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군 위천면 당산리 331번지, 당산마을 내에 소재하고 있는 고목인 소나무 한 그루. 현재 천연기념물 제41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소나무가 있는 곳을 당산마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나무가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거창 당산리의 당송은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18m, 밑동의 둘레는 4.1m 정도이다.

6월 24일 거창군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당산마을 당송. 마을 밖 길에서도 커다란 소나무가 의젓한 모습으로 보인다. 이 나무의 껍질은 거북등과 같이 갈라져 있으며, 밑동 부분에는 도끼자국이 남아있다. 남쪽의 가지 하나가 죽었으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소나무이다.


도끼자국 누구 짓일까?

도대체 이 거목인 소나무에 누가 도끼질을 한 것일까?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나게 되는 천연기념물 중에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둘이 간혹 눈에 띤다. 누군가 나무를 죽이려고 농약을 나무뿌리에 들이부은 경우도 있고, 멀쩡하던 나무가 급작스럽게 고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

거창 당송도 누군가 밑동을 도끼질을 했다고 하는데, 이 나무를 땔감으로 여겨 찍을 것은 아닐 터.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도끼질을 한 것일까? 마을 주민들에게 물었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이 당산리의 당송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 웅~’ 소리를 내어 울면서 미리 알려준다고 한다.




나무가 신령스럽다 하여 ‘영송(靈松)’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화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1910년 국치를 당했을 때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몇 달 전부터 밤이 되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슬픈 일에만 운 것은 아닌가 보다. 1945년 광복이 될 때에도 울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나무에게는 알지 못할 신비가 있다

나무도 생명을 갖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생명의 신비함이 나무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 등을 만나보면, 그 나무들이 갖고 있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특히 당산제나 목신제, 거리제 등을 지내고 있는 나무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무가 운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잘랐던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심지어는 떨어진 나뭇가지도 줍지 않는다는 곳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꼭 화를 당해서가 아니라, 나무에 대한 예를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이런 큰 나무에게는 또 다른 ‘정령(精靈)’이 있는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무지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당산나무들은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보살피게 된다. 당산리 당송 역시 마을 주민들이 모임을 만들어 나무를 보호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매년 정월 보름에 제를 지내고 있는 것도, 이 나무의 영험함 때문일 것이다.

푸른 옷을 입은 당송, 볼수록 장관이다

나무를 둘러본다. 조금은 옆으로 휜 듯한 가지에 보호대를 설치하여 받쳐 놓았다. 일반적으로 본 천연기념물인 소나무들보다는 그렇게 생육이 발달하지는 않은 듯하다. 아마도 한 가지가 부러져 나가고, 밑동을 도끼자국 등이 그렇게 힘이 들게 했는가보다. 무지한 인간들의 심사가 이 나무에도 해를 입힌 것인지.




그래도 나무의 껍질에 가득한 푸른 이끼가, 이 나무의 모습을 한층 신비롭게 만든다. 푸른 옷을 한 벌 걸친 듯하다. 마치 가지마다 춤을 추는 듯하다. 그런 것 하나를 갖고도 장관이라고 표현을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 없이 만나는 생명들. 그 생명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당송 아래서도 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인간을 위해 서 있었지만, 정작 인간들은 그런 고마움을 알지 못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화를 입어 마땅하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큰키나무이다. 이 나무의 원산지는 한국이며 일본, 대만, 중국에도 서식한다. 왕버들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는 나무로 유명하다. 나무의 키는 10~20m로 크게 자라며, 주로 습지나 냇가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 같은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도 아주 훌륭하다. 왕버들 나무의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거나 긴 타원 모양이며, 잎이 새로 돋을 때는 붉은 빛이 돈다. 암수가 딴 그루이고, 4월에 잎과 함께 꽃이 핀다.



광주호를 끼고 있는 마을 충효동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은 조선 정조 때 충효리에서 유래된 충효동이,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리가 동으로 되었다. 그 후 1998년 9월 21일 행정동인 충효동(법정동 : 충효동, 덕의동, 금곡동) 청옥동(법정동 : 화암동, 청풍동, 망월동) 장운동(법정동 : 장등동, 운정동) 3동을 통ㆍ폐합하여 현 석곡동이 되었다.

이 충효동의 왕버들은 광주호 동쪽 제방과, 충효동 마을 사이의 도로가에서 자라고 있다. 원래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던 소나무 한 그루와 버드나무 한 그루, 그리고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있다.




충효동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정자가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왕버들도, 그 때 심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 그루의 나무 중 가장 큰 나무의 높이가 12m, 둘레가 6.3m이고, 작은 나무의 높이가 9m, 둘레가 6.25m로 세 그루가 고른 크기로 자라고 있다.

왕버들에 빠져버리다.

