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떡이며 태봉 마루에 서 있는 명종의 태실을 오르다

 

지금 저 꼭대기를 올라가자는 겁니까? 점심 먹고 이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저곳을 어떻게 오릅니까? 아무리 위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다고 해도 저는 절대 못 올라갑니다. 경사도 장난이 아니구먼?”

 

5일 오후 서산시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은 서산시 운산면 문수골길 94-8(태봉리)에 소재한 명종의 태실 및 비가 서 있는 태봉 아래 주차장이다. 위로 보이는 태봉은 밥을 먹고 난 후 바로 오르기에는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곳 높이야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소화도 되기 전에 오르라고 하면 힘들 것 같다.

 

 

태봉이나 태재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곳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 두는 작은 석실을 말한다. 마을이름까지도 태봉리리고 한다. 그 산 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된 명종의 태실 및 비가 있다. 산 밑에서도 태실 앞에 세운 비의 윗부분이 보일정도이다. 하지만 그곳을 올라야 한다는 데는 쉽게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이곳에 태를 묻은 명종(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다. 중종이 죽고 큰 아들인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를 한 명종 대신 어머니인 문정황후가 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명종은 왕위에 있을 당시 왜의 잦은 침략을 당했고 임꺽정이 혼란한 틈을 타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된 명종 태실

 

명종 태실은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되었다. 정말이지 오르기 싫은 태봉의 가파른 길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 올랐다. 태봉 정상부근까지 가파른 비탈을 따라 오르면 위에는 소방도로가 나 있어 걷기에 편해진다. 산 아래편에는 대밭이 있었는데 이곳 소방도로를 따라 산죽이 양편으로 자라고 있다.

 

태봉 위는 약 40평 정도의 넓이로 조성하였다. 방형의 대좌 위에 태를 넣은 태함을 석종형 부도의 태실로 마련했으며, 그 위에 8각의 옥개석을 놓고 보주형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석종형 부도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의 높이는 90이며, 각 변이 약 2m8각 난간으로 둘러져 있어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태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가 서 있다. 하나의 비에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瑃齡阿只氏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가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다. 이 비는 1538년인 중종 33년에 세운 비이다. 이 비는 태실을 조성하면서 세웠다.

 

그 옆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 비는 명종 1년인 1546년에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안해야 하기 때문에 건립된 비이다. 이 비는 귀부와 이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또 한기의 비는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숙종 37년인 1711년에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라는 글씨를 각인하여 세웠다. 이 비는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 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로 조형하였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명종태실. 태실의 석종형 부도 앞에서 먼 곳을 바라본다. 이곳에 오르기가 그렇게 싫었던 것도 사실은 힘이 든 이유도 있었지만, ‘눈물의 왕이라고 불린 명종의 태실 앞에 선다는 것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54576일 명종이 즉위했으니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황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부터 명종은 그저 허울분인 왕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가차없이 내치는 대비 문정황후로 인해 결국 을사사화까지 일어났지만 명종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어머니 문정황후의 그늘에 가려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을 시작했지만 2년 후인 명종 22(1567) 6,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날이 좋으면 더 멀리까지 보인다네요

답사에 동행한 지인이 하는 말이다. 세상살이에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쪽을 바라보면 속이 트인다고 말하는 지인. 하지만 난 이곳에 오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평생을 어머니 문전황후의 그늘에 가려 마음껏 왕으로서 친정을 펼치지 못한 명종. 그리고 젊은 나이인 34세를 일기로 왕위를 이을 후사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명종. 그의 생에를 알기에 이곳을 오르면 역사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지난 3월 말경 오후 6시. 이제 30~40분 후면 일몰시간이라 사진조차 찍을 수가 없다. 당황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당성을 찾아보기 위해, 늦은 시간이지만 당성으로 향했다. 올 들어 첫 황사가 심하게 끼는 날이다. 설상가상으로 화성은 서해와 인접해 딴 곳보다 황사가 심하다. 온통 시야가 뿌옇게 보일 정도이다.

 

 

 

이런 날 산성 답사라니...

