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하나가 고을의 운세를 바꾼다'고 하면 그런 허황된 말이 어디 있느냐고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정자 군자정은, 고을의 운세를 바꾸는 정자로 알려져 있다.

 


  
군자정의 현판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군자정은, 고부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주변이 집들로 싸여 있어, '이 정자가 무슨 고을의 운세를 바꿀만한 대단한 정자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의 모습일 뿐이다.

 

이 고부정은 주변을 둘러 파서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넓지 않은 정자마당에는 각종 비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들은 반 토막이 된 비석들이다.

 


  
군자정은 주변을 파서 연못 가운데 자리한다. 돌 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어갈 수가 있다.


  
군자정 주변에는 토막이 난 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군자정의 원래 이름은 '연정(蓮亭)'이었다고 한다. 정자의 주변이 연못이고 온통 연꽃들이 피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땐가 군자정(君子亭)이라고 바뀌었는데, 연꽃이 '꽃 중에 군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군자정이 왜 마을의 운세를 바꾼다고 전해지는 것일까?

 

이 군자정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조선조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 이후선이 이 정자가 황폐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고, 황폐가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0년 이상이 된 유서 깊은 정자다. 연못을 정비하고 난 뒤에 홍백색 연꽃이 자생 하게 되고, 그때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뒤 두 차례 중건을 해서 오늘에 이르는 이 군자정이다.

 


  
군자정은 가운데 방을 두고, 우편은 마루 위로 누각식의 높은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방의 좌측 마루도 조금 높게 만들어 놓았다. 세심한 배려를 한 정자이다.

 

지금은 주변 연못이 그저 정자를 겨우 감싸고 있을 정도다. 아담하게 지어진 군자정은 가운데 방을 두고 있다. 우편은 마루 위로 누각식의 높은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뒤편에는 여닫이문을 달아 주변 경치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높은 곳에서 연못을 둘러보기 위해서인가 보다. 좌측에는 마루보다 조금 높게 단을 만들어 역시 문을 달았다. 그저 평범한 듯한 정자지만, 하나하나 세심한 배려를 한 정자다.

 


  
조선조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 이후선이 이 정자가 황폐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쳐지었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을 문으로 처리를 해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둘러보다가 혼자 피식 웃는다. '고부마을에서 요즈음은 장원급제를 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를 않겠구나'하는 객쩍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자정 한편 처마 밑에 커다란 스피커가 달려 있다. 아마 마을에서 무엇을 알리기 위해 사용을 하는 스피커인 것 같다. 저 스피커가 군자정에 달려 시끄러우니, 장원급제자가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혼자서 수많은 곳을 답사를 하면서 생긴 이상한 버릇이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이런 버릇들이, 십년 넘게 답사를 다니면서 어느 새 버릇으로 굳어버렸다.

 


  
인재를 배출헤 마을의 운세를 바꾼다는 군자정

 

한때는 마을의 운세를 뒤바꿀만한 정자로 유명세를 탔던 군자정. 이제는 그 화려하게 피었던 연꽃의 잔치도 줄었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던 옛 기운도 사그라진 듯하다. 그러나 저 조졸하기만 한 군자정이, 언제 또 다른 인재를 배출할지 기대를 해본다. 이런저런 사유를 갖고 있는 것이 정자이기 때문에.

 

진안군 마령면에서 만난 수선루가 눈에 선해

 

난 이 계절이 되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 3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면서 만난 많은 문화재와 절경 등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곳 중에 아직도 눈에 선한 몇 곳의 정자 등은 후에 책을 한권 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암굴을 이용해 중층누각으로 지은 수선루라는 조선 후기의 정자이다.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57번지. 이곳에는 지은 지가 333년이 지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인 수선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선루는 조선조 숙종12년인 1686년에 연안 송씨의 사형제인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이 힘을 합해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선조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누각은, 그 뒤 고종21년인 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였고, 연재 송병선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안군지>에는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다. 수선루 사변에는 '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사형제가 우애와 학식이 두텁고 효심이 지극하며, 마치 신선이 노니는 것 같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 4형제는 나이 80이 넘어서도 이 정자에 올라 학문을 논하고, 바둑을 두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바위 암벽을 이용해 축조한 정자 수선루

 

수선루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고, 2층의 중앙에는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수선루를 오르는 길은 우측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좌측으로는 섬진강 줄기가 흐른다. 돌 축대를 쌓은 곳을 오르다가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어떻게 이런 곳에 누각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2층으로 지어진 수선루는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이곳 수선루를 찾아갔을 때는 수선루 위에서 내다보이는 앞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어갈 철이었다. 앞으로는 나무들이 가려 밖에서는 수선루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이 누각을 찾아왔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그렇게 헛걸음을 친 덕에 이곳을 다시 찾았을 당시에는 사전에 수선루에 대해 조사를 하고 온 길이라, 머뭇거림 없이 수선루를 찾을 수 있었다.

