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가남면 본두2리는 '해촌 조기울'이라고 부른다. 조기울이란 본두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조선조에는 조개울면 또는 소개국면이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본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본두 1리는 묘촌 조기울, 본두 2리는 해촌 조기울이라고 부른다. 해촌 조기울은 일제 때에 농촌의 식량증진을 위해 마을마다 농촌진흥회를 만들었는데, 이 마을에는 중앙에 괴목인 해나무가 있어서, 해촌진흥회라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안녕을 위한 오래된 대보름 의식

 

28일 오후에 길을 나서 본두2리를 찾아 나섰다. 매년 이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낙화(落火)놀이'라는 의식을 보기 위해서다. 길을 잘못 들어 몇 번을 주변을 돌아서야 겨우 도착을 한 조기울 마을. 낙화놀이를 하는 논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논을 가로질러 줄을 매어 놓고 그 곳에는 등이 달려 있다. 등을 달아 맨 줄에는 길게 순대처럼 생긴 것들이 달려 있는데, 그것들이 연신 불꽃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낙화놀이는 마을의 제의식이다. 딴 곳에서는 산신제나 목신제, 장승제, 서낭제 등을 지내는 것처럼, 이 본두리 마을에서는 낙화놀이라는 특별한 놀이를 통하여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빌었던 것이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제관으로 선출해, 불꽃이 떨어지는 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가정의 안녕과 만복이 깃들기를 빈다. 이 낙화놀이는 영동고속도로가 마을을 가르고 지나면서 조기울 마을이 갈라진 후에는, 홀수 해에는 본두 1리에서 지내고, 짝수 해에는 본두 2리에서 의식을 거행한다.

 

 

 

마을에서 전해진 전통방법으로 만들어지는 낙화 

  

낙화와 등을 매단 줄을 흔들고 계신 본두리 마을 신동유(남, 77세) 노인회장은 이 대보름 의식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진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우리 평산 신씨가 이 마을에서 살아 온 것이 벌써 14대인데, 마을에 정착하면서 이 낙화의식이 전해졌다고 하니까 500년은 족히 넘은 전통이지."

"낙화놀이는 왜 시작을 했을까요?"

"예전에는 마을에 병원도 없고 하니까 병이 들면 큰일이지. 그래서 정월 대보름에 이렇게 낙화놀이를 해서 병이 걸리지 않고, 자식들이 잘 크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리는 것인데, 지금은 예전 같지가 않아. 예전에는 대단했지."

"낙화는 어떻게 만드세요?"

"낙화는 집집마다 정성을 드리려고 만드는 것인데, 소나무 껍질을 말려 숯가루와 함께 곱게 빻은 다음, 메밀짚 잿물에 담갔다가 말린 창호지에 잘 싸서 만들지"

 

연신 줄을 당기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신동유옹. 이렇게 전해지는 마을의 전통 대보름 의식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집집마다 만드는 등과 낙화

 

논을 가로질러 걸린 줄에 매달린 등은 30여 개가 조금 넘었다. 그런데 등의 모습이 제각각이다. 마침 등을 매단 곳에 계신 주민들이 있어 내용을 들어보았다.

 

"등은 집집마다 만드시나요?"

"그럼요, 정성인데요. 집집마다 만들어서 등에다가 이름과 소원을 적어 걸어요. 그래서 등이 못 생겼잖아요."

"파는 등을 사다가 하셔도 될 텐데."

"정성이잖아요. 매년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만들어야 일 년 동안 집안이 편안해지죠."

"마을 주민 전체가 다 등을 만들어 거나요?"

"전에는 집집마다 걸었는데 요즈음은 빠지는 집이 많아요."

 


낙화는 불이 폭포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숯가루가 불에 타면서 아름답게 불꽃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진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 불꽃이 날려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는 바람이 없어 아래로만 떨어져 내린다. 마을을 못 찾아 헤매는 동안 많은 불꽃은 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아름답기만 하다.

