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풍습을 지키는 거창군 무촌마을 사람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이런저런 일을 많이 당한다. 마을에 들어가면 길을 묻거나 문화재의 소재를 파악하다가 보면,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무촌마을에 들렸다. 마을에는 경남 기념물 제198호인 수령 400년이 지난 은행나무가 서 있기 때문이다.

마침 무촌마을 은행나무가 서 있는 옆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그 옆에 정자가 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계시다. 이 은행나무는 원줄기에서 새싹이 나와 흡사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 있는 듯이 보인다. 가지는 8개가 사방으로 뻗어 자라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이 되면 많은 은행을 수확한다고 한다.


무촌마을 마을안에 자리잡은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할머니 당이라고 한다. 정월 보름에 지낸 당제 때 쳤던 금줄이 쳐져 있다.


마을 사방에 당산이 있는 무촌마을

이 은행나무 앞에는 제단이 있다. 돌로 만든 제단의 앞쪽에는 ‘당산제단’이라고 음각이 되어있다. 이 당산을 마을에서는 할머니 당이라고 부른다. 이 할머니 당에는 비린 음식을 제수로 차리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당제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더니, 어르신들이 굳이 이장님을 찾는다. 마을을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이장이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보니 마을 이장님보다 윗분들이시다. 그리고 당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아시는 듯하다. 그런데 굳이 이장님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잠시 후 무촌마을 이민언(남, 68세) 이장님이 정자로 오시고 나서, 본격적인 마을 당제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다. 이장님과 어르신들은 앞장서 마을에 있는 네 곳의 당산을 안내를 해주신다.



당제를 가장 먼저 지내는 할아버지 당으로 오르는 길 양편으로는산죽이 하늘을 가란다. 제단은 두개가 놓여있으며 하나는 산신단, 또 하나는 .주산신제단'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아래편 돌 밑에는 정우러 보름에 당산제를 올린 후 제물로 사용한 돼지머리를 묻는 곳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있어야 해’

마을 산제당이라고 하는 할아버지 당을 찾아가면서 동행을 하시는 어르신께 슬쩍 물어보았다. 왜 꼭 이장님이 오셔서 말씀을 하셔야 하는 가를. 그랬더니 간단하게 대답을 하신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 마을의 가장 어른이 이징님 아니신가? 그래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당연히 이장님한테 들어야 하지”

산제당인 할아버지 당을 올라가면서 계단에 나 있는 풀을 뽑으신다. 할아버지 당 근처에도 금줄을 둘러놓았다. 참나무인 당산나무는 밑동의 둘레가 2m 가 넘을 듯하다. 몇 년이나 묵은 나무냐고 질문을 드렸더니, 아주 오래 되었다는 것 밖에는 알 수가 없다고 하신다.

산제당에는 산신당이라고 쓴 제단이 있고, 그 옆에는 ‘주산신제단’이라고 쓴 돌이 놓여있다. 이곳이 바로 가장 먼저 제를 올리는 할아버지 당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제를 지낼 때는 돼지머리를 사용하며, 제사를 마치고 나면 그 돼지머리를 땅에 파묻는 다는 것이다. 제단 옆에는 커다란 돌이 보이는데, 그 밑에 돼지머리를 통째로 묻고 내려온다고 한다.


동구당산이라 부르는 아들당산과 대곡천 옆 논둑에 쌓아 올린 며느리당산


돌탑으로 쌓은 아들당산과 며느리당산

할아버지 당을 돌아보고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마을 입구라고 하는 곳에 자리한 아들당산으로 향했다. 아들당산은 우측으로 연수사를 들어가는 길 건너편 산 아래, 돌을 쌓아 만든 누석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이곳에도 금줄을 쳐 놓았는데, 이 당산을 ‘아들당산’ 혹은 ‘동구당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며느리당산은 마을의 북쪽 대곡천이 흐르는 곁 논둑에 자리하고 있다. 며느리 당산 역시 돌탑을 쌓아놓았다. 네 곳의 무촌마을 당산은 마을을 에워 쌓고 있는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어르신들은 당산제를 정성을 다해 드린다고 말씀을 하신다. 인근에 있는 마을들도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마을에 화가 있어 다시 시작을 하였다고 귀띔을 해주신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대곡천. 예전에는 이곳에서 정월이면 집집마다 용왕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에서 사용하는 당산제 축문. 아들당산의 축문으로 네 곳 모두 축문이 있다.


