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800년 보호수 향나무의 가르침
봉녕사 향나무 창건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
사람이 기쁨과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모든 생명을 아프게 하거나 해치지를 말라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을 없애주고
죽음에서 살려주는 일을 즐겨하면
뒷날 반드시 행복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느니라
불경인 법구경 도장품 중의 가르침이다.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수령 800년이 지난 수원시 보호수인 향나무 아래 적힌 글이다. 이 향나무는 수원22로 2007년 5월 22일 지정이 되었다. 향나무의 높이는 9.4m이며, 둘레는 2.8m이다. 향나무의 경우 이렇게 큰 나무는 그리 많지가 않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침엽교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상나무, 또는 노송나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향나무는 바늘모양과 비늘모양의 두 종류가 있다. 향나무의 심재는 진한 향기가 나므로 이곳을 이용해 제사를 지낼 때 향료로 사용을 했다. 요즈음은 향나무를 정원수나 공원의 나무로 많이 식재하고 있다.
봉령사 향나무를 만나다.
26일(일) 오후에 돌아 본 봉령사. 향나무는 봉녕사의 중심전각인 대적광전과 용화각 앞에 자리한다. 봉녕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향나무는 수령이 800년이 지난 고목이다. 향나무의 밑동은 한쪽 면을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있으며, 가지 하나가 밑으로 처져 마치 용틀임을 하는 듯하다.
이 향나무를 볼 때마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수령이 오래되었고, 높이나 둘레가 적지 않은 나무인데 왜 보호수로만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외과수술은 했지만 잎이나 가지 등을 보면 실하게 잘 자라고 있다. 봉녕사를 찾을 때마다 이 향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이 나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중에서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향나무도 여러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제232호인 남양주 양지리 향나무(수령 500년), 240호 서울 선농단 향나무(수령 500년), 88호인 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수령 800년), 314호 안동 주하리 뚝향나무(수령 500년), 321호 연기 봉산동 향나무(수령 400년), 427호 천안 양령리 향나무(수령 1,200년), 194호 서울 창덕궁 향나무(수령 750년) 등이 지정되어 있다.
봉녕사 창건과 맞아 떨어지는 향나무
이 외에도 많은 향나무들이 지역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봉녕사 향나무를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향나무가 언제 누가 이곳에 심었을까 하는 점이다. 봉녕사는 고려 희종 4년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지금으로부터 807년 전이다. 이 향나무의 나이도 800년이다. 2007년에 지정이 되었으니, 이 향나무의 수령과 봉녕사의 창건연대가 일치한다.
우연일까? 그렇다면 이곳에 절을 창건한 원각국사와 이 향나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봉녕사의 창건연대와 향나무의 수령을 보면, 이 향나무는 봉녕사를 창건할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향나무가 바로 봉녕사의 역사인 셈이다. 이 향나무를 더 애지중지 보호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남들은 그저 쉽게 오래 묵은 향나무 정도로 알겠지만, 이 향나무와 봉녕사의 관계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 향나무가 곧 봉녕사이고, 봉녕사가 이 향나무라면 억지스런 주장일까? 향나무 앞에 서서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하다. 대낮에 나온 낮달이 향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이 나무가 더 고귀하게 느껴진다. 그 오랜 세월을 이 자리에서 역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임해정 앞바다에는 수로부인의 미모에 반한 용이 산다.
남의 부녀자를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가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해가(海歌)라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海龍)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神君)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은 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神物)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영험한 뱀이 살고 있다는 수령 1,200년의 은행나무
주변에는 열녀와 효부, 효자각 등이 서 있어 더 엄숙해
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누구는 천년이라고 하고, 누구는 1,200년이라고 한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어 우리나라 최고령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76호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수백 년만 되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입을 벌린다. 그 세월이 가늠이 되질 않아서이다. 그런데 1,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는 소리에, 나무가 그렇게 신령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나무의 높이는 29m, 가슴높이의 둘레가 14.5m에 밑동의 둘레는 13.8m에 이른다, 가지는 동서로 22.5m에 남북으로 22m나 된다고 하니 가히 일품이다.