 

자연암벽을 이용해 지은 수선루.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밖에서 보는 경치만으로도 절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암벽을 이용해 정자를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열려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머리에 닿을 듯 누마루의 바닥이 위에 놓여있다. 바위를 주춧돌로 이용해 멋대로 늘어선 기둥들. 그 또한 세상 격식에 매이지 않은 송씨 4형제의 마음을 닮았다.

 

 

한 철을 이곳에서 머물고 싶다

 

정자의 보이지 않는 뒤편은 바위 면과 처마가 맞닿을 듯하다. 그래도 꾸밀 것은 다 꾸며놓았다. 비스듬히 깎아진 바위 면에도 송씨수선루라고 음각을 해놓았다. 그 밑으로는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고여 있다. 물을 떠 입안에 넣어본다. 싸한 기운이 목을 타고 흐른다. 이 물을 마시면서 4형제는 이곳에서 신선과 같은 생활을 한 것일까?

 

아마 나라도 이곳에서 떠나기 싫었을 것이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누렇게 익은 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누각이, 그 위로 오르면 이런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 내다니. 이곳이야 말로 비경이 아니겠는가? 한 철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수선루가 그리워진다. 그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돌아보지 못했던 전국의 정자와 고택, 문화재,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들. 그 오랜 세월 이런 것들을 찾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삶에 찌들어서였는지 나태해졌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계절에 다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가까운 곳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겠나?

 

누각 안에는 수선루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이 걸려있다. 작은 방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내었다. 방은 천정이 낮아 서서는 들어갈 수 없다.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철에도 이곳에서 사방 경계를 바라보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위에 서니 절로 신선이 되는 듯하다.

 

누마루에 철버덕 주저앉는다.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곳이다. 인적 없는 이곳에서 한 철을 살면 안 되려나? 사람들은 어찌 이런 곳을 두고, 답답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이 수선루가 내 조상들의 것이 아님을 한탄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수선루. 난 이 누각을 호남제일암루라고 이름하고 싶다. 아마 이곳에서 한 철을 난다고 하면,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으려니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수선루의 자료를 찾는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행하기 닥 좋은 계절, 들판에 나무들도 푸른색을 띠고 있다. 이번 여행은 진안군을 한 번 다녀와야겠다. 마이산을 비롯해 많은 볼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장성에서 734번 도로를 따라 영광IC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가 나온다. 이 도로변 우측으로 키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정자가 서 있다. 기영정, 이 정자는 1543년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서 지어진 정자이다.

 

지지당 송흠(1459-1547) 은 세조 5년인 1459에 참봉 송가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만고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노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여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한 뒤, 광주 나주의 목사, 담양과 장흥의 부사를 지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노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여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모친을 봉양하였다. 7회에 걸쳐 효렴으로써 상을 받은 송흠은 1538년 청백리에 녹선이 되고, 1696년에는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기영정에는 서로 다른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에는 다른 글씨로 쓴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은 1543년 당시 전라도 감찰사인 규암 송인수가 송흠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용암천이 흘러 경치가 뛰어나다. 중종이 송흠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던 것 같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면, 세상 누구인들 그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아마 송흠도 천하에 효자로써 어머니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였으니, 당연히 중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영정은 전쟁으로 소실이 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송인수의 10세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을 하면서 철종 7년인 185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철 늦은 은행잎이 노랗다


방을 놓지 않고 사방을 트이게 했다. 주름이 진 기둥이 기영정의 역사를 알려준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기영정에 오른다. 방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정자가 시원하다. 앞으로 흐르는 용암천가에 아직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노랗다. 정자 앞에는 잎을 다 떨어트린 백일홍이 서 있다. 기영정이란 다른 글씨의 현판이 좌우에 걸려있는 정자는 주춧돌도 자연석이다. 그저 자연을 닮아 평생을 효로써 마친 정자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아마 뒤로 난 도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없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만 남았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요직을 거쳤으면서도, 노모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송흠. 그에게 내려진 중종임금의 사랑이 깃들어서인가 마음부터 숙연해진다. 수많은 정자를 돌아보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 기영정에 올라 효심(孝心) 하나를 배워간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가면, 전라남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된 요월정원림이 있다. 500~600년이 지난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이 숲은, 그야말로 원림(園林)’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곳이다. 아니 그보다 원시림(原始林)’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듯도 하다. 그만큼 노송과 각종 나무들이 어우러진 숲이다.

 

전남 장성군의 몇 군데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찾아간 요월정원림. 휴일이라 그런지 숲 앞 황룡강가에는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앉아서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황룡강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이 숲은 약 4,500평 규모로 그리 큰 숲은 아니다. 그러나 숲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오랜 옛 이야기를 들을만한 곳이다

 

 

숲과 강과 정자가 한데 어우러지다

 

길을 지나다가 이름이 생소하여 들린 요월정원림. 사실은 이 숲보다는 정자가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숲길로 들어서니, 초여름 더위를 가시게 하는 바람과 숲의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답사를 할 때는 늘 바삐 걸음을 옮기지만, 이곳은 그렇게 바쁜 걸음을 걷게 하지 않는다.

