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西安市 碑林区 文昌门内 三学街)에 소재한 비림박물관(碑林博物馆)은 중국을 대표하는 성계가들의 필체가 한자리에 모여있는 대표적인 비석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박물관이다. 본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현재는 송나라 때부터 900년에 걸쳐 시안에서 수집한 비석 1,000여 점을 보유한 박물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곳에는 서성이라 칭송받는 왕희지(王羲之, 303~361)의 글씨를 비롯해 서예인이라면 누구나 모범으로 삼는 구양순(欧阳询, 557~641), 당대 해서의 모범이 된 안진경(颜真卿, 709~785), 우리나라 서예에 큰 영향을 끼친 조맹부(赵孟頫, 1254~1322) 등 저명한 중국 서예가들의 필체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하이라이트는 제1~3 전시실이다. 1 전시실은 국보급 문화재인 개성석경(开成石经)’이 유명하다. 도합 114개의 비석 양면에 65만여 자를 새긴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서적이라 불린다. 내용은 <논어>, <맹자>, <시경>, <효경>, <의례> 등 유가에서 중시하는 13종의 경서로 채웠다.(디음 백과침조)

 

 

 

영등할미 오는 날 며느리와 오면 진눈깨비, 딸과 오면 바람 불어

 

우리나라의 절기는 음력으로 이루어진다. 올해 224일은 음력으로 2월 초하루다. 이 날은 영등할머니가 땅으로 내려오는 날로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 영등할머니는 음력 2월 초하루에 내려왔다가 음력 215일에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올라간다고 한다. 영등할머니가 내려올 때는 수비(=수배)들이 함께 따라온다고 속설에 전한다.

 

수비는 수배(隨陪)’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서울·경기지역의 옛 재수굿에서는 굿의 본거리를 모두 놀고 난 다음, 뒷전거리에서 다른 여러 잡귀잡신과 함께 수비를 반드시 놀렸다. 이는 굿을 아무리 잘해도 뒷전에서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잡귀인 수비를 잘 풀어먹이지 않으면 굿이 영험을 얻지 못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1930년대 오산(烏山) 박수 이종만(경기재인청 도산주)무가를 보면 상청(上廳) 서른여덟 수비, 중청(中廳) 스물여덟 수비, 하청(下廳)은 열여덟 수비, 우중간 남 수비, 좌중간 여 수비, 벼루 잡던 수비, 책 잡던 수비, 군웅왕신 수비, 손님별상 수비, 해산영산에 간 수비, 수살영산에 간 수비, 먼 길 객사 수비, 언덕 아래 낙상 수비, 염병질병에 돌아간 수비, 쥐통객사에 간 수비, 고뿔감기에 간 수비, 열삼애삼에 간 수비, 여러 각 항 수비들아, 많이 먹고 네 가거라라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수비들이 음력 21일 영등할머니가 내려올 때 함께 따라온다는 것이다. 영등할머니가 내려오는 1일과 올라가는 15일에는 정화수를 떠놓고, 소반에 떡을 해서 놓은 후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영등제>라고 한다. 영등할머니는 주제가 여성이므로 영등제는 남자들은 관여하지 않고 주부들이 제를 지낸다. 영등할머니가 내려오는 음력 21일에는 물을 동이에 떠놓고, 그 이후에는 15일까지 접시에 물을 떠 놓는다.

 

 

볏가리대 허물며 풍년기원도 염원

 

영등할머니가 내려오는 날 진눈깨비가 오면 <물영등>이 들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이 와는 달리 바람이 많이 불면 그 해는 <바람영등>이 들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이날 진눈깨비가 오는 것은 딸을 하늘에 두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영등할머니가 며느리의 다홍치마가 비에 젖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와는 반대로 바람이 부는 것은 딸을 데리고 내려오기 때문에 딸의 다홍치마가 바람에 날려 자랑을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영등할머니도 며느리보다는 딸이 남들에게 잘 보이기를 바란다는 인간다운 면이 보여 재미있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예전에는 어전에서 신하들에게 <중화척>이라는 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정월 대보름에 시골에서는 커다란 대에 곡식주머니를 단 <볏가리대>를 세운다. 이 볏가리대는 음력 21일에 내리게 되는데, 볏가리대를 내리면서 그 대에 달린 곡식주머니를 가마에 넣으면서 천석이요 만석이요를 외친다. 그 해에 풍년이 들어 농사의 소출이 천선, 만석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 볏가리대에서 내린 쌀로 흰떡을 해 먹는다. 이 흰떡은 솔잎 위에 놓아 쪄서 만들므로 이 떡을 <솔떡>이라고 한다. 이 떡은 콩과 팥을 안에 넣고 찐다. 솔떡은 큰 것은 주먹만 하고 작은 것은 계란만 하게 만든다. 이 떡을 집안의 노비들에게 나이수대로 먹이는데 이때부터 농사일이 시작하게 되므로 기운을 북돋기 위함으로 보인다.

