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시 동명동에 소재한 보광사는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산사의 느낌을 받는 곳이다. 앞으로 20m 정도를 나가면 영랑호와 닿고,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시내 중심가까지도 걸어서 15분 정도면 나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사의 분위기를 맞볼 수 있다.

 

이 절은 예전 원효스님이 도를 닦던 자리라고도 전해지며, 골짜기 이름을 불당골이라도 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관음'이라고 각자를 해 놓았으며, 이 관음바위 위에서 '영랑스님'이 동해와 금강산을 바라보고 공부에 전념했다고도 전한다.

 

관음바위가 있는 절 뒤편은 산이라고 해도 그저 작은 소나무 동산 정도이다. 그 위로 오르면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 바위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한다. 이 바위가 바로 영랑스님이 날마다 공부에 정진하던 '관음바위'라는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면 바위에 커다랗게 '관음'이라는 글자를 각자해 놓았다.

 

 

속초 영랑호 보광사는 설악산을 뒤뜰 삼고 동해를 앞뜰 삼아 영랑호를 품은 속초의 대표적인 전통사찰이자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다. 보광사는 속초를 찾으면 꼭 들려야하는 전통문화 장소로 승속 구분 없이 맑고 향기로운 세상으로 함께 가는 열린 도량이다.

 

보광사는 원래 안양암으로 1623(인조 원년) 광명당 등휘당이 창건하고 1937(개산314) 도천면이 속초면으로 개칭되자 보광사로 개칭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지장보살좌상,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현왕도, 사천왕탱화 등의 성보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대표적인 전통사찰이다. 전통사찰로 지정된 영랑호 보광사에는 역사와 세월을 이겨낸 빛나는 문화유산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대웅전의 <목조지장보살좌상> <현왕도>는 강원도 지정문화재이며 그 외의 많은 비지정문화재를 보유한 외형적 아름다움 외에 전통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찰이다.

 

보광사는 소가 누워 평화롭게 풀을 먹고 있는 와우형(臥牛形)의 길지에 스님이 부처님께 기도하는 형국의 호승배불형(胡僧拜佛形)터로, 배산임수(背山臨水) 좌청룡 우백호의 용이 여의주를 품고 있는 비룡함주형(飛龍含珠形)의 천하대복지(天下大福池) 명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1944일 일어난 속초·고성 대화재 당시, 화마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전각과 유물들을 지켜낸 불가사의한 도량으로 부처님의 가피가 충만한 최길상(最吉祥)도량이다.

 

 

보광사는 모든 것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봄에 <영랑 축전>, 여름에 <영랑호 칠석달빛문화제>, 겨울에 <동지팥죽축제>를 연례행사로 주관하고 있으며, 나눔의 일환으로 어린이 구호단체(www.goodworld.kr) 굿월드자선은행과 결연하고 부설 굿월드스토리에 협찬하고 있다.

 

관음바위 한편에는 누군가 일부러 파 놓은 듯한 자국이 보인다. 관음바위 위에 오르면 펼쳐지는 동해와 설악산, 그리고 금강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밑으로는 영랑호의 푸른 물이 소나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관음바위를 떠나 봉우리 위의 바위 밑을 통과한다. 흡사 석문과 같은 바위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사 저리 의지를 하고 믿고 살면 참 좋으련만. 30~40년 전에는 이 바위 아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시끄럽게 징을 두드려대고는 했다.

 

관음바위는 보광사 와불전 70m 뒤 산등성이에 있는 가로15m 높이8m로 동해바다 일출을 바로 볼 수 있는 큰 암벽이다. 오른쪽 모서리에 세즉사바구난대성(世卽娑婆救難大聖)’이라 쓴 작은 글씨가 있고, 사방 1.2미터의 큰 글씨로 중앙에 관음(觀音)’이라는 두 글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 옆 왼쪽에는 작은 글씨로 西曆 一九五二年 六月 日, 李亨根 題, 蒼軒 崔泓熙 書라고 새겨져 있다. ‘관음의 뜻은 관음보살을 말한다. 관음보살은 세상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분으로 보광산 불당골에 화현하여 세계평화와 국태민안을 서원하며 큰 바위에 새겨졌다.

