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염원을 담은 빈신사지 석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와 제천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두 번째로 들린 빈신사지. 문화재란 볼 때마다 조금씩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아마 그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나름대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제천시 한수면의 빈신사지 석탑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사자 석탑이 몇 기가 전하고 있는데, 제천 빈신사지 석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라 때 석탑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연대와 이유가 확실한 빈신사지 석탑
문화재는 대개 그 형태 등으로 보아 연대를 추정한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이들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복장물 등이 모두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덤에서 빈신사지 석탑은 조성 연대와 목적이 확실하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단에 명문을 음각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문에 적힌 것을 보면 빈신사지 석탑은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조성을 했으며,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으로 인해 적국인 거란족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기를 염원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석탑은 명문을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는 9층 석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돌 위에는 사각의 하대가 놓여있고, 상부에는 두터운 테를 둘렀다. 그 밑에는 각 면을 파서 3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꽃문양이 그려진 안상은 고려시대 석탑 등의 기단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는 10행 79자의 글이 명문으로 음각되어 있다.
아름다운 상층 기단은 뛰어난 작품
상층 기단의 중석은 이 빈신사지 석탑의 백미라고 보여진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갑석을 이고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갈기를 세운 네 마리의 사자 중 앞쪽에 있는 좌우 두 마리의 사자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사선으로 밖을 보고 있다 뒤편의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안에는 비로자나불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을 담은 탑에 비로자나불을 조각한 것일까? 아마도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온 세상에 미치듯, 북방정벌을 위한 고려의 염원이 그렇게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이 연꽃은 가운데 연밥을 두고 주변에 꽃잎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는 위로 5층의 몸돌과 4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탑만으로도 고려 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네 마리의 돌사자는 그 모습이 다르게 조성이 되었다. 정면 좌우에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무엇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뒤편에 있는 두 마리는 입을 다문 형태이다. 이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어, 수사자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자는 힘차게 조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고려의 기상을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에 조성된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을 조성하면서 새겨 놓은 명문대로 거란을 영원히 물리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왕이 장수할 것을 바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기능은 ‘호국탑’으로 세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는 빈신사지 석탑. 오늘 이 빈신사지 석탑이 더욱 마음 안에 다가오는 것은, 혼란한 이 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비천의 최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 중에서 탑, 범종 등 불교 문화재를 보면, 비천인이라는 조각이 보인다. 비천인은 범종이나 석탑, 부도나 법당의 단청 등에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흔히 비천, 비천인, 천인 등으로 불리는 이 선인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부처님의 내력을 칭송하는 천인의 일종이다.
하늘거리는 의상을 입고 양 팔뚝에 표대 또는 박대라고 하는 긴 띠를 걸치고,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이 된 비천.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비천은 인도의 신화에서 나오는 건달바와 긴나라에서 유래한다.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향을 살라 몸에서 향기를 발산한다고 하여 ‘향음신(香音神)’으로 불린다. 이 비천의 유래가 되는 건달바는 악(樂), 악음(樂音), 미(美), 미음(美音)의 왕이다. 긴나라 역시 천신으로 팔부신중의 하나로 천악신과 가악신이다.
국보 제35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충석탑
아름다운 비천의 최고는 무엇인가?
손목에 두른 표대가 머리 위에서 나부끼며 허공을 나르는 이동수단이 된 비천. 중국 등으로 전해진 아름다운 비천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인 4세기 말이다. 한국에 전해진 이 비천은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을 통해 좀 더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비천의 초기 흔적은 고구려 고분 등에서 그 모습이 보이며, 상원사 동종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년에 제작된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에는 종 몸체의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을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몇 구의 공후와 생 등을 연주하는 주악상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고, 그 밑으로 마주보는 두 곳에는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새겼다.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 기단에 새겨진 비천인상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 새긴 비천인
문화재 답사를 시작한지 30년이 지났다. 그렇게 단순히 ‘좋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던 문화재들이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의 눈으로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없던 돌과 쇠붙이 등에 온기가 느껴졌다. 조금씩 다가오는 아름다움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비천인상
구례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한 효대에는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삼층석탑의 기단에는 주악천인과 공양상이 한 면에 3구씩 모두 12명의 천인이 새겨져 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년 자장율사가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삼층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 73과가 봉안되어 있는 적멸보궁이기도 하다.
화엄사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 사사자삼층석탑에 새겨진 비천인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벌써 몇 번을 화엄사로 향했다. 절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는 효대에 올라 한참을 보내고는 한다. 기단에 새겨진 비천인의 모습. 표대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춤을 추고 있는 비천인상
단지 어떤 기대감이 아니다. 한참이나 그 천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어느새 손목에 표대를 감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 남들은 이렇게 삼층석탑 앞에 앉아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나를 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빠져 그곳을 떠나기가 싫을 뿐이다. 어찌 저 아름다움을 찌들어버린 세상에 견줄 것인가?
