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속촌 안의 아름다운 절 금련사
용인에 소재한 한국민속촌을 들어가 좌측으로 길을 잡아 올라가면, 놀이마당 좌측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석장승이 서 있고, 무봉산 금련사라고 쓴 현판을 단 일주문이 서있다. 금련사는 대전 유성에 있던 절집을 옮겨다 놓은 사찰이다.
금련사에는 일주문과 객사인 하마정(하마정은 현재 민속촌 농악팀이 사용을 하고 있다),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 운판과 목어, 북이 달려 있는 자금광루와 종각, 법문을 펴는 안심료, 칠성당과 산신각, 아미타불이 모셔진 극락보전, 요사채인 염불당과 수광당 등의 전각으로 꾸며져 있다.
해우소가 이렇게 멀어서야
수광당과 칠성각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공덕암이라는 암자가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는 텃밭과 해우소가 있는데, 이 해우소 역시 한 칸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해우소다. 밖에서 보면 해우소라기 보다는 아름다운 목조건물 같이 조성이 되어 있다. 이외에도 금련사에는 돌장승, 부도, 삼층석탑, 석등, 돌당간, 돌수조, 연못 등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숲길이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져 운치 있는 산길을 만들어 준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만난 일주문은 새 기운을 얻은 듯하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면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문이 있다. 외국에서 찾아 온 젊은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본다. 험악한 모습 안에서 보이는 미소가 또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은 아닐는지.
사천왕문을 지나서 만나는 넓은 앞마당. 이곳에도 이제 얼마 후면 봄이 다가올 것만 같다. 계단을 올라 있는 정자가 자금광루다. 자금광루 안에는 목어와 운판, 북 등이 걸려있다. 이곳의 북은 특이하다. 구부러진 통나무를 속을 파내고, 가죽을 양편에 대어 만든 북이다.
크진 않아도 고루 갖춘 절 금련사
자금광루와 마주한 대웅전인 극릭보전. 안에는 아미타불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극락보존 앞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으며, 자금광루의 옆으로는 종각이 있다. 한 무리의 외국 여행객들이 주말을 맞아 찾아 온 금련사. 활기가 넘치는 경내에는 어느새 저만큼 봄이 다가와 있다. 자금광루 좌측으로는 법문을 펴는 인심료와 수광당, 그리고 칠성각이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으며, 좌측으로는 요사인 염불당이 자리하고 있다.
수광당과 안심료 뒤편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에 얼음이 녹아 봄이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푸른 대나무 잎들도 물이 오르는지, 잎이 점차 푸르게 변한다. 연기를 내뿜고 있는 굴뚝이 오랜만에 찾은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듯하다.
산길을 올라 만나는 공덕암. 한편은 마루로 트여져 있어. 한 여름 이 마루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다면,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공덕암 앞에 텃밭은 벌써 정리가 되어있다. 해우소가 마치 목조 전각이라도 되는 양 보인다.
민속촌 안에 있는 아름다운 절 금련사. 사시사철 그 풍광이 달라 자주 찾는 곳이다. 아마 천년 시간은 보내지 못했다고 해도, 그만큼 고풍스런 멋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주말에 금련사를 찾아, 깊은 산 속에서 느껴볼 수 있는 정취를 맛보기를 바란다.
양산 통도사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를 걷다
28일 아침 일직 수원을 출발했다. 경남 양산 통도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 회원 30여명이 승차했다. 이들은 양산 통도사로 2016년 정기 삼사순례를 떠난 길이다. 길을 떠난 지 두어 시간이 더 지나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눈이 쌓이고 상고대가 아름답게 햇살에 반짝인다.
그 전날 수원에도 첫눈이 내렸지만 날이 푹한 터에 모두 녹아버렸는데 지대가 높은 추풍령에는 눈이 남아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주고 있다. 모처럼 떠난 여행에서 첫 눈이 아름다운 모습을 만난다는 것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몇 시간을 달렸을까? 양산 통도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통도사를 향하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로 접어들었다.