축관을 지내셨다는 어르신께서 축문을 가져다주신다. 컴퓨터에 저장을 해 놓고 매년 그 해에 맞게 출력을 하여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있어야한다고 말씀들을 하시는 무촌마을 어르신들. 이장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도, 이 마을이 얼마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어, 오늘도 무촌마을은 모두가 탈 없이 지내는가 보다.

감악산 연수사. 그 이름만큼이나 어느 오랜 옛날, 꿈속에서 돌아본 듯한 정겨운 이릉이다. 6월 10일, 한 낮의 온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간에, 감악산 연수사를 찾았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소재하는 연수사는, 해발 951m의 감악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연수사를 찾은 것은 경내에 있는 수령 6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현 사찰 남쪽에 세우려 했던 절이다. 이 연수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감악조사가 절을 짓기 위해 서까래를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통나무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 연수사 은행나무

서까래가 옮겨진 곳에 터를 잡은 연수사

아침에 주변을 살펴보니 현 연수사 대웅전 자리에 서까래가 놓여있어, 그 자리에 대웅전은 짓고 가람을 이룩했다고 한다. 연수사는 조선조 숙종 시에 벽암선사(1575-1660)가 사찰을 중수하고, 십여 사원을 지어 불도를 크게 일으킨 절이라고 한다. 연수사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 구멍에서 떨어지는 맛 좋은 샘물이 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이 샘물을 먹고 중풍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어, 연수사의 물이 병 치료에 좋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 물은 사철 물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연수사를 오르기 전에 만나는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수령이 6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승이 심었다고 전하는 연수사 은행나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연수사 은행나무도 애틋한 세상사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연수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육백여년 전 어느 젊은 여인이 10살 먹은 자신의 유복자와 이별을 하고 비구니가 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모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전나무는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남았다는 것이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8m에, 밑동둘레가 7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정도에 이른다.



물맞이 시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연수사 일주문 곁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양편에는 누군가 돌탑을 여러 개 쌓아놓았다. 이렇게 돌탑을 쌓은 사람은, 돌 하나를 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대웅전 우측으로는 호리병에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저 샘물이 그 용하다는 물은 아니었는지.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는 크지 않은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일주문 앞 암석에 잠시 다리를 뻗는다. 눈앞에 물 맞는 곳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180m. 천천히 걸어 산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고목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딱...” 더운 여름 날 그 소리가 마치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다.

저만큼 강돌로 쌓은 구조물이 보인다. 끈끈한 몸을 물이라고 적실 요량으로 달음질을 쳐 구조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에는 여탕이라는 간판이 놓여있다. 그 반대편으로 들어가니 입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게 조성을 하였다. 당연히 물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연결한 물길과 호스가 따로 떨어져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더위가 몰려온다. 괜히 이마에 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속으로 투덜대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 밑으로 거창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별로 올라온 것 같지가 않은데, 꽤나 지역이 높은가보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산길을 돌아 나오니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오랜 시간 저리고 꿋꿋이 서 있는 은행나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저리도 불평 없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순간적으로 혈기를 내다니. 또 한 번의 부끄러움에 허한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거목(巨木)이나 오래된 고목(古木)들 중에서,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 등이 아니면 잎이 날 철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찍어도, 그 위용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산 23-1 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281호인 ‘남원 보절면 느티나무’를 찍으려고, 아마도 몇 달인가를 기다린 듯하다.