 

도로변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숲 안으로 들어서면 깊은 산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나는 그런 자연림이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니 황룡강을 굽이보고 있는 노송들이 보인다. 아래쪽을 보니 그 긁기가 꽤나 됨직하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수령이 500 ~ 600년이 되었다고 한다.

 

 

500년 가까이 된 요월정, 살림집처럼 꾸며

 

이 숲 안에는 조선 명종 때에 공조좌랑을 지낸 요월정 김경우(1517~1559)가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가 있다. 산수를 벗하며 음풍농월하기 위해 건축한 요월정이 바로 그 정자이다. 앞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수령 100년이 지난 자미나무와 배롱나무 들이 서 있다. 아마도 이 요월정은 1550년 이후에 지어진 듯하다.

 

요월정은 1811년에 1차로 중건하였으며, 1925년 후손 김계두가 재중건하였다. 요월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당대의 명사인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천 양웅정 등이 이곳에서 시를 읊고 글을 남겼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요월정은 정자이기 보다는 차라리 살림집처럼 꾸며 놓았다.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고자 한 김경우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사방에 활주를 달아 지붕을 받치고 있다. 측면으로 보면 앞으로 툇마루를 놓아 세 칸인 듯 보이나, 전체적인 넓이는 두 칸 정도이다, 다만 처마를 앞으로 내밀어 세 칸으로 보인다. 요월정은 전면은 모두 문을 달았다. 두 개의 방으로 들인 요월정은 ()’에 가까운 살림집의 형태이다.

 

 

황룡은 조선제일, 한양은 천하제일입니다

 

이곳에 전하는 말로는 김경우의 후손인 김경찬이, 이 정자의 경치를 찬양하여 조선 제일 황룡리라 현판하였다 한다. 이에 나라에서 장성 황룡이 조선제일이면, 한양은 어떠하냐는 질문을 해왔다. 자칫 대답을 잘못하면 곤욕을 치루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도 목숨도 잃을 판이다. 김경찬은 바로 답을 내었다.

 

장성 황룡은 조선제일, 한양은 천하에 제일이다라는 답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정자 앞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주변은 오래된 노송과 숲으로 우거진 곳. 이곳에서 시를 읊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갔던 사람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 새삼 머리를 숙인다.

 

숲길을 천천히 걸어본다. 이 시간에는 답사의 바쁜 걸음도 잊고 싶다. 아래쪽으로 흐르는 황룡강에 낚싯대를 늘여놓고 세월을 낚고 싶다. 아마도 이 노송들도 그런 마음에 강 쪽으로 가지를 두었는가 보다.

 

 

정자나 누각이라고 해서 꼭 경치 좋은 계곡이나 바닷가, 혹은 강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절마다 누각을 지어 그곳에서 강론을 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법을 알려주는 장소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전국의 사찰에는 이러한 누각이 상당히 많이 보존이 되어 있다.

내가 그 중에서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 경내에 있는 쌍계루를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쌍계루는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교루(橋樓)’라고 하여 최초로 지어졌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시에는 다리 위에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누각

지금도 쌍계루 앞에는 물이 고인 곳이 있고, 그 물은 계곡에서 흘러드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9년인 1370년 폭으로 인해서 교루가 부서졌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는 파손된 교루를 청수스님이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도전이 ‘백암산정토사교루기’를 지었다.


백양사 들어가는 길. 절을 찾아 가는 길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려 우왕 7년인 1381년에는 목은 이색이 교루의 이름을 쌍계루라 하고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를 지었다. 1980년에는 쌍계루가 복원이 되었는데, 그 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백암산을 뒤로 한 쌍계루와 쌍계루 현판

지금 시를 써 달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청수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도리어 빛나도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포은 정몽주가 당시 이곳에 머물면서 청수스님의 권유로 지은 시이다. 여기서 백암사는 지금의 백양사를 말하는 것이며, ‘옷을 떨친다’는 말은 관복을 벗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몽주는 결국 이 시를 남겨놓고 선죽교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으니, 그 혼이라도 이곳에 들렸을 것만 같다.


최근 새로 보수를 한 쌍계루. 전체적인 보수를 마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쌍계루 전각에 올라 보다.

쌍계루, 말 그대로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 곳에 서 있는 누각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아마 백암산에서 흘러드는 물줄기가 이 쌍계루를 휘감아 도는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 교루라 이름을 붙인 것도, 후일 이색이 쌍계루라 이름을 붙인 것도 물과 연관이 지어지는 이름이다. 지금도 쌍계루 앞에는 고여 있는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유영을 즐기고 있다.



쌍계루 위 누각에는 포은 정몽주의 시를 비롯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층 누각을 오르면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그 중 정몽주의 시판에 눈에 띤다. 아직도 이곳을 그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낯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난간에 머문다. 혹시 포은 선생의 넋이 저리 새가되어 쌍계루를 찾은 것이나 아닌지. 오랜만에 찾은 쌍계루는 그렇게 말없이 지난 역사만을 알려주고 있다.

난간에 앉아 쉬는 작은 새 한 마리. 포은 선생의 방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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