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 있는 아우는 늘 바쁘다. 사람들이 찾아가면 그 바쁜 시간에도 반갑게 맞이하고, 그저 막걸리 한 잔이라도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은 듯하다. 요즈음은 지난 해 심어 놓은 농작물을 수확하느라 땀을 빼고는 한다.

 

내가 쉬고 싶을 때 언제나 찾아가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기에, 이 집을 가끔 블로그에 소개를 하고는 한다. 6월에 찾아가는 이 집은 정말 좋다. 말로만 좋은 것이 아니고, 주변의 모습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넓은 평수에 초호화 주택을 좋다고 하겠지만, 그런 곳은 사람 사는 맛이 없다는 생각이다. 누구는 없는 자의 자기합리화라고도 하겠지만.

 

 

위는 황토로 된 아우의 전시실 '지우재'이다. 이 안에 방이 있어, 늘 그곳에서 쉬고는 한다. 아래는 전시실 앞에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이다. 그곳에는 어리연이 사람을 맞는다.

 

청개구리가 살고 어리연이 피는 집

 

지난주에 찾아갔을 때, 전시관 앞에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에는 어리연이 아침햇살에 활짝 피어있었다. 그런데 어리연 잎에 무엇인가가 움직인다. 가만히 보니 요즈음 보기 힘든 토종 개구리 몇 마리가 한가롭게 쉬고 있다. 이 녀석들 사람이 가까이가도 도망갈 생각을 안 한다. 아마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품성을 다 읽을 듯하다.

 

작은 연못 주변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있다. 이 집에는 딴 곳에서 보기 힘든 꽃들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작은 꽃들이 모여 있는 ‘한라산수국’은 보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물론 그것을 보고 평안하다고 느끼는 것도, 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블루베리가 익어가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작은연못에는 개구리들이 어리연 꽃 잎에 숨어 살고 있다. 아래는 한라산수국이다.  

 

몇 개 따먹어 본다. 새콤한 맛이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게 만든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먹다가 보니, 익은 것을 다 따먹은 듯하다. 미안한 김에 곁에 있는 꽃을 손으로 슬쩍 건드려본다. 향내가 코를 간질인다. 백리향이다. 향이 짙어 백리까지 향기를 보낼 수 있다는.

 

 

 

블루베리와 클레아티스(가운데), 백리향도 볼 수 있어서 좋은 집이다.

 

“마늘이 임신을 했나? 날씨 탓인가?”

 

아우부부가 마늘밭으로 올라간단다. 지난해에 심어 놓은 마늘을 수확하야 하는데, 날마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미쳐 수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헌 장갑 하나를 주워들고 작업실 뒤편, 마늘밭으로 갔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심해, 먼지만 풀풀 날리는 마늘밭. 마늘이라고 제대로 자랄 리가 없다.

 

호미로 먼지가 나는 땅을 파 하나씩 마늘을 캐본다. 잘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마늘은 여느 마늘과는 다르다. 한 마디로 완전 무공해 마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늘대를 자르다가 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마늘대에 또 마늘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마늘대 위에 또 마늘이 자라고 있다. 이런 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임신을 했다'라는 말에 죽는 줄 알았다

 

“마늘이 임신을 했냐? 왜 마늘대에 또 마늘이 달렸냐?”

“마늘이 무슨 임신을 해요.”

“이것 봐 마늘대에 또 마늘이 달렸잖아, 여기 와서 누가 오줌 싼 거 아녀?”

“정말 이상하네. 왜 그러지. 그러고 보니 임신한 마늘이 꽤 있네.”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다. 나야 마늘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이런 경우를 알 턱이 없다. 그저 마늘이 임신을 했다는 말 밖에는. 그 말에 모두가 자지러지게 웃는다. 좋은 사람들과 만남이란 매사가 즐겁다. 그래서 생활에 활력소를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늘의 임신사건. 그 하나만으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 내가 여주를 자주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는 잠시나마 세상 모든 시름을 내려 놓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름을 함께 풀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에.