답사 길에서 만난 영월 은행나무. 지나는 길에 이정표를 찾아들어간 마을에서 만난 은행나무는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 등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흡사 로또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다. 영월의 은행나무를 보았을 때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처음에는 이곳에 ‘대정사(對井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새롭게 난 줄기가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험한 은행나무로 마을에서 신목으로 제사를 지내
“이 나무에는 옛날부터 커다란 뱀이 살았어.”
“뱀을 보신 분이 있으세요?”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있지”
“이 나무는 얼마나 살았다고 해요?”
“천 이백년도 더 되었다고 하네.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르지”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워낙 영험한 나무라, 음력 7월12일에 이 나무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가 나무 주변에는 가급적이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은행나무에게 불경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나무 주변을 축대를 쌓고 보호를 하고 있다.
신령한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그 나무의 수령조차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을주민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로 기억을 하고 싶어 한다. 잎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은 어떠할까? 내년에는 여름철 은행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그것도 음력 7월 12일에. 아들을 점지하는 나무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치성을 드리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변에 효자와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는 뜻 깊은 마을
이 나무가 더 신령스러워 보이는 것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하송리 한편에 작은 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온양방씨 열녀각, 경주이씨 효부각, 그리고 김지룡 효자각과 엄윤 효자각이다. 은행나무의 수령만큼이나 오래도록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오랜 세월 효자와 열녀가 없었겠는가?
열녀 온양방씨는 17세에 엄병수에게 시집와 4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까지 보양하면서 살았다. 고종 10년인 1873년 3월 27일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4달만에 남편과 사별했으니 자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까지 조양했다고 하니 가히 그 효성을 어찌 칭찬하지 않겠는가?
효부 경주이씨는 김지학의 처로 가족들이 출타 중에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무는 단지요법으로 시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다. 효부각은 고종 4년인 1867년 4월 20일에 정문이 새워졌다.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네들에게는 단지 옛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 정성이 갸륵하다.
효자 엄윤과 효자 김지룡 역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답사길에서 우연히 만난 은행나무와 열녀, 효부, 효자각. 이런 뜻 깊은 것들을 만나면 피곤함이 가시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아 아니라, 아름다운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해와 어우러지는 서천 마량리 동백숲
서천은 우리나라의 명창들이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란 칭호를 듣던 이동백 명창이 종천면 도만리 출신이며, ‘한국 판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극찬을 한 김성옥 - 김정근 - 김창룡, 김창진으로 이어지는 김문의 소리가문이 장항 빗금내에서 살았다. 이렇듯 우리문화의 보고로 불리는 서천은 마량리 동백숲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서천군 서면 마량리는 유명한 동백나무 숲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서천 팔경 중의 한 곳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 5백 여 년이 지난 동백나무 80주 정도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마량리 동백 숲은 3월 하순부터 5월 초순까지 푸른 잎 사이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붉은 동백꽃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동백은 그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 등으로 구분을 한다. 열매는 삭과로 가을에 구형으로 익으며 3갈래로 벌어지는데, 그 속에는 진한 갈색의 씨가 들어 있다. 아직은 파랗거나 붉어지는 열매가 달려있다.
절경에 자리한 동백 숲
시원한 서해바대를 바라다보면 앞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멀리 가물거리는 수평선에 떠 있는 무수한 고깃배들을 볼 수가 있다. 조금 가파르기는 해도 계단을 오르면 키가 큰 소나무 숲을 지나 동백 숲이 보인다. 동백 숲을 지나면 그 중간에 당집이 있다. 마량리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동백나무 숲 안에는 풍어제를 지내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으로는 서해안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동백정’이 자리하고 있으나, 현재 동백정은 보수공사 중이다. 이 동백나무 숲은 이곳에서 500m 쯤 떨어진 마을의 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러한 전해지는 이야기는 별로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일설에는 약 300여 년 전 이 지방에 부임한 고을 수령이 꿈을 꾸었는데, 바다 위에 떠 있는 꽃다발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바닷가에 가보니 정말 꽃이 있어서 가져와 심었는데, 그 때 심은 꽃이 현재 동백나무 숲이 되었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정월에 이곳에 모여 풍어제를 올리며, 고기잡이를 나간 어선들이 재앙이 없기를 빌고는 한다.
