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6에 소재한 중요민속자료 제147호인 청천리 고가는,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현재는 곁에 충북양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 때는 이 집을 양로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이 청천리 고가는 ㄷ자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를 일각문을 사이로 동서로 나란히 두고, 안채의 앞에는 중문을 달아 一자 모양의 광채를 배열했으며, 뒤쪽에는 4칸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선이 고운 사랑채의 멋은 단연 최고

 


 

 

청천리 고가의 대문채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대문의 외벽은 기와로 줄 문양을 넣은 것이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ㄷ 자 모양의 사랑채가 자리한다. 청천리 고가의 사랑채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집의 사랑채와는 다르다. 우선 사랑채의 지붕을 보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선이 일품이다. 어떻게 저렇게 양편 날개채의 지붕을 아름다운 선으로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보기만 하여도 덩달아 하늘 위로 날아오를 듯하다.

 

중앙은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 등으로 꾸몄는데, 대청은 동쪽으로 몰아 낸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동쪽의 날개채를 누마루로 올려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게 했다. 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둘러 대청까지 연결을 했으며, 대청 앞에는 들문을 달아 들어 올렸다. 이 집은 19세기에 송병일이 지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종가로 6대가 거주하였다는 청천리 고가는, 1944년부터는 사회복지법인 충북양로원에서 사용을 하기도 했다.

 

대문 외벽은 기와로 선을 넣어 아름답다. 우측에는 '충북양노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딴 사랑채보다 지붕의 선이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붕의 선이 있다니
 
사랑채의 동편끝에는 누마루를 두어 누정과 같이 꾸몄다.
 
두칸 대청은 동쪽으로 몰아 내었다. 이렇게 대청을 낸 것도 이집의 특이한 점이다.

 

안채 모서리에 쌀뒤주 방을 드리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안채는 ㄷ 자 집으로 안마당에 기단을 쌓은 장독대와 돌로 둥그렇게 꾸민 우물이 자리한다. 마침 안채의 방과 대청을 연결하는 툇마루에는 메주를 말리느라 잔뜩 벌려놓았다. 그 모습이 한없이 정겹다. 양로원의 관계자 설명에 따르면 지금은 고가는 사용을 하지 않고 있으며, 양로원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직접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방의 뒤편에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안방의 뒤편쪽 모서리에 까치구멍을 낸 이상한 방이 한 칸이 보인다. 문을 널문으로 해 달았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이 모서리 방이 바로 쌀뒤주 방이다. 어떻게 안채의 뒤편에 이렇게 뒤주 방을 만들어 놓을 생각을 한 것일까? 고택의 무한한 변신에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안채 역시 대청을 동편으로 몰아 조성을 했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창호는 모두 들문으로 만들었는데, 양편 날개채가 색다르다. 우측 윗방과 사이를 떼어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동편 날개채 끝에 부엌을 드렸다. 양편 날개채의 지붕은 중앙의 지붕보다 낮게 두어, 전체적으로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ㄷ 자모양의 안채도 대청을 동편으로 몰았다. 양편의 날개체도 특이하다.
 
안마당에 기단을 쌓고 장독대를 꾸몄다. 이 또한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뒤주방 안채의 모서리에 마련된 쌀 뒤주 방. 이런 형태는 볼 수가 없었다.

 

집안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중문채와 사당

 

우암 선생의 종가였다고 해서인가, 이 고가의 꾸밈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집의 특징은 어디 한군데 모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안채의 앞에는 - 자형의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안채와 중문채를 합하면 튼 ㅁ 자 형으로 꾸몄다. 중문채는 광채로 꾸몄는데, 중문을 서쪽 끝에 놓고, 일렬로 광과 헛간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 뒤편으로는 네 칸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모두 앞으로 툇마루를 내고 양편의 두 칸은 까치구멍을 낸 막힌 벽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두 칸은 창호로 보아 마루방으로 꾸민 듯하다. 양편 두 칸은 아마 기물을 넣어두는 곳이고, 가운데 두 칸이 재실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뒤편에는 네 칸 사당을 두었다.