 

당성 입구에 도달했는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카메라의 배터리 양을 나타내는 표시가 깜빡거린다.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몇 번을 벼르고 별러 찾아온 곳인데, 그리고 이제 얼마 후면 해도 떨어질 텐데 정말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동행을 한 아우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밭 옆에 서있는 전신주로 가서 무엇인가를 살펴본다.

 

다행히 가방 안에 항상 충전기는 지니고 있어, 전신주에 있는 계량기 안에 코드를 연결할 수가 있었다. 배터리를 충전시키면서 기다리는 10여 분이 여삼추다. 벌써 날이 점점 어두워온다. 10여 분을 기다리면서 충전을 해 성으로 올랐다. 저 아래로 보이는 마을에는,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비탈길에 조

 

 

 

성한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다리도 뻐근하고 숨도 차다. 이렇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마시는 황사의 먼지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정말로 내가 문화재 답사에 미친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이렇게 황사가 심한 날, 숨 가쁜 산성 답사를 할 일이 없을 듯하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2k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벌써 날이 컴컴해진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다 되어 있다.

 

당성을 한 바퀴 다 돌아 내려오니 기진맥진이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보다. 앞에까지 가서 성을 돌아보지 못할까봐 맘을 졸인 것이, 한꺼번에 피로를 몰고 온다. 삼국이 번갈아 가면서 차지했던 당성. 그만큼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 떨어지고 있는 당성의 마른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재를 보았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사적 제206호인 화성 융릉과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소재한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 역시 사후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다. 이 융릉은 합장 능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후에 의황제로 추존한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한 능이다.

 

융릉은 조선 후기의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 또한 매우 아름답다.

 

 

여러 번 명칭이 바뀐 융릉

 

1762년 윤 5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12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3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1112,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뛰어난 융릉의 석물과 곤신지

 

77일 오후 융건릉을 찾아 나섰다. 융건릉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 융릉의 석물을 보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에 대해 좀 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어서였다. 동행한 지인이 문화재에 대해서는 남다르게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융릉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재실 안 마당에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504호로 지정된 개비자나무며 각종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융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릉으로 들어가는 숲은 이 계절이 되면 천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이다. 노송이 우거지고 잘 닦여진 숲길에는 까치와 청설모 등이 길손을 맞이한다.

 

숲길을 지나 융릉 가까이가면 좌측에 곤신지가 나타난다.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이며 이곳이 길지이기 때문에 조성했다고 한다. 원형의 곤신지에는 각종 색을 띤 물고기들이 유영을 하고 있다.

 

천천히 융릉으로 향한다. 융릉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들을 보다가 옛 이야기 하나를 떠올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 주변 소나무를 송충이들이 갉아먹자 정조는 송충이를 잡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송충이를 바라보다가 "아버님이 잠드신 수풀을 갉아먹느니 차라리 이 불효자식의 오장육부를 갉아먹으라"며 송충이를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때문인가?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와 송충이들을 모두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융릉 주변의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색이 곱고 생육이 좋다.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사적 융릉. 길은 자연적인 흙길 그대로이.

 

잘 정리된 능침,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적어도 나에게 가을이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늘 답사를 다니는 나로서는 그 이상의 계절이라는 의미는 무의미하다. 다만 많이 걸어도 땀이 덜 흐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을은 바람직한 계절이다. 그런 계절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다.

 

매주 목요일마다 돌아보는 인근지역 답사. 얼마 안 있으면 수원화성문화재도 열리고, 정조대왕의 능행차가 서울서부터 시흥, 수원, 화성까지 이어지며 전 구간에서 시연된다고 한다.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능까지 이어질 능행치 생각에 가까운 곳에 소재한 사적 제195호인 효종대왕능을 찾았다. 효종대왕능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소재한 세종대왕능인 영능(英陵)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능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합장능이고 영능(寧陵)은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이다.

 

 

벌써 한 이태는 지났을 듯하다. 여주에 잠시 거주하고 있을 때는 오가는 길에 늘 들렸던 곳이다. 2년 만에 찾아간 효종대왕능도 주변이 변했다. 재실 바로 앞에 있던 주차장이 멀찌감치 떨어져 나왔고, 앞에는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다. 좁던 주차장도 여러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혔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입장료만 해도 상당한 금액을 지출했다. 대개의 문화재가 입장료를 받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경노우대라고 하여 웬만한 곳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점이 괜히 씁쓸해진다. 아직도 돌아볼 곳이 지천이기 때문이다.

