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서신면 정용래 가옥을 돌아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오얏리길 56(궁평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5호인 화성 정용래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1800년대 말에 지은 집이다.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와 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은 주말만 되면 답사를 나간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해 늘 몸이 굼실거리는 것이 사는 재미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 번 답사를 나서면 7~8곳을 돌아오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그동안 게으름을 반성하는 뜻에서이다.

 

화성시는 일개 지역치고는 많은 문화재가 소재한다. 그래서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몇 주에 걸쳐 돌아보기로 한 곳이다. 7일 이른 시간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는 화성시 서신면을 중점적으로 답사하리라 마음을 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선 것이다. 답사를 즐기면서 하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여러 곳을 돌아보려면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초가도 이 정도면 대갓집 부럽지 않소

 

서신면 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산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기와집인 정용채 가옥과 이웃하고 있다. 위쪽 정용채 가옥은 기와집이고 아래쪽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조성되어 있어 한 곳에서 기와와 초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용래 가옥은 항상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집 앞으로는 소로가 나 있고 대문 앞에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수령이 꽤 된 이 느티나무가 정용래 가옥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집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밖에서 촬영을 하자니 산비탈까지 올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어느 대갓집이 부럽지 않다.

 

 

 

 

집 앞 도로에서는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굴뚝이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는 것이 이곳 사랑은 부엌이 사랑과 안사랑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과 안방, 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 이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정용래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볼썽사나운 문화재 안내판, 문화재명 바꾼 지가 언제인데

 

대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저 집 주변만 이리저리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의 모습을 이곳저곳 꼼꼼히 촬영을 마치고나서 문화재 안내판을 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안내판은 색이 다 흐려져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거기다가 중요민속문화재로 문화재 명칭이 바뀐 지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요민속자료라는 안내판과 안내 석물에 적혀 있다.

 

화성시 몇 곳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재 명칭이 바뀐 것을 교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렇게 문화재명칭 하나 제대로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화재는 민족의 자랑이다. 중요민속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중요민속문화재라고 해도 관리는 해당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화성시 모든 곳의 민속문화재는 민속자료라고 쓴 안내판을 교체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이유는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작은 정성이다. 문화재의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보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좋은 것을 칭찬해주고 문제가 있는 것은 시정을 요구하려고 노력한다. 작은 힘이나마 후손들에게 온전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물려주기 위함이다. 문화재 안내판을 정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교체한다고 해서 화성시의 재정이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화성시 문화재 담당부서에서는 관내의 문화재 안내판을 조속한 시일 내에 일제정비를 해주기 바란다.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하기는 했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쓴 것을 하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대문의 안편

 

머슴들의 생활을 엿보다

 

감고당을 들어가는 문 입구에는 영조의 친필인 감고당 편액이 걸려 있다. 솟을대문은 중앙과 우측에는 문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 문이 있을 자리에는 방이 들어섰다. 누가 문이라도 열어달라고 하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솟을대문의 양편으로는 길게 행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머슴 등 일꾼들이 작업을 하는 곳이다. 새끼를 꼬기도 하고 가마니를 짜기도 한다.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도 이용을 하는데. 감고당을 둘러보다가 만나는 하인들의 모습이 재미 있다. 

 


머슴들이 주로 기거를 하는 곳이다. 농한기면 가마니를 짜기도 하고, 새끼를 꼬기도 한다


행랑채 방에서 새끼를 꼬는 머습의 모습이 재미있다


행랑채 방 중에서 곳간으로 사용되는 방에서 볏가마를 진 머슴

 

중후한 멋을 자랑하는 사랑채

 

행랑채의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이다. 이곳은 손님을 맞이하기도 하고, 시를 쓰고 정치를 논하기도 하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나랏일을 걱정하고는 했을 것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대청, 사랑방, 누마루로 구분이 되어 있다. 사대부가의 집이라고는 해도 정취가 있게 지어진 집이다. 

 


감고당의 사랑채는 누마루, 대청, 사랑방으로 구분된다


이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비켜서면 중문채가 있다. 중문채는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곳이다. 중문채의 입구에는 중문이라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문 안편으로는 안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칸막이를 하였다. 이 중문채에 달린 방에는 집안에서 일을 하는 청지기 등이 기거를 하는 곳이다. 또한 김칫독을 저장하는 저장소나 곳간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중문채를 들어서면 안채다. 안채는 여자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와는 담을 사이에 둔다. 감고당의 안채는 집안에서 가장 안편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외부와는 차단되었다.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이곳 안채는 명성황후와 인현황후가 기거를 했던 곳이다.

