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野生花)’란 ‘산이나 들에 저절로 피는 꽃’을 말한다. 야생화는 생명력이 질겨 딴 꽃럼 관리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란다. 백과사전에는 야생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꽃피는 식물. 정원에 심는 여러 가지 꽃은 이 야생화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 원래 자랐던 지역에서만 자라지만,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자라기도 한다.(일부발췌)’ 라고

 

또한 덧붙여 ‘잡초와 야생화는 분류 목적에 따라 구별된다. 즉 잡초는 사람이 볼 때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해바라기가 논이나 북아메리카 대평원의 목초지 등에서 자라면 잡초로 여겨지지만, 경작지가 아닌 골짜기 등에 자라면 야생화가 된다. 해바라기는 씨를 얻기 위해서 심는 농작물이기도 하지만 정원에 심기도 한다. 지구에는 약 25만 종(種), 한국에는 약 3,500종의 꽃피는 식물이 있는데, 이중 거의 대부분이 야생화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야생화동산? 난 잡초동산인줄 알았네.

 

8월 26일, 여주에 사는 아우를 만나러 갔던 길에 잠시 여주 신륵사 관광단지를 들렸다. 이곳에 갈 때마다 보이는 이정표 때문이다. ‘야생화동산’이라는 이 이정표가 늘 발길을 붙잡고는 했다. 산과 들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나에게는 ‘야생화동산’이라는 이 글씨처럼 눈에 띠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 때는 나도 경기도 광주시 남한강을 내려다보이는 수청리 산 중턱에 야생화단지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한 겨울을 난 적이 있었다. 결국 야생화 몇 포기 갖다 심어놓고 생각만으로 그쳤지만. 그래서 야생화동산이라는 이정표에 눈길이 멈췄다. 이정표가 가르치는 곳으로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야생화동산이라고 할 만큼 꽃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야생화동산을 찾아냈다. 그 앞 안내판에는 ‘우리 꽃 조성사업 섬백리향 외 30종 52,200본 여주군’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그 뒤편 넓은 동산 안에는 야생화가 아닌 잡초더미였다. 아니 일부 야생화가 있기는 하다. 잡초더미와 함께 꽃을 피운 야생화들이.

 

아마 이 동산도 처음에는 꽤 아름답게 꽃을 피운 야생화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산을 조성하느라 꽤 많은 비용도 들어갔을 것이다. 물론 그 돈은 세금으로 충당했을 것이고. 그런 야생화동산의 꼬락서니가 잡초더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신륵사 관광단지 옆, 그것도 박물관과 인접한 곳에 자리하고 야생화동산.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들렸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 이 동산 구경을 해보자. 

 

 

여길 보고 누가 야생화동산이라고 하겠소?

 

 

 

그래도 야생화가 여기저기 꽃을 피우고 있다. 잡초가 없었다면 아름다웠을 것을...

 

난 고구마를 닮은 야생화도 있는 줄 알았다. 누군가 고구마밭까지

 

잡초더미에 쌓여 힘들게 자라고 있는 야생화들 

 

원래 그렇게 자연적으로 관리를 했다고 핑개를 댈까봐 동산 안 관람통로를 인증샷으로. 정리 안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사람은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주 해괴한 생각 말이다. 아마도 찜통더위가 계속되면서, 하도 햇볕에 싸돌아다니니 머리에 이상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그 절터 한 복판에 장방형의 석조물 한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 석조대좌’이다.

 

난 이곳을 들릴 때마다 이 석조대좌 위에 올라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위에 올라가 하늘에 흐르는 구름만 바라보아도 바로 부처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가끔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해대는 것도, 무료한 답사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찜통더위를 잊으려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석조대좌 하나만으로 보물이 되다니

 

이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가 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이 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려 초기의 역작인 석조대좌, 정말 대단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이 받침돌은 상중하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방형의 종첩과 연꽃과 안상을 교차적으로 조각하여, 밋밋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승탑과 동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같은 고달사지 내에 소재한 국보 제4호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대좌의 축조시기가 승탑과 같은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석조대좌. 불상을 올려놓았던 이 석조대좌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8월 4일의 찜통더위에 찾아간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석조대좌로 인해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힘든 답사길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10일이 넘게 계속된 찜통더위. 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4일에 찾아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사적 고달사지. 그곳에서 난 땀을 비오 듯 흘리면서도 그늘을 찾아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때문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찾아간 고달사지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을 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추시하고 대사의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다. 이 탑비는 대사가 입적 후, 17년 뒤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벌써 몇 번째 찾아간 탑비, 그런데 이럴 수가

 

이 비는 몸돌은 무너져 내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이곳 고달사지에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몸돌인 비문을 볼 수가 없어 매번 갈 때마다 아쉬움이 컸던 원종대사탑비였다. 언제가 답사를 함께하던 동료 한 사람이, 도대체 왜 그렇게 갈 때마다 사진을 많이 찍어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혹 무엇이 변하지는 않았는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탑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한 장씩 찍어댄다. 40도를 육박하는 땡볕에서 사진을 찍다가보니, 이미 몸은 땀으로 다 젖어버렸다. 얼굴과 등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닦을 엄두도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이걸 왜 보지 못했을까? 지난번에는 제대로 잘 찍었었는데.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문화재 이야기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이 비에 조성된 거북의 머리는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머릿돌인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두의 이는 큼지막하니 두텁게 표현을 하였고, 콧구멍을 크게 뚫렸다. 영화에서처럼 이 콧구멍에서 불이라도 뿜어대는 것일까? 눈썹은 짙고 굵게 표현을 하였으며, 왕방을 눈은 금방이라도 사람에게 위압을 줄 것만 같다. 귀두를 살펴본 후 그 위에 비문을 올려놓았던 장방형의 비좌를 살펴본다.

