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기견에 대한 글을 올렸다.(버려진 녀석을 걱정하다 의 글) 많은 분들이 그 작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사연을 남겨주었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다행하게도 동물병원에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다리에 있던 철사라고 생각했던 것도 나무가지였다는 것이다. 주인을 잃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녀석이, 자꾸만 눈에 밟혀 잠을 제대로 자지를 못했다.

의견을 남겨주신 분 중에는 자신이 키우겠다고 연락처까지 남겨 놓은 분들도 계시다. 오늘 아침 여주에 있는 아우에게 그 녀석이 어떻게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더라는 것이다. 블로그를 들어가 보면 메시지글에 키우겠다는 분이 계시니, 연락을 취해보라고 했다. 그래놓고는 연락이 올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구조를 하기 전 버려진 곳의 풀밭에 힘없이 있는 녀석입니다

동물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에

오후 8시가 다되어 가는데 연락이 왔다. 녀석을 키우겠다는 분과 통화를 하고 난 후, 여주에 있는 동물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디?”
그냥 차에 태우니까 바로 난리를 치데요. 창문을 발로 긁고

왜 그랬지

아마 집으로 가는 줄 알고 그랬나 봐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더니

말도 말아요. 동물병원에 가서도 그렇게 활달하게 돌아다녀요


얼마나 그곳에서 오랜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일까? 그런 춥고 배고픈 것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서일까? 동물병원에 가서는 언제 그렇게 풀죽은 모습으로 있었냐는 듯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더라는 것이다. 아마 이제 주인이 곧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개를 키우겠다는 분이 곧 데려갈 테니, 녀석의 건강을 좀 챙겨보라는 부탁가지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는 한시름 놓았다.

녀석은 나이가 꽤 먹었다고 한다. 그런 녀석이 그렇게 사람들의 발길만 보아도 목을 움츠리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은, 그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았는지도 모르다. 녀석을 길가에서 만난 날도 걱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키지 않는다고 빵빵거리면서 욕을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더 걱정스러웠다.


집으로 데려 와 먹이를 먹고 있는 사진입니다

두 가지 주인이 있다.

녀석은 아마도 그곳 어디를 다니는 사람이 유기를 한 것 같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추운 길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올 겨울처럼 추운 날을 버티기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보듬고 키우겠다는 분이 나타난 것만 해도 녀석의 복이란 생각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마음이 따듯하고 정말 동물을 가족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또 한 가지는 개만도 못한 사람이다. 바로 이렇게 키우던 개를 유기하는 사람들이다. 키우다가 못 키워 내다 버릴 것이라면, 아예 집안에 들이지를 말아야 한다. 그동안 방송 등을 통해 수 없이 길가에 내버려진 유기견들을 보면서, 참 마음 속으로 안쓰러워했다. 좋을 때는 내새끼’ ‘내딸이라는 표현을 일삼으며 너스레를 떨다가, 어떻게 그렇게 길가에 버릴 수가 있는 것인지.


동물 병원으로 옮겨진 후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이 엄마라고 부르면서 키우던 사람들. 자식과 같다고 말만 번지르르 하는 사람들. 가족이라고 떠들어 대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식을 버리고 가족을 버렸다. 그렇게 하고도 스스로가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개보다 못한 인간이 아닐까?

이번에 만난 녀석으로 인해 생각을 한다. 그래도 세상에는 마음이 따듯한 분들이 계시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녀석. 앞으로는 정말 행복한 날이길 기원한다. 끝으로 녀석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걱정을 함께 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한 동물병원으로 옮기게 해주신 분, 고맙습니다. 그런 아픈 사연이 있어 녀석과의 인연이 생긴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을 보내주신 상교리 지우재의 지우선생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이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눈이 덜 녹은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부릅뜬 눈과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귀부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바로 귀부의 머리이다.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귀부의 왕방울 눈을 보면, 무섭다기보다 친근감이 먼저 앞선다. 아마도 그 눈이 세상의 모든 악한 기운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닌지. 커다랗게 뚫린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바람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길지 않은 목이 몸체에 달라붙은 듯 표현을 해, 이 귀부의 힘을 더 느끼게 만든다. 마치 강인한 역사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등에는 이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그 육각형의 귀갑문이 중앙으로 가면 한 단계 높게 조각을 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위에 비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비좌를 돌출시켜 조각하였다.      




