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나무가 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은 것은 2008년 6월 16일이다. 전나무는 ‘젓나무’라고도 부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큰키나무를 말한다. 전나무는 흔히 펄프원료나 건축자재, 가구용을 많이 사용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전신주로 이용하기 위해 많이 심었다.

전나무의 높이는 20~40m, 지름은 일반적으로 1.5m 가량이 된다. 고산지대에서 잘 자라는 전나무는 나무껍질이 잿빛이 도는 암갈색으로 거칠다. 전나무도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비늘조각 모양의 표피를 갖고 있으며, 작은 가지는 회갈색이고 얕은 홈이 있다. 이러한 전나무 중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것이, 바로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이 된 전북 진안의 천황사 전나무이다.



겨울철에 만나본 전나무의 멋

천연기념물 중에서 나무들을 답사할 때는 계절에 맞추어야만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은 봄철과 여름철에, 은행나무는 여름과 가을에 답사를 한다. 그러나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과의 나무들은, 어느 때 찾아가도 좋은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진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나무 천연기념물을 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며칠을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최초의 전나무 천연기념물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자그마치 수령이 800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그 위용이 어떠한지가 궁금하여 조바심이 난다. 무엇을 보아야겠다고 작정을 하면, 하루라도 빨리 가서 보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듯하다. 일요일 오후에 길을 잡아 진안으로 향했다. 남원을 출발하여 1시간 30분, 천황사 전나무가 있다는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로 접어들었다.


전나무 최초로 천연기념물 지정을 받은 진안 천황사 전나무

천황사를 옆으로 두고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럽다. 더구나 추위에 여기저기 얼음이 언 곳도 있다. 조심스럽게 길을 올라 전나무가 있는 곳까지 닿았다. 밑에서 바라보는 전나무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저렇게 거목으로 자란 전나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거목으로 자란 전나무의 아름다움

이 전나무는 천황사 남쪽 산 중턱에 자리한 ‘남암’이라는 암자의 번성을 기원하여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안내판에는 수령이 400년으로 되어 있고, 그 옆 석재로 된 안내판에는 800년으로 되어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일까? 나중에 내려오다가 마을의 어르신께 물으니 800년이 지났다고 말씀을 하신다. 아마 그냥 보기에도 그 정도 수령은 되었을 것만 같다.

물론 문화재청에서 적은 것은 과학적인 측정방법에 의해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또한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전나무의 확실한 수령은 추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는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뜻하나 보다. 그러나 이 전나무가 천황사에 속한 암자인 남암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하여 심었다고 하면,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천황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5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남암을 세웠다고 해도, 800년이라는 수령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밑동 한편에는 알 수 없는 구멍도 있어

이 전나무의 크기는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높이 35m정도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자그마치 5.7m 정도이다. 이렇게 큰 전나무는 보기기 힘들다. 나무의 폭은 동서로 16.6m, 남북으로 16m 정도의 크기로 자랐다. 나무 밑동은 옹이가 진 듯 대단하다. 나무의 밑에서 위로 오르며 거북의 등껍질 같은 표피로 쌓여있고, 가지는 윗부분에 나 있다.

나무 밑을 돌다가 보니 팔이 드나들 정도의 구멍이 있다. 안을 들여다보아도 잘 보이지가 않는다. 무슨 짐승의 구멍 같기도 하다. 돌을 하나 던져보았다. 바로 소리가 나질 않는다. 이럴 때는 괜한 상상도 해본다. 현재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전나무 중에서 가장 크다는 천황사 전나무. 전나무 중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최초의 나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밑동에 난 구멍과 수령이 800년임을 알리는 안내석

날은 쌀쌀하고 걸어 오르는 길이 미끄럽고 가팔라 힘은 들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본 전나무의 아름다움에 반해 추운 줄도 모르겠다. 이런 즐거움만 있다면, 문화재 답사 길이 얼마나 좋을까?