 

길이 30 ~ 40cm, 굵기가 5cm 정도인 낙화에서 아름답게 떨어지는 불. 정월에는 불을 놓아 액을 방지한다. 달집태우기나 횃불놀이 등도 다 불로써 일 년의 액을 태운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 불로써 액을 막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를, '낙화놀이'라는 본두리 마을 특유의 의식으로 바꾼 것이다. 단지 액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함께 창출해 낸 조기울 낙화놀이는 또 다른 대보름의 아름다움이다.

 

"기자양반 우리 마을 소개 좀 잘해서, 많은 사람들이 낙화놀이를 보러 올 수 있도록 해줘. 이렇게 아름다운 놀이가 자꾸 사라지는 것이 아쉽잖아."

 

본두리 마을을 떠나는 기자에게 당부를 하시는 노인회장의 말씀이다. 밤새 그렇게 불꽃이 떨어진다는 조기울 낙화놀이. 정월 대보름 액막이의 특별한 모습이다.

여주 원적산은 오대산의 끝자락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산이라는 이야기다. 이 원적산의 산자락인 여주군 도곡리 산 7번지에 소재한 도곡리 석불좌상은, 9세기의 통일신라 불교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석불좌상이다.

 

산자락에 외로이 앉은 석불좌상

 

도곡리를 지나면서 이정표를 보고 찾아들어간 석불좌상. 1998년도에 여주군에서 보호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돌려가면서 살창을 만들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전체를 보려면 이 보호각의 살창으로 인해 다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맨 땅에 세워놓은 것보다는, 보호각이라도 있다는 것이 보기에도 나아 보이니 어쩔 것인가?

 

 

원적산의 산자락에서 북동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이 석불좌상은, 팔각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두툼한 코와 팽팽한 뺨,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에서 자연스러운 부처의 모습을 느낄 수 있고 상태도 비교적 양호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수인은 왼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2개의 손가락을 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알맞은 신체비례를 갖고 있는 통일신라 말의 석불로 보인다.

 

삼단으로 된 대좌의 뛰어난 조각

 

세 매의 화강석으로 구성된 대좌는 위에 올린 불상에 비하여 작은 편이다. 하대석은 연화문을 두르고 있다. 중대석은 육각형으로 되어있으며, 상대석과 하대석에 비해 너무나 얇게 조각이 되어 보기에도 불안해 보인다. 중대석의 여섯 면 중에 앞면에 있는 사면에는 신장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많이 마모가 되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이렇게 돌에다가 느낌을 들 정도의 조각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상대석은 4단의 받침을 갖춘 복엽연판문이다. 각 연잎마다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선정인을 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특이하다. 상대석에 이렇게 불상을 조각을 했다는 것은, 당시 이 석불좌상을 조성한 장인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한다. 9세기 통일신라 말의 이 석불좌상은 주변이 평편하고 석재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절터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당시 이곳에 자리한 사찰의 대웅전에 모셔졌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다만 이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던 절의 명칭이나 규모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연을 훼손하는 이런 일은 삼가야

 

도곡리 석불좌상은 그동안 몇 번이나 답사를 했다. 항상 지나는 길마다 근처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변화는 없었는지, 또는 관리가 잘못되어서 훼손을 당하지나 않았는지 등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요즈음은 문화재로 지정만 해놓고 관리가 되지 않는 소중한 자원들이 많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관계당국에 연락을 하고 질책을 하기도 하지만, 워낙 많은 숫자이다 보니 일일이 그런 일을 하는 것도 버겁다.

 

 

석불입상을 보고 내려오는데, 길옆 풀숲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여름철 풀이 무성하면 볼 수 없었을 테지만, 마른 풀 숲에 드러난 것들이 있다. 좁은 내를 건너 숲으로 가보니 촛대와 대야 등이다. 누군가가 이것을 버리고 간 것이다. 옆에는 붉은 천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갖다 버리고 간 것이란 생각이다.

 

 

전국의 문화재 중에서 석불이나 마애불, 그리고 탑 등을 돌다가 보면, 주변에 이런 것들이 심심찮게 눈에 띤다. 심지어는 의식을 마치고 난 돼지머리 등을 버리고 가기도 해, 여름철이면 심한 악취가 나기도 한다. 신을 모신다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다니.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밭으로 올라오신다.