이수의 용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귀부의 머릿돌인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다. 앞면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 한 옆에 따로 보관을 해 놓았다. 이 이수는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가 생동감이 넘친다. 금방이라도 이수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면의 용은 좌우로 밖을 향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뒤편쪽의 용은 안을 향하고 있어, 앞뒤의 용이 다르다. 옆면을 보면 비늘이 선명한 용의 몸체가 뒤틀려 감아 올라간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이수의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면서 조성이 된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 및 이수.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하면 975년에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대사가 입적한 후 8년이 지나서 세워진 것이다. 이 귀부와 이수의 형태는 인근 원주의 거돈사지 등에서 발견되는 원종대사의 승묘탑비 귀부와는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의 탑에서 보이는 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문화재답사. 그래서 고달사지의 귀부는 늘 발길을 붙잡는가 보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우두산 일대와 주암리 뒷산인 옥녀봉. 그리고 서원리 뒷산을 오르다가 보면, 여기저기 수도 없이 많은 굴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상교리 뒷산인 우두산에 만도 어림잡아 40~50여개는 넘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굴은 자연적인 굴이 아니다. 모두가 일제에 의해서 파여진 인공적인 굴이다. 굴 중에는 군인들에 의해서 군 작전상 막아놓은 것들도 있다.


굴은 대개 땅을 아래로 파 들어가 그곳부터 옆으로 굴착한 것들이 있고, 처음부터 암벽을 평행으로 파 들어간 것 등 다양하다. 이 굴들은 주변에 바위를 뚫고 들어간 것인데, 깊은 것은 수 십 미터에 이르는 것들도 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많은 굴들을 이곳 여주군 북내면 일대 산에 뚫어놓은 것일까?


금광채취를 위해 뚫어놓은 굴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즘골 뒤 우두산.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금광이 있었다 

다음지도에서 본 금광굴이 집단으로 있는 위치

옥녀봉 방향 뒷산은 눈이 많이 쌓여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할 수없이 북내면 상교리 ‘즘골’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즘골이란 예전에 가마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눈길은 아무래도 위험할 듯 해, 카메라를 소지하고 오르기를 포기했다. 우두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쌓여있는 낙엽과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엔 새들이 앉아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시끄럽다. 눈이 녹은 나무 밑에는 한겨울을 보낸 영지버섯 하나가 추위에 떨고 있다. 생명의 끈질김을 본다. 눈길에는 고라니를 비롯한 짐승들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혀있다. 낮에도 사람의 발길에 놀란 고라니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산으로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산 중에 축대를 쌓은 듯한 돌담들이 보인다. 잘 다듬어진 돌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집이라도 있었는가 보다. 금광을 채굴하기 위해서 파 놓은 굴 옆에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는 축대가 있다. 금광을 채굴하던 사람들이 묵었던 막사를 지었던 곳이었나 보다.



산으로 오르다가 보면 집터인 듯한 곳이 보인다. 주추돌인 듯한 돌들과 축대가 있다.

한 때는 60호가 넘는 집들이 있던 곳


즘골의 뒤편에 있는 우두산은 ‘소머리산’이다. 이 즘골로 들어가는 곳에는 유난히 소를 키우는 목장이 많다. 현재 즘골에는 16호 정도의 집들이 있다. 하지만 금광을 한창 채굴 할 당시에는 60여 호나 되는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산에서 캔 광석을 잘게 부수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 와서 채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우두산은 산세가 그리 높지는 않다. 하지만 이 산은 명산이라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이 우두산은 가히 인재를 키워낼 만한 산이었기에, 인근에 ‘고달사지’가 자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우두산이 일제강점기에 무수히 파 놓은 굴로 인해, 그 명산의 혈이 모두 끊겨버렸단다. 그래서 즘골에는 인재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다.