 

각자를 창헌 최홍희(1918.11.9.~ 2002.6.15)는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리 출생이다. 창헌 최홍희는 일본주오대학 법학과1학년인 1944년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 근무 중 조선학병중심으로 전국반일동맹조직을 도모하다가 검거, 6년형을 받고 평영형무소에 수감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그 후 대한민국육군에 들어가 장성이 되었다. 6.25한국동란 중 1952년 지역 1군단장 이형근 장군과 창헌 최홍희 장군(후에 6군단장)의 글씨가 보광사 관음바위에 암각 되어있는 것이다.

 

창헌 최홍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탁견이라 하자 태권도라는 용어를 고안 태권도(跆拳道)라는 명칭을 지었으며, 독립운동가·군인·서예가로 19526월에 보광사 바위에 본인의 글씨로 관음이라 새겼다. 최홍희는 1군단 참모장 때 무술시범을 열었으며 1953년 제29보병초대사단장부임 해 부대이름을 태권도부대라 하고, 19553군관구 사령관으로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쓴 태권도라는 글씨를 받았다.

 

 

1960년대 제2훈련소장, 1961년 제6군단장, 1962년 예편 후 말레이시아 대사, 1966년에는 박정희와 트러블로 인해 1972년 해외로 망명했으며, 캐나다로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설립하였다. 북한과 함께하여 공산권국가에 태권도를 보급하는데 힘썼으며, IKF 후계자로 장웅IOC 위원을 지명했고, 2002년 평양에서 83세로 사망, 애국렬사능에 안장되었다.

 

관음바위는 보광사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관음바위 외에도 보광사는 여러 문화재와 유물, 미술작품 등을 전시하여 시민들과 속초를 찾는 분들에게도 문화체험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템플스테이, 야외 음악회, 결혼식 장소로도 무료 대관을 원칙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를 지나다 보면, 길가에 5층 석탑과 석불이 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의 낮은 산 쪽으로 쇠줄로 이어 만든 철렁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이 나타난다. 낮은 구릉을 넘어서면, 강 쪽 밑으로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낙엽이 쌓이고 눈이 채 녹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강물로 처박힐 판이다. 강가로 내려서면 우측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성이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아마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26일부터 3일간 벌어진 인근의 탄금대전투로 인해,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왜군과 탄금대에서 전투를 한 신립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전쟁에 패하게 되자 스스로 탄금대 앞 남한강으로 뛰어 들었다. 같이 이 전투에 참여했던 부장 김여물과 이종장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왜군은 충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결국 신립의 패전으로 인해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불이 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할까? 그것은 아마 마을사람들의 염원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무장 신립의 마음을, 남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 마애불과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마도 멀지 않은 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신립 장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는 이러한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때로는 황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전해지는 그 내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들의 끈끈한 정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낙엽과 눈이 쌓여 미끄럽다. 아래로는 남한강의 물이 보인다.


충주지역의 대표적인 마애불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연 암벽에 조성을 한 이 마애불은 윗부분은 돋을새김을 하였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처리를 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낮은 돋을새김을 한 것이 선각처럼 보인다. 아래는 생략이 된 듯한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에 속한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 큼직한 코와 귀 등이 자애로움보다는 근엄함을 엿보게 한다. 흡사 근엄한 장수상의 상호다. 그래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했던 것은 아닌지. 법의는 통견으로 그려냈는데, 구불구불한 선을 어찌 저리도 부드럽게 처리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절벽에 그려낸 마애불의 법의 자락이 바람이라도 불면 너풀거릴 것만 같다. 11세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창동 마애불. 어찌 보면 투박하기 만한 이 마애불이 오히려 정감이 드는 것은, 토속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인가 보다.

 


마애불의 윗부분은 돋을 새김을 하였다. 찢어진 눈꼬리와 뭉뚝하고 큰 코가 위엄있게 보인다. 그래서 신립의 자화상이라고 했을까?


통견으로된 법의. 선각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돋을새김을 한 것이다. 법의의 굴곡된 주름이 자연스럽게 너풀거리는 듯 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조성을 한 것일까?