 

이곳에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느냐고 물으니, 몰래 와서 뚱땅거리고 가기도 한단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기물(器物)을 버리고 가는 심사는 무엇인지. 이런 것 하나도 우리문화재를 훼손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 오랜 천년세월, 이 자리에 앉아 원적산 산봉을 바라보는 석불좌상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실까?

줄다리기는 풍년, 풍어의 기원

 

줄다리기는 여러 사람이 두 편으로 갈라, 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줄다리기는 한 해의 길흉을 점치고 풍년·풍어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시작한 마을 행사였다.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점점 이웃마을로 합세를 하면서 대보름이 되면 거대한 줄로 변한다. 새끼줄이 중줄이 되고, 그것이 다시 모여 쌍룡이라는 암수의 줄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줄은 주로 음력 대보름을 기해 행해졌으며 마을 단위로 편을 갈라 장정들이 하거나 또는 남녀노소가 함께 줄을 마주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었다. 줄다리기를 삭전(索戰)·조리지희(照里之戱)·갈전(葛戰)이라고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줄다리기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온다. 주로 중부지방 아래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아 벼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줄다리기는 대개 정월 대보름날 행하지만, 곳에 따라 단오나 한가위에 하기도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각각 만든다. 예전에 여주 흔암리 일대의 줄다리기는 수천 명이 달라붙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줄의 길이가 한편이 80m 정도의 큰 줄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기 때문에 일대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줄은 암수줄을 만들어 그 용두(줄머리) 부분을 암줄은 넓게, 숫줄은 좁고 위로 오르게 만든다. 숫줄의 용두를 암줄의 용두에 넣은 후 비녀라는 나무빗장을 걸게 된다. 용목의 너비가 1m에 이른다고 했으니 그 줄의 위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줄의 용두 부분. 굵은 줄은 용목이 1m 나 되었다

 

줄다리기는 공동체의 구심점

 

줄다리기는 단순히 줄을 당기는 놀이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공동체를 창출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내적 사고를 지니게 된다. 마을에서는 정월 초이틀이 지나고 나면 마을마다 작은 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줄을 갖고 이웃마을과 줄다리기를 한다. 진 마을에서는 이긴 마을에 줄을 넘기게 되고, 이긴 마을에서는 그 줄을 합해 조금 굵은 줄을 만든다. 이처럼 처음 만들어진 줄이'새끼줄'이다. 마을마다 이렇게 줄다리기를 하며 새끼줄을 모으고, 이긴 마을끼리 또 다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날이 갈수록 줄은 점점 굵어지는데, 이때 줄을 '중줄'이라고 한다.

 

줄을 이긴 마을에 넘겨줄 때는 사람들도 함께 그 편이 된다. 이웃과 이웃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절로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줄이 보름이 가까워지면 커다란 암줄과 수줄로 형태가 변한다. 즉 암용과 수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마을도 강을 사이로 강북과 강남이 암숫룡을 이고 줄다리기를 할 강변으로 모여든다. 마을마다 들고 나온 깃발에, 마을의 풍물패가 한데 어우러지면 그야말로 한바탕 난장이 벌어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마음으로 풍농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염원하였던 것이 바로 우리 줄다리기의 근본이다. 또한 겨우내 움츠려진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길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 것이다.

 

  
거대한 줄로 보를 막으면 그 줄을 이용해 많은 어종들이 알을 낳기도 했다.

 

'줄보'는 생명의 근원

 

줄다리기를 마친 후 줄은 마을마다 사용법이 다르다. 어느 곳에서는 줄을 당산에 쳐놓기도 하고, 어느 마을에서는 얼음이 언 강에 갖다 놓기도 한다. 새끼줄을 잘라 지붕에 던지면 집안에 액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잘라가기도 한다. 또는 기자속(祈子俗)으로 줄을 이용하기도 하는 등, 줄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줄보>라는 줄의 사용법이다. 마을에 내가 흐르면, 줄을 당긴 후 내를 막아 보를 만든다. 이 짚으로 만든 줄보는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자연을 보호하고 물을 정화시킨다. 수많은 어류들이 이곳에서 생명을 잉태시킨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어장이 되는 것이다.