악기를 부는 천인의 표대는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오르고, 두 손에 공손이 받친 공양물은 부처의 덕을 칭송한다. 그 고마움에 화답이라도 하듯 춤을 추고 있는 천인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쳐 오를 것만 같다. 어찌 돌에 새겨진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려는 것이 바보스러움이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는 발길. 어찌 보면 나도 천인이 되고 싶은가 보다.
공양물을 올리고 있는 천인상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용인 대장금파크
<대장금>은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로 2003년 9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방송되었다. 한류 사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드라마 대장금은 여러 곳의 촬영장소만으로도 중국인 유커들을 불러들이는 관광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한 때 촬영장소를 찾아온 중국 유커들은 드라마 대장금에서 만들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정도였다.
천민의 신분으로 궁녀로 들어와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임금의 주치의가 되는 장금은 훗날 ‘대장금’이라는 호칭까지 부여받았다. 그런 조선조 의녀 장금의 일대기를 그린 대장금을 비롯해 주몽, 선덕여왕, 이산, 동이, 옥중화 등 수많은 MBC의 사극들이 이곳에서 제작되었으며 그 현장을 보관한 곳이 바로 용인시 백임면 용천리에 소재한 ‘대장금파크’이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은 수원화성 행궁에서도 이루어졌다. 행궁을 찾아오는 많은 유커들도 대장금에서 보이는 요리를 주문하기도 해 유커들이 몰려올 때 그렇게 준비할 수 있는 식당을 주선하기도 했지만 당시 몰려드는 유커들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 없어 무산된 적이 있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행궁도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난 20일 바쁜 일정 중에도 이곳을 찾아간 것은 지인이 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한 ‘미실(고현정 분)’에게 푹 빠져 있었다고 하면서 선덕여왕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고 싶다는 부탁에서였다. 사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나 역시 용천리에 소재한 MBC드라마 촬영장이 궁금했던 차라 선뜻 대답을 하고 길을 나섰다.
구봉산 자락에 마련한 대장금파크는 멀리서보면 그대로 옛 마을이 들어서있는 듯하다. 멀리서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것은 도대체 저 안에서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제작되었으며 그 많은 배우들의 땀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TV시청을 하면서도 사극드라마 외에는 시청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자연 이 대장금파크의 모든 것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출입구부터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에 마음 끌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표소를 가니 입구서부터 기분좋게 만든다. 65세 이상은 경로우대를 한다는 것이다. 굳이 65세 이상이라는 이야길 하지 않고 다니지만 입장료 7천원을 3천원이나 할인을 해준다는 것이다. 거기다 장애인들도 3천원을 할인해 주는데 장애인과 동반한 보호자 한 사람은 무료입장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칙적으로 애완동물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청각 도우미견은 입장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입구에 보면 장애인용 휠체어가 건물 안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말로만 떠들고 있는 장애인 우대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대장금 기념세트장이다. 대장금 기념세트장은 경기도 양주문화동산에 조성된 세트장의 일부를 가져와서 새롭게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넓은 세트장 전체를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오후 3시가 넘어 들린 곳이라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대장금파크를 돌아보면서 그에 못지않은 실젤적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수원도 관광객을 맞이하는데 있어 좀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일반인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목적만으로 영업을 한다면 관광객들의 구미를 제대로 맞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장금파크처럼 공용화 된 휴게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면 수원화성과 행궁에 대한 더 좋은 인식을 관광객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가는 곳마다 정밀한 조형에 놀라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눈에 띤다. 동반한 지인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나오던 곳을 보고 싶다”고 몇 번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미실의 연기에 빠져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선덕여왕만은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최우 사택은 드라마 <무신>을 보면서 꼭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고려시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무신정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문(文)’을 중시하던 우리 역사에서 ‘무(武)’를 배경으로 노비출신인 김준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사극 세트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실제 건물과 같이 꼼꼼하게 꾸며진 조형물에 감탄을 한다. 이곳을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만하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세트장을 다녀본 나로서도 이곳 세트장은 그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게 꾸며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주 촬영지인 연무장과 미실궁 등을 돌아본다. 한편에 마련된 포도청과 옥사는 <구가의서>외에도 <이산> <짝패> <해를품은달> <무신> <구암허준> 등 많은 사극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었던 곳이다. 안을 한 바퀴 돌아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요즈음 산자락에는 일찍 해가 떨어진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지만 다음에 다신 합 번 찾아올 것을 약속한 후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산 중턱에 서 있는 외로운 석탑 한 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건너편 산 중턱에 석탑이 한 기 보인다. 처음에는 이곳이 사극 세트장이기 때문에 그 탑도 세트의 일부인줄로만 알았다. 안내소에 물어보니 세트가 아닌 옛 탑이 맞다고 한다. 올라갈 수 있느냐 물으니 그곳도 경내이기 때문에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비실에 문의를 하고 난 후 몇 사람과 대화를 거쳐 겨우 승낙을 받았다. 문화재를 답사하는데 이런 불편쯤이야 감당해야 않겠는가?