 

처마가 아름다운 집, 안채 모서리에 쌀되주 방을 드린 집, 안마당에 장독과 우물이 있는 집. 괴산 청천리 고가는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니, 과거 이 집안에 살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대단한 가문도 사라지는 것일까? 지역에서 나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청천리 고가를 보면서,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1. 캡틴67 2021.01.3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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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갈산중학교 인근에 보면 충남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전용일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은 예전에는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네모반듯한 대지위에 높은 담장을 두른 전용일 가옥은 처음에는 99칸 반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99칸 반의 집이라니, 그 규모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의 집이었을 목조기와집은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일 가옥은, 전체적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을 갖춘 튼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남아있는 안채만 보아도 이 집의 규모를 알 수 있어

 

현재 남아있는 28칸의 안채는 바람벽을 둔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청과 온돌방을 두고, 좌우의 날개채를 달아 남향을 향한 집이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자형은 띤 집의 구조지만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튼 자형이다, 중문을 달린 중문채와 안채의 날개채 사이에는 쪽문을 낸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구조로 축조가 되어있다.

 

예전에는 100칸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칸을 뺀 99칸의 집을 짓는 것이 지방의 토호들이나 세도가들이 집을 짓은 방법이다. 그러나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달아낸 99칸 반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 후원을 보아도 이 집의 세를 알만하다. 현재는 안채를 중심으로 네모난 대지위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안채만이 남아있지만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용일 가옥의 가세를 알기에 충분하다.

 

 

 

 

 

 

부재 등이 돋보이는 전용일 가옥

 

전용일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 건물에는 팔각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에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부호였을 것 같다. 집안 곳곳을 살펴보면 이 집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쪽문의 문턱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전용일 가옥.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들이 크고, 가공기술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건축 기술과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이 집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대표적인 양반집이다.

 

바람벽을 막은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방과 부엌 등을 덧달아 냈다. 부엌이나 광 위에는 까치구멍을 낸 살창들도 견고하다. 목재 하나라도 흐트러짐이 없는 집이다. 정면을 보면 우측으로 너른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는데, 안채에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여늬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좋은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건넌방과 부엌, 광들을 놓았는데 모든 자재들이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을 만큼 견고하다. 부엌을 건너 방을 드렸는데 문 위에 까치구멍을 낸 것을 보면, 이 방은 곳간방으로 보인다. 중문과 연결이 된 중문채는 모두 광으로 사용을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런 많은 광을 필요로 할 정도로 식솔들을 거느렸을 것이다.

 

홍성의 대부호 양반집으로 알려진 전용일 가옥. 영원한 세도는 없다는 옛 말을 떠올리게 하는 집이다. 그러나 남아있는 안채의 규모나 그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99칸 반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어도, 그 자취는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소재한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된 홍범식 가옥. 이 가옥은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식 가옥은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가옥으로,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 선생의 고택이다. 이 가옥은 괴산 3.1만세 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말끔하게 복원을 마친 홍범식 가옥. 일요일에 찾은 홍범식 가옥 앞에는 관광 안내소가 자리하고 있어 괴산군이 이 가옥을 남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부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집인데다가 역사적인 장소인 홍범식 가옥은, 괴산군의 문화를 알리는데 크게 일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웬 문이 이렇게 많아?

 

말끔하게 단장된 홍범식 가옥을 돌아보면 절로 한마디를 하게 된다. 대문서부터 시작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수도 없이 많은 일각문 때문이다. 집안을 돌아보니 10여 개가 되는 문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흡사 미로 찾기라도 하는 집인 듯하다.