지난 6월 18일,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을 답사하면서 들리게 된 광주호 일원. 길을 가다가보니 큰 나무들이 보인다. 앞을 보니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차에서 내려 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수령이 400여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왕버들 세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왕버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가지가 늘어져 버팀기둥을 세웠으며, 나무의 밑동은 그야말로 혹부리라도 된 듯하다. 이런 나무가 세 그루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무 근처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모습이 가히 놀랍기만 하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가 각각 나름대로의 장관을 연출한다. 안쪽의 나무 한 그루는 가지가 늘어져 땅에까지 닿고 있다. 그 나무 가지 밑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한 낮의 더위를 가시기에 충분한 그늘이 생겼다. 그렇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모두 다섯 그루가 있었다는 왕버들의 두 나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남아있는 왕버들 나무의 모습으로 보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고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기기묘묘한 형태를 자랑하는 충효동 왕버들나무. 그동안 많은 나무들을 보아 온 나로서도 이런 나무를 보기란 흔치가 않다. 어찌 이리 제 멋대로 생긴 것일까? 시간이 없어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동행자의 재촉도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그 나무에 손을 대고 있고 싶은 것은, 오랜 세월을 지내 온 왕버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이다.

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다. 이렇데 장맛비가 후줄근하게 내리는 날 지리산 선유폭포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면 참을 수 없는 성격 탓에 아우녀석을 졸라 정령치로 향했다. 남원에서 춘향묘가 있는 육모정 앞을 지나면 구불거리는 지리산 산길을 넘어 운봉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운봉 방향으로 가다가 다시 우측으로 접어들면 1,173m의 정령치로 오르는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어 해발 600m.가 넘는 곳에 선유폭포가 자리한다. 선유폭포는 지리산의 빼어난 절경 중 한 곳이다. 선유폭포는 칠월칠석이 되면 선녀들이 이곳에 내려와 주변의 경치를 관람하고, 목욕을 하고 즐기다가 올라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와 같은 분들 또 있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 누가 이 선유폭포를 보러 올 것인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비가오고 나면 아무래도 폭포의 물이 불어 장관일 듯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좋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빗방울에 화면이 얼룩이진다. 하지만 위에서 만이 아니라, 아래서도 보여주어야 할 것만 같아 밑으로 내려간다.



누군가 인기척이 나 돌아보니 연인인 듯한 두 남녀가 선유폭포를 찾아들었다. ‘어~ 나와 같이 정신줄 놓은 사람들이 또 있네’ 라는 생각을 하면 피식 웃는다. 이 비에 웬 선유폭포 촬영이라니. 그나저나 빗속에 내리막길은 정말 위험하다. 조금만 잘못 딛어도 바위가 미끄러워 나자빠질 판이다. 그래도 엉금거리며 밑으로 내려간다.

2단으로 된 선유폭포. 아래서 보니 더욱 장관이다. 사진 몇 장을 찍기 위해 빗길을 달렸다. 돌아오는 길에 혼자 중얼거린다.

‘역시 난 제 정신이 아닌가 보다’


전남 담양군 무정면 면소재지에서 무정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안으로 들어가면 봉안리 슬지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높이가 33m 에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마을 가운데 서 있다. 봉안리 1043~3번지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82호이다.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로 명명된 이 은행나무는, 가슴 높이의 둘레는 8.5m 가 넘는 거대한 나무로, 마을 외곽 네 방위에 있는 느티나무들과 함께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로 여겨진다. 봉안리 은행나무는 밑 부분에서 2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는데, 작은 줄기는 근원부에서 발생해 생장한 것으로 보이며, 큰 줄기는 지상 2m 부위에서 11개의 줄기로 갈라져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다.

산 위에서 바라본 슬지마을과 마을 한 가운데 서 있는 천연기념물인 봉안리 은행나무 


겉모습만으로도 당당한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확장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단히 장엄하게 보인다. 당당한 풍채의 수형을 자랑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철이 되면 나무 밑에 떨어진 은행이 상당량이 쌓인다고 한다. 실제로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은행나무의 주위에는, 지난 해 떨어져 마른 은행열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은행나무 밑 그늘에는 마을 여자 분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인사를 하고 은행나무에 대해 질문을 해보았다.

“은행나무 밑에 금줄이 쳐져 있네요.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나요?”
“예, 정월 보름날 제사를 지냅니다.”
“제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당산제라고 하죠. 여긴 추석 때도 행사를 해요. 구경 와요”


수령 500년이 지난 봉안리 은행나무와 지난 해 떨어져 나무주변에 수북히 쌓인 은행


“이 나무 죽으면 안된 당께”

나무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마을 분들은 묻는 대로 대답을 해주신다. 이중의 원형단을 쌓아 은행나무를 보호하고 있는 봉안리 은행나무. 한 분이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큰일이라고 하신다.

