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800년 보호수 향나무의 가르침
봉녕사 향나무 창건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
사람이 기쁨과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모든 생명을 아프게 하거나 해치지를 말라
살아있는 것들의 아픔을 없애주고
죽음에서 살려주는 일을 즐겨하면
뒷날 반드시 행복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느니라
불경인 법구경 도장품 중의 가르침이다. 팔달구 우만동 248 봉녕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수령 800년이 지난 수원시 보호수인 향나무 아래 적힌 글이다. 이 향나무는 수원22로 2007년 5월 22일 지정이 되었다. 향나무의 높이는 9.4m이며, 둘레는 2.8m이다. 향나무의 경우 이렇게 큰 나무는 그리 많지가 않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침엽교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상나무, 또는 노송나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향나무는 바늘모양과 비늘모양의 두 종류가 있다. 향나무의 심재는 진한 향기가 나므로 이곳을 이용해 제사를 지낼 때 향료로 사용을 했다. 요즈음은 향나무를 정원수나 공원의 나무로 많이 식재하고 있다.
봉령사 향나무를 만나다.
26일(일) 오후에 돌아 본 봉령사. 향나무는 봉녕사의 중심전각인 대적광전과 용화각 앞에 자리한다. 봉녕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향나무는 수령이 800년이 지난 고목이다. 향나무의 밑동은 한쪽 면을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있으며, 가지 하나가 밑으로 처져 마치 용틀임을 하는 듯하다.
이 향나무를 볼 때마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수령이 오래되었고, 높이나 둘레가 적지 않은 나무인데 왜 보호수로만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외과수술은 했지만 잎이나 가지 등을 보면 실하게 잘 자라고 있다. 봉녕사를 찾을 때마다 이 향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이 나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만 같아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중에서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향나무도 여러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제232호인 남양주 양지리 향나무(수령 500년), 240호 서울 선농단 향나무(수령 500년), 88호인 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수령 800년), 314호 안동 주하리 뚝향나무(수령 500년), 321호 연기 봉산동 향나무(수령 400년), 427호 천안 양령리 향나무(수령 1,200년), 194호 서울 창덕궁 향나무(수령 750년) 등이 지정되어 있다.
봉녕사 창건과 맞아 떨어지는 향나무
이 외에도 많은 향나무들이 지역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봉녕사 향나무를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향나무가 언제 누가 이곳에 심었을까 하는 점이다. 봉녕사는 고려 희종 4년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지금으로부터 807년 전이다. 이 향나무의 나이도 800년이다. 2007년에 지정이 되었으니, 이 향나무의 수령과 봉녕사의 창건연대가 일치한다.
우연일까? 그렇다면 이곳에 절을 창건한 원각국사와 이 향나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봉녕사의 창건연대와 향나무의 수령을 보면, 이 향나무는 봉녕사를 창건할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향나무가 바로 봉녕사의 역사인 셈이다. 이 향나무를 더 애지중지 보호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남들은 그저 쉽게 오래 묵은 향나무 정도로 알겠지만, 이 향나무와 봉녕사의 관계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 향나무가 곧 봉녕사이고, 봉녕사가 이 향나무라면 억지스런 주장일까? 향나무 앞에 서서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못하다. 대낮에 나온 낮달이 향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이 나무가 더 고귀하게 느껴진다. 그 오랜 세월을 이 자리에서 역사를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중복 무더위에 걷는 노송지대, 그윽한 소나무향에 취하다
정조대왕이 부친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을 다니는 길목에 식재한 나무
내가 소나무에 빠져든 것은 전국을 돌면서 우리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부터이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소나무에 넋을 뺐기고, 몇 시간이나 한 자리에서 소나무만 바라본 적도 있다. 또한 오래된 석탑이나 석불과 함께 어우러진 소나무를 바라보다가 버스시간을 놓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소나무는 내가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숱한 나무 중에서도 가장 귀히 여겼던 나무들이다.
