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요즈음 덥더니 드디어 이 양반이 정신 줄을 놓았구만. 이런 생각들을 하실는지 모르겠다.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409호로 지정이 된 수령 350년의 처진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의 높이는 11m 에 밑동의 둘레가 3m가 넘는다.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져있는 희귀종이다. 우리나라에는 속리산 정이품송을 비롯해 몇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행곡리 처진소나무를 찾아갔을 때는 뒤늦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이 계절에 내리는 비는 별로 반갑지가 않다. 이때는 수확을 서두르고 있는데, 비가 내리면 수확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빗속에 무슨 답사를 한다고, 미쳤구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갔다. 답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날이 좋아서 길을 떠났는데도 답사 중간에 비를 만나는가 하면, 폭설로 인해 발이 묶이기가 일쑤다. 그런가하면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듯한 추운 날이 있기도 하고, 더위로 인해 사람이 진이 빠지기도 한다.

나는 현장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가급적이면 동영상으로 자료를 남긴다. 사진에서 미비한 것은 동영상으로 보충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문화재를 한 번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계절별로 찾아다니다가 보면, 그 변화를 알 수가 있어 더욱 좋다.




주변 사람들은 가끔 질문을 한다. 이 빗속에 미치지 않고서야 무슨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그러느냐고. 글쎄, 나도 가끔은 내가 정상은 아니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문화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빗속에서 바라 본 행곡리 처진소나무, 멋지다 정말 

처진소나무를 찾아간 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요즈음은 일기의 변화가 잦아 답사 길이 점점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계획을 세워 길을 나섰는데, 비가 오거나 눈이 오가나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중간에 포기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자료들을 조사해보면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한 자료가 상당히 많다.

마을이 조성될 때 함께 심었다는 행곡리 처진소나무는 마을에서 위하는 나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을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신목으로 삼아 위하는 습속이 있다. 이러한 행위를 단순히 우상숭배나 미신이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민족은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 공동체를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행곡리의 처진소나무도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표상이다. 이 나무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하나로 뭉쳐진 것이다. 행곡리 처진소나무는 한 그루의 희귀종인 소나무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 더욱 소중한 것이다.

비가 오는 날 찾아간 천연기념물 제409호 행곡리 처진소나무. 나무를 촬영하고 있는데 곁에서 계속 말을 한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이 비에”

그래 나 미쳤다. 그렇다고 이 나무를 안보고 가면 마음이 편하겠냐?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수령 450년의 매화나무. 수령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고, 남명 조식 선생이 심은 나무라 해서 더 유명하다. ‘남명매(南冥梅)’ 조식(1501 ~ 1572) 선생이 심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른다. 산청의 오래 묵은 매화나무 두 그루 중 하나인 이 나무는, 선생이 61세에 심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으로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만 열중한 선생은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재주가 뛰어났다. 한 마디로 팔방미인인 선생은 명종과 선조 대에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다. 그러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오직 제자를 기르는 데만 힘썼다.


비를 맞으며 산천재를 찾아가다

남명매는 조식 선생이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그 앞에 기념으로 심은 나무라고 한다. 8월 13일, 산천재에 도착했을 때는 장맛비처럼 비가 내리 쏟고 있었다. 우산을 들었다고 해도 바람까지 불어, 카메라가 비에 젖을까 봐 행동이 부자유스럽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남명매를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산림처사’라고 자처한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지었다. 61세에 이 집을 짓고 명이 다할 때까지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다. 선생의 제자들은 늘 선생이 천왕봉과 같은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 선생의 교육 때문에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 모여 나라를 구할 것을 다짐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선생은 우리의 역사상 가장 성공을 거둔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힘든 모습이 보이지만, 그래도 당당한 매화나무

선생이 남은여생을 보냈다는 산천재. 그 앞마당에 심은 매화나무는 10여 년 동안 선생과 함께 생활을 했다.

朱點小梅下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을 찍다가
高聲讀帝堯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아마도 이 시를 지을 때는 매화나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매화를 심은 지 10여 년 후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 선생과 함께 한 매화나무는,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450년 세월을 묵묵히 천왕봉을 바라보며 산천재를 지키고 있다.



