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읍 하리 200-1에는 강한사라는 곳이 있다. 이 강한사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인 우암 송시열을 모신 사당이다. 강한사는 조선조 정조 9년인 1785년에 건립되었다. 이 강한사 안에는 강한루가 있다. 강한루는 남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데, 가을 은행잎이 떨어져 마당 가득 노랑 물을 들이고 있었다.

 

손에 노랑 물이 들것 같은 곳

 

지난 가을, 마당 어디를 보아도 온통 노랗다. 주변에 서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잎을 다 떨어뜨려 강한루를 장식하고 있는 듯하다. 강한루는 단지 누각으로만 사용했던 곳은 아니다. 그 앞쪽에 보면 대로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어, 한 때는 이곳을 서원으로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루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름다운 정자가 아니다. 널찍한 평마루는 난간이 없다. 우측 한편에 붙어있는 조그만 방은 겨울철에 이용한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넓은 마루에 한 쪽 편에 방을 드린 형태다. 마루 양편에는 기둥이 서 있어 정자라기보다는 객사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조의 명으로 건립되었던 대로사

 

원래 이 강한사는 대로사였다. 정조대왕이 세종의 능인 영릉과, 효종의 능인 녕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양행 등에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름을 '대로사'라고 내려주었으나, 고종 10년인 1873년 10월에 지금의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강한루의 이름도 이때 같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가을이 깊었을 때 강한루는 주변의 은행나무들과 어울려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찾아갔으나, 멀리서 보니 은행나무에 잎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허망한 생각에 그저 돌아갈까 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그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잎들이 모두 마당에 쌓여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은행잎이 달렸을 때보다 더 아름답다. 강한루 주변이 온통 노랗다. 마당, 담장, 지붕, 뒤뜰,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다. 모두가 다 노랗다. 그저 강한루를 노랑 물을 들인 듯하다.

 

 

 

가을의 장관을 기억해 내다

 

가을이 되면 강한루가 아름답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정경을 보았기 때문인가 보다. 무엇이 이보다 아름다울 것인가? 노랑 물을 들이고 남한강을 굽어보는 강한루. 강한루를 찾아본지 몇 번 만에 처음으로 보는 장관이다. 그래서 한곳을 여러 번, 그것도 계절마다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지난 가을 강한루에 올라, 그 빛에 취해 세월을 잊는다.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가을 날 강한루를 보지 않았거든 남한강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만큼 온통 노랑 물을 이고 서 있는 강한루이다. 올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 또한 이 노랑물감 때문이다. 어디를 만져도 손끝에 노랑물이 들 것 같은 곳이다. 그 가을이 기다려진다.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황후가 태어날 만한 기가 응집된 곳

 

명성왕후 생가를 돌아보다가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생가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행랑채와 곳간, 측간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솟을대문 안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중문에 연결되어 대청과 방으로 연결된다. 헛간을 두고 꺾여 중문채를 두었다. 중문과 사랑채, 중문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배치가 되었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 곳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안채와 중문채 사이에 일각문을 두어 별당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명성황후 생가를 출입구는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중문 곁에 붙은 사랑채의 마루가 된다. 일직선상에 놓인 대청은 솟을대문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이 바람을 막는 것을 피해, 솟을대문과 마루를 일직선상에 놓아 바람이 맞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으로 연결이 되며 마루에 안으로 문을 내어 바람이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문은 사랑채의 마루에 붙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나 있다. 이 중문 안에 방과 헛간은 청지기가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과 안방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중문을 들어가 방과 헛간, 부엌을 지난 후 ㄱ 자로 꺾여 있으며 대청과 건넌방, 곳간으로 마련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건넌방이다.

 

 

대청을 지난 건넌방은 안채의 대청보다 높은 마루가 앞에 있다. 그리고 그 마루 밑에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이 건넌방은 솟을대문과 샤랑채의 마루, 그리고 건넌방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바로 이 기가 모이도록 지은 집안의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좁은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기능성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랑채와 중문채를 이어서 구성한 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반가의 집과 같이 집을 띄엄띄엄 지은 것이 아니고, 오밀조밀하니 붙여지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평지와 작은 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편에 있는 구릉에 막히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형태의 집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여유를 보이는 별당채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이 이어지는 곳에 일각문을 통해 별당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별당채는 명성황후가 8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별당채는 안채와 사랑채보다도 넓은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을 드나드는 문은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에 연결한 일각문과,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있다.

