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8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냈는가? 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전주시 완산구 교동 105-4에 소재한 학인당. 현재 전북 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곳을 일컬어 '서울 북촌에 윤보선 고택이 있다면, 전주 한옥마을에는 학인당이 있다'고 할 만큼 격식을 갖춰 지은 집이다. 한옥마을에 있는 많은 한옥을 대표하는 학인당은 100년이 지난 대형 한옥으로 건축 당시에는 2000평의 대지에, 건평만 99칸의 집으로 지은 집이다.

 

학인당은 조선조 말 왕조가 퇴락하자 반가의 상류층에서는 한국 전통 건축기술을 이어받은 도편수와 목공 등을 청해 집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다. 학인당은 당시 궁중건축양식을 민간의 가옥에 도입한, 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집으로 그 가치가 높다. 연인원 4280명이 압록강과 오대산 등지에서 구입한 우리 목재를 이용하여 28개월 끝에 완공을 했다는 학인당. 당시 돈으로 백미 4000(8000가마)을 들여 지었다는 학인당의 규모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백낙중은 효자로 소문이 나 고종황제는 특별히 그의 효행을 높이 사 '승훈랑'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백낙중은 이 집을 장남 백남혁이 태어남을 기념하여 1905년에 부친 백진수에게서 물려받은 대지에 지은 것이다. '학인당'이란 명칭은 백낙중이 서거 후 그의 호인 '인재(忍齎)'에서 ''자를 따서 지은 명칭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는 안채와 행랑채를 매각. 했다. 1970년대에는 용인민속촌에 이 집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거액을 제시하며 두 차례나 팔기를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몇 번의 권유가 있었으나 백남혁 부친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썼다고 한다.

 

 

전북 예술의 산실 학인당

 

부친 백낙중의 서거 후에 일본에서 돌아 온 백남혁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력으로 전북 예술인들의 후원에 힘을 쏟는다. 심농 조기석, 유당 김희순 등의 서예가와 청천 이상범, 금추 이남호 등을 후원했으며, 소리꾼인 남전 허남옥을 비롯하여 만정 김소희, 박녹주, 김연수, 박초월 등의 명창들을 지원했다. 학인당은 일제치하에서 전북 예술을 지켜가는 문화교류의 장이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절. 예술인들은 많은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그 끈질긴 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학인당과 같은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학인당은 해방 후에는 영빈관으로 사용이 되기도 했다. 김구 선생이 전주를 방문하면 학인당에서 묵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학인당은 전북 모든 분야에서 구심점이 되었다.

 

 

변화된 모습의 학인당

 

학인당의 솟을 대문에는 '영릉 참봉 수원 백낙중지려'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전통문화 체험장으로 개방된 학인당에는 최근 전통찻집 '선다원'이 문을 열었다. 학인당에서 차 한 잔 여유와 휴식을 즐길 수가 있다. 학인당을 찾았다. 대문이 걸려있는데 집 앞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전화를 걸었더니 쪽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 놓은 정원이 있고, 뒤편 학인당의 대청에는 주인과 객들이 차를 마주하고 담소를 하고 있다.

 

신문시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안주인인 듯한 분이 손수 나와 반기며 학인당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200년간이나 이 집터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정원에는 계단을 내어 깊은 곳에 물이 고여 있다. 지하샘이라고 하는 이곳은 원래 식수로 사용한 것이었는데, 현재는 김치 저장고로 사용하고 있단다. 계단 입구가 용꼬리가 되고 지하샘 위쪽이 용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의 설명만으로도 이 집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

 

 

학인당 앞에서 대문채를 보니 양편에 방을 드렸다. 대문을 팔작지붕으로 꾸민 것도 특이하다. 그 한편으로 건물 한 동이 있고, 학인당의 뒤편과 좌측에도 한 동이 있다. 학인당이라는 현판을 건 본채는 팔작집으로 지붕 처리가 남다르다. 지붕의 팔자로 갈라진 아랫부분에는 문을 내고, 끝부분의 둘레를 동판으로 싸 비바람을 막게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잘 꾸며진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안채와 행랑채 등 예전의 99칸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면, 주변에서는 보기 힘든 저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다 보니 100여 년 전 상류층 사회의 집 구조가 옛 고택과는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서울 북촌의 윤보선 전 대통령의 집과 비길 만 하다는 학인당.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전통문화 체험을 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것 같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꽉 메운 한옥마을을 찾은 사람들

 

수원 행궁동 일원과 전주 한옥마을 무엇이 다른가?

 

살다가 인생이 재미가 없거나 삶에 지쳤거든 주말에 전주한옥마을을 찾아가세요. 그곳에서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며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세요. 그저 길가 아무 곳에나 앉아 지나는 사람들만 보고 있어도 힘이 솟아오릅니다.”