 

 

보물로 지정된 효종대왕능 재실

 

효종대왕능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재실이다. 효종대왕능의 재실은 보물 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치하와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많은 능의 재실들이 소실되기도 했는데 효종대왕능의 재실은 원형 그대로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재실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각에서 보이는 담장 밖 굴뚝이 효종대왕능 재실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재실 외벽을 심벽으로 조성하고 그 심벽 안으로 연도를 냈기 때문이다. 재실 외벽 곳곳에 기와 몇 장을 포개놓은 곳이 보인다. 이 기와가 바로 굴뚝 역할을 하는 것이다. 능침 어디를 보아도 이런 조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하나 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한다.

 

재실 담장 안에는 수백년 묵은 회양목 한 그루가 서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495호로 지정된 회양목이다. 일반적으로 회양목이 거목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효종대왕능 재실 회양목은 크기도 크거니와 수령이 이미 300년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앞에는 보기에도 엄청난 거목들이 담장과 함께 늘어서 있어 전각의 멋을 더하고 있다.

 

 

북벌을 꿈꾼 효종대왕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능침으로 오르다보면 좌측으로 작은 내를 건너가는 길이 나온다. ‘왕의 숲길이라는 이 길은 세종대왕의 능과 연결이 되는 숲길이다. 그저 타박타박 걸어가면 좋을 이 길은 주변에 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숲을 걷는 것 하나만으로도 힐잉이 되는 길이다.

 

앞에 홍살문이 보이고 그 뒤로 정자각과 능침이 보인다. 효종대왕능의 정자각은 최근에 해체보수 하였다. 정자각을 앞에 두고 좌측에는 2006년에 발굴조사 후 복원한 수라간이, 우측에는 수복방이 있다. 그 앞을 보면 참도에 놓인 금천교를 건너게 된다. 효종대왕능의 금천교는 홍살문 안에 자리하고 있어 색다르다. 대개 능원의 금천교들이 홍살문 밖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대군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생활한 효종대왕. 그곳에서 살면서 효종은 늘 북벌을 마음먹었다. 효종의 북벌의지는 정예화 된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기에 효종대왕은 재위기간 동안 늘 북벌을 꿈꾸면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는데 노력하였다.

 

효종대왕은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효종대왕의 머릿속에는 강한 나라를 만들어 북벌을 하겠다는 의지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4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북벌의 의지는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가을초입에 찾아간 여주 효종대왕능. 곳곳에 보수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관람에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이다. 잠시의 불편을 참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기 위함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 더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겠다.

 

원효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곳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발굴 중이다. 10일 오후 찾아간 당성. 입구에서부터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4차 발굴중이라 출입을 통제한다는 가드라인이 쳐져있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성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며 구봉산에서 봉화산으로 뻗는 남서능선 정상부에 600m의 테뫼식 산성으로 6~8세기 신라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들어갈 수 없는 당성 자료만 훑어보다가 돌아와

 

지난 해 몇 차례 당성을 답사하였기에 당선의 형태는 눈에 선하다. 현재는 발굴을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당성사적비와 성이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면서 발굴관계기관의 발굴보고서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을 돌아본 곳이기 때문에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란 한 번의 답사로 알 수가 없다. 한곳에 서 있는 유형문화재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성곽의 경우 회를 거듭하는 발굴로 인해 새로운 것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30년 넘는 세월 전국을 스 없이 돌아보면서 문화재를 답사한 나로서는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기회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고는 한다.

 

낮에 잠깐 뿌린 비로 숲속은 습하다. 거기다가 땀 냄새를 맡은 산모기까지 달라붙어 사람을 귀찮게 한다. 답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사람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산모기 떼와 각종 벌레들이다. 무더위에 옷으로 감싸고 오르지만 달라붙는 모기떼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는 당항성(신라시대의 이름) 인근 당막(=무덤)은 바로 당성 인근 현 신흥사 인근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 일대는 과거 무덤들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10일 오후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찾아간 당성. 그동안 전국의 성 40여 곳을 답사했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한 곳이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돌아본 성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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