 

이렇게 집안에 문이 많다보니,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꽁꽁 감추어 놓은 집안의 내력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민초들의 담장은 그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인데 비해. 아무래도 반가의 집들은 이렇게 조금은 가려 놓는 것이 당시의 풍습인 것 같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를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좌측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은 작게 만드는 것이 통례인데, 홍범식 가옥의 사랑채를 들어서는 일각문은 두 칸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일각문 우측에는 작은 쪽문이 나 있는데, 일각문을 열지 않고 이 쪽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다. 이런 쪽문은 대개 솟을대문에 마련하는데 비해, 이렇게 사랑채를 출입하는 문에 쪽문을 놓은 것은 특별한 건축 구성이다.

 

사랑채는 자 형으로 동북쪽의 부엌 앞에 한 칸 방을 두고 옆으로 두 칸 방, 대청, 다시한 칸 방을 나란히 배열하였다. 부엌 앞의 돌출이 된 방을 빼고는 네 칸 모두 앞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다섯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바라보면, 우측 끝에 작은 쪽문이 있다. 바로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비밀 문이다. 밖으로 나가 중문을 통하지 않고, 사랑채에서 이 문을 통해 안채로 출입을 할 수가 있다. 나름대로 넓은 집안의 동선을 최대한 짧게 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반가라 다르네, 도대체 광이 몇 개여?

 

홍범식 선생은 풍산 홍씨의 명문가 출신이다. 홍범식 가옥을 둘러보면, 집안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7년 전북 태인, 1909년 충남 금산군의 군수가 되었다. 1910829일 순종이 한일합방의 조약체결을 발표하자, 그날 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는 바로 홍범식 선생의 아들이다.

 

홍범식 가옥을 돌아보면 집안에 많은 광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우선 대문채에 광이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안채 뒤편에는 뒤주를 겸한 다섯 칸의 자형 광채가 있다. 그 맞은편에도 담장을 둘러 일각문을 들어서면 세 칸으로 마련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도 광인 듯 하다. 담장을 둘러 별도로 마련한 것을 보아서는, 특별한 것을 보관하던 곳 같다.

 

안채 부엌의 뒤로는 뒤주가 있으며,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채에도 세 칸의 광이 자리하고 있다. 집 전체를 돌아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들. 곡간으로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안에는 이러한 광들이 많아, 당시 이 집이 얼마나 많은 농토와 식솔들을 거느렸는지 가늠이 간다.

 

 

넓은 안채에 재미난 작은 것

 

사랑채를 드나드는 일각문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중문이 있다. 이 집의 중문채는 사람이 기거하는 방이 없고, 세 칸의 광이 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들여다보는 것을 막았다. 안채는 자 형으로 꾸며졌다. 중앙에는 세 칸의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세 칸씩의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대청을 벗어나 꺾어진 양편의 날개채 끝에는 각각 부엌을 두었다. 너른 대청이 시원하게 보이는 안채는 오른쪽에는 세 칸의 툇마루를, 왼쪽에는 두 칸의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를 돌다가 보면 재미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세 칸 대청 뒤로도 툇마루를 놓고, 안방과 윗방 뒤로도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이 툇마루 밑에 굴뚝과 아궁이가 숨어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굴뚝과 아궁이는 윗방에 불을 때기 위한 것 같다. 이 큰 집에서 이렇게 툇마루 밑에 숨겨놓은 굴뚝과 아궁이라니. 고택을 돌아보는 또 다른 재미는 이렇게 새로운 것을 찾을 때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한 듯한.

 

 

번듯한 대문채와 행랑채

 

홍범식 가옥의 대문채는 모두 일곱 칸으로 꾸며졌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세 칸의 광이 있고, 우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 담장을 두른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네 칸으로 꾸며진 행랑채가 자리한다. 행랑채에 안담을 두르고 마루방을 놓은 집은 보기가 힘들다.