 

 

집집마다 콩을 볶는 음력 2월 초하루

 

농촌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루에 집집마다 콩을 볶았다. 솥에 콩을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타지 않도록 주걱으로 잘 지으면서 달달 볶아라. 콩알을 볶아라. 새알도 볶고, 쥐알도 볶아라.”라고 한다. 이날 콩을 볶아먹으면 쥐와 새들이 곡식을 축내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음력절기로 보는 우리의 풍습. 지금은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음력절기는 우리 선조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였다고 본다. 이런 지혜를 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주체성도 함께 잃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옛 풍속을 되돌아보는 것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나 고칠현심제(古七現三制)’라는 말이 허황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볏가리대를 용인 한국민속촌이나 찾아가야 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당에 세워놓은 후 영등할머니가 내려온다는 음력 21일에 내렸다. 볏가리대를 내릴 때는 주머니 안에 넣어놓은 쌀, 수수, 기장, , 밭 등을 볏가리대 밑에 놓은 가마니에 넣으면서 천석·만석을 외치는 풍속이 있었지만, 이제는 볏가리대를 보기도 쉽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난 이상하리만치 고래 등 같은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아마 나더러 초가집과 기와집 중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초가집을 택할 것이다. 초가집의 역사는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라시대의 경우 서라벌 안에는 기와집만을 짓게 했던 곳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초가가 전해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초가라 하면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지만 원래는 자연에서 채취한 갈대나 억새, 띠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엮은 새나리 지붕이 그 원조였을 것으로 본다. 새나리 지붕은 비교적 수명도 길고 깨끗하기는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 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농촌에서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것이 많다. 그리고 기둥은 소나무, 벽면은 흙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 볏짚은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단열과 보온성이 우수하여 많은 집들이 짚을 이용하여 지붕을 덮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벌레가 생기며, 화재의 위험이 높다는 단점도 있다. 또 볏짚을 매년 한 번씩 다시 바꾸어 지붕을 이어야 하므로 번거롭기도 하다. 초가집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나무로 기둥을 세운 다음 벽체는 대나무나 수수로 엮어 흙벽으로 하여 지붕을 올리는 <뼈대집>, 앞쪽을 제외한 세 면을 블록처럼 찍어 만든 흙 담을 쌓아 지붕을 올리는 <담집>이다. 이러한 초가집은 한때는 가난과 게으름의 상징이라고 하여 철거를 하고 새마을 가옥이라고 하여 양철지붕을 올리고 붉은색과 푸른색을 칠해 우리의 전통적인 미를 말살시키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집단을 이은 초가집이 있는 곳은 민속마을이라고 하여 보존을 하기도 하는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새롭게 초가에 대한 아름다움을 재조명 하고 있기도 하다.

 

 

난 나름대로 초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초가 안에 아주 작고 소담한 우리 민초들의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초가의 지붕을 새로 올릴 때 용마루에 해당하는 것을 용마름이라고 하여 머리를 땋듯 엮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그런 기능도 연세가 드신 몇 분만이 제대로 하신다고 하니 그 기능을 전승시키는 것도 적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즈음에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용마름을 엮는 방법 등이 소개가 되고 있어 기본적인 내용이 글과 그림으로 정리가 되어있다는 점일 것이다. 용마름이란 용을 엮어 말아 놓은 단을 말한다.

 

그런데 왜 지붕을 용마름이라고 했을까?

난 이 문제를 놓고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용이란 임금을 뜻한다. 용을 지붕을 덮는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었을 것이다. 그 예로 궁의 임금의 숙소나 왕비의 숙소를 보면 그 곳에는 용마루가 없다. 한 지붕 안에 두 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란다. 즉 임금이 용이기 때문에 용 위에 또 용이 군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모든 가옥의 지붕 중앙의 가장 높은 곳을 용마루, 혹은 용마름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란 생각이다.