무풍한송로는 그야말로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내를 건너 반대편에는 차를 이용해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지만 어찌 통도사까지 먼 길을 달려와 이 좋은 길을 놓아두고 차를 이용한다는 것일까? 그저 심호흡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솔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듯하다. 바쁠 것도 없다. 수백 년 넘은 소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소나무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풍한송로는 걸어서 20~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걷는 속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 통도사로 향한다. 천천히 걷다보면 중간에 시원한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자도 있어 피곤한 발을 쉴 수도 있다. 또한 이곳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맑은 통도사 계곡물과 노송, 그리고 차 한 잔 얼마나 어울리는 단어들인가?
수원 노송지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까?
통도사 무풍한송로를 걸으며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가 생각난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년 7월 10일에 지정된 파장동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의 효심을 가득 담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모신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효행의 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오랜 수령을 자랑하 듯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노송지대가 변했다. 노송지대 사이로 난 차도를 한편으로 옮겨 차량들의 매연으로부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보존방법을 택한 것이다. 많은 정조의 효를 상징하는 노송들이 이제는 차량의 매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얼마나 그 오랜 세월을 차량의 매연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한 것일까?
‘노송지대’ 통도사 ‘무풍한송로’와 같이 만들어야
통도사 무풍한송로는 내 건너편으로 차도를 내었다. 소나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차량의 매연을 피하기 위함이다. 곳곳에는 부도탑이며 석등, 불자들이 세운 각각의 다양한 탑들이 즐비하다. 물론 이 탑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사찰경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곰곰 행각해본다.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도 이렇게 사람이 걷기 좋은 숲길로 조성할 수 있을까?
노송지대 안에 무분별하게 난립된 무허가 건물들을 정리하고 곳곳에 정조대왕에 관한 글이며 시비를 세운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숲길이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낙엽을 밟으며 심호흡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즐겨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송지대는 또 다른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즉 정조의 효심이 어린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길을 통도사 무풍한송로와 같이 조성할 수만 있으면 수도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다. 통도사 무풍한송로를 걸으면서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걸을 수 있는 노송 숲길이 될 수 있도록 조성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인을 벌거벗긴 도편수의 불편한 진실
강화 전등사를 찾아 옛 전설을 기억하다
사랑하는 여인이 배신을 했다. 장인은 그 여인에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씌웠다. 전등사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이름을 ‘진종사(眞宗寺)’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등사는 원종 7년인 1266년에 중창하였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에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가 승려 인기에게 부탁하여, 송나라의 대장경을 가져와 이 절에 보관하게 하고 옥등을 시주하여 전등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충숙왕 6년인 1337년과 1341년 승려들이 중수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고찰이다.
고졸한 멋을 풍기는 전등사 대웅전
전등사대웅전은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이 되었다. 전등사 대웅전은 1916년 수리 시에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 38년인 1605년에 일부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불이나 전소되었다. 다음해인 161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 6년인 1855년에 규영화주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등사 대웅전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 쌓기 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 올린 다포식 건축이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나목녀
전등사를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전등사와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분에 젖는 것은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점도 있겠으나 볼 때마다 달라지는 처마 밑 ‘나목녀(裸木女)’들의 표정인 것 같다. 어느 날은 편안한 듯한 표정이었다가, 또 어느 땐가는 절박한 표정이기도 한 것은 찾을 때의 내 마음이 비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하는 이야기대로라면 도편수를 속이고 정분이 나서 사라진 여인을 영원히 절의 처마를 바치고 참회를 하라는 뜻으로 조각을 해서 올렸다는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마음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왜인지. 휴일을 맞아 찾아드는 많은 관광객들은 그저 처마 밑에 웬 사람이 있느냐고 반문을 하다가도 죄를 지은 여인이 벌을 받고 있다는 말에 시큰둥한 표정이다.