주변 정리가 잘되어 있고 커다란 노송까지 곁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용인 향토유적 제66호인 고려시대 석탑인 ‘용인 용천리 오층석탑’이다. 원래 인근 절터로 추정되는 논바닥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모아 1979년에 복원한 것으로 용인시 지역의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석탑으로 높이가 4.3m 정도이다.
역사의 한 장을 가늠했던 곳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만난 오층석탑. 현재는 오층석탑 몸돌 위 옥개석과 상륜부가 유실돼 5m를 넘지 않지만 탑의 형태로 보아 상륜부까지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다면 6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 늦게 만난 오층석탑의 조우로 인해 더 뜻깊은 대장금파크의 관람. 설핏 산등성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면서 건너편 산중턱에서 바라보는 대장금파크의 위용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용인 두창리에서 만난 삼층석탑이 쓰레기장
용인시 향토유적 앞에 쌓인 쓰레기 부끄럽다
용인시에서 지정한 향토유적 앞에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향토유적이란 문화재로 지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역에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하는 제도이다. 비록 국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못했다고 해도 나름 선조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 민속문화재, 혹은 지방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돼야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향토유적은 그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선조들의 유물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는 어느 문화재와 다를 바 없다. 그런 향토유적 앞에 쓰레기가 쌓여있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향토유적도 문화재 명칭은 지정받지 못했다고 해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하기에 해당지자체에서는 도로변에 이정표를 내걸어 안내를 하고 있다. 그런 향토유적을 문화재 지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향토유적 역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다만 지정 문화재에 비해 훼손이 되었거나 제작연대 등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는 점 등이 문화재지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모처럼 떠난 문화재답사로 들뜬 마음
20일 떠난 문화재답사. 모처럼 마음을 다잡아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이라도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시간에 쫓겨 살다보면 문화재답사도 제대로 떠날 수가 없다. 작정을 하고 떠난 길이라 몇 기의 문화재라도 둘러보겠다고 나선 길이다. 먼 길을 갈 수 없으니 수원에서 가까운 용인으로 답사할 곳을 정했다.
부지런을 떨어 길을 나섰지만 오고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정작 문화재를 둘러보는 시간을 그리 많지가 않다. 당연히 마음만 바빠질 수밖에. 한 곳을 둘러보고 찾아간 곳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농촌파크로에 소재한 용인법륜사이다. 법륜사는 전통사찰로 최근 새롭게 조성을 하고 있는 절이다. 웅장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화려하게 치장한 전각들이 우리 전통사찰이라기보다는 흔히 현대적인 면을 가미한 거대 작품같은 절이다.
그 안에 경기도문화재자료 145호로 지정된 ‘용인법륜사 삼층석탑’이 소재하고 있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층석탑은 서울시 구로구에 거주하는 이덕문씨 집에 소장하고 있던 것을 이운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신라석탑의 형식을 계승한 일반적인 삼층석탑으로 조성시기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법륜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올린 삼층석탑으로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탑의 형태로 보아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층석탑은 몸돌과 옥개석을 각각 1석으로 조성하였으며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되어 있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석탑이다.
현재의 탑은 법륜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으며 상륜부가 유실된 듯 새롭게 치장한 상륜부를 조형해 올려놓았다. 탑의 크기나 조형에 맞추어 상륜부를 제작한 듯하지만 밋밋한 탑에 비해 화려하게 조형한 상륜부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듯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위하는 삼층석탑이니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아름답게 상륜부를 치장한 법륜사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 정도로 우리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 중 만난 두창리 삼층석탑 화가난다
법륜사 삼층석탑을 돌아보고 난 후 다음 답사지를 향해 이동을 하던 중에 갈에 안내판이 보인다. 두창리 삼층석탑과 선돌이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가던 길을 돌려 먼저 답사를 하기로 정하고 심층석탑을 찾아갔다. 용인시 향토유적 19호로 지정되어 있는 두창리 삼층석탑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 1447-2에 소재한다.