비록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여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선생의 기개처럼 당당히 서 있는 나무이다. 매화나무를 보고 난 후 옆 전각의 마루에 걸터앉는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매화나무 잎 하나가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그 오랜 세월, 선생의 마음을 닮아 산 남명매. 앞으로 얼마나 더 선생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것인지. 그저 세세연년 그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태풍 무이파가 몰고 온 피해는 상상외로 컸다. 7일 오전 7시20분께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에 태풍 '무이파'가 몰고 온 강한 비바람으로 인해, 수령 600년 된 팽나무 밑동이 부러져 곁에 있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일관헌’까지 덮쳤다.

이번에 부러진 팽나무는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 군’에 속한 노거수로, 높이 20m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4.4m에 이른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같은 아름드리 팽나무가 태풍에 밑동부근이 부러져 나간 것이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 군

여러 그루 중 왜 그 나무만 부러졌을까?

제주도 남동 해안 근처의 성읍리는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곳이다. 이 마을의 일관헌 주변에는 느티나무 1그루와 팽나무 7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으며, 느티나무의 나이는 수령이 이미 1,000년이나 된 것으로 추정한다. 팽나무 7그루는 높이 14.5 ∼ 23.5m 정도에, 둘레는 2.36 ∼ 5.00m 정도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1274∼1308) 때에도 이곳에 나무가 자랐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곳에 지정된 천연기념물 제161호인 나무들은, 그 가운데 일부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이란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법률에 따라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식물이나 동물, 혹은 광물 등을 말한다. 학술상 가치가 높은 동물의 서식지를 포함하여 번식지, 도래지와 식물의 자생지, 광물, 지질과 그 밖의 천연물 등이다. 한 번 지정된 천연기념물은 원칙적으로는 현상 변경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한 천연기념물인 팽나무가 밑동이 부러져 버렸다는 소식이다. 가까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가지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그 밑동 쪽이 통째로 부러져 나갔다면 태풍의 세기가 가늠은 간다. 그러데 여러 그루의 나무 중 왜 그 나무 한 그루만 부러져 나간 것일까?

천연기념물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나게 되는 많은 천연기념물 등, 여러 가지 많은 종류가 있지만 내가 유난히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나무 종류이다. 노거수들을 만나는 먼저 고개부터 숙이게 된다. 경외심이 절로 일어서이다. 그 오랜 세월을 꿋꿋이 살아온 나무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그동안 답사 길에서 만난 많은 나무들은 알게 모르게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도 했다. 사람들이 일부러 해를 입히는가 하면, 태풍이나 심한 바람으로 가지가 잘려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변함없이 한 자리에 수백 년을 지키고 서 있다는 것이 늘 고마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600년 이상이나 된 나무가 부러져 나간 것이다. 그것도 가지가 부러진 것도 아니도 밑동 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내 몸 일부가 잘라진 듯 마음이 아프다

곁에 있는 문화재의 지붕이 망가진 것은 부수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밑동 째 부러져버린 팽나무는 살릴 수도 없다. 뿌리가 있으니 잔가지들이 다시 자랄 수도 있겠지만. 원줄기를 잃은 나무는 이미 천연기념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다. 자연이 망가트린 현상변경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겠지만, 강한 태풍이 온다고 했는데,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버팀목이라도 설치를 했더라면 잘 넘어갈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부러진 천연기념물인 팽나무로 인해 하루 종일 우울하다. 글을 쓸 마음도 일지 않는다. 어제 저녁서부터 마음만 불안한 것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비가 흡사 내 마음을 아는 듯하다. 잘려나간 밑동 사진을 보면서 내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듯한 기분이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 부었다. ‘비가 왔다’는 말은 이제는 옛 이야기이다. 이제는 ‘왔다’ 혹은 ‘내렸다’ 보다는 ‘쏟아 부었다’라는 말이 맞을 듯하다. 단 2~3일 만에 반년 동안 올 비가 왔다는 것이다. 기상이변이라고 애써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속으로는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인지를.

그렇게 한 편에서 쏟아 붓고 있는데, 한 편에선 이마가 까질 정도의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참 이 좁은 나라에서도 이젠 점점 이변이 생기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 쏟은 후에는 불볕더위가 찾아온다고 한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세상을 ‘감(感)’ 으로 아신다. 올 여름은 더위가 예년보다 길 것이란 것을.


여름피서, 폭포를 찾아가는 보았나?