 

 

이제는 단순히 서민을 상징하고,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그 안에서 찾는가 하면, 좀 더 우리답고 멋스러움을 찾는 초가집. 난 그래서 황토로 벽을 올리고 이엉을 엮어 용마루를 튼 초가집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짚이 부족하다고 하니 원초적인 모습대로 갈대와 억새, 띠와 칡넝쿨을 이용한 초가 한 칸을 짓고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붓하게 가족들과 함께 보리밥에 직접 농사를 지은 풋고추 몇 개 따서 된장을 찍어먹는 소박함을 맛보고 싶다.

 



장치기는 정월의 민속놀이이다. 장치기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1920년 동아일보에 보면 수원군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남녀 32개팀이 보여 시합을 벌였다고 적고 있다. 수원에서는 현재 수원농생명과학고의 전신인 수원농고 학생들이 수원장치기를 연습하여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를 하기도 했다.

 

장치기 시합을 하는 도중에 반칙을 범해 밖으로 나가 벌을 학생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경기를 마친 다음에는 이구동성으로 지역 학교에 많이 알려, 장치기 경기 한마당을 벌였으면 좋겠다고들 한다. 수원시에서 재현이 되어 경기도 여러 곳에서 재현이 된 우리 전통의 공놀이 장치기는 정월의 흘겨운 민속놀이 한마당이다.

 

 

 

 

 

 

 

 

 

서경문화유산포럼 중국 상하이, 항저우, 충칭 등 임시정부흔적 찾아

 

대한민국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경문화유산포럼(회장 신영주)은 지난 30일부터 84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찾는 탐방활동을 진행했다. 항일독립운동유적 지킴이 활동을 위해 중국의 상하이, 항저우, 충칭에 이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1919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 만주, 한성의 세 군데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통합정부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소를 여러 번 옮겼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지켜냈다. 그 가운데 흔적조차 사라진 곳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장소를 찾아 기억하고, 알리기 위한 발걸음이다.

 

 

임시정부 유적 자주 찾아보고 의미 되새겨야

 

1919411, 상하이 서금이로 어디선가 임시정부가 탄생했고 회해중로에 두 번째 청사였던 것을 확인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마당로청사와 다른 유적지까지도 함께 기억하고 자주 방문해야 그 장소가 유지가 될 것이다.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홍커우공원(현루쉰공원)을 방문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힘썼던 임시정부의 네 번째 주석인 이동녕선생 주거지,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과 가족들, 한국광복군 산하 토교대 대원들이 거주했던 한인촌 등을 방문하며 나라를 지켜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회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특히 김구선생의 주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했던 최중호선생의 손녀인 최위자 선생과의 만남은 살아있는 교육현장이 되었다. 중국에서 음악교사였던 최위자 선생은 독립운동가들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며 그때의 상황과 환경이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인은 강하고 뛰어납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야 합니다.”로 현재의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강조해주셨다.

 

 

우리문화재 지키고 가꾸는 서경문화유산포럼

 

한편 서경문화포럼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자발적인 참여로 가꾸고 지켜나가는 문화재지킴이 운동을 하는 단체 중 서울, 경기, 인천, 강원지역 단체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경문화포럼은 지난 2018년에도 방치되거나 훼손된 중국내의 간도지방 항일독립운동유적 보존을 위한 탐방 및 캠페인 활동을 펼쳤다.

 

20192월에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혼을 찾다는 주제로 연해주 각지에 흩어진 항일독립운동유적지의 상태와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조사하는 모니터링도 수행했다. 서경문화유산포럼의 활동은 항일독립운동유적을 살피는 것과 현지의 교민들을 만나 문화유산을 잘 보존할 수 있도록 협력관계를 맺는 것에 있다. 서간도와 북만주에서는 연변의 후사모와 협약을 맺었고, 연해주에서는 크라스키노포럼과 협약을 맺었다. 이번 중국 임정로드에서는 상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히어로역사연구회와 협력을 해나가기로 약속했다.

 

히어로(HERO)역사연구회는 중국에서 지내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치고, 역사기행 및 탐방프로그램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도움을 주는 민간단체이다. 신영주 회장은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행사로 끝나지 않고, 100년 전의 함성을 기리고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활동은 서경문화유산포럼의 문화살림, 수원지기학교, 하남프랜즈 등의 단체와 개인 등이 참여하였다.

서경문화유산포럼 회장 신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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