두창리 삼층석탑은 뒤편에 두창저수지가 자리하고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길 건너 언덕에는 선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마을에 두 기의 향토유적이 소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도로 아래편에 자리하기 때문에 길가에 커다란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삼층석탑 옆으로는 간이의자와 간결하게 조성한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농촌마을인 두창리를 들린다면 이 삼층석탑과 선돌을 돌아보면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이곳은 탑 옆에 두 대 정도의 차량을 주차시킬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삼층석탑 앞에 마을에서 갖다 버린 듯 쓰레기더미가 수북이 쌓여있다. 버린 쓰레기들을 보니 하루이틀동안 버린 것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마신 술병이며 집에서 사용하다 내다버린 의자 등. 한 마디로 이 향토유적 앞 도로변의 공간을 마을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화가 치민다. 아무리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간판을 걸어 소개하고 있는 향토유적 앞에 수북하게 쓰레기를 쌓아놓을 수 있단 말인가? 용인시나 원삼면 관계자는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할 줄 알면서 관리는 할 줄 모르는 것일까? 쓰레기를 쌓아 놓은 지 하루 이틀이 아닌 듯한데 한 번도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문화재란 지정만 하고 관리를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기 일쑤이다. 관심을 갖고 꾸준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 바로 우리문화재이다. 그런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방치하고 있다니. 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정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관리이다. 비록 향토유적이라고 해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삼층석탑 앞 도로변에 가득 쌓인 쓰레기를 보면서 관계당국이나 지역주민들의 의식수준을 알만하다. 용인시 관계자는 하루 빨리 이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여 다시는 이런 볼썽사나운 꼴을 보지 않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문화재의 보고 불지종가 영축총림 통도사
보물 삼층석탑과 보물 영산전을 돌아보다
양산시 하북면에 소재한 통도사를 흔히 ‘불지종가국지대찰 영축총림 통도사’라고 칭한다. 구만큼 사세(寺勢)가 대단하다는 말이다. 통도사에는 국보와 보물, 그리고 많은 지정 문화재들이 있다. 통도사는 흔히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구분하는데 입구인 일주문부터가 하로전에 해당한다.
하로전은 보물 제1826호인 영산전,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재197호 약사전, 경남 유형문화재 194호 극락보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과 일주문, 호혈석 등이 이 하로전에 속해있다. 그 중 보물 삼층석탑 뒤편으로는 보물 영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보이며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전은 숙종 39년인 1713년 봄에 화재로 인해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는데 이듬해인 1714년 33명의 목수와 천오 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는 강희 53년 甲年인 1714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영산전이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것을 1714년 복원하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내벽화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영산전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형식이다. 기단의 정면 중앙과 양 측면 앞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창호 없이 벽으로 폐쇄하였다. 정면에는 매칸 사분합 정자살문을 두고 배면에는 두 짝의 띠살문으로 달아냈다. 공포는 정면은 각 칸마다 3구를 배치하고 있으나 배면에는 2구가 놓은 것이 영산전의 특징적이다.
통도사 영산전과 같이 정면 각 칸에 3구씩의 공포를 두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통도사의 많은 전각들은 단청이 거의 지워져 있다. 오랜 시간동안 단청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산전의 단청은 1715년에 총안스님이 단청을 시작해 1716년에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영산전의 단청은 300년 전에 한번 올렸을 뿐이다.
단청이 퇴색하여 맨 건축목자재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영산전. 이렇게 단청이 지워진 것이 오히려 통도사를 더 고풍스럽고 무게있게 만들고 있다. 실내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판 때문에 실내에도 보물로 지정된 52점의 벽화(보물 제1711호) 등이 있지만 촬영을 하지 않았다. 문화재는 누군가가 아니라 모두가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삼층석탑은 보물 제1471호로 지정
영산전 앞에 놓인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은 원래 자리에서 1.5m 정도 이동을 했다. 이는 삼층석탑을 에워싸듯 놓인 영산전과 약사전, 극락전의 중심축에 맞추기 위함이라고 한다. 통일 신라의 작품으로 일려진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1987년 해체 수리 당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지난 11월 28일. 벌써 통도사흫 다녀온 지 10일 가까이 지났다. 통도사를 찾아간 날은 휴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탑 주변으로 몰려들어 사진촬영을 하기가 난감하다. 그렇다고 관람을 하거나 동행한 가족이나 지인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데 비켜달라고 할 수도 없다. 짧은 시간에 촬영할 곳은 많은데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순간순간 사람들이 삼층석탑 주변에서 떨어졌을 때 급하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
내가 사진작가라면 도저히 찍을 수 없는 분위기거나 아니면 사람들과 어우러진 탑을 촬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탑의 온전한 형태만 전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를 촬영할 때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이 한 부분씩이라도 더 자세히 소개를 하야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1471호인 통도사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이다. 이 석탑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형한 작품으로 보는 까닭은 석탑의 형태는 신라말기의 보편적인 탑 형식으로 조성을 했는데 기단석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상은 흔히 고려조의 탑에 나타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석탑의 몸돌과 옥개석은 모두 한 장씩의 돌로 조형을 했으며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마다 4단으로 조성하였다. 천년이 지난 세월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통도사 삼층석탑. 그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 까닭은 국정농단으로 망가져버린 이 나라가 바로 서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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