1982년 11월 4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 정도라고 전한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천연기념물 제281호로 지정이 된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의 느티나무 

진기마을의 느티나무, 위용에 감탄하다

신기 마을의 정자나무와 당산나무의 구실을 하고 있는 ‘남원 진기리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크기는 높이 23m, 가슴높이의 둘레가 8.25m이다. 뿌리 근처의 둘레가 13.5m나 되는 거목으로, 가지의 길이는 동서 25.8m, 남북 28.6m이다. 이 느티나무는 단양 우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올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 세조 때 힘이 장사인 ‘우공(禹貢)’이라는 무관이, 뒷산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뽑아다가 마을 앞에 심어놓고, 마을을 떠나면서 나무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우공은 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의 녹훈을 받았으며 그 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후손들은 사당을 짓고 한식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6월 2일 오후, 그동안 미루고 있던 진기리의 느티나무를 찾아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따가울 정도의 날씨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잠시 자리를 비워놓고 답사를 떠난 것이다. 신기마을을 물어 들어가니, 마을 한편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길가에 안내판 하나 없는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찾아 촬영을 마치기는 했지만, 영 마음이 씁쓸하다. 신기마을이라는 석비가 길가에 서 있어 마을을 찾기는 했지만, 도로변에도 마을이 갈라지는 곳에도 안내판 하나가 서 있지를 않다. 마침 동행을 한 일행이 남원에 거주하는 사람이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었지만, 만일 외지에서 혼자 찾아들었다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나무의 연륜을 말해주는 듯한 흔적

길을 지나는 몇 분의 어르신에게 길을 물어 찾아 든 신기마을이다. 자료를 미리 보았기에 보절면 진기리 신기마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마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라면 이곳을 찾아 올 리가 없다. 아니 올 수가 없다.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느티나무가 소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식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알리는 안내판은 큰길가에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느티나무가 천연기념물임을 알리는 안내판은, 느티나무가 서 있는 안쪽에 달랑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장소에 서 있다. 천연기념물을 찾아 그 위용에 감탄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런 경우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우리 문화재가 홀대를 받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무의 갈라진 줄기와 땅위로 들어 난 뿌리에 고인 물(아래)

느티나무를 만지며 소원을 빌다

거목으로 자란 느티나무는 가지가 넓게 퍼졌다. 한편으로는 축대 밑까지 가지가 뻗어있다. 나무의 뿌리는 원 줄기에서 10여m 밖까지 뻗어 땅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나무뿌리가 땅 위로 솟아 홈이 파진 곳에 물이 괴어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럴 정도로 나무는 오래 묵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몇 개의 굵은 줄기가 하늘을 향해 오르다가 잔가지를 만든다. 밑동 근처에는 연륜을 말해주듯, 혹처럼 불거진 옹이도 보인다. 밑동 위에 처진 새끼줄에는 숯이 끼워져 있다. 아마도 제를 지내면서 금줄로 친 듯하다. 나무의 옆에는 많이 훼손이 된 솟을삼문이 보인다. 사당의 출입문이었을까? 나무는 그러게 당당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 솟을삼문은 퇴락한 모습이다.


금줄에 끼워놓은 숯과 솟을삼문

나무에 손을 대어본다. 딱딱한 감촉이 느껴지지만, 그 안에 거대한 힘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600년 오랜 풍상을 이겨 온 나무의 힘일까? 그 세월을 이렇게 한 자리에 서서 온갖 세월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동백은 그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백(秋栢), 동백(冬栢), 춘백(春栢)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난 개인적으로는 추백이나 동백보다 봄철에 꽃을 피우는 춘백이 좋다. 겨우내 꽃을 피우고도 모자라 5월까지도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많은 나무가 함께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꽃에서 민초들의 어우러진 삶을 연상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내가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4번지 일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9호인 ‘마량리 동백나무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우선은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동백 숲도 있지만, 당집과 동백정, 그리고 서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볼거리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은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5월을 아름답게 꾸미는 마량리 동백

지난 5월 4일 서천군 마량리 동백나무숲을 찾았다. 이곳은 80주가 넘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100주도 채 안 되는 동백나무 군락이지만, 주변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장관이 따로 없다. 이곳의 나무들은 강한 해풍으로 인해 키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옆으로 퍼져나간 나뭇가지들은 오히려 무성한 숲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다.