휘귀한 보호 숲 마량리 동백나무 숲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대만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한다.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동백은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마량리는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상에 자리하고 있어,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높다. 이곳의 동백나무들은 강한 바람을 받아 키가 작은 편이며, 3∼5m에 이르는 나무는 땅에서부터 줄기가 2∼3개로 갈라지면서 곁가지가 발달하여 나무의 모습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철을 기다리고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 정월에 시끌벅적하니 치러지는 풍어제와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저 멀리 나가있는 수많은 고깃배들이 만장을 느린 모습들을 그려보면서.
추석은 ‘근친(覲親)’과 ‘반보기’를 하는 날, 알고 계세요?
올 추석은 강원도 여행으로 쌓인 피로 풀어내고 새 기운 얻어
음력 8월 15일을 ‘추석(秋夕)’이라고 한다. 가을이 깊어진다는 말이다. 추석이 되면 모든 열매들이 결실을 맺어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하기에 추석을 ‘한가위’라고도 한다. 올 추석은 태풍 링링으로 인해 많은 걱정을 했다. 전통시장도 태풍으로 인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매상을 올렸다고 한다.
더구나 과수농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결실을 앞둔 과수들이 태풍으로 인해 많은 열매들이 낙과가 되는 바람에 올 일 년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결실을 맺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과수농가는 한숨만 몰아쉬고 있다. 가을 소득을 기대하면서 일 년 동안 정성들여 키운 과수가 못쓰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날 길을 떠났다. 평소에 수원을 벗어날 수 없는 나로서는 예전보다 짧은 기간의 추석이지만 마음먹고 길을 나선 것이다.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강원도 여행이라 마음을 설레며 떠난 길이다. 추석귀성으로 인해 길이 막힌다고 하지만 그동안 강원도를 여행하면서 막히지 않는 길을 익혀두었기 때문에, 고생스럽지 않게 강원도 고성군 최북단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었다.
추석은 근친과 반보기를 하는 날
추석이 되면 사람들의 마음도 풍족해진다. 그만큼 풍성한 먹거리들이 이 계절에 상위에 오르기 때문이다. 하기에 설날보다 추석이 항상 풍족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풍요로운 계절이다 보니 부모를 떠나 멀리 외지에 나가있는 자식들도, 이날 부모형제를 찾아보는데 이를 ‘근친(覲親)’이라고 한다. 추석 때는 시집을 간 딸도 친정을 찾아가 부모를 뵙는다.
시집간 딸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친정으로 나들이 하기가 쉽지 않다. 하기에 농사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먹을 것이 풍부한 계절인 추석 때를 전후해 근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근친을 할 수 없는 딸들은 친정과 시집의 중간 지점에서 부모를 만나게 된다. 이를 ‘반보기’라 한다. 이때는 좋은 음식을 서로 준비해서 만나게 되며, ‘반보기’는 근친과는 달리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기 때문에 그리움의 정은 배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나야 근친도 아니고 반보기도 아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며칠이라도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명절 때 뿐이라 추석연휴 기간 중에 여행을 떠난 것이다.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길을 나선다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나로서는 고향이라는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만 들린다. 먼 길을 달려 근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다.
그나마 단 2~3일이라도 도심을 떠나 바닷가나 산을 찾아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새롭게 앞으로 해야 할 일 등을 정리하는 것으로 근친이나 반보기를 대신한다, 마침 최북단이라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정수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어, 그곳을 찾아가 일 년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자 길을 나선 것이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시작하는 추석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도읍 안의 부녀자를 두 패로 나누어 두 사람의 왕녀가 각기 거느리고, 음력 7월 15일부터 8월 한가위 날까지 한 달 동안 두레 삼 삼기를 하였다. 마지막 날에 심사를 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회소곡’을 부르며 놀았다고 하는데, 이를 ‘가배’라 해서 추석의 시원으로 보고 있다.
풍족한 먹거리와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즐길 수 있는 명절인 추석. 올해는 일요일까지 연 4일의 연휴를 맞게 되었다. 추석을 맞아 매년 일 년이면 몇 차례씩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본 여행. 물론 남자인 내가 친정을 찾아간 것도 친정 식구들을 만난 것도 아니지만 그동안 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의형제들을 만나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새로운 힘이 솟는다.
올 추석은 나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있는 추석연휴가 되었다. 새로운 기분으로 일상생활로 돌아온 날. 근친과 반보기는 아니지만 마음만은 그에 못지않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새로운 기운으로 열심을 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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