소나무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 눈이 쌓인 겨울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고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소나무를 보면 나 스스로가 그 나무가 된 양 착각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소나무길이 있다. 그만큼 소나무는 우리의 목조주택의 자제는 물론, 궁궐이나 사찰 등 많은 건축물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지 못하도록 ‘황장금표’ 비를 세워 황장목을 보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나무길 중 내가 가장 의미를 두는 곳이 있다면 치악산 국립공원 안에 구룡사 금송길, 양산 통도사의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479에 소재한 천년고찰 은해사 금강소나무길인 금포정, 그리고 수원시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19호인 노송지대 소나무길이다.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옛 경수간 국도를 따라 펼쳐진 5km의 도로변에 식재된 소나무들을 말한다. 정조대왕이 내탕금 1,000량을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주어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이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현재의 융릉)을 다니는 길목에 식재한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는 길이다.
무더운 중복에 노송지대를 돌아보다
물론, 소나무길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찬연기념물들 중에도 소나무만 만나면 길을 떠나지 못하고 몇 시간씩 그 앞에서 나무만 바라다보기 일쑤였다. 언젠가 함께 문화재 답사에 나섰던 지인이 “선생님은 예전에 소나무를 심던 식목관이었나 봐요. 소나무만 만나면 온통 정신을 빼앗기는 것을 보니..”라고 한 적이 있다.
이상하게 소나무를 만나면 바로 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나무그늘에 앉으면 코끝을 간질이는 소나무향이 좋아서인가도 모르겠다. 그런 소나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원 노송지대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주(효행기념관 부근 9주, 삼풍가든 부근 21주, 송정초등학교 부근 8주)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22일, 중복이다. 무덥지 않다고 하지만 복중에 햇볕아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녹녹치 않다. 노송지대라는 푯말이 걸려있는 곳에서 천천히 노송지대 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비라도 한줄기 퍼부었으면 더 없이 좋으련만 햇볕만 따갑다. 중복 오후에 내리쬐는 햇볕은 우리가 흔히 복중기온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듯하다.
우리가 가꾸고 보존해야 할 노송지대
중복은 다르다. 소나무 길을 걷고 있는데도 숨이 턱에 닿는다. 일기예보에서 소나기가 내린다는 바람에 우산까지 준비했는데 비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 사진을 촬영하면서 소나무를 돌아본다.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빼면 모두 화초를 심어 온통 초록색이다. 아무리 더워도 그런 길을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수원시는 그동안 노송지대 곳곳에 들어서 있던 건물을 매입해 주변을 정비했다. 2016년 5월엔 노송 지대를 통과하는 도로를 폐쇄했으며, 우회도로를 개설하고 노송공원 일대(2734㎡)에 소나무 33주를 심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노송 지대 주변 토지를 사들여 도로포장을 걷어내고 녹지를 조성했다.
녹지에는 소나무와 풍해나 수해를 방지해 주는 식물을 심는 등 1만 2085㎡에 이르는 노송지대를 복원했다. 수원시 관계자는 "앞으로 2020년까지 복원 구간에 초화류를 추가로 심고, 이목지구 내 남은 노송길(약 340m)도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때가 되면 노송지대도 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중복 더위에 찾아가 돌아본 노송지대. 지천으로 심겨있는 맥문동을 비롯하여 한편에는 코스모스가 벌써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앞으로 노송지대는 수원시가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대로 시민의 훌륭한 힐링공간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와 변화된 노송지대를 만끽해야겠다.
수원 영통 수령 530년 보호수 느티나무, 26일 강우에 가지 찢겨
지역주민들 매년 단오 날 나무인근서 성황제 등 지내는 신목(神木)
수원시에는 모두 24주의 보호수가 있다. 그 중 영통구 단오어린이공원 안에 서 있던 수령 530년 된 느티나무가 26일 강우와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찢겨지면서 쓰러졌다. 영통구 느티나무는 26일 오후 3시께 내내 불어온 비바람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무 밑동 부분부터 찢기듯 부러졌다.
나무 높이 3m 부분에 자리한 큰 가지 4개가 원줄기 내부 동공(洞空)으로 인해 힘을 받지 못하고 바람에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고 직후 현장을 찾은 염태영 수원시장은 “500년 넘게 우리 시와 함께해온 느티나무가 한순간에 쓰러져버린 처참한 모습에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면서 “불과 열흘 전 영통청명단오제에서 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염태영 시장은 이어 “전문가들과 함께 복원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보존 방안을 강구하라”며 “영통청명단오제 위원 등 지역 주민 의견을 수렴해 사후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라”고 주문했다.