여름철에 만나는 폭포. 아마 이런 폭포보다 더 좋은 피서지는 없을 듯하다. 우선 폭포라는 곳을 가면, 물이 떨어지는 그 소리 하나 만으로도 압권이다. 벌써 그 물소리가 다르다. 그리고 물이 떨어지면서 주변으로 튀는 물방울들이 사람을 속 시원히 만든다. 세상에서 찌든 몸과 마음의 때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듯하다.

그래서 여름피서는 복잡하지 않아 좋고, 시끄럽지 않아 좋은 폭포가 제격이란 생각이다. 전국에는 수많은 폭포가 있지만, 그 중 힘들지 않게 찾아갈 수 있는 폭포를 소개한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좋다.

소금강
강릉 소금강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소금강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수도 없이 많은 크고작은 무명의 폭포들이 줄 지어 있다. 물 맑기로 유명한 소금강. 아이들과 함께 찾아 폭포를 세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태백 미인폭포
폭포가 마치 미인의 몸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경사가 급한 비탈길을 내려가면 미인폭포가 보인다. 까마득한 폭포 주변으로는 괴이한 돌이 붙은 바위들이 널려있다.

구례 수락폭포
도착하면 금방이라도 판소리 한 바탕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여름이 되면 명창이 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폭포독공에 힘을 쓰는 곳. 피서도 하고 소리도 듣고.

지리산 구룡폭포
남원에 있는 구룡폭포. 길 밑에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만날 수가 있어, 아이들과 함께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가 있는 곳이다.

양구 팔랑폭포
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한 팔랑폭포. 작은 폭포가 아기자기 하다. 앞으로는 소가 있고, 주변에 나무 숲길이 있어 좋다.

양산 홍룡폭포
양산 홍룡폭포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만한 곳이다. '척판구중'의 일화가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찾으면 고사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줄 수가 있다.

영주 희방폭포
희방사를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폭포이다. 폭포 옆으로 희방사를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서 폭포의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완주 위봉폭포
위봉폭포 주변으로는 위봉산성과 위봉사, 그리고 폭포를 가기 전 송광사 등이 있는 곳이다. 위봉폭포를 찾아들어가다가 만나는 아름다운 길은 시골 길의 듬뿍 느낄 수가 있다.

폭포는 많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근접하기 좋은 곳으로 소개를 한다. 올 여름은 폭포에서 더위를 피해보자. 이보다 더 좋은 피서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이들에게 색다른 추억을 남겨 줄 수가 있으니까

합천 해인사. ‘법보종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으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세워진 가람이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인 802년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고 한다.

이 해인사 한편에는 ‘학사대’라는 곳이 있다. 신라 말기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은거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시서에 몰입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소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루는 최치원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데,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경청을 했다고 한다.



학사대에 서 있는 기이한 전나무

이 학사대에는 기이하게 자라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가지를 아래로 내린 듯하다. 이 전나무는 최치원이 전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 전설로 미루어보면 이 나무의 수령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문성왕 19년인 85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으로 유학을 가, 다시 신라로 돌아온 것이 885년이다. 그 뒤 897년에 효공왕의 ‘사사위표’를 찬술하였고, 효공왕 8년인 904년 무렵에는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다. 908년에는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짓고 난 후,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최치원이 이 곳 학사대에 머물렀던 것은 9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고 해도 이 전나무의 수령이 1,100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가지가 아래로 처진 전나무

전나무는 대개가 굵은 한 줄기가 곧바로 자라난다. 하지만 학사대에 있는 전나무는 어느 정도 원 줄기가 위로 오르다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나무의 높이도 상당하다. 대충 눈대중으로 따져보아도 25m 이상이 될 것만 같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그만큼 이 전나무는 위로 까맣게 솟아 있듯 보인다. 나무줄기가 갈라진 곳에는 풀씨가 떨어져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아끼고 보듬은 최치원의 마음인가 보다.

그 아래로 가지가 부러져 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부러진 모습이 어느 쪽에서 보면 용머리 같기도 하고, 어느 쪽에서 보면 늑대의 머리 같기도 하다. 아마도 우연히 부러진 가지가 남은 모습이지만, 해괴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 학사대에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 등이 보인다. 그만큼 이 곳이 원시림이었을 것이다.


그곳 학사대에서 은거를 했던 최치원. 가야금을 벗 삼아 세월을 유유자적하던 최치원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높다랗게 위로 솟은 줄기와 아래로 고개를 떨군 가지.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싶었던 최치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7월 26일, 해인사에서 만난 학사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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