 

27일과 282일 동안 전주 한옥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곳은 이미 그저 한옥마을이 아니었다. 한 해에 한옥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일천만명. 그 중 80%가 외지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 도시도 아닌 풍남동과 교동이라는 작은 마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벌어들이는 경제 효과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한 점포에서 하루에 올린 매상이 수천만원을 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처음에는 설마하며 웃었는데 정작 한옥마을에 찾아와 보니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보세요, 이 길가에 사람들을. 이들이 모두 대여한 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잖아요. 4시간에 만원이라고 하는데 한복만 대여해서 하루에 300만원의 매상을 올린집도 있다고 하네요

 

이목대에서 내려다 본 한옥마을의 지붕들 

 

한옥마을에서 만난 이아무개(, 44). 경기도 부천에서 왔다는 이씨는 자신도 두 딸과 함께 한옥마을에 와서 1박을 했지만 이런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 줄은 몰랐다고 한다. 주말에 한옥마을 중요도로는 차량통제를 하고 있어 그야말로 관광객들의 지상낙원으로 변한다. 길거리마다 즐비하게 자리 잡은 각종 먹을거리 또한 다양한 종류가 있다.

 

우리 아이도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왔는데 23일 동안 여행경비 18민원을 학교에 내고 아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돈 10만원을 주었으니까, 이곳에서 사용하고 온 돈이 숙식비를 포함해 30만원 가까운 돈을 쓴 것이죠. 일 년이면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정말 이 한 마을에서 어마어마한 경제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죠

 

한옥마을을 찾은 학생들이 한복으로 치장하고 즐기고 있다

  남녀 젊은이들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한옥마을 전체가 흥겨운 놀이판

 

이틀 동안 돌아본 한옥마을은 우리들이 알던 세상과는 별천지였다. 흡사 조선시대로 회귀를 한 것 같은 분위기이다. 거리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거리도 젊어진다. 나이가 느긋한 어른들은 찻집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웃음을 띠운다. 여기저기 풍악소리가 울리는 한옥마을은 그저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5년 전에 나도 이곳 인근에서 몇 년인가를 살며 거의 날마다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그 5넌 전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당시의 한옥마을은 관광객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떻게 길지 않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변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점점 늘어나고 있는 한옥들로 인해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마을을 돌아보면서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위대한 승리라는 것에 감탄을 한다. 한 마디로 한옥마을 전체가 놀이판이 된 것이다.

 

한옥마을에는 한복대여점이 곳곳에 있어 누구나 한복을 입고 즐길 수 있다

  수학여행을 온 여학생들이 경기전 안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대박'이라며 포즈를 취해주었다

 

마침 한옥마을에서는 제34회 전국대사습대회 학생전국대회가 28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기간이다. 이목대, 경기전, 풍남문광장 등 한옥마을 일원 가는 곳마다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다가 길거리 곳곳에 대사습유랑단이라 쓴 윗옷을 걸친 젊은이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연주를 하는 학생들은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연주를 하고, 지나던 관광객들도 가장 편한 자세로 구경을 한다.

 

이 넓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서 춤을 추고 연주를 하고 소리를 한다. 음악소리가 나서 따라가 보면 신명나게 순서를 기다리는 대사습 참가학생들의 연습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이 된다. ‘국악의 도시 전주’, 그 말이 이렇게 실감이 날 수 없다. ‘노다가세 노다나가세라는 부제를 둔 대사습놀이는 그저 사람들이 절로 놀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

 

전주학생대사습에 참가한 학생이 이목대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전 대금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대사습 무용경연에 참가한 한 학생이 승무춤을 연습하고 있다

 

수원 행궁동과 전주 한옥마을 이것이 다르다

 

수원 화성 안 행궁동에도 요즈음 한옥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집을 한옥으로 개조하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수원시에서 매입한 토지나 건물들을 한옥으로 개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날마다 한옥으로 개조공사를 하고 있는 집들을 볼 수 있다. 벌써 700여동이나 되는 한옥들이 들어섰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추세라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건너 전주읍성 풍남문 일대에는 전주남부시장이 있다. 수원 화성 팔달문 밖에는 9곳의 인정시장이 있다. 전주남부시장은 지난해에 글로벌 명품시장으로 지장이 되었고, 수원 남문시장(팔달문 밖 9곳의 통합시장)은 올해 글로벌 명품시장으로 협약식을 맺었다. 수원과 전주 닮아도 너무 많이 닮았다. 하지만 그 양상은 전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전주 한옥마을과 남부시장은 이미 전국 최고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해 수원 행궁동과 남문시장은 이제 변화를 시작했다. 과연 이 두 곳을 비교는 할 수 있을까? ‘절대불가란 없다. 노력해서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의식과 노력이 차이이다. 그렇게 만들어야겠다고 수많은 노력을 한 곳과 주어진 일을 처리한다는 의식의 차이이다.