 

창동 마애불은 발목 밑의 부분이 생략이 되어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생략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한 밑 부분의 바위가 아래쪽으로는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저 부분이 저렇게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만일 그 밑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면, 그 부분에 발이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크기로 보아 그 움푹한 곳이 바로 발목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단을 놓고 마애불의 앞쪽에도 난간을 둘러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에는 강물이 발목까지 출렁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마애불을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마애불은 산이나 들에 조성한다. 자연적인 절벽을 이용해 마애불을 조성하지만, 이렇게 강가에 조성을 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것도 당시의 지형적인 여건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주변을 보면 이곳이 물에 잠기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밧줄이라도 타고 내려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해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마애불의 밑을 보면 움푹 들어가 있다. 저 곳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라면 발이 있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창동 마애불.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문화재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가 정성이 가득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화재라고 해도, 그것을 만든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이 오래도록 문화재를 지켜 온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살아가는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노력과 땀이기에, 우리가 그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받은 지인의 도움을 그 자손에게 갚았다

 

마애불이란 바위나 암벽 등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30여 년 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난 수많은 마애불들. 언젠가는 마애불에 관한 작은 책자를 하나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마애불이 있다고 하면 찾아다녔다.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험한 길을 걸어야 하기도 하고 복중 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산길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많은 문화재 중에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답사는 어렵고 고통스런 길이었다.

 

그렇게 마애불을 찾아다니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대체 장인은 왜 이런 험산준령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인지? 지금처럼 장비도 발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높은 암벽을 타고 내려와 저렇게 바위에 그 거대한 마애불을 조각한 것이지? 마애불을 만날 때마다 그런 질문은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 대답 없는 마애불의 조성을 생각하면서 그 어떤 불교미술품보다 몇 배의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내가 답사를 하다가 마애불을 만나게 되면 꼭 한 가지 치루는 의식이 있다. 바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에 서원하는 바를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그 간구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확인은 필요치 않다. 그저 내가 마애불을 만났고 그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의 정성을 느끼고 있기에 마애불 앞에서 간절히 서원을 간구하면 막연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마애불에 대한 나의 믿음은 답사를 계속하고 더 많은 마애불을 만나게 되면서 확고해져만 갔다. 그것은 마애불에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나는 마애불마다 마애불에 읽힌 이야기는 우리들의 믿음을 초월하는 것들이다. 결국 마애불은 우리가 상상하는 정성을 뛰어넘는 장인의 노력을 요하고 있고, 그런 노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서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 나는 마애불을 조성할 생각을 했니?

 

20168월은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런 날씨를 피해 간 곳이 바로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금강산 노인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정수암이라는 암자다. 이곳 주지스님은 벌써 20여년 가까운 시간을 늘 마음을 더하고 살아온지라 마음 편하게 찾아갔다. 정수암 한편에 자리한 요사에서 하루를 묵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인법당 앞에 바위에 마애불이 보였다.

 

그 전날까지도 볼 수 없었던 마애불을 언제 누가 저렇게 조성을 한 것일까? 그런데 그만 헛것을 본 것이다. 그저 덩그마니 자리한 바위인데 왜 마애불이 보인 것일까? 법당 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데 마애불을 조성하자라는 생각이 든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위를 깎아 마애불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 마애불을 조성하려면 그 경비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달을 쉬지 않고 노력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로서는 그 마애불을 조성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때 내가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 서원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낯 모르는 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말 우연히 그 지인을 수십 년이 지나 만난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인가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그 지인은 나중에라도 자신의 딸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딸처럼 아껴주라는 부탁을 했다. 사람이 술김에 하지 못할 약속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그 딸을 만날 일도 없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우연일까? 공덕일까?

 

사람이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을 하신다. 갚기 싫어도 갚아야 할 때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사람이 어떻게 이 넓은 세상에 그 도움을 준 지인의 딸일 수가 있겠는가? 영화에서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그 따님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저 내가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따님의 자제가 몸이 불편해 몇 차례인가 수술까지 받았다는 이야기에 그 무더운 복중에 절을 찾아다니면서 나름 간절히 기원을 하고는 했다. 내가 찾아다닌 절은 대개 마애불이 인근에 소재한 곳이고 가급적이면 마애불을 찾아가 기원을 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 바위가 마애불로 보였나보다.