 


집안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며 외부와 차단이 된다


사랑채와 담을 경계로 한 안채

 

두 분의 황후가 기거를 했다는 감고당.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듯 하다. 찬찬히 훑어본 감고당은 역사의 아픔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그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소용돌이치는 역사를 이제는 다 잊은 듯.

 

화홍문 옆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을 찾아가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명당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세가 늘어난다고 하여 꼼꼼하게 명당을 찾아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아무리 세월이 변했다고 하지만 명당을 선호하는 우리 습속은 변하지 않는다. 명당의 기본 조건은 바로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즉 뒤로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물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수원에도 과연 그런 명당자리가 있을까? 수원에서 그런 명당의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 바로 수원화성 성 안쪽이다. 현재 행궁동 일대가 그런 명당자리에 속한다. 뒤로는 팔달산을 두르고 앞으로는 수원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명당자리에 수원시 지정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었다고 하여 24일 오후 찾아가보았다.

 

밖에서 얼핏 보기에도 명당자리에 들어섰다. 그동안 전국을 답사하며 수많은 고택을 보아온 나로서는 집 근처에만 가도 느낌이 다르다. 바로 명당인가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 기운은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 자리한 한옥게스트하우스 예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한옥 객실과 한옥 카페까지 갖춘 게스트하우스

 

매홀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수원을 관할했던 475, 고구려 20대 장수왕(394-491) 시절부터 통일신라 35대 경덕왕(742-765) 16년에 이르기까지 수원의 옛 지명이었다. ‘물골이라는 의미인 매홀(買忽)’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매홀의 지명을 한문 식으로 바꾼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은 객실 6실에 1층과 2층 모두 거실과 한편에 2층으로 된 한옥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객실 한 옆으로는 숙박을 하는 손님들이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매홀재)이 마련되어 있다. 그동안 수원시에 소재한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보았지만 매홀처럼 숙박을 하면서 쓰임새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집을 자랑하고 싶다.

 

객실은 모두 화장실과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방안에 마련되어 있으며, 긴 복도와 계단을 통해 1층과 2층 객실이 연결되어 있어 일행이 많을 경우 매홀 전체를 전세를 낸다고 해도 사용이 편리하다. 모든 객실은 와이파이가 작동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업무를 보기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화성팔경 중 삼경을 만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수원은 아름다운 곳을 정해 수원팔경이라 이름 붙였다. 그 하나는 북지상련(北池賞蓮)이요, 다음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다. 그리고 팔달청람(八達晴嵐)과 화산두견(花山杜鵑), 광교적설(光敎積雪), 서호낙조(西湖落照)를 꼽았으며, 화홍관창(華虹觀漲)과 남제장류(南堤長柳)를 더해 수원팔경이라 했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수원팔경 중 삼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방화수류정 앞 용연에서 떠오르는 달을 맞이할 수 있는 용지대월(龍池待月), 화홍문 7개의 수문에서 물이 흐르며 낙차를 만들어 물보라가 이는 화홍관창(華虹觀漲), 그리고 남제장류(南堤長柳)를 만날 수 있다. 남제(南提)는 화홍문에서 화산능까지 이르는 수원천의 긴 제방양편에 늘어서 있는 수양버들을 일러 長柳(장류)라고 불렀다.

 

한옥게스트하우스 매홀이 더 장관인 것은 2층 객실에 올라 창을 열면 바로 눈앞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이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의 멋 또한 장관이다. 어느 게스트하우스가 이 멋진 광경을 따라갈 것인가? 행궁동 일대에 마땅한 객실이 없어 늘 수원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엉뚱한 곳에서 잠을 재우곤 했는데 이젠 그런 걱정 하나는 덜게 생겼다.

 

 

최고의 산책 코스를 갖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매홀

 