여주에 있는 효종대왕릉은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효종대왕릉을 가끔 찾아가는 것은, 이 능의 재실 안에 자라는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 때문이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회양목은, 효종대왕릉과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회양목으로는 유일하게 높이 4m 정도의 큰 노거수

 

효종대왕릉의 사적지 안에 있는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다. 꽃은 4∼5월경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달리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회양목이란 나무는 조경수로 많이 심으며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다. 그러나 이 재실 내에서 자라고 있는 회양목은 그 크기가 약 4m정도는 되어 보인다. 옆으로 퍼져나간 가지도 3m 정도로 넓게 퍼졌다. 이 나무는 1673년 구리에 있던 효종대왕릉을 옮겨오면서 재실 안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회양목은 딴 곳에서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가치가 더 크다고도 하지만, 아마 효종대왕의 릉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듯하다. 또한 그 나무를 심어 300년이 넘는 세월을, 탈 없이 이렇게 자랐다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

 

힘들 때마다 찾아간 나무, 인연이 깊어

 

살면서 힘이 들 때면 나름대로 찾아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효종대왕과 인선황후를 모신 영릉이다. 그렇다고 능침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바로 능 입구에 있는 재실을 향한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담장보다 훨씬 큰 회양목이 반겨주기 때문이다. 대문채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일각문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회양목.

 

내가 이 나무를 처음으로 찾아본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한참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거듭하는 바람에 힘이 들 때, 처음으로 이 회양목을 보았다. 아마 그 처음 볼 때도 눈이 내리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만난 회양목 한 그루가 나에게는 큰 의미를 남겨주었다. 우선 이 능이 효종대왕릉이라는 것이 그랬다.

 

 

 

조선조 17대 왕인 효종대왕은 북벌을 꾀했던 왕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쪽으로 남진을 하자, 청은 우리에게 원군을 청했다. 효종대왕은 우리 군대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원군을 보내, 송화강과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런 계기가 아마 북벌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벌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한 효종대왕. 북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이 회양목에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 나무가 대왕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거목에는 기운이 있는 것일까?

 

겨울철에 찾아가도 그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던 회양목이다. 크기도 하지만, 300년이 넘는 시간을 이렇게 당당하니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당시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는 정말 큰 힘을 주었다. 그래서 그 이후 힘이 들 때면 이곳을 찾아, 한참이나 이 회양목을 바라보고는 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회양목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아마 효종대왕의 그 북벌의 기운이 이 나무에 전해진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언제보아도 당당한 회양목. 비록 한 그루가 이렇게 서 있지만, 그 회양목으로 인해 효종대왕의 능이 더욱 돋보인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얼마를 더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천년이고 그 이상이고 이렇게 푸르게 살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나무는 많지만 이 나무가 나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 겨울마다 찾아보는 회양목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그래도 한 나라의 임금이었는데, 군으로 강등이 되어 길을 나섰다. 나이어린 단종은 부인과 헤어져 먼먼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결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길을 나선 것이지만, 아마 단종은 언젠가는 돌아오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길에서 마셨다는 샘물 하나.

 

여주군 북내면 상구리에 있는 골프장에는, 단종임금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로 귀향을 가면서 마신 샘이 있다고 하여 찾아 나섰다. 현재 이 샘은 여주군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블루헤런이라는 골프장 경내에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낮지 않은 언덕길을 걸어올라, 블루헤런 골프장으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려 어수정을 취재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친절하게 골프장 전동차인 카트로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직원의 안내로 카트를 타고가면서, 몇 번이나 멈춰야했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꽤 먼 거리를 돌아 어수정에 도착을 했다.

 

단종은 샘물을 마시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수정을 찾아 나선 것은 여주군 상교리에 거주하는, 그림을 그리는 아우가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예전에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는 것이다. 상교리는 지금도 몇 채의 집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런데 예전에 이 마을을 '주막거리'라고 했으며, 지금도 집터가 있고 그릇, 기와 등의 파편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우재라는 아우의 도자기 전시실 앞을 지난 단종임금이, 고개를 넘어 여주로 향하면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다. 걸어보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금도 꽤 시간이 걸리는 고개다. 고개를 넘어 여주로 가면서 만난 옹달샘. 당시에는 그저 산중에 있는 작은 샘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어수정. 남한강을 따라 이포나루를 지난 단종은, 파사성을 거친 후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이곳 상구리 어수정에서 타는 목을 축인 후에, 여주를 거쳐 원주로 길을 잡았다.