 

결국 스님과 상의를 하고 여주에 살고 있는 의동생인 작가에게 당부를 했다. 마애불을 조성하는데 의형제들이 조금씩 경비를 마련해 조성하자고. 선뜻 마애불을 조각하겠다고 나선 여주아우나 함께 동참하겠다고 나선 주변의 지인들. 아마 내가 마애불을 조성해 받는 공덕이상으로 도움을 준 지인들이 더 많이 받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게 마애불의 조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20169월 연화대를 뺀 부분이 조성이 되어 점안식을 가졌다. 그리고 17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연화대 조성을 하지 못해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번에 아우가 바쁜 일정에서도 며칠 시간을 내 연화대 조성을 마무리했다고 연락을 취해왔다.

 

 

선생님 덕에 우리 애가 달라졌어요. 이제 스스로 운동도 하고 취직자리도 알아보고요

아우가 고성으로 17개월이나 미완으로 남아있던 마애불의 연화대를 조성하기 위해 떠난다고 연락을 취하던 날 만난 지인의 따님이 전해준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듯하다. 마애불을 조성할 때 크던 작던 도움을 준 지인들의 이름을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 한 면에 각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들은 콧방귀를 뀔지 모르지만 나의 간절함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마애불을 조성한 수많은 장인들이 그 믿음 하나로 그 높은 바위를 정 하나를 이용해 쪼아냈을 것이다. 돌아오는 4월초파일(522)엔 힘들게 조성한 마애불을 찾아가 감사의 공양물이라도 올려야겠다.

 

국보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던 날

 

20041212, 해질녘 찾아간 서산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일부러 벡제의 미소라는 삼존불을 보기 위해 찾아갔지만 실망만 가득 안고 뒤돌아서야 했다. 해가 기울기에 따라 미소가 달라진다는 말에 찾아갔는데 보호각을 만들어 놓아 해가 들지 않는 삼존불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은 보호각을 지어놓고 삼존불 주변에 붉은색이 도는 흙으로 발라놓고 아래편 삼존불을 조각한 바위까지 흙칠을 해놓아 도대체 국보를 이렇게 훼손해도 되는가에 대해 분노마저 느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놓은 당사자들은 국보인 마애여래삼존불을 보호한답시고 해 놓은 짓이었겠지만 말이다.

 

 

44일 오전. 서산시 은산면 용현리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삼존불을 오르는 길을 가로 질러 내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번에 찾아가보니 전혀 낯선 곳이 되었다.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았고 마애여래삼존불로 오르는 길은 내에 다리를 놓고 돌계단을 놓았다. 사람들이 오르기 쉽게 조성을 했지만 난 그것도 너무 인위적인 듯해서 달갑지가 않다.

 

문화재란 조성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기조차 하다. 내에 걸린 다리를 지나고 돌층계를 따라 오른다. 높지 않은 층계는 가파르다. 처음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화장실이며 관리사까지 지어놓았다. 국보를 관리·보존해야 하니 이해를 할 수밖에.

 

 

불이문을 지나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다

 

관리사에서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러 가는 길에 불이문을 조상해 놓았다. 불이문 앞에 멈춰서 마음을 다스린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피안의 세상이다.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 문에서 지금까지 의심으로 가득찼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천천히 마애여래삼존불로 다가가 앞에 보이는 삼존불을 항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바위에 돋을새김을 한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바로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가 상처만 가득 안고 돌아갔던 곳이다. 바위에 덧칠해 입혀놓았던 흙더미도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바닥에 높이 쌓였던 흙도 제거해 제 모습 그대로 사람을 맞는다. 중앙에 석가여래입상을 비롯해 오른편에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왼편에는 제화갈라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모습 그대로를 보기 위해 벌써 15년 전에 이곳을 찾았지만 아제야 훼손되지 않은 백제의 미소를 만난다. 삼존상은 불상의 광배까지 생생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중앙 본존의 연꽃과 불꽃 무늬 광배가 꽃이 피어나는 듯 살아 있는 백제 후기의 작품이다. 그 앞에서서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온 것인가?

 

 

 

백제의 미소’, 그 모습에 반하다

 

삼존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처음처럼 마음이 맑지 않아서일 것이다. 다시 두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마음속으로 간구한다.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서원이다. 그동안 숱한 시간을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만나야 할 마애여래삼존불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았다는 것 또한 죄스럽다.