“이 나무 이제 죽은 나무에 제사 지내게 생겼어”
“왜요? 나무가 50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 왜 죽어요?”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고 사람들이 그래요. 그래서 위에서 무슨 약을 뿌리더라고“
“약이 아니고 나무에 주는 영양제에요. 죽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딴 나무에 비해 잎이 무성히 달리지는 않은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생육상태는 좋은 듯한데, 위편의 은행잎이 충실치 못한 듯도 하다. 아마도 나무가 오랜 고목이 되다보니, 위편 가지에 생육이 조금 부실한가 보다. 나무의 밑동은 뿌리가 땅 위로 솟아날 만큼 세월의 연륜을 느끼는 고목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벌들도 공생하는 신령한 나무

봉안리 은행나무는 신령한 나무로 소문이 나 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한일합병과 8,15 광복, 한국전쟁 등, 나라에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마을 주민들은 이 은행나무를 상당히 신령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가 있어 마을에 지금까지 도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무를 한 바퀴 돌아가 보니 어디선가 벌들이 날아온다. 가만히 보니 나무줄기가 갈라진 틈에 벌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다. 벌들이 그 틈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은행나무에 벌들이 집을 지었네요.”
“오래되었어요. 꿀이 많을 때는 밖으로 흘러내리기도 하는데”
“한봉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하던데요”
“은행나무 당산님이 벌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의 갈라진 틈새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발들에게 속을 내줄 만큼 속이 넓은 천연기념물. 그래서 오래 묵은 나무는 그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하시는가 보다. 듣는 소리마다 신기하다. 500년 넘는 세월을 봉안리 슬지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 온 은행나무. 부디 탈 없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마도 마을 주민들의 간절함이 있어. 절대도 별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가 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무의 수령이 600년이 지났으며, 전하는 말에 의해 이성계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공을 들일 때, 심었다는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788번지, 한재 초등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느티나무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나무의 높이가 34m, 가슴높이의 둘레가 8.78m나 거목으로 생육의 발달이 좋다. 현재는 대치리가 평지로 변하고 한재초등학교의 교정이 되었지만, 이곳의 옛 지명이 ‘한재골’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산의 골짜기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조 태조는 왜 이 나무를 심은 것일까?

마을에 전하는 바로는 기도를 마친 이성계가 기념으로 이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때도 기념식수를 심는 버릇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옛 사람들이 심었다는 나무들을 만날 수가 있다. 아마도 꼭 그런 일화가 아니라고 해도, 이성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느티나무는 보존가치가 상당히 높다.

우선 나무의 크기나 생육이 발달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당당한 위용이 사람을 압도한다. 6월 18일 오후에 찾아간 ‘대치리 느티나무’. 멀리서 보기에도 그 나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학교 교정에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공놀이며 각종 놀이를 하느라 소리를 치고 있다. 그런 어린 아이들에게 이 나무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성계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대요”

아이들이 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있으려니 일부러 카메라 앞으로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있다. 우리도 예전에 저랬다. 소풍이라도 가서 누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괜히 그 주변을 맴돌다가 앞으로 뛰쳐나가고는 했으니까.

“애들아 이 나무 누가 심었는지 알아?”
“그 나무요 이성계 할아버지가 심었대요.”
“어떻게 알아?”
“거기 적혀있어요. 그렇게요. 그리고 선생님이 알려 주셨어요. 이 나무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요”




입을 모아 떠드는 녀석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나무는 높기도 하지만, 동서로 뻗은 가지들은 땅에 닿을 듯 늘어져 있다. 버팀기둥을 받쳐 놓았는데도 늘어진 가지가 보기에도 멋들어져 보인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조선. 그러나 이 나무는 그 숱한 역사의 아픔을 보듬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연기념물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몰지각한 사람들

학교 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니, 천연기념물인 나무 옆에 차가 한 대 서 있다. 좀 빼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보니, 입에 담배를 물고 있다. 그것도 초등학생들이 주변에 가득한 교정 내에서 말이다. 예전 같으면 벌써 한 마디 했겠지만, 날도 덥고 그럴 생각이 없다. 일일이 그렇게 역정을 내다가보니 이젠 내가 지쳐가는 듯해서이다. 아무리 나무 아래 평상을 만들고 쉴 공간이라고 해도, 아이들도 있는데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아이들에게 무엇을 잘하라고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느티나무를 찬찬히 돌아본다. 세월의 연륜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밑동 쪽에 혹처럼 불어난 것들이며, 마치 거북 등짝같이 두텁고 거칠어 보이는 표피가 그러하다. 하긴 말이 600년이지 그 숱한 세월을 바람과 눈 비, 폭염에도 이렇게 버티고 있지 않은가?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갑자기 민초들이 생각이 난다.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이 나무처럼만 버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을 먹고 산 것만 같은 천연기념물 제284호 대치리 느티나무. 그 웅장한 모습처럼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을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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