수원시는 사고 직후 지역 주민과 함께 느티나무를 위로하는 제(祭)를 올리고, 주민 안전을 위해 부러진 가지 등 잔해 수거에 나섰다. 밑동의 부러진 날카로운 부분도 당일 내 다듬어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계획이다. 또한 수원시는 쓰러진 느티나무 밑동은 보존할 계획이다. 밑동 주변에 움트고 있는 맹아(萌芽)를 활용하는 방안과 후계목을 육성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느티나무 복원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나무병원 전문가 자문과 주민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기로 했다.
또 시에 있는 나머지 보호수 23주에 대해서도 유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문가 현장 점검을 진행하고, 안전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수령(樹齡)이 530년 이상인 영통구 느티나무는 1982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됐다. 나무 높이가 33.4m, 흉고(胸高)둘레는 4.8m에 이른다. 이 느티나무는 1790년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나뭇가지를 잘라 서까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칠 무렵 나무가 구렁이 울음소리를 냈다는 전설이 있다.
영통동 주민들은 매년 단오에 나무 주변에서 ‘영통청명단오제’를 열고 있다. 축제는 청명산 약수터에서 지내는 ‘산신제’로 시작돼 느티나무 앞 ‘당산제’로 이어진다. 영통구 느티나무는 2017년 5월 ‘대한민국 보호수 100選(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음력 단오는 설날과 추석, 한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한 날이다. 단오는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五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하는데 이 날은 양수가 겹치는 날로 가장 양의 기운이 강한 날이라고 한다. 단오를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리란 수레의 바퀴를 뜻하는 것으로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수레의 중요성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추정한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단오를 ‘술의일(戌衣日)’이라고도 불렀는데 술의는 우리 발음으로 수레의 뜻이고, 이날 속가에서는 쑥잎을 찧어서 팥가루를 넣고 푸른빛이 돌게하여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게 떡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전한다.
단오가 되면 마을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정성으로 각종 제수를 마련해 제를 올렸다. 요즈음이야 청명단오제라는 명칭으로 지역 축제화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거목에 지내는 목신제나 거리제, 성황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가내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의식이었다. 영통 느티나무에서 지내던 청명단오제 역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의식이다.
요즈음처럼 일기가 불순하고 강한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거목(巨木)들은 언제 어떻게 화를 당할지 모른다. 사전에 방비를 한다고 해도 가지에 철주로 버팀기둥을 만들어 놓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영통 느티나무는 지난 15일과 16일 이곳에서 단오청명제를 지낼 때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첫 장마에 화를 당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원시는 영통 느티나무 밑동에 자라고 있는 맹아를 이용한 복원계획을 세우겠다고 했다.
말복이 가기 전에 찾아간 영흥도 소사나무 숲
고려의 왕족이 살던 곳이라는 옹진군 영흥도를 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은 섬이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해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흥도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 개통 후부터이다. 선재도와 함께 뭍과 이어진 영흥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던 영흥도. 영흥대교가 개통이 되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나 인근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다.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가다
영흥도는 섬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10일 간간히 비가 뿌린다. 메주 목요일이면 인근 문화재 등을 답사하는 것이 한 주간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다. 아침 일찍 영흥도로 향했다. 간간이 비가 뿌리지만 마침 날도 선선하고 답사를 하기 딱 좋은 날씨이다.
영흥도를 찾아간 것은 십리포 해수욕장에 방풍목으로 심었다는 소사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그동안 영흥도를 몇 번인가 찾아갔지만 여름철에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소사아무의 상태도 궁금하고 더구나 막바지 더위가 한물 가시는 계절에 해수욕장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영흥도는 인신 대부도에서 연육교로 선재도를 가쳐 들어가지만 경기도가 아닌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한다. 가는 길은 대부도를 거쳐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천광역시라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지만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모순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그저 가는 길은 경기도를 통해야하지만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하고 하니 괜히 멀게 느껴지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소사나무에 빠지다
소사나무는 중부이남 해안과 섬 지방에서 자란다. 나무는 다 자라도 수고 15~20m에 지름이 한두 뼘 정도가 고작이다. 소사나무의 매력은 똑바로 선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군데군데 소금덩어리가 매달린 것 같은 옹이가 달려있다. 그래서 이 나무가 더 매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사나무는 소금기에 강해 줄기가 잘려져도 새싹이 잘 나오는 등 척박한 조건에 잘 적응하는 나무로 유명하다. 하기에 소사나무는 바닷가 방풍목으로 식재한다. 소사나무는 빨리 자라지 않고 생명력이 강해 소금기가 많은 바닷가 등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영흥도 소사나무숲은 350그루 정도가 자라고 있으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1997년 12월 30일 지정되었다.