 

비좌는 받침돌과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이중의 육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된 귀갑문을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켰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는 이 비좌를 놓치고 말았다. 비좌에 새겨놓은 문양을 돌아보다가 그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더위먹고 내가 제대로 살 수는 있을까?

 

꽃과 구름문양을 새겨 넣은 비좌의 밑면에도 세세하게 조각을 해놓았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섬세함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이수를 보다가 ‘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몸을 꼬아 용트림을 하는 조각의 놀라움이다. 어찌 그리도 섬세하게 표현을 해 놓았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비좌의 밑에도 이수의 밑에도 아름답게 조각을 한 문양들. 그런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려 걸음을 옮기면서 되뇐다.

 

“이 문화재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참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라고 생각이 든다. 문화재 답사는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만일 누가 이 40도를 육박하는 더위에 답사를 하라고 시켰다면, 길길이 뛰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답사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전생에 내가 우리 문화재에 큰 잘못을 했던 것만 같다. 이런 나를 두고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아마도 과거에 우리 문화재를 일본 놈들에게 팔아먹던 사람이었을 것” 이란다. 전생에 그런 죄를 지은 업보로, 이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을 문화재를 찾아디닌다는 것. 그러지 않고서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더우나 추우나 그렇게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야 알 수 없으니, 그만해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다.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있을 것인가?

 

 

하기야 지금도 그런 인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사람들.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문화재를 방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소중한 문화재를 도굴하여 몰래 치부를 하는 사람들. 이 모두가 다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할 사람들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참 고맙고 또 고맙다.

 

문화재의 보고 여주 고달사지

 

사적 고달사지,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던 사찰이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 그리고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와 비지정 문화재 등 많은 석조유물들이 남아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사지에서 출토되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신라말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요즈음 고달사지를 가면 또 다른 발굴작업을 하고 있어, 고달사지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문화재가 출토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전 고달사는 한강을 끼고 있던 흥법사와 법천사, 거돈사, 신륵사 등과 함께, 한강의 수로를 이용한 교통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두 점의 석조가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어 사용된 수조는 일정한 공간에 물을 담아 저장 하거나, 곡물을 씻거나 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수조는 일반적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져 석조 또는 목조가 많이 제작되었으며, 사찰이나 궁궐 등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기거하는 건축 공간에 조성하였다.

 

새롭게 보인 고달사지 석조

 

고달사지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가-4 건물지에서 발견 된 석조는, 물을 담아 두기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한 돌로 치석, 조성하였다. 이 석조는 일부 파손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그 규모는 장변 321cm, 단변 149cm, 높이 98cm 이다. 석조는 한 돌로 치석되었으며, 평면이 긴사각형으로 표면을 고르게 다듬어 전체적으로 정연하면서도 정교한 인상을 주고 있다.

 

 

 

33도를 웃돈다는 8월 4일. 고달사지를 한 바퀴 돌면서 만난 석조 앞에는, 예전 답사 때 볼 수 없었던 문화재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석조를 설명하는 이 안내판에는 석조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석조를 살펴보니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 석조를 보았지만, 이렇게 안내판을 보고 다시 돌아보니 모르고 있던 부분까지 알게 된다. 문화재를 자주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쌀을 씻기 위한 석조인 듯

 

이 석조는 전체적인 치석 수법과 고달사지의 연혁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전기 에서도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고달사지에는 또 하나의 석조가 있다. 한편이 심하게 훼손이 된 또 하나의 석조는, 지금은 중앙국립박물관으로 옮겨 간 쌍사자 석등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어, 이는 예불을 드리기 전 손을 씻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석조는 건물터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쌀을 씻기 위한 것이나, 식수를 담아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석조가 쌀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면, 당시 고달사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성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는 고달사지 석조, 문화재는 보면 볼수록 눈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만큼 많이 알아가기 때문이다. 고달사지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조로 인해, 과거 고달사의 또 다른 일면을 유추해 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찜통더위마저 잊게 만든다.

여주군 여주읍 천송리 301-2에 소재한 국내 최초 도자 쇼핑타운인 ‘도자세상’. 7월 24일(화) 도자세상에는 무슨 상품들이 있는지 궁금하여 찾아가 보았다. 도자세상은 생활도자기에서 악세사리, 값비싼 예술작품 등 한국에서 생산되는 각양각색의 도자기들을 직접 만나보고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도자세상은 여주 신륵사 입구 도자기 행사단지에 조성한 쇼핑문화 관광지로, 2011년 5월 2일에 공식 개장을 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각처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들을 구입할 수 있는 곳으로, 전시 체험시설인 반달미술관을 비롯하여 쇼핑시설인 기념품샵, 리빙샵, 갤러리샵, 브랜드샵 등이 있다.