 

물론 세조 3년인 1457년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기는 했지만 걷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이라도 타고 길을 나섰겠지만, 한양을 떠나는 마음이 오죽이나 아팠을까? 아마 정이 많은 단종은 이 샘에서 자신이 물을 마시기보다는, 걷는 사람들을 위해 행렬을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넘느라 목이 탔을 텐데 산 속 호젓한 곳에서 만난 샘물이, 행렬의 누군인들 반갑지 않았겠는가?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종에게 먼저 물을 떠다 올렸을 테고, 그 때부터 이 샘은 '단종 어수정(御水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수정은 한 맺힌 역사를 알고 있을까?

 

이 물을 마시면서 어린 단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귀향에서 돌아오는 날, 다시 이 샘에서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샘물을 마시고 떠난 단종은, 다시는 이 길을 돌아오지 못했다. 영월 땅에서 어린 단종은 이 호젓한 산길에 있는 샘물이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이 샘물을 다시 마실 수만 있다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테니까.

 

 

 

15분 정도 카트를 타고 구불구불 골프장 길을 돌아 도착한 어수정. 현재의 샘물은 골프장 내에 석축으로 주변을 둘러 조형이 되었다. 아마 그 옛날이야 조그마한 산골짝의 옹달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은 2단 석축으로 둘러쌓아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어수정 앞에 세운 안내판이 없었다면, 아무도 이 샘이 한이 서린 샘이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샘의 너비는 약 3.3m 정도이고, 둘레는 10여 m가 된다. 샘의 폭은 2.8~2.11m 정도에 수심이 2.25m 정도이다.

 

어수정에서 어린 단종을 그려내다

 

한때 이 어수정은 사철 내내 수량이 풍부하고 가뭄에도 마르지가 않아서, 일대의 식용수는 물론 농업용수로도 사용이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샘 안을 들여다보니 낙엽이 떠 있는 샘은 물이 한없이 맑다. 가끔 바닥에서 물이 솟구쳐 올라, 물방울이 생기고 여울이 지기도 한다. 아직도 물이 쉬지 않고 솟아나오고 있는 어수정. 이 샘에 얽힌 한 맺힌 사연들을 지나는 사람들은 알고나 있을까?

 

다음 스카이뷰로 본 어수정. 붉은 선 안이 골프장 내에 있는 '어수정'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래도 말끔하게 보존이 된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어 고맙기만 하다. 비록 단종이 귀향을 가는 길에 잠시 들러 목을 축인 샘이요 물이 깊어 떠먹을 수는 없었지만, 샘 앞에 서서 타는 목을 축였을 단종을 그린다.

경기 여주군 금사면 외평리 454-1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호인 포초골 미륵좌불상. 이 불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있는 높이 1.7m의 석조미륵좌상이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좌불상은, 현재는 사찰 안 용화전에 자리하고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을 찾아본 것은 벌써 서너 번은 되었는가 보다. 처음에 찾아갔을 때는 전각에 단청도 하지 않은 채로 만났는데, 그 뒤에는 용화전에 단청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난 해인가 찾아갔을 때는 먼저는 보지 못한 광배를 찾았다고 했다. 이렇게 갈 때마다 달라진 모습을 보인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이다. 문화재는 찾을 때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머리에 갓을 쓴 석조 미륵좌불상

 

여주 금사면의 미륵좌불상은 민머리에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으며, 네모진 얼굴에는 반쯤 감은 눈, 오똑한 코, 풍만한 양 볼과 짧은 귀가 표현되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어깨의 주름과 가슴에 묶인 띠 매듭은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둔탁한 편이다.