 

행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부엌을 두고, 두 칸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이 세 칸의 방 앞에는 모두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마루방은 행랑채에 기거를 하는 남정네들의 작업 공간으로 보인다. 행랑채의 부엌은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뒷문을 내었다. 이곳에서 음식이라도 해서 사랑채로 나르기 위함이었는가 보다. 넓은 집 안에서 집안 식솔들의 동선을 생각한 집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선조를 둔 파평윤씨의 후손들이, 사랑채를 짓는데 재활용을 했다고 하면 이해가 가는 일일까? 물론 추증으로 영상이 되긴 했지만, 조선조에 양반들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시기에, 딴 곳에서 옮겨온 목재를 이용해 사랑채를 꾸몄다. 사랑채의 기둥에는 그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52에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윤황선생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이 처음에 지어진 해는 정확하게 전해지지가 않으나, 윤황(15721639) 선생의 6대손인 윤정진이, 조선조 영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종가로 내려오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자형 사랑채와 자형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조는 튼 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담을 쌓아 안채와 구분하고 있으며, 좌측으로는 자형의 안채가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l 자형의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우측에는 높게 앉은 사당채가 자리하고 있다. 윤황선생의 고택은 화려하지 않으며, 간결하게 지은 옛 전통 가옥으로 중부지방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의 심성을 닮은 사랑채

 

윤황선생은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인조 때에는 동부승지, 이조참의, 전주부윤을 지내기도 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 선생은 자신이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자처할 수 있는 윤황선생의 고택. 앞으로는 - 자형의 사랑채가 6칸으로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다섯 칸이 있고, 좌우측에는 반 칸의 높임마루를 한 방이 있는데, 사랑채를 바라보며 좌측은 앞으로 돌출이 된 작은 공간이고, 우측은 측면으로 툇마루를 달아낸 누정 방으로 꾸몄다. 중앙 좌측의 두 칸은 온돌방으로 했으며, 이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대청은 두 칸 다 네 짝 문을 달아냈다.

 

이 집은 딴 곳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대청의 기둥을 보면 목재를 재활용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청 앞으로 나란히 선 네모난 기둥들의 위편을 보면, 나무를 끼웠던 흔적들이 있다. 당시 파평 윤씨들의 가문에서 이렇게 나무를 다시 재활용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도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남을 위해서 스스로를 버릴 줄 아는 윤황선생의 자손답게 집을 옮겨 지으면서도 절약을 했다는 것이다.

 

 

낮은 굴뚝에 얽힌 의미

 

뒤편으로 돌아가면 배수로를 내었는데, 연도가 그 배수로를 지나 낮은 굴뚝과 연결이 된다.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낮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늘 그 굴뚝처럼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위하라는 뜻이다. 종가집들의 굴뚝이 하나 같이 낮은 이유가 바로 그렇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 누구에게도 겸손하라는 것을 일러주는 교훈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방역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대개 한옥에서 소나무나 참나무 등을 이용해 불을 지핀다. 나무를 넣기 전에는 낙엽 등을 이용해서 불씨를 만드는데, 그때는 연기가 많이 나게 된다. 그 연기들이 낮은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집안 곳곳에 병충해를 잡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한옥에는 그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안채의 정숙함

 

윤황고택의 안채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분칠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정숙하다. 자 형으로 꺾인 안채는 좌측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같이 안채의 대청에도 창호를 달았다. 그리고 우측 맨 끝 방은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한데 아궁이를 내었다.

 

이렇게 높임마루를 놓았을 경우 그 측면에는 낮은 툇마루를 놓기도 하는데, 윤황 선생의 고택은 그 흔한 툇마루마저 없다. 그저 치장을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집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며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듯한 축대가 있다. 그 축대 한편에 장독대가 놓여있는데 일반적인 종가의 장독대와는 다르다. 그저 평범한 민초의 장독대와 다를 바가 없다. 무엇하나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하지 않은 집. 그래서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 것일까? 윤황선생의 고택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이 녹아있는 사당채와 연못

 