천연기념물은 봄부터 가을까지 주로 찾아간다. 그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멋스러움을 겨울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모습을 소개한다는 것은, 그 오랜 풍상을 견디며 꿋꿋하게 버텨온 나무에게 누를 입히는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단 하나 소나무만은 예외이다. 사시사철 푸르게 그 멋진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11일, 아침부터 날도 잔뜩 흐리고 바람도 분다. 8시에 숙소를 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바로 답사 길에 나섰다.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천연기념물 제358호인 목현리 ‘구송’이 있다는 것이다. 휴천면에 들어가 구송을 찾아야하는데, 정작 길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 휴천면소재지를 한참이나 지나 함양읍 쪽으로 나온 듯하다. 이럴 때는 그저 당황스럽다. 정확한 주소를 모르고, ‘리(里)’만 알고 들어갔다가 당하는 낭패이다.

천연기념물 제358호 목현리 구송

달랑 안내판 하나, 아쉽다 

고갯마루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다행히 정확하게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신다. 다시 길을 되돌아 면소재지로 들어갔으나, 천연기념물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없다.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냇가에 심상치 않아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송은 가지가 어느 정도 위로 오르다가, 옆으로 퍼져나간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개울 길을 따라 들어 가보니 철책을 둘러놓았다. 목현리 구송이다. 그러나 이 천연기념물인 구송을 알리는 이정표 하나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문화재가 있는 곳은 큰 길에서부터 안내판을 걸어놓는다. 그리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는 또 안내판을 놓아,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이 길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함양군내의 많은 문화재는 바로 코앞에 가야 달랑 안내판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목현리 구송은 밑동에서 가지가 아홉갈래로 갈라져 붙인 명칭이다.

수령 300년의 목현리 구송

천연기념물 제358호로 지정된 함양 목현리 구송은, 면소재지 중심으로 난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냇가에 서있다.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854번지에 소재한다. 반송으로 알려진 이 구송은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본다. 반송은 밑동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 나무를 말한다. 대개의 반송은 나무가 자라면서 옆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목현리 반송은 여러 가지가 나왔지만, 옆으로 자라지 않고 위로 자랐다. 나무의 높이는 13.1m 정도에, 가슴 높이의 둘레는 4,5m 정도이다. 이 나무를 ‘구송(九松)’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가지가 9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목현리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 온 진양 정씨 학산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구송은, 현재는 두 가지는 죽고, 일곱 가지가 남아 있다.




죽 곧은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 같아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죽 곧은 나무는 마치 몸매가 좋은 여인 같기만 하다. 자라는 모습이나 귀한 반송이라는 점을 감안해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했겠지만, 멀리서 보고도 그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나뭇가지는 위로 올라가면서도 조금의 굽힘도 없다. 그런 모습이 굳은 절개를 지닌 듯하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아 절개가 굳은 사람에 곧잘 비유를 한다. 목현리 반송이야말로 그런 느낌을 받기에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는다. 그저 나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나무인 것만 같다. 나무를 돌아보다가 갑자기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팔을 벌려 나무의 둘레를 재는 듯 안아 본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뿌듯함이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람에게 주는 기쁨을 남들은 무엇이라고 표현을 할까?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마을 한편 길가에 목현리 구송의 안내판 하나가 달랑 보인다. 오히려 그 잘 보이지 않는 안내판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런 귀한 나무를 어렵게 찾았다는 기쁨을 맛 볼수가 있었으니.


11월 27일, 시간은 이미 오후 4시를 지나 5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라 금방이라도 날이 어두워질 것만 같다. 지리산 둘레길 중 한 곳인 남원시 주천면 구룡폭포를 찾았다. 비가 뿌리는데도 사람들은 주말을 맞아 둘레길을 걷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1박 2일이 지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둘레길을 걷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주천의 절경 중 한곳이라는 구룡폭포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 위치한 육모정계곡은 용호구곡, 또는 구룡폭포라고도 한다. 옛날 음력 4월 8일이 되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곳의 폭포에, 용 한 마리씩 자리를 잡아 노닐다 다시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기 때문이다. 이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다가 승천 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구룡폭포. 그 모습이 궁금해서다.