 

날이 잔뜩 흐린 날 찾아간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해가 나오질 않아 해의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백제의 미소를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이미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미소가 가득 차 있는데 말이다. 삼존불 앞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 뒤편에 있던 석불좌상을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에 누군가 가져 간 것 같아요. 언제 사라졌는지도 잘 모르고요

마애여래삼존불 관리사에 있는 분의 이야기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국보를 지키기 위해 사람까지 두고 관리를 했다고 하는데 언제 들고 간 것일까? 꼭 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조형된 모든 것들이 다 문화재라는 생각이다.

 

그 석불좌상 한 기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마음이 아픈 것이 제대로 보존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제 모습을 찾은 마애여래삼존불을 다시 만났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앞으로는 이런 마음 아픈 이야기를 다시는 듣지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향토유적도 소중한 문화재라는 사실 인식해야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마치 문화재는 그저 한 곳에 영원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지(無知)’라는 생각이다. 문화재는 각종 주변의 문제에 의해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수원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수원 화성을 자랑만 할 줄 알았지 정작 그 문화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문화재 중에는 국가에서 지정하는 사적이나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 중요민속문화재 등이 있고 광역지자체에서 지정하는 유형문화재나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이 있다. 하지만 그 과중은 다르다고 해도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만 그 조성 연대나 정확성, 희귀성 등에 따라 차등 지정이 될 뿐이다.

 

국가나 광역지자체에서 지정을 한 문화재 외에도 중요한 것은 지자체에서 향토유적(鄕土遺蹟) 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향토유적은 정확한 조사를 마친 후 지자체나 국가의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다. 향토유적 자체가 그 지역의 문화재이기 때문에 그 역시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문화재이다.

 

 

 

수원의 향토유적 보존은 잘 되고 있을까?

 

수원에는 모두 22기의 향토유적이 있다. 그 중 1호는 수원시 권선구 수인로 126(서둔동)에 소재한 항미정이다. 항미정은 서호에 있는 정자로 본래는 화성을 쌓을 때 서호 동북쪽에 세웠는데, 순조 31년인 1831년에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으며 그 뒤 유수 신석희와 관찰사 오익영이 중수 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유무형문화재 중 국가나 광역지자체에서 지정받지 못한 문화재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해 보존을 하게 된다. 영통구 창룡대로 265(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 경내 입구에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3호인 동래정씨 약사불이 자리하고 있다. 이 약사불은 바위에 새긴 마애불로 우리 민속문화를 알 수 있는 문화유적이다.

 

동래정씨 약사불은 팔달구 화서동에서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온 마애불이다. 이 동래정시 마애불은 최근까지 동래정씨 집안 여인들에 의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의가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삼존상으로 조성 된 마애불은 본존 여래좌상과 좌우협시 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존상의 머리 뒤쪽에는 원형 두광이 표현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을로 보이는 이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으로 불상의 몸 부분 곳곳에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다. 동래정씨 마애불은 큼직한 이목구비에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은 원만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생략된 옷주름과 마애불이 좌정하고 있는 앙련과 복련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의 소박한 형태 등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나름 중요한 문화재이다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 필요해

 

2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원박물관에 들려보았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야외에 젖시가 되어있는 동래정씨 약사불의 보존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이다. 본존불이 약사여래불인 이 심존상은 한 개의 돌에 나란히 조성을 한 삼존상으로 본존불 좌우에는 같은 형태의 협시불을 조각하였는데 머리에 쓴 보관으로 보아 관음보살을 새긴 듯하다.

 

한 개의 석재에 이렇게 삼존불을 조성한 것은 보기 드문 예로 이 동래정씨 약사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치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런 약사불은 보호전각을 짓고 수원박물관 입구에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보존불 안면에 새가 똥을 쌌는지 여기저기 흔적이 남아있다.

 

야외에 전시한 문화재의 경우 지연적인 이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늘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야 조금이라도 더 온전한 형태로 보존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보존불과 우측협시불의 안면에 남아있는 하얀 분비물을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일까? 새들의 분비물은 산성이기 때문에 문화재에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누군가 관심을 가졌다면 이렇게 더럽혀진 문화재의 안면부분을 치우지 않았을까? 하얗게 더렵혀진 동래정씨 약사불을 보면서 앞으로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는 한 언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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