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 출토되었다는 삼존불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는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봉녕사가 소재한다.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중기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상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조성하였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삼존불 모두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16일 오후, 봉녕사를 찾아갔다. 전날 찾아가려했지만 15일은 우란분절이라 봉녕사를 찾아오는 신도들 때문에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 용화각에는 접근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아 뒷날인 16일을 택한 것이다. 봉녕사 경내로 들어서니 사진촬영금지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촬영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현수막을 걸어 알리고 있는 것일까?

 

 

종무소를 찾아가 사진촬영 허가받아

 

먼저 봉녕사의 업무를 관장하는 종무소를 찾아갔다. 종무소 근무자에게 삼존불 촬영을 하기위해 왔다고 설명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남자 한분이 들어와 무슨 일로 삼존불 촬영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문화재소개를 하기 위해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후, 관리자의 안내를 받아 용화각으로 향했다.

 

용화각(龍華閣)의 명칭을 용화전이라고 해야 하는데 용화각에 붙인 명칭을 바꾸겠다고 했더니, 문화재로 지정을 받은 후에는 바꿀 수 없다고 해서 용화전으로 고치지 못했어요.”

관리를 하는 분의 설명을 듣고 용화각 전경을 한 장 촬영하고 난 후 용화각 안으로 들어서 삼존불을 촬영했다.

 

카메라가 아닌 휴대폰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가보다. “카메라는 플래시를 써야하기 때문에 삼존불에 피해가 갈수도 있어 휴대폰으로 촬영을 한다고 설명을 드렸더니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 기자는 처음 보았다.”며 웃는다.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은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부자연스럽게 조각하였다. 석불의 밑을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을 조성하였다.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마모가 워낙 심해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협시불은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려 중기 한 사람의 석공에 의해 조성한 듯한 삼존불,

 

용화각에 모셔진 석조삼존불은 모두 평평한 느낌을 준다.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봉녕사 삭조삼존불. 모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땅에 묻혀있던 삼존불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불자들에게는 이 삼존불이 예사삼존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 역시 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봉녕사를 찾아가 석조삼존불 앞에 머리를 조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제는 백중이라 워낙 많은 사람들이 용화각을 찾아와 아마 사진촬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관리자의 설명이 없다고 해도 15일이 백중일임을 알고 다음날 찾아간 것이다. 음력 715일을 우리는 흔히 백중일(百中日)’ 또는 백종일(百種日), 이라고 부른다. 백중 때가 되면 채소와 과일 등을 수확할 수 있는 시기로, 100가지 과실이 나온다고 하여 백종(百種)이라고도 했다. 이날을 망혼일, 중원일(中元日) 혹은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 부른다. 우란분절에 불가에서는 하안거를 해제하고 망자들을 위한 제를 올린다.

 

 

우란분절의 내력은 이러하다. 예전 목련존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은 백가지 과일과 꽃을 차려놓고 스님들을 청해 우란분회(盂蘭盆會)를 열어주라고 일렀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대덕스님들을 모셔 우란분회를 열어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란분절에는 모든 절에서 재를 올린다. 세상을 먼저 떠난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이다. 다음날 찾아갔지만 마음속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고개를 숙인다. 봉녕사 삼존석불을 돌아본 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먼저 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마음 아픈 보물 제794호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사면불상을 모셔놓은 전각 잎에서 나무살창 안으로 보이는 사면석조불상을 바라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면불상이고 백제시대 유일한 사면불상이라는데 사면불상의 얼굴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불상이 유실되어버린 얼굴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 어느 불교문화재보다 뛰어난 작품이었을 것이다.

 

지난 4일 서산과 예산을 답사하면서 맨 끝으로 찾아간 곳이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뒷산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794호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이다. 1983년 화전리 미륵당이라 불리는 뒷산에서 발견된 이 사면석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면석물로 백제권에서 발견된 유일한 사면석조불상이다.

 

화전리 사면석조불상은 당시 도괴되어 땅에 묻힌 상태여서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서면불상은 마멸이 가장 심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원래부터 반듯하지 않은 석주의 가장 넓은 면에는 사면불의 본존으로 보이는 높이 120cm 정도의 불좌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나머지 면에는 동면입상 130cm, 북면입상 168cm 정도의 석조불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뛰어난 광배문양 등 수작으로 보여

 

사면석불을 각 면을 돌아보면서 찬찬히 살펴본다. 보면 몰수록 마음이 아픈 것은 도대체 이 사면석불의 얼굴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사면석불은 머리와 손은 따로 조각하여 부착했다. 이렇게 손을 따로 제작하며 석불을 조성하는 방법은 세심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쪽면에는 여래좌상의 주존불을 조성하고 동··북면에는 여래입상을 조성하였다. 남쪽면의 여래좌상은 양쪽 발을 무릎에 올려놓은 결가부좌 한 자세인데 가슴부분에 광배는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여래좌상의 법의는 양편어깨를 덮었고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어깨부분을 원형기법으로 조성하였다.