윤황선생 고택 사당채는 양편에서 오를 수가 있다. 사랑채 뒤에서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제의를 지낼 때 종친들이 사랑채에서 바로 오를 수 있도록 낸 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은 안채 뒤편 계단을 통해서 사당채로 오르는 길이다. 역시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이 문은 안채에 있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나를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에 앉아 좌측 높임마루에서 보면 그 앞쪽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주변이 정리가 안 돼 연못을 식별하기조차 쉽지 않지만, 아마 이 연못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들이 유영을 했을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닮은 집. 그리고 자연을 위한 집. 논산 윤황선생의 고택은 집 안에 그렇게 자연이 녹아 있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은 예전에 아흔 아홉 구비 물길이 들어오던 곳이다. 이곳은 충남 아산지역이면서도 경기도 평택과 도계를 이루고 있어, 오히려 아산보다는 평택 쪽에 생활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는 둔포까지 소금배가 들어왔다고 하는 포구에는 아가씨는 둔 색주가가 100집이 넘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 둔포면 신항리를 찾아가면, 마을에 고래 등 같은 한옥들이 몇 채 보인다. 그 중 가장 마을 안에 넓은 평지를 앞에 두고 한 가운데 집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된,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이다.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를 찾아가면 제일 먼저 느낌이 '거대하다'라는 생각이다. 물론 아흔아홉 칸 집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오히려 더 크다는 느낌이 든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자 형으로 꾸며진 대문채와 행랑채가 있다. - 자로 된 대문채와 꺾인 부분의 행랑채가 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행랑채와 연결된 담에는 중문이 있고, 중문은 담벼락이 행랑채와 연결이 되면서 다시 자의 광채와 중문채를 이루고 있다. 밖에서 보면 이 행랑채와 중문채의 담장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 중문채를 안사랑채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광채와 연결된 중문채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이란 집안의 남자들이 묵는 곳인데, 이 중문채에 연결된 방 등 공간은 집안에서 일을 하는 부녀자들이 기거를 하는 곳으로 안사랑채와는 다르다. 바깥쪽의 행랑채나 사랑채는 출입을 할 수가 있으나, 중문 안으로는 굳게 잠겨 있어 담 밖에서만 촬영이 가능하다.

 

안채는 중문채와 반대로 자 형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담 밖에서 몇 바퀴를 돌아 안채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고택을 찾아가면, 이렇게 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어려움이다. 안채는 모두 아홉 칸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 구성이다. 안채는 남쪽으로부터 부엌, 안방, 샛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인 곳에 두 칸의 대청과 두 칸의 건넌방, 맨 끝에 부엌을 배치하고 있다. 바깥사랑채와 안채사이에도 담장으로 구분을 하였다.

 

 

특이한 구조의 사랑채의 미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는 윤 전 대통령의 선친인 윤치소가 1907년에 지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에 자리한 사랑채는,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별도의 담을 둘러 일각문을 내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아래에는 숨은 쪽문이 있어 사랑채의 뒤로해서 안채로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사랑채는 서쪽으로 누정과 같이 높은 네모뿔대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방을 들여놓았다. 이곳에 오르면 앞뜰이 훤히 내다보일 것이다. 그리고 두 칸 큰사랑과 두 칸 대청, 건넌방을 두었다. 앞으로는 모두 유리문을 달아냈는데, 우리 전통 고택의 창호와는 다르다. 전체적으로 사랑채는 하나의 또 다른 공간 구성을 하면서 멋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집의 특징이기도 하다.

 

 

담장에 낸 굴뚝, 궁궐과 같은 효과를 내

 

사랑채의 뒤로 난 담장에는 굴뚝이 높게 솟아있다. 굴뚝은 사랑채와 땅 밑으로 난 연도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뒤로해서 안채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동선인 일각문 옆에 자리한 굴뚝. 흔히 우리가 고궁을 관람하면서 볼 수 있는 형태로 꾸몄다. 고궁을 관람하다가 보며 이런 담장에 난 굴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굴뚝 하나가, 이 집이 이 마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 비록 중간에 약간의 보수를 하였다고 하지만, 처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중문을 넘어설 수 없어, 안채를 꼼꼼히 살필 수 없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많은 고택을 보았지만, 그 중에서는 단연 '고래등'이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일 듯하다. 그래서 대통령이라는 큰 인물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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