첩첩산중에 쏟아지는 폭포

구룡폭포를 가려면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야 한다. 운봉을 가는 길은 산길을 돌고 또 돌아야 한다. 승용차로 15여분 정도를 그렇게 산길을 돌아가면, 구룡폭포 이정표가 나온다. 그곳을 따라 들어가면 구룡사라는 절이 있다. 구룡사를 들어가기 전에 길이 갈라진다. 소나무가 늘어선 흙길을 따라 걸어보면, 감촉이 그만이다. 이곳 구룡사가 한 구간의 끝이 된다고 한다.

나뭇가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표시가 있다. 산악회 등에서 걸어놓은 표시들이다. 울긋불긋 가지에 걸린 안내표지가, 마치 철 늦은 단풍이라도 되는 듯하다. 그 밑으로는 폭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이 있다. 비가 오고 있어 축축이 젖은 가파른 길. 지난번에 빗길에 넘어지면서 아까운 렌즈 하나를 버린 적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둘레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남긴 흔적(위), 비가 오는데도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가운데) 그리고 폭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

 
암반을 타고 흐르는 구룡폭포

줄을 잡고 기어 내려가듯 밑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45도는 될 듯하다. 밑으로 내려가니 육모정으로 간다는 길목에 출렁다리가 걸려있다. 다리 앞으로 가니 암반을 타고 경사지게 흐르는 구룡폭포의 물길이 보인다. 주변에는 가을철에 떨어진 단풍들이 바위에 붙어, 마치 붉은 바위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폭포를 관람할 수 있는 계단이 폭포 위까지 놓여있다. 철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본다. 맨 위로 올라가니 산자락에 걸린 듯한 곳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 물이 소를 만들고 다시 옆으로 흘러 또 소를 만든다. 그리고는 밑으로 빠르게 흘러 내려간다. 맑은 물과 오랜 세월 물살에 깎여 반들거리는 바위. 어느 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노닐었던 것일까? 아마 이 구룡폭포에서 시작을 해 육모정까지 흐르는 용호구곡 여기저기서 용들이 놀았던가 보다.



폭포를 관람하기 위해 오르는 계단(위) 폭포의 맨 위 소와(가운데) 오른쪽으로 꺾인 두번 째 소

구룡폭포는 모두 3단으로 나뉘어 흐른다. 처음 떨어지는 곳에 소를 만들고, 그 밑에 바로 우측으로 꺾이어 또 하나의 소를 만든다. 이 두 개의 소들은 폭포의 위편에 있다. 그리고 경사진 암반을 따라 길게 흘러내린다. 그 밑에 출렁다리를 지나 또 하나의 소를 만들고 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구룡폭포를 보고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둘레길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갈 길 바쁜 일정에 비까지 오는데, 언제 이 길을 다 가려는지 걱정이다. 구룡폭포 물길을 따라 함께 흘러내리는 색 바랜 단풍이 더 쓸쓸해 보이는 것도 계절 탓인가 보다.


떨어진 단풍잎으로 붉게 변한 암벽과(위) 둘레길을 돌다가 폭포 앞에 멈춘 사람들.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 7번 국도에서 해송천로를 따라 상월천리 방향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가다가 보면, 인구2리 길가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두 그루 다 처진 소나무와 같이 아래로 가지를 내리고 있다. 이 중 길가에서 볼 때 뒤편에 있는 소나무는 흡사 정이품송을 닮았다.

길을 가다말고도 희귀한 나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차에서 내려 소나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소나무를 보니 가슴 높이 정도에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된 일인가하여 밑동서부터 자세하게 살펴보니 틀림없는 연리목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함께 자라다가, 이곳부터 연리목이 되었는데, 밑과 위가 완전히 붙어버렸다.



정이품송을 닮은 소나무의 밑에 구멍이 나 있다

희귀한 연리목, 나무의 생김새도 아름다워

이 나무가 여느 나무와 달라 보이는 것은 모양도 아름답게 생겼지만, 연리목이라는 점이 더욱 특이하기 때문이다. 밑동을 보아도 한 나무인지 두 그루의 나무가 붙어있는 것인지 구별이 쉽게 되질 않는다. 다만 나무의 구멍이 난 부분을 보니 그 안에 표피가 잇는 것을 보아, 이 나무가 한 그루가 아닌 두 그루가 붙어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나무를 촬영하고 난 후, 길 건너 배추밭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마을 분들이게 이 나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저 뒤편에 소나무가 혹 수령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세요?”
“저희들은 잘 몰라요. 어르신들 이야기로는 500년이 지났다고도 하는데”
“저 나무에 혹 전설 같은 것은 없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나무의 구멍을 살펴보니 연리목인 듯하다.