 

 

동쪽과 북쪽의 여래불은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어깨를 덮은 법의가 U자형으로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대좌와 머리부분의 두광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서쪽면의 여래입상은 마모가 가장 심하여 원래 모습을 정확히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조각수법은 다른 여래입상과 비슷하게 조성하였다.

 

이 석조사면불상의 곳곳에 표현된 불꽃문양과 연꽃문양은 백제 특유의 양식이며 각 상의 주위를 마치 감처럼 파서 원각상에 가깝게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발견 당시 땅 위에 노출되어 있던 서면을 제외하고는 머리와 양손을 잃었을 뿐 원래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백제권의 불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사면석조불상 보면 볼수록 마음만 아파

 

사면석조불상이 있는 화전리 뒷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화재가 있는 곳을 향했다. 아래서부터 사방불을 모셔놓은 전각이 보인다. 전각 앞에는 누군가 작은 바위 위에 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놓았다. 아마도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하나씩 올려놓고 간 것인 듯하다.

 

넓은 목책 창살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아는 사면석불. 그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백제권에서 유일한 사면석불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조성된 사방불이라는 점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갔다. 하지만 사방불을 보는 순간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불의 머리부분과 손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소중한 사방불이 어떤 이유로 머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며칠을 검색을 하면서 혹 이 사방불의 머리부분 유실에 대한 자료가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그런 내용을 밝힌 것은 없다. 손의 경우 따로 조각을 해서 끼워 넣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땅 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유실될 수도 있지만 머리부분의 유실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방불, 그리고 백제권 유일한 사면석조불상이라는 이 사면석불을 보면서 마음만 더 무거워진다. 경주에 있는 보물 제121호인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한 곳의 얼굴부분만 사라지고 삼면의 석불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화전리 사면석조불상은 어쩌다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것일까? 지난 44일 답사를 다녀온 후 며칠을 안타까워한 예산 화전리 사면석조불상. 앞으로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m0.2km인가? 이 분들 정신 나갔구먼?

 

하루에 문화재 담사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나름 그동안 문화재답사를 꽤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거리와 시간, 얼마나 집중을 했는가에 따라서 답사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늘 이런 점이 궁금했는데, 한 번 답사를 제대로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4일 오전 일찍 수원을 출발하여 서산으로 향했다. 주 목적은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들러보리라 마음먹고 나선 길이지만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화재를 답사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는 시간 40분 정도를 제외하고 오가는 시간을 제하면 6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찾아가고 오르고, 걷고, 촬영하기를 반복했다.

 

그 시간동안 답사를 마친 문화재는 국보 1점과 사적 한 곳, 보물 7, 중요민속문화재 2, 지방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5점 등 총 15점을 만났다. 6시간 만에 이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뛰고 걷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답사를 하는 동안은 몰랐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니 파김치가 따로 없다. 생전 이렇게 많은 문화재를 하루 만에 만난 적은 없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문화재를 돌아보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 거참 묘하게 생겼네

 

서산에서 가장 먼저 만난 문화재는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산1에 소재한 충남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산 여미리 석불입상이다 도로변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뒤편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 때문에 쉽게 눈에 띤다. 도로애서 불과 20m 정도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길가에서 바로 접근할 수 있다.

 

몇 사람의 관광객이 석불입상 주변으로 다가가 안내판을 읽고 있다. 요즈음 들어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문화적 인식이 높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문화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수령 300년 수고 25m 정도의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여미리 석불입상 뒤 소나무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무이다. 석불입상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재지만 이 소나무 한 그루가 뒤에 서 있어 석불입상의 분위기를 한 층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잘 자란 소나무의 위편 가지는 마치 용틀임을 하듯 휘어지면서 자랐는데 생육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뒤편에 멋들어지게 자란 소나무와 주변 정리가 잘 된 여미리 석불입상을 처음 본 순간 , 묘하게 생겼네라는 느낌이 든다. 유인원처럼 신체의 아래편에 긴 팔을 조각한 이 여미리 석불입상은 화강암으로 조성한 높이 3.1m로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미리 석불입상은 화강암에 조성했는데 뒤편을 보면 정으로 쪼아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자국이 거칠게 남아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쓴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데 목 부분은 부러졌던 것을 이어 붙였다고 한다. 지방 장인의 솜씨로 보이는 여미리 석불입상은 조각수법이 간략하고 형식적이다.