 

수원 화성 행궁동 안에 한옥이 좀 더 많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다. 주민들의 의식의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한옥이 있다고 해도 전주한옥마을을 따라잡을 수 없다. ‘우는 아이 젖 주기식으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이라도 일대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주 한옥마을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옥마을 어디서나 길을 다니면서 먹을 것을 먹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한옥마을은 스스로 변화를 했다. 그들은 한옥마을을 살리기 위해 한옥을 늘리고 자신의 점포 앞을 개방했다. 지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쉴만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나가던 관광객 누구라도 들어가 잠시 쉬겠다고 하면 흔쾌히 허락을 하고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내온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나라도 구해야 한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아왔다가 떠나는 사람마다 손에 쇼핑백이 들려있는 이유이다.

 

수원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단 몇 집을 돌아다녀보아도 목소리가 높아진다. 장사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 의식과 개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전주 한옥마을은 그저 꿈같은 곳이다. 그들의 변화는 먼저 지신을 버리고 모두의 이익을 앞장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찾았다. 정신의 변화를 먼저 시작한 것이다. “수원 행궁동은 절대 전주 한옥마을을 따라갈 수 없다하지만 늦은 것이란 없다. 이제라도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변화를 시도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전문가 집단이 탁상공론을 하는 자들이라면 기대할 바가 없다. 현장에서 직접 뛰어 본 전문가들이라야 변화가 가능하다. 탁상공론으로 인해 망쳐진 환경과 계획을 수도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전주 한옥마을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전주한옥마을이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변화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까지 깨지는 않을 생각이다. 노력하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구 125만의 전국 지자체 중 최고의 도시 수원이기 때문이다.

 

 

남원시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남원예촌 조성사업 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남원예촌을 우리나라 최고 품격 · 최고 건축양식의 한옥체험 단지로 조성 할 계획이며, 올해 말 1 지구 준공을 목표로 분야별 명장들의 혼을 담아 한옥숙박 체험단지 조성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단계 남원예촌 조성사업은 광한루원 북문 주변 17,400 에 총사업비 272억 원을 투자하여 전통한옥 및 문화 체험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1지구 전통 숙박 체험단지 ( 2015 년 준공 )2지구 남원 한국의 집(2016년 준공)을 단계적으로 조성 할 계획이다. 남원예촌이 완공되면 광한루원과 구도심권을 연계하는 문화관광 거점 인프라로서 구도심권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고의 명장들이 15동의 전통한옥단지 조성

 

전통한옥 숙박체험단지 (1지구)는 연말 개관을 목표로 총 15 동의 전통한옥이 들어선다. 이곳에는 고품격 전통한옥 숙박동, 기업연수 및 세미나 개최를 위한 예촌관, 전통 정자와 연못, 쉼터, 관리사무소 등이 조성되어 남원을 찾는 관광객들이 전통한옥의 맛과 여유를 즐기는 공간으로 조성된다 .

 

남원예촌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옥 명장들이 시공에 직접 참여하여 혼을 담은 명품· 명작으로서 국내 전통 한옥분야를 대표하는 최기영 대목장과 전통기와 잇기 대가인 이근복 번와장, 전통구들장(온돌) 과 황토흙벽 시공에 문화재 공사 토수분과 유종 위원장 등 대표적 한옥명장들이 모여 최고의 명품 숙박단지 조성을 위하여 각 분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최기영 대목장은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74)로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 유산으로 지정됐으며, 부여 백제재현 단지를 비롯해 봉정사 극락전, 경주 월정교 복원공사를 주관하는 등 국내 전통 한옥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또한 이근복 번와장은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제(121)로서 우리나라 유일의 기와잇기 시공 전문 기술자이며, 숭례문을 비롯한 우리나라 문화재들은 다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재 수리기능 제 4669호를 부여받은 유종씨는 한국전통구들협회 회장으로 전통 문화재와 구들 시공의 전문가로 내손으로 구들 놓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

 

 

 

옛 전통방식 그대로 재현

 

특히 남원예촌은 주요 목부재에 우리나라 육송, 난방에 전통 구들장(온돌), 벽체에 황토흙벽, 옻칠 등 타 지역과 차별화 된 순수 고건축방식의 전무후무한 명품 한옥단지로 조성하고 있다.

전통 구들은 우리 선조의 지혜가 집약 된 세계 유일의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난방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추운 겨울 우리의 아랫목을 따뜻하게 데워 준 민족 공동의 문화유산이다 .