이곳 영흥도 소사나무숲의 나무들은 수령이 100~150년 정도 되었으며 영흥면 내리 신91-4에 소재한다. 이곳의 소사나무 군락지에는 수고 20~30m 정도에 나무둘레 0,7~1.5m 정도이다. 피서철이라 그런지 소사나무 숲에는 피서객들이 천막을 치고 여기저기 더위를 피하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니 시원하다. 소사나무숲은 여름에는 에어컨처럼 시원하고 겨울이 되면 따듯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사나무가 자라고 있는 이곳 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온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은 소사나무숲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고 카페며 각종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소사나무숲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바닷가로 달려간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각종 조개며 낙지 등을 잡고 물이 들어오면 수영을 할 수 있는 곳. 이곳 소사나무숲이 있는 십리포 해수욕장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이다.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소사나무를 본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린다. 내년에는 여름에 꼭 이곳을 다시 찾아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오산의 뿌리 부산동 당집 지켜져야 한다
당산나무 인근에 당집 건축해 보존해야
오산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재인무대를 마치고 난 뒤 오산은 더 이상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이란 행사를 위한 일회성 동선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노력해야하고 무엇인가 태동의 움직임이 보여야 한다. 쉬지 않고 이어나가는 끈질김만이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현재 부산동에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당집이 있다. 당집 인근에는 당제에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 이곳에서 물을 길어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산동 당집 인근에 아파트가 건설 중에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건물이 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당집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주민들의 대다수가 이주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어 부산동 당제가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는 이 당집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산동과 경기재인청을 연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 당집이 사라지고 당제가 소실된다고 하면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당집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져야 한다. 당집을 지키는 일만이 전국의 모든 재인을 관장하던 오산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당산나무 사이에 당집 건축하고 재인청 복원 서둘러야
부산동에 소재하고 있는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무속인들이 정월 등 기도를 드릴 때 찾아드는 신목(神木)이다. 이 부산동 도로 가운데 서 있는 왕버드나무는 부산동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와 연관이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과거 부산동에 거주하던 화랭이 이용우 가문의 선대들이 주축이 되어 당굿을 열면 이 나무까지 내려와 돌돌이를 돌았다고 전한다.
한 마디로 이 왕버드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이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정월이 되면 무속인들이 찾아와 나무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왕버드나무를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라고 하여 나무에 오색천을 두르고 이곳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수시로 이 나무를 찾아와 불을 밝히고 기원을 한다.
이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지난해 오산시의회 김영희 의원이 왕버드나무의 생육상태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박사인 경북대학교 박상진 교수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초빙해 왕버드나무의 보존가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 집행부 관계 공무원과 함께 현장에 나가 실태 점검을 실시하는 등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왕버드나무 보호의 체계적 관리를 추진했다.
김영희 의원은 시 집행부 관련 부서(건설도로과/농식품위생과)와 연계하여 생육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버드나무 주변 아스콘 제거와 도로선형 변경과 주변 휀스 설치공사를 2개월간의 걸쳐 실시하여 버드나무 생육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당산나무인 이 왕버드나무를 당할아버지, 당할머니나무라 부르고 았는 것으로 보아 이 왕버드나무는 도당굿을 하던 부산동 산이들이 이곳까지 돌돌이를 돌고 당으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을 지키는 일 오산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문제는 당집이 사라진다고 하면 결국 부산동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 되며 이 왕버드나무 역시 무속인들이 위하는 의미없는 나무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시에서는 현재 부산동 마을 뒤편 산중턱에 있는 당집을 이곳 왕버드나무 사이에 기와팔작집으로 조성하고 이곳에서 매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도당굿 남부지부(지부장 승경숙)를 당집과 당산나무를 보호할 수 있는 단체로 고지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럴 경우 오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되는 것은 물론 300년 예인의 가문을 지켜 온 이용우 일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련행정 기관과 오산시민 모두가 힘을 합해 지키려고 노력할 때야 비로소 오산이 전국 재인들을 총괄하던 위상을 다시 찾게되는 것이다. 오산의 뿌리를 지키는 일에 오산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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