 

무릎은 신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양 발목 사이에는 부채꼴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안정감이 있고 육중한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석조 불상은 고려시대의 거대 석조불상의 형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중대석에 보살상을 새긴 연화대좌

 

일반적으로 미륵입상이나 좌상을 모신 전각을 용화전이라고 한다. 이 포초골 미륵좌불상이 소재하고 있는 절은 그 동안 상당히 불사를 많이 하였다. 하기에 용화전 주변도 정리가 되어있으며, 절 경내 곳곳에는 아직도 불사를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포초골 미륵좌불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이 큼지막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중대석에는 8각의 각 면에 보살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보살입상을 새겨 넣은 연화대좌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것에서 이 미륵좌불상의 독특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뒤늦게 발견이 된 광배

 

연화대좌의 하대에는 커다랗게 앙화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이 불상을 보면 4각형의 원만한 얼굴에 넓고 당당한 어깨, 그리고 둔탁한 옷주름의 표현 등을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 이곳을 찾았을 때 볼 수 없었던 광배는 나중에 주변을 정리하다가 땅 속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광배응 몸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큰 편이며, 윗 부분이 배의 선미처럼 휘어져 있다. 광배에는 위편에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원을 중심으로 하여 각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포초골 석조미륵좌불상. 4월 26일 오후에 찾아간 절집에서 만난 석불좌상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접시를 깨자’

 

여주군의 도자기축제장 한편의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의 가사이다. 참 축제 중에는 희한한 이벤트가 다 있다. 그것도 지역 주민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을 했단다. 여주군에서는 도자기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접시깨기대회’를 열어 일부 지역주민들에게서 볼멘소리를 듣고 있다.

 

4월 21일부터 시작한 도자기축제는, 5월 13일까지 여주군 북내면 신륵사 관광단지에서 열린다. 이 축제 기간 중 매일 한 차례(주말에는 2회)씩 모두 27회에 걸쳐 ‘접시깨기 대회’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대회를 위해 준비한 접시는 일인당 3회에 걸쳐 벽에 던진다. 그 중 가장 큰 파편의 길이를 재어서 가장 작게 조각을 낸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 안전을 위해 헬멧을 쓴 사람들은 힘껏 벽에 접시를 던져 박살을 내는 것이다.

 

이 행사는 여주군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지역 도예인들이 생산한 도자기의 재고량 해소를 위해서 마련한 이벤트라고 한다. 접시깨기 예산 1억4천여 만원은 전액 경기도의 시책추진비로 충당된다.

 

접시깨기 이벤트에 쓰이는 1천 5백여 만원 상당의 접시와 도자기는, 여주군이 지역 내에서 생산된 불량 도자기나 재고품을 구매해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지역주민들은 접시깨기를 위해 관람객들은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지만, 그런 행사가 오히려 도자축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안 좋은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한다.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아요”

 

‘접시깨기’에 도전한 한 관람객의 말이다. 이 행사는 대회참가비를 1인당 5,000원을 받고 그릇 세 장을 준다. 그것을 5m 앞 과녁을 향해 던져 파편의 길이로 승부를 가르는 방식이다. 매일 파편의 길이가 가장 짧은 참가자를 뽑아 도자교환상품권을 준다는 것.

 

이런 축제의 이벤트를 보면서 북내면 서원리에 거주한다는 이아무개(남, 51세) 는 어이가 없다면서 일침을 놓는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죠. 도자기축제 예산 중 18.3%나 되는 1억 4천에 이 넘는 예산을 저렇게 깨버리고 있습니다. 구경꾼들 스트레스는 풀릴 줄 몰라도 지역사람들은 저런 것을 보면서 스트레스가 더 쌓입니다.”

 

 

 

특히 지역의 일부 문화예술인들은 이런 여주군의 처사에 대해 못마땅하다고 한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저렇게 1억이 넘는 예산을 깨버리는 군 당국이, 지역예술인들의 행사 예산은 모두 삭감처리를 했습니다. 단체들이 공들여 쌓아 온 축제를 행정당국에서 하겠다는 것이죠. 그런 발상이 이런 어이없는 이벤트가 나온 듯 합니다”

 

여주군은 이 접시깨기 행사에 7천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내걸고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행사기간에 매일 13명을 뽑아 5만~5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주고 있다. 이 입상자 가운데 폐막 전날에 351명이 참여하여 최종 우승자에게 30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행사를 주관하는 군의 관계자는 여주를 전국적으로 알리고, 도자생산업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부 지역주민들은 이런 행사에 대해 ‘한 마디로 일부 업자들을 위해 마련한 웃기는 이벤트’라며 쓴소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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