 

 

20m0.2km,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나?

 

안내판에 보니 이 석불입상은 1970년대 현 위치에서 1km정도 떨어진 용장천에 묻혀있던 것을 주민들이 발견해 옮긴 것이라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냇가에서 5km 정도 상류에 두 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한 구가 떠내려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르고 그저 전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 여미리 석불입상은 화강암 단면에 돋을새김으로 팔을 조성하였는데 신체 아래편에 팔을 조성했다. 비례가 맞질 않아 긴 팔의 유인원처럼 조형했다. 조금은 신체비례구조가 맞질 않아 이상하게 보이긴 하지만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지방장인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인 것일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가 그렇게 소중할 수 없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 나오다가 안내 이정표를 보니 이해할 수 없다.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 석불입상의 거리는 불과 20m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이정표에는 0.2km라고 적혀있다. 어떻게 문화재 안내 이정표를 세우면서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서산시 문화재 관계자는 이런 것 하나 확인도 하지 않고 세운 것일까?

 

 

0.2km200m가 된다. 그 위에 선정묘는 0,1km라고 표기했다 어림잡아 거리가 100m는 되어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여미리 석불입상은 0.2km라고 표기하는 우를 범했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발견한다. 문화재 관계자들조차 우리 문화재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20m0.2km라고 적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서산시 문화재 관련자들. 이곳에 한 번이라도 나와 확인은 한 것일까? 이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해서는 인된다. 서산시는 하루 빨리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바란다.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친다고 해서 이런 잘못이 무조건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3-11에 소재한 미륵당.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어있는 미륵당은 그동안 몇 번이고 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곳이다. 문화재답사라는 것이 멀리 있는 지역의 문화재는 계획을 세워 찾아가게 되지만 막상 가까이 있는 곳은 바로 보지 못한다.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평생 오르지 못한다라는 우리말이 있듯이 말이다.

 

참 답사란 것이 가끔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무더위가 기승을 떨 때 답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 우선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다. 더욱 제대로 된 정보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 당집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양 돌아다니기도 한다. 예전 파장동 미륵당을 찾아간 날도 바로 앞에 소재한 당집을 애매한 곳에서 찾아다니는 해프닝을 벌였다. 애초 첫 설명이 잘못됐었기 때문이다. 주변 주민에게 미륵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차가 못 들어가는 곳이고 조금 산길로 걸어간다는 이야기에 애꿎은 곳만 찾아다닌 것이다.

 

굳게 닫힌 문 꼭 이래야 하나?

 

19일 찾아간 파장동 미륵당. 예전이나 지금이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쉼터가 조상되었다. 당집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편에 한 칸으로 지어진 당집이 있다. 마을에서는 미륵당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집의 앞에 걸린 현판은 미륵당이 아닌 '법화당(法華堂)'이다.

 

아마도 마을의 주민들이 미륵당이라 부르던 것을 누군가 미륵당을 법화당으로 바꿔 당명을 적은 게판을 달아놓은 것 같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1959년과 그 이듬해에 보수와 증축을 하고 법화당으로 개칭을 했다고 한다.

 

미륵은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서 머물다가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수많은 미륵불을 조성한 것도 후천세계에 좀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중생이 기다리는 미륵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한 사례도 적지 않다.

 

후백제의 견훤은 금산사의 미륵불이 바로 자신이며 후백제야말로 미륵의 용화세계라고 주장했다. 태봉의 궁예도 자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햐여 두 아들을 협시보살로 삼아 직접 불경 20여권을 만들고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행한다며 대중을 현혹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륵사상은 모두 후천세계를 바라는 민초들의 기대가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까치발로 들여다 본 당집 풍경

 

전국을 답사하며 수많은 미륵석불을 만나보았기 때문에 자연 우리고장에 소재한 미륵의 형태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써 찾아간 미륵당의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안을 들여다 보아야하는데 문엔 조그마한 공간도 없었다. 위를 보니 문의 상단이 살창으로 되어있다. 까치발을 딛고 위로 들여다보니 커다란 거구의 미륵이 보인다. 그런데 화강암으로 조성을 했다고 하는 미륵은 온통 화장을 하고 있다.