 

물속에 많은 먹이를 만들어 배부른 강을 만들고, 여름 장마철이 되면 떠내려간다. 이때쯤이면 농사를 지을 물이 부족하지 않다. 생명을 잉태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물을 가둘 수 있는 줄보.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하면 스스로 떠내려가 물의 흐름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생명의 줄보가 물을 막는 것이다.

 

  
줄을 이용해 보를 막은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자. 강을 오염시키지 않고 수 많은 생명을 잉태한 생명의 줄이다

 

이런 줄보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들의 논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조상 대대로 이용해 농사를 지을 물을 가두고, 많은 생명을 잉태시킨 줄보. 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선조들의 자연사랑과 공동체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저마다 잘났다고 침을 튀기는 사람들. 이 줄보를 과연 알고는 있었을까? 그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저곳을 줄보로 막을 수만 있다면 굳이 이런 논란은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생명의 보 <줄보>, 이 줄보를 만들어 썩은 물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에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에서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년.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 강월헌 강월헌의 현판

  
▲ 강월헌 판소리 중고제라는 한 류파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명창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 강월헌 명창 염계달이 밤마다 소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강월헌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에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작은 이 정자 안에는 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사적 제251호 파사성은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이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해발 235m 정상을 중심으로 5각형 모양의 둘레로 경사가 가파른 곳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성 둘레는 약 943m로, 높이 4 -5m 견고한 암반층을 기반으로 하여 쌓았다. 잘 다듬은 직사각형 돌을 이용한 초축성벽과 부정형의 쪼개진 돌을 이용한 추축성벽이 있는데, 이는 여러 시기에 걸쳐 축조되어 오늘날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구조물로는 치 3개소, 문지 2개소, 우물지 1개소, 수구지 1개소 등이 있다. 파사성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성벽 발글조사중 출토된 삼국시대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류였으며, 축성기법 또한 신라 산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파사성은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여주, 이천, 양평으로 가는 길목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더욱 여주에서 양평을 흐르는 남한강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어 이 파사성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아직은 복원이 끝나지 않아 군데군데 무너진 곳을 볼 수 있다.

  
성위로 오르면 양평방향의 남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여주 북방 53리에 있으며, 둘레가 3만8825척의 석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95년(선조28) 3월에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 의엄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수축하도록 하였다. 의엄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을 마련하고 군사의 양식을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을 동원하여 수축하여 1597년에 공사를 마치었다"고 했다.

 

이 파사성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했다.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전에 남장군이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여장군은 마지막으로 성을 쌓을 돌을 양평군 개군면 석장리에서 날라오다가 놀라는 바람에 치마가 찢어져, 그 마을에 돌담이 쌓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파사성은 미완의 석축산성이라는 것이다.

 

  
파사성은 뚜벅이 여행족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복원이 된 성벽. 견고한 석축산성임을 알 수 있다

전설이야기를 생각하며 천천히 성벽 안으로 난 길을 걸어본다. 아직은 복원이 다 되지 않아 여기저기 널부러진 돌무더기가 오히려 정감이 간다. 잘 복원된 동문지 성벽들이 단단한 석축산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 밖으로 걷다보면 어느새 파사산 정상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경이라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본다. 이 곳은 주변이 모두 30~40m 낮은 구릉지대이기 때문에, 사방 어디를 보아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중요한 전략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도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정상에 오른 뚜벅이 연인들

  
파사성의 정상에 서 있는 안내표지목

  
성 위에서 바라본 여주방향의 남한강.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아이들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도 성내를 걷는다. 한 쌍의 연인들은 정상에 올라 밑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환호를 한다. 신라 때부터 수차례 축성을 해 온 파사성. 산 높이나 성벽 길이나 걷기에는 적당한 것 같다. 뚜벅이족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는 최적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정리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할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역사와 건강이 함께하는 파사성. 전설이 있어 더욱 좋은 곳이다. 산성을 한 바퀴돌아 산성 밑에 자리한 막국수촌에 들려,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에 산성의 가을이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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