화재,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들. 그 오랜 세월 이런 것들을 찾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삶에 찌들어서였는지 나태해졌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계절에 다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가까운 곳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겠나?

 

누각 안에는 수선루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이 걸려있다. 작은 방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내었다. 방은 천정이 낮아 서서는 들어갈 수 없다.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철에도 이곳에서 사방 경계를 바라보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위에 서니 절로 신선이 되는 듯하다.

 

누마루에 철버덕 주저앉는다.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곳이다. 인적 없는 이곳에서 한 철을 살면 안 되려나? 사람들은 어찌 이런 곳을 두고, 답답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이 수선루가 내 조상들의 것이 아님을 한탄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수선루. 난 이 누각을 호남제일암루라고 이름하고 싶다. 아마 이곳에서 한 철을 난다고 하면,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으려니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수선루의 자료를 찾는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행하기 닥 좋은 계절, 들판에 나무들도 푸른색을 띠고 있다. 이번 여행은 진안군을 한 번 다녀와야겠다. 마이산을 비롯해 많은 볼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장성에서 734번 도로를 따라 영광IC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가 나온다. 이 도로변 우측으로 키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정자가 서 있다. 기영정, 이 정자는 1543년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서 지어진 정자이다.

 

지지당 송흠(1459-1547) 은 세조 5년인 1459에 참봉 송가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만고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노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여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한 뒤, 광주 나주의 목사, 담양과 장흥의 부사를 지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노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여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모친을 봉양하였다. 7회에 걸쳐 효렴으로써 상을 받은 송흠은 1538년 청백리에 녹선이 되고, 1696년에는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기영정에는 서로 다른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에는 다른 글씨로 쓴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은 1543년 당시 전라도 감찰사인 규암 송인수가 송흠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용암천이 흘러 경치가 뛰어나다. 중종이 송흠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던 것 같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면, 세상 누구인들 그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아마 송흠도 천하에 효자로써 어머니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였으니, 당연히 중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영정은 전쟁으로 소실이 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송인수의 10세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을 하면서 철종 7년인 185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철 늦은 은행잎이 노랗다


방을 놓지 않고 사방을 트이게 했다. 주름이 진 기둥이 기영정의 역사를 알려준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기영정에 오른다. 방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정자가 시원하다. 앞으로 흐르는 용암천가에 아직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노랗다. 정자 앞에는 잎을 다 떨어트린 백일홍이 서 있다. 기영정이란 다른 글씨의 현판이 좌우에 걸려있는 정자는 주춧돌도 자연석이다. 그저 자연을 닮아 평생을 효로써 마친 정자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아마 뒤로 난 도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없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만 남았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요직을 거쳤으면서도, 노모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송흠. 그에게 내려진 중종임금의 사랑이 깃들어서인가 마음부터 숙연해진다. 수많은 정자를 돌아보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 기영정에 올라 효심(孝心) 하나를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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