 

파장동 미륵당은 원래 조선 중기에 건조된 건물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석불은 '미륵부처'란다. 전체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반신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하는 이 석불입상은, 높이는 219cm, 흉부가 107cm, 두부의 높이가 114c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이 석불은 소발이며 머리 위에는 넓게 육계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타원형의 보개를 얹었으며 귀는 크고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는 이 미륵당 석불은, 희게 회칠을 해놓아 원형을 알아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이마의 백호와 입술을 붉게 칠하고 눈썹과 눈을 그려 넣었다. 머리도 검게 칠해 원래의 모습을 분간하기 어렵다. 머리에 비해 신체는 작은 편이며 어깨도 좁게 표현하였다. 손은 가슴께에 표현을 한 듯한데 색칠을 해놓아 분간하기 어렵다. 까치발을 딛고도 밑까지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현재는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그리고 공장 등이 들어서 마을의 토착민을 찾기 어렵다. 아마도 이 미륵을 위하고 살던 토착민들이 이미 마을을 모두 떠난 듯하다. 생긴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섬겨왔다던 미륵은 이제는 외롭게 혼자서 굳게 닫힌 당집을 지키고 있다.

 

생활이 바뀌면서 남들과 다른 날 쉬어야 하고, 남들은 쉴 때는 일을 해야한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온전히 쉬는 것은 아니다. 그저 편하게 몇 시간이라도 내 생활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을 살다보니 화를 낼일 보다는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을 뒤늦게 배워나가고 있다.

 

매주 목요일은 마음 편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날이다. 이 목요일이 나에게는 그렇게 중요할 수 없다.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하루를 시간을 내어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없으니 그동안 꾹꾹 참고 있었던 문화재 답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문화재담사, 얼마나 마음 설레는 일인가? 30년 가까운 시간 전국을 돌며 수많은 문화재를 만났지만 아직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예전처럼 먼 길을 떠날 수 없으니 가까운 안성시를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함께 동행한 지인이 안성에 상당히 아름다운 카페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들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한다.

 

 

아름다운 미산저수지 옆 카페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299-8(미산리)에 소재한 카페엔비노 로스가든. 알고보니 탤러트 노주현씨가 운영하는 카페리고 한다. 친구들과 이곳을 들렸던 지인이 황혼이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고 안내를 해준다. 미산저수지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카페는 주변이 산과 저수지, 그리고 숲으로 쌓여있어 상당히 아름다운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다.

 

22, 30도를 웃도는 날씨라고 하지만 이곳은 별천지인 듯하다. 앞으로는 시원하게 조망이 전개되고, 미산저수지가 바라다보이기 때문에 더운 줄을 모르겠다. 바람까지 시원하게 불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인가? 그저 이런 곳에서 단 하루라도 모든 세상시름을 다 잊고 지내고 싶은 마음이다.

 

어딜 가나 주변 소음이 문제다. 연예인이 운영하는 곳이고 주변경관이 아름답다보니 평일 한 낮인데도 꽤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러고 보니 이곳 손님들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주변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접시가 깨질만도 하다. 저수지 주변을 돌면서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보니 상당히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란 생각이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문화재 한 점

 

정해진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하는 중압감 때문인가? 오후 세 시가 넘어가면서 마음이 조급해진다. 마침 동행한 지인이 미리내성지를 돌아보다가 보고 싶은 문화재가 있으면 찾아가보자고 한다. 그 말 한 마디가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멀지 않은 곳에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인 안성 대농리 석불입상을 돌아보기로 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얼마만의 문화재답사인가? 안성시 대덕면 대농리 91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46호인 대농리 석불입상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과는 다르다. 머리에 쓴 보관은 중절모와 같은 형태의 갓을 쓰고 있다. 커다란 나무 옆에 서 있는 석불입상은 하반부가 땅 속에 묻혀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형태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민머리에 오뚝한 코와 눈, 입 등은 산명하게 표시되어 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 어깨를 감싸 흘러내렸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보병을 잡고 왼손은 병을 받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그 조형한 형태로 볼 때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한다. 안성에는 유난히 미륵입상이 많은 곳이다. 아마 궁예가 이곳 칠장사에서 어린시절 수학을 했다고 하는데 그와 안성의 관계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 후천세계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미륵불은 보살과 부처의 상으로 구분되는데 이 미륵입상은 불상으로 조성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보병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는 약병으로 볼 수 있으며, 이 미륵입상은 약사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동안 수많은 석불입상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특이한 석불입상은 처음인 듯하다. 더구나 머리에 쓴 보관의 형태기 흡사 무관들이 쓰는 전립과 같은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든다.

 

단 하루의 여유가 이렇게 즐거움을 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루를 바쁘게 몇 곳을 돌아보면서 모처럼 생기를 되찾은 듯하다. 수원에 자리를 잡았을 때 수원의 문화재를 만나면서 한참이나 활기가 차 있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문화재답사. 모처럼 만난 문화재 한 점에서 예전 그 열정을 되찾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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