양양군의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되어

더 이상은 물을 수가 없다. 일손을 놓지 않고 대답을 하시는 분에게, 자꾸만 질문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남면사무소에 문의를 하였더니, 양양군 내에 있는 소나무 품평회에서 이 나무가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자란 소나무가 그리 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 나무에는 애틋한 사랑이야기 한 편쯤은 전해지고 있지 않을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소나무다. 더구나 두 나무가 붙은 연리목이라는 데에는 한 가지 사랑이야기라도 만들어 주고 싶다.


밑동에도 가운데가 떨어진 것이 보인다. 이 나무는 양양군 소나무 품평회에서 아름다운 나무로 선정이 되었다고 한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전설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우리민족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에 마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마 이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 텐데, 혹 잊은 것은 아닐까? 그런 이야기 한 가지 듣지 못하고 떠나는 발길이 내심 아쉽기만 하다.


울산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860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64호인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는 아픔의 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550년 정도가 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이지대 선생이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이지대 선생은 고려 말기의 정치인인 익재 이제현 선생의 4세손이다. 선생은 이 나무를 한양에서 갖고 와 연못가에 심었다고 한다.

현재 나무 앞에는 한성부 판윤인 죽은 이공의 유허비가 서 있다. 현재는 연못은 사라지고, 주변이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이 나무는 마을의 정자목으로 밑 부분의 한쪽이 썩어있다. 구량리 은행나무의 둘레는 8.4m 정도이며, 높이는 22.5m이다. 이 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부러져 나무의 한쪽이 사라져 버렸다.


한성판윤을 지낸 이지대 선생

이지대 선생은 조선 태조 3년인 1394년에 경상도 수군만호로 있을 때, 왜구가 탄 배를 붙잡았다. 그 공으로 인해 한성판윤까지 벼슬이 올랐다. 그러나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까지 강화로 유배를 보내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구량리 은행나무가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7번 국도에서 나무가 서 있는 구량리까지 찾아가는 길은 버거웠다. 그러나 하나의 천연기념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한다. 마을 옆 논 한가운데 서 있는 은행나무는 한편을 지지대로 받쳐 놓았다. 아마 그 쪽이 매미 때 훼손이 된 곳인가 보다.



은행나무의 위용에 눌리다.

은행나무 한 그루가 주는 감동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나무를 보는 순간 나에게 밀려 온 것은 바로 위엄이었다. 나무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한쪽 편이 잘려나갔음에도 그 위용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감히 이 자연 앞에서 누가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무 앞에 선 한성판윤 이지대 선생의 유허비도 색다르다.

구량리 은행나무를 보면서 자연은 스스로 치유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태풍 매미에 상처를 입고서도 푸른 잎이 무성히 달려있다. 그런 아름다움이 더욱 가슴을 뛰게 한다. 스스로 치유를 하고 550년 세월을 버텨 온 구량리 은행나무.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인간이 하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나무에 대한 또 다른 전설은 없었을까? 마을 주민들에게 은행나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태풍 매미에게 한편을 훼손당한 구량리 은행나무

한성판윤 이공 유허비와 제단석

아들을 점지하는 은행나무

“어르신 저 은행나무를 마을에서 위하지는 않나요?”
“왜요. 마을에서는 저 나무를 신성시 하죠”“저 나무에 전설은 없나요?”
“저 은행나무를 훼손하면 그 사람은 해를 입어요. 그래서 저 은행나무 주변에는 사람들이 잘 들어가지 않아요”
“또 다른 전설은 없나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저 은행나무에 가서 아들을 낳는다고 하죠”

아들을 점지하는 구량리 은행나무. 태풍에 가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스스로 치유를 한 나무에는, 많은 사연이 전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 곳에는 항상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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