요즈음은 작은 나무들을 키워 더 넓은 지역에 동백 숲이 조성이 되고 있어 그도 볼만하다. 이곳에 동백나무를 처음 심은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마량리에 주둔하던 수군첨사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 뭉치를 많이 증식시키면, 마을에 항상 웃음꽃이 가시지를 않을 것이란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군첨사는 진감인가 하여 바닷가에 나가보니, 정말로 꽃이 있었단다. 그것을 증식시킨 것이 바로 현재의 마량리 동백나무숲이라는 것이다. 동백나무숲 옆으로는 해송이 자라고 있는데, 이 두 숲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서해를 내려다보는 동백정의 정취

사람들은 동백나무가지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계단을 오르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를 않는다. 아마도 500여 년 전 이곳에 동백을 심은 수군첨사의 꿈대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를 않기 때문인가 보다. 동백꽃이 땅에 떨어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떨어져 내린 꽃도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오르면 누각으로 된 동백정이 있다. 지난해인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라 미쳐 정자에는 오르지를 못했다. 정자에 올라 서해를 내려다본다. 5월의 시원한 해풍에 몸을 맡긴 채, 한 없이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이 절경에 세월이 가는 것을 모르고 머물지 않았을까?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나이 지긋한 연인들도 이곳을 오면 젊은이가 되나보다. 젊은 연인들보다 오히려 나이가 든 부부들이 더 많이 찾는 듯하다. 아마도 동백나무숲과 동백정의 정취 때문은 아닐는지. 동백나무숲만으로도 족하거늘, 동백정이 그 풍취를 더하고 있다.



멀리 작은 배 하나가 지나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글 한자 남길 수 없는 마음이 안타깝다. 정자에서 내려 동백나무숲 안을 들여다본다. 가지가 이리저리 서로 맞물리며 자라고 있다. 그저 이곳을 오면 민초들의 얼크러진 삶이 연상되는 것도,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가지 때문이다.

늘 찾아오는 곳이지만, 늘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 마량이 동백나무숲은 주변 절경과 어우러져 늘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마도 500년 전의 이 전설은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이렇게 찾아와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뒤돌아 오는 길에 누군가 동백꽃 세 송이를 울타리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바라다보며 괜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저 것만 보고도 글 하나는 쓸 수 있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군 삼인리에 소재한 선운사. 선운사 대웅전 뒤편을 보면 빼곡히 들어찬 숲이 있다. 언제 심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일설에는 신불로부터 선운사를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이다. 이 숲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5월 1일 찾아간 선운사 동백나무 숲. 약 2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집단으로 들어차 있는 곳이다.

동백나무는 차나뭇과의 상록활엽목이다. 나무의 높이는 5~8m 정도로 자라며,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으로 단단한 편이다. 선운사 동백 숲의 동백나무는 4월에 꽃이 피는 춘백이다. 동백은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백(秋栢), 동백(冬栢), 춘백(春栢)으로 구분을 한다. 붉은 꽃이 피는 선운사 동백나무 숲. 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동백 숲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분주하다.


산불로부터 선운사를 지키는 보호림

선운사 동백 숲은 산불로부터 선운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1597년인 정유재란 때 선운사가 거의 소실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때쯤에 이 동백나무 숲이 조성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동백나무들은 아름다운 붉은 색 꽃을 가득 피웠다. 꽃들이 떨어져 여기저기 나무아래 흩어져 있다. 천 여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 길을 떠날 수가 없다. 많은 천연기념물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넓은 지역에 퍼져있는 동백나무 숲은 충남 보령시 외연도의 동백나무 숲 등에



이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동백꽃이기에 그 꽃말이 ‘자랑’과 ‘겸손한 마음’은 아닌지. 화려함을 자랑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 동백 숲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이치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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