 

전통 구들방 에서 잠을 잘 경우 원적외선 발산으로 열기를 온몸으로 전달하여 체온을 높이며 ,이로 인해 잔병을 없애준다. 또한 구들의 그을림은 지하수맥을 차단 해주며 장작을 땔 때 발생되는 원적외선은 여성들의 자궁암 발병률을 줄여 주는 등, 구들은 그 가치와 효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구들의 장점을 활용하여 , 관광객들이 아궁이에 장작(땔감)을 때며 가마솥에 옥수수고구마감자 등을 삶아 먹는 등 전통체험 시설에 역점을 두고 만들어 가고 있다. 벽체는 전통황토 흙벽(외엮기 + 황토 + + 미역 , 다시마 끓인 물)으로 우리 몸에 좋은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여 방안의 공기를 순환시켜, 한옥에서 숙박체험 시 머리를 맑게 해주는 등 우리 몸에 가장 좋은 전통방식으로 시공되고 있다.

 

그리고 전통한옥이 화재 및 곰팡이 , , 흰개미 등에 의한 파손에 취약한 점을 내, 외부 건축 목부재에 옻칠 작업을 통해 개선하였으며, 전자파 차단, 방수성, 방청성 등 옻칠의 장점을 살려 목부재의 내구성을 강화하였다.

 

 

 

이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옻칠의 본고장인 남원의 최고비법을 적용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더 큰 의미가 있으며, 팔만대장경 등 문화재에만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을 한옥 건축에 도입하였다는 점 등, 타 전통한옥 단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명품 건축을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금년말 명품 숙박 체험단지 완공과 개관을 목표로 남원예촌 1지구 조성사업에 막바지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남원예촌의 명품 숙박단지 개관을 시발점으로 구도심권내 관광 인프라 시설을 구축하여 명실상부한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화도시 남원의 새로운 랜드 마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황윤석 선생은 이재난고3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대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조 영조 5년인 1729,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출생을 하였다. 63세에 일생을 마친 선생은 군자는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다양한 학문을 연구한 분으로 유명하다.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있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5호인 황윤석 생가는, 선생이 출생한 집으로 부친 황전이 세운 집이다. 높은 축대 위에 7칸으로 된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와 문간채, 사당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초가로 된 안채와 그 앞에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광채가 남아있다. 사랑채와 문간채는 불타버렸던 것을 190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초가의 기품을 지닌 사랑채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마련한 사랑채는 모두 4칸으로 꾸며졌다. 이 중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의 한 칸은 앞으로 돌출이 되게 해, 정자방으로 꾸몄다. 툇마루 역시 앞으로 돌출이 되었으며, 마루방을 비롯한 모든 방은 창호를 달아냈다. 덤벙 주추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사랑채는 그저 학자의 집처럼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기품이 엿보인다.

 

사랑채와 문간채 사이에는 쪽문인 일각문을 판자문으로 두어 안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와 대문으로 이어진 대문채는, 사랑채와 합해 자 형으로 되어있다. 대문채는 두 칸의 방을 드렸으며, 흔히 보이는 헛간채 등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불에 탄 것을 복원을 하면서 변형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은 축대 위에 세운 안채

 

안채는 7칸으로 꾸며졌다.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7칸의 집을 - 자로 지었다. 안채를 바라보면서 동쪽의 맨 끝은 마루를 놓고, 이어서 한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안방과 부엌의 순으로 나열을 하였다. 대청의 북쪽 벽 위에는 평해황씨 선조의 위폐를 모신 곳이 있다고 하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볼 수가 없다.

 

안채는 동쪽에 툇마루를 놓았는데 방의 끝까지 이어지도록 하였다. 예전에는 꽤나 운치있는 집으로 꾸며진 듯하다. 모든 문이 걸려있어 안을 확인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니 시원하게 판자벽 위에 까치구멍을 내었다. 문을 열면 부뚜막 옆에 커다란 독을 묻어놓았다. 아마 물독인 듯하다.

 

 

 

안채의 뒤편에는 예전에는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빈 터만 남아있다. 안채의 동쪽에는 2단의 축대 위에 지은 광채가 있다. 5칸으로 꾸며진 광채는 양편에 문을 달고 판자벽으로 꾸몄다. 마루를 깐 광채는 땅에서 10cm 정도를 높여 습기를 막았다. 광채의 문에는 쇠고리를 달았는데, 이 집의 역사만큼이나 고풍스럽다.

 

이 집에서 황윤석 선생은 당대의 대유학자인 김원행의 문하에서 실학을 접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10세부터 63세 까지 54년간의 일상을 기록한 이제난고를 비롯하여 역대운어, 이수신편, 성씨운휘3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문학, 경제, 예학, 사학, 종교, 천문, 지리, 언어, 예술, 의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박학한 지식을 갖춘 선생이 태어났다는 이곳 생가. 집안 곳곳에 배어있는 겸손이 눈이 띠는 듯하다. 화려하지 않은 집이 그저 선생의 기품을 닮은 듯하다. 집을 돌아보면서도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걷는 것은. 행여 선생의 학문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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