 

 

도자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솟을문이다(상) 뒤편에 보이는 관리동(하)

 

가격에 따른 구입을 할 수 있는 곳


한국도자재단 도자세상의 마케팅본부 김광래 팀장과 이과성 과장의 안내를 받아 돌아 본 도자세상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가격표가 붙은 작품에서부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도자기 등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상설전시관은 한 달에 마지막 주 월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문을 연다. 매장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문을 열고 있으며, 나름대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골라 샵을 선택할 수가 있다.

 

 

관리동 옥상에서 내려다 본 도자세상과(위) 안내를 해준 마케팅본부 김광래 팀장(아래 좌측)과 이과성 과장(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는 리빙샵이 자리한다. 소매용 도자기 25,000점 정도가 진열되어 있는 리빙샵은 중, 저가 상품들로 다량 구입이 가능한 곳이다. 이곳은 백화점이나 마트 등에서 다량으로 구입할 수 없는 상품들을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으며, 식당 등을 개업할 때는 도자세상 직원들과 협의하여 좋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리빙샵 건너편인 우측에는 기념품샵이 있다. 기념품샵은 생활자기에서 부터 팬시용품까지 다양한 아트상품 19,000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상품들이 눈길을 끄는 기념품샵은, 각종 악세사리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마도 여행객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곳이다.

 

리빙샵에 진열된 상품들(위) 와 기념품샵 매장이 진열된 상품들(아래)

 

중앙에 조형물을 지나 8층 높이인 관리동을 바라보고 우측에는 갤러리샵이 자리하고 있다. 갤러리샵에는 국내 도예가들의 수공예품을 엄선하여 판매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 등의 도예가들과, 전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100여명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갤러리샵에는 1천 2백만원의 가격이 붙은 작품도 보인다.

             

관리동 좌측에는 대중브랜드인 생활자기를 판매하는 브랜드샵이 자리한다. 브랜드샵에는 행남자기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생활자기 문화를 선도하는 브랜드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가끔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브랜드 도자를 구입할 수가 있기도 하다.

 

 

브랜드샵(위) 와 갤러리 삽(아래)

 

앞으로 다양한 행사와 함께 할 것


“처음에 이 도자세상을 연 것은 지역의 도자예술인들이 판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온전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 매장은 도자기를 구입을 해서 자신들이 이분을 붙여 판매를 하지만, 저희들은 위탁 판매를 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이익을 그분들에게 되돌려 드릴 수가 있습니다.”


마케팅본부 김광래 팀장의 말이다. 처음에는 전국의 도자예술인들의 신청을 받아 120명 정도의 작품을 전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작가들이 참여를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이문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100명으로 줄였는데, 다시 80명 정도로 선별을 하겠다는 것이다.


“저희들도 작가 분들에게 연말에 작품을 철수하라고 하기가 참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그분들을 도와주는 것이라면, 제대로 도울 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다행히 한  두 분을 제외하고는 저희들의 뜻을 이해해 주셨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갤러리샵에 진열된 1,200만원의 작품

 

많은 예술인들의 속내를 일일이 알 수는 없는 법. 가격을 예술인들 스스로 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따른 어려움도 있다는 것이다. 이과성 과장은


“올 가을 쯤에는 스스로 장과 짱아지 등을 담구는 행사를 열려고 합니다. 그분들이 옹기를 구입해 자신의 옹기에다가 김치 등을 직접 배워 담구는 것이죠. 언제든지 이곳에 와서 자신의 항아리에 있는 것들을 가져 갈 수 있도록 하는 이벤트 등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더 많은 행사를 기획하고, 인터넷을 통해 직접 저희 도자세상의 그릇 등을 구입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직원들도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 터


“지금은 판매직 사원들은 계약직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조회를 하면서 고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법, 도자기에 대한 것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도자기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내년 4월경에는 판매직 중 6명 정도를 정규직으로 채용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자체 등과 협의를 하여 테마관광 코스도 개발하려고 합니다. 매년 발전을 하는 도자세상을 위해 마케팅 부서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반달미술관에 전시중인 남한강 도예가들의 작품(위)과 주도전(아래) 

 

김광래 팀장은 도자예술인들에게 더 많은 이문을 남겨주기 위해, 해외 판촉에까지 정성을 쏟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 등과 경쟁에서 더 나은 조건으로 판매전략을 짜고 있다는 것. 누구나 도자세상에 오면 가장 좋은 제품을 적정한 가격에 구입을 해, 기분 좋은 쇼핑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1시간 정도 돌아본 매장에는 유난히 눈이 쏠리는 작품들이 있다. 구매충동이 아니라 ‘저런 그릇은 정말 좋다’라고 생각이 드는 도자기들이다. 마지막으로 돌아 본 반달미술관. 그곳에서는 여주 지역의 남한강 젊은 도예가들의 작품과, 술과 도자기가 어우러지는 ‘주도전’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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