수원시 지정 한옥 게스트하우스 매홀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바로 최고의 신책코스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매홀을 나와 수원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을 돌아본 후 방화수류정과 각건대를 둘러보고, 동암문과 장용영 군사들이 훈련을 하던 연무대(동장대)에 들리면 뒤편 아름다운 담장과 개인화가인 불랑기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동북공심돈과 창룡문을 지나 포를 쏘던 포루와 돌출된 방어기지인 치, 그리고 적의 침입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포루와 동남각루, 남수문을 만날 수 있다. 남수문 앞에는 정조대왕이 조성한 성밖시장인 220여년이 지난 글로벌명품 수원남문시장이 자리하고 있어 이 시장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가족이나 단체가 왔다고 하면 수원남문시장은 가히 최고의 산책로이다. 지동 순대타운을 비롯해 팔달문시장 통닭거리, 그리고 남문고객센터 2층에서 금박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남문시장에서 즐겼다면 오후 4시가 지나면 문을 여는 청년상인들이 운영하는 푸드트레일러와 영동시장 2층에 자리한 청년몰 또한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매홀로 돌아가는 길은 수원천 산책로를 따라 돌아갈 수 있다. 매홀의 이용료는 평일에는 8만원, 주말에는 10만원 정도이며, 숙박을 한 손님들이 요구할 때는 한옥카페에서 조식을 호텔식 브런치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최고의 명당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수원시 지정 한옥 게스트하우스 매홀.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가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계절에 떠난 무작정 여행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16, 무작정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갈 곳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 얼마 만에 맛보는 자유로움인가? 1시간여를 달려 찾아간 곳은 여주시였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옆에는 서울서 옮겨온 감고당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 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전형적인 중부지방 민가로 지어진 집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세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 음식이나 기념품, 전통혼래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이곳은 늘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두 명의 황후가 살았던 집 감고당

 

현재 여주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있는 감고당은 이 자리에 있던 가옥이 아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편에 있었다. 그 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 마침 여주군은 명성황후 생가의 성역화 작업 당시였기에 2006년 현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차례 이전을 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감고당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건축구조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대왕이 효성이 지극한 인현황후를 기려 친필로 써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감고당은 조선조에 두 명의 황후가 기거하던 집으로 유명하다. 숙종임금의 계비인 인현황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면서, 복위가 될 때까지 5년간을 이곳 감고당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8세에 서울로 올라간 뒤 왕비로 책봉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렇듯 감고당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가옥으로 유명하다.

 

 

감고당 옆에 서 있는 소원바위

 

감고당과 옆 민가마을 뒤편에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사람들은 소원바위라고 부른다.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은 스승인 오희상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씨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한 부인이 바로 나중에 한창부부인이 된 한산 이씨다. 이들 부부사이에선 12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걱정하던 부부는 집 인근에 소재한 바위를 찾아가 정성으로 자녀를 점지해 주기를 빌었다.

 

정성이 효험을 보았는지 민치록이 53세 되던 해에 딸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명성황후가 되었다. 명성황후가 태어나던 날인 18511117일 새벽, 붉은 빛이 비치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고 전하는데 어린 여자아이가 나중에 큰일을 할 것을 예견하는 전조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소원바위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와 소원바위, 김고당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서운하다. 한국민속촌을 찾아가면 99칸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다. 바로 수원 팔달산 밑 남창동에 자리하고 있던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축했다고 한다. 수원 화성 내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고택 200여 채를 돌아보았다. 그 많은 집을 보면서 늘 마음 한 편에 아쉬움이 바로 이 거대한 고택이 옛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돌아보기 위해 수원화성 안을 찾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가을에 떠난 여행,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다시 생각나게 만든 것이 바로 남창동 99칸의 양반가이다.

 

가을철 놀이에 빠진 사람들 부러워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지난 28일 잠시 틈을 내어 가까운 여주로 달려갔다. 매주 한번은 이웃 도시에 있는 문화재와 명소 등을 찾아보는 것이 요즈음 유일한 낙이다. 마침 날씨도 좋고 단풍철이라 길이 많이 막힐 줄 알았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영동고속도로애도 그렇게 많은 차들이 몰리지 않는다. 수원을 출발해 한 시간 남짓 걸려 명성황후 생가에 도착했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벌써 몇 차례나 이곳을 들렸지만 들릴 때마다 가슴 한 편이 아린 것은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 잘 보여줘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행랑채와 안채는 자 형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 가옥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안채는 중문과 이어져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대청과 건넌방이 이어져 있다. 건넌방의 툇마루는 높게 놓고 아래편에 아궁이를 놓았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살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고택이 부럽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생가를 찾아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연못에는 어린 아이들이 단체로 찾아와 연못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물고기들을 보고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연과 벗 삼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마련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 우리 수원의 행궁동에도 한옥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즐길만한 곳이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이나 가족단위로 함께 즐길 곳을 찾아다닌다. 그런 곳을 마련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올 것이란 생각이다. 한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늘 아쉬웠던 점은 바로 민속촌에 소재하고 있는 남창동 양반가옥이다.

 

99칸의 대저택이 수원에 그대로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여주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우리에게도 저런 공간 하나 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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