금광굴의 흔적. 이 사진들은 모두 핸드폰으로 촬영하였다.

가시지 않는 상처


산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본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무수히 많은 굴들이 있다. 이곳에는 아직도 금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도 한다. 산 중에 축대를 쌓고 관리를 하는 집까지 지었던 흔적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한 금이 묻혀있었던 것 같다. 산 위에도 여기저기 예전 집터가 보인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와 재화를 찬탈해간 일제. 그런 점도 마음이 아픈데 이런 흔적들이 전국에 수도 없이 널려있는 것을 보아야 하다니. 언제나 이 아픔이 그치려는지 모르겠다. 마을의 어르신들조차도 “죽어도 그 원수는 갚아야 혀. 너무 많이 고통을 받았어. 우리 민족들이” 라고 분노를 표한다. 산을 내려오는데 철모르는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지만 남은 오동나무가지를 쪼아댄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난 야생동물이 지나다닌 흔적과 영지버섯
도공이 그릇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일까? 요즈음은 세라믹이라는 그릇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조금은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우리의 전통 장작가마에서 불을 때 만든 도자기에 대한 진가를 모르는 듯도 하다. 세라믹이란 고온에서 구워만든 비금속 무기질의 고체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의 생활자기라는 그릇들은 장작가마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며칠 휴가를 여주에서 보내면서, 찻사발과 다기를 만들고 있는 아우의 그릇만드는 과정을 볼 수가 있었다. 전에서 부터 자주 보아왔던 터라 신경을 쓰지 읺았는데, 며칠 눈여겨 보니 그 공정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찌는 듯 더운 여름 날 불을 땐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의 진을 빼는 일인가도 느꼈다. 땀은 금방 옷을 적시고 어디든 흐를 수 있는 곳이라면 흘러내리는 데도 묵묵히 작업을 하는 아우.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형이 땀을 흘리는 것이 안스럽다고, 선풍기를 선뜻 갖다가 틀어주는 마음까지 갖고 있다. 바로 장인의 마음이다.

옷이 다 땀으로 젖었으면서도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여유는 무엇일까?

그 작업을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면,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 모습은 어느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불현듯 자기 일에 빠져 이 찌는 듯한 더위에 땀으로 목욕을 하면서도 일을 하고 있는, 저리 멋진 모습 하나를 안 남겨놓으면 두고두고 후회 할 것만 같다.

"형은 하이에나 같아요"

"무슨 말이야"
"글 소재가 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덤벼드니,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죠"
"직업이 그래서 그런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아우의 그 모습이 그리 아름답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지우재'라는 아주 오래 묵은 한옥의 전시관을 갖고 있는 아우는, 미술을 전공했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로 내려와 벌써 17년이 지난 세월을 도자기와 씨름을 하고 있다. 고집스럼게 장작가마에서 불을 때기 때문에, 한번 가마에 불을 붙일 때마다 적지 않은 경비가 들어간다.   

아우의 작업하는 과정을 대충 사진으로 넘겨보자. 물론 이 작업이 다는 아니다. 아니 그 전 과정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의 과정에서 흘리는 땀의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는 것일까?


도자기를 빚을 점토가 보인다. 흙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요즈음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것이 예전처럼 흙을 거르고 발로 밟지를 않는다. 


물레질을 하고나서 남은 흙이다. 하나하나 물레질을 하고 그것을 그릇형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모형이 완성되면 그것을 말리는 공정을 거친다. 그것이 말라야 초볼구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벌구이는 대개 1,000도 정도의 불에서 구원낸다.