아마도 요즈음에 그런 것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는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전등사 처마 밑의 나목녀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참으로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과, 이제는 그만 그 올무를 벗고 처마 밑에서 내려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벌을 받고 있는 나신의 여인이 지금세상아리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또 하나의 전하는 이야기는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 벌거벗은 여인상이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인을 벌거 벗겨놓은 도편수의 숨겨진 마음
전등사 대웅전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나목녀는 마을에 사는 여인네였다고 전한다. 절집을 짓던 도편수가 그 여인에게 반하여 돈을 벌어 모두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여인은 도편수가 벌어다 준 많은 돈을 갖고 딴 남자와 눈이 받아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목수는 배신감을 느꼈고, 그 여인을 벌거벗겨 대웅전 처마 밑에 올렸다. 그 곳에서 참회를 하고 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아심을 갖는다. 그 도편수의 마음이다. 참회를 하라고 그 여인상을 만들아 올렸다고 하는데, 그러면 옷이나 입혀줄 일이지 하필이면 발가벗겨 놓았을까? 갈 때마다 그 여인을 바라보면서 측은하다는 생각이다. 오랫동안 무거운 처마를 이고 벗은 몸이 부끄러워 한손으로는 처마를 받치고, 한손으로는 무릎 밑을 가린 채 엉거주춤 쭈그리고 앉아있는 그 여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때로는 그 도목수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도목수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 것은 몇 번인가 전등사를 찾은 후였다. 옷을 입혀 놓으면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다시 도망을 갈 테고 그러면 죄를 또 짓게 되어 그 업보가 더 깊어질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던 여인이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마음이 아프지만 옷을 벗겨 대웅전 처마 밑에 올린 도편수의 마음을 한 스님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정녕 그 시대의 아름다운 사랑을 안 것은 아닐는지. 요즈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봄에 서해바다도 돌아보고 봄철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을 만날 겸 강화 전등사를 찾아 나목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랑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절에 상주한 스님이 300명이 넘었다고?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렸다.
대좌 위에 올라앉으면 나도 부처가 되려나?
고달사지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석불대좌의 받침돌은 상중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새롭게 보인 고달사지 석조
고달사지 경내에 석조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석조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석조를 살펴보니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석조를 보았지만 이렇게 안내판을 보고 다시 돌아보니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알게 된다. 문화재를 자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년 세월 제 모습을 지켜 낸 고달사지 부도
여주 고달사지의 동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돌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이번까지 3번을 이 부도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천년 세월을 제 모습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이 부도가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각으로 된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중대석의 용과 구름은 아직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다. 중대석의 용은 힘차게 부도를 감고 있다. 용의 무늬 중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두발로 감싸고 있는 조각은 가히 압권이다.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많은 부도를 보았지만 이런 멋진 조각을 해놓은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부도의 전면에 돌출이 된 용의 머리 역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대석으로 올라가면 연촉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영창이 서로 반대편에 조각이 되어 있다. 자물쇠 문양과 영창 사이에는 사천왕상이 힘있게 조각되어 있다.
머릿돌은 상대적으로 몸돌보다 크게 만들었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머릿돌의 밑면에 조각이 된 비천상이다.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 같은 이 비천상에서 부도는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부도를 조각한 공인도, 이 부도의 주인이 하늘로 오르기를 바랐나보다. 또한 스스로도 하늘로 올라 비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주 e수원뉴스 기자들과 함께 찾아갔던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문화재들은 국보 1점과 보물 3점, 그리고 유형문화재인 석조 1점 등이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거동한 불편한 사람들도 경내를 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좀에서 보면 고달사지는 무리없이 돌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고달사지를 찾아 선조들의 예혼(藝魂)을 느껴보기 바란다.
가을이 되면 모악산을 찾아가고 싶다
그동안 단풍이 아름다운 곳을 먾이도 다녀보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에 자리한 대원사 단풍이란 생각이다.
우연히 자료를 정리하다가 만난 모악산 단풍. 시리도록 붉다는 그 단풍이 아직도 선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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