초벌구이는 전 과정의 20% 정도  

초벌구이를 마치면 그릇 하나씩을 일일이 손질을 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한다. 유약을 묻혀 바람에 말린다음 다시 두벌구이를 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모두 세번을 구워내는 도자기의 공정은 불을 땔 때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야 그릇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는 도자기. 그 공정에서 흘리는 땀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감히 잡히지가 않는다.


초벌구이를 한 찻그릇을 꺼내 정리를 하는 아우의 등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하나하나 다듬고 닦아내면서 땀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만큼 작업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릇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 그 하나하나에 들이는 정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초벌구이를 하고나서도 몇 번의 공정이 더 기다리고 있다. 땀을 흘리면서 그 땀으로 빚어지는 것이 도자기라고 한다. 그래서 생명을 얻게되는 것일까?

아우의 아픔이 널려있는 가마

초벌구이를 한 그릇을 손질하는 아우를 두고 가마로 향한다. 가마 주변에는 아우의 아픔이 널려있다. 땀과 불, 바람과 흙이 어우러져야 만들어진다는 도자기. 그러나 1,000도가 넘는 가마 안에서 생성되는 그릇을 알 수는 없다. 불을 끄고 하루, 이틀이 지나 가마 안에서 끄집어 내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 그 속에서 잘못된 그릇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바로 아우의 아픔이다.
 





수없이 많은 땀을 흘리고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있기 까지에는 장인의 고통이 함께 한다는 것을 모른다. 나 역시 며칠간 아우와 함께 편하게 휴가를 보내면서 새삼 느낀 것이니 말이다. 아우에게서 받은 마음의 선물인 도자 몇 점.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남다를 의미를 가진 그릇이 되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가면 단종임금이 지나갔다는 마을이 있다.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상구리와 상교리, 그리고 주암과 서원리 등이다. 1457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어린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이 되어 한양을 출발해 뱃길로 한강을 거슬려 이포나루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린 단종은 어디로 길을 택해 영월로 향했을까?

눈물어린 길을 따라가 보다

여주군 상구리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파사산성이 보이는 강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단종 일행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골을 지나 무촌리 -옥촌리-장풍리를 거쳐 현재 골프장인 블루헤런 안에 있는 어수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수정은 단종임금이 이곳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야 길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겨우 사람 하나 지날만한 숲길을 헤치고 일행은 더딘 걸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일행은 혜목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절로 ,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원의 하나로 역대 왕들이 비호를 하던 사찰이다.


어수정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안개가 자욱한 이 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는 고달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종 일행이 지나갈 때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중에는 억울한 단종의 유배길에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도 있엇을 것이다.

고달사에서 논둑 길을 따라 걷다가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이라야 그저 낮은 마을 뒤 언덕이다. 이 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낭나무에 도착을 한다. 서낭나무는 지금은 옆으로 쓸어져 모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아마 당시 이곳을 지나던 단종일행의 아픔을, 아직도 다 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하늘이 트인 곳이 나오고, 그 낮은 고개 위에는 서낭나무가 서 있다.

서낭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들이쉰다. 서낭나무에서 20여m 앞에는 예전 서낭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에서 논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원리로 향했을 것이다. 서원리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현 서원1리를 '원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공무를 보러 여행 길에 나선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도 서원리에는 예전 원이 있던 집터가 있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채만한 주추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리 원골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일행은 북내면 석우리 선돌 앞을 지나 내룡리, 북내면 외룡리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이름이 내룔이나 외룡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왕과 관련된 지명이고, 단종이 지나갔기 때문에 '용'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목이 되어버린 서낭나무와 그 앞 들판인 점말 고래들. 그리고 원골로 넘어가는 길

고달사지부터 길을 시작해 논길을 걸어 숲으로 접어든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숲길은 시원하다. 발밑에서는 비가 온후 자라난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이 어린 폐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먼 길을 떠나 유배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단 한 시간여를 걸어본 길도 힘이든대, 700리 길을 걸어 영월 청령포로 향한 어린 단종. 지금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을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