 

그런데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장에 연결된 일각문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다. 별당채는 안채보다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그런데 행랑채의 끝에 있는 초가로 만들어진 측간 곁에 별당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내었다는 것은, 우리 전통가옥의 구조상 어긋난다는 생각이다.

 

 

 

별당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이 별당채도 1995년 복원이 되었다. 별당채는 매우 간결하게 꾸며져 있다. 별당채는 정면 세 칸으로 좌측의 한 칸은 방으로, 우측의 두 칸은 대청으로 꾸몄다. 방과 대청의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의 문은 들어 올리게 되어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추운 계절에는 문을 닫아 보온을 하였다. 대청의 뒤는 판자문으로 막았는데, 대청 끝 우측 벽을 창호를 내어 멋을 더했다. 어린 소녀가 이곳에서 자라, 한 나라를 뒤흔들만한 역사의 중심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굴뚝이 없는 거북등 연도와 부엌의 비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이상한 점이 있다. 연도는 있는데 굴뚝이 없다.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굴뚝이 없다. 대신 거북이가 웅크리고 앉은 듯 한 연도가 있다. 안채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 집은 굴뚝을 세우지 않고 연도를 뺀 듯하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우연히 이 집을 복원할 때 일을 맡아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복원을 할 때 안채의 부엌바닥을 조금 고쳤다는 것이다. 어째 옛 모습 그대로였다면 조금은 더 깊어야 할 부엌바닥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엌바닥은 조개무덤이 생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조개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바뀐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복이라고 하셨다. 많은 집들이 보수를 하면서 이런 조개무덤이 사라졌다.

 

 

부엌이 깊어야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방에 불을 때고 음식을 조리하려면 부뚜막이 있어야 하고, 그 부뚜막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방을 데우게 만든다. 그러려면 부엌의 아궁이가 깊어야 불길이 위로 잘 솟아 방이 빨리 뜨듯해진다. 아마 바닥 정리를 하면서 조금 돋은 듯 하다. 고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옥의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다.

여주읍에서 점동면으로 나가는 도로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한 기 서 있다. <처리선돌>이라고 쓴 안내판에는, 안내판에서 30m 근처에 선돌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콘크리트 회사의 축대 밑에 서 있어, 선돌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30m 이내에 선돌 비슷한 것도 발견을 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공장의 축대 밑이고, 그곳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안내판에 적힌 선돌이 그 공장 안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문화재

몇 번 주위를 돌아보다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공장 안은 콘크리트 공장답게 주변에 제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안쪽에 돌로 축대를 쌓은 곳이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선돌이 보인다. 이렇게 선돌이 있으면 안내판에 공장안이라고 표기를 하든지, 아니면 축대에서 외부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아무런 설명도 없이 30m 표시만 있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주군 점동면 처리 88 - 6에 소재하는 이 선돌은 경기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선돌은 높이가 2.1m에 넓이는 1.35m 이다. 돌의 두께는 30cm 정도로 직사각형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돌은 위 부분을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문화재

‘입석(立石)’이라고 하는 이 선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선돌은 고인돌과는 달리 근대화가 되는 과정이나, 도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돌이 왜 세워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거나, 경계표시, 권위의 상징 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리선돌이 서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그 앞에 청미천이 흐른다. 이곳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아마 마을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리 선돌 앞에는 길게 누운 돌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 같이 세운 것이 아니고, 후에 갖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선돌의 앞에 누운 돌은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처리의 선돌은 풍년을 구가하는 거석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마을의 신앙물로 추정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작은 문화재 하나라도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문화재의 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가나, 논밭 아무 곳이나 서 있는 것보다 관리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선돌을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안내판에서 바로 들어가는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콘크리트 공장 안에 갇힌 선돌의 바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6호 김영구 가옥은, 조선 영조 29년인 1753년에 지어졌다. 이 김영구 가옥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김영구 옹이 40여년 전에 구입을 하여 살고 있다. 원래는 풍양 조씨들이 살고 있던 집으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석우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김영구 가옥은 세 번째나 방문을 했다. 김영구 가옥은 볼수록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집이다. 마치 철옹성 같다고나 할까?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으로 구성된 본채는 앞에 누마루로 달아 만든 누정이 달린 시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서쪽에 붙여 대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길게 ㅡ 자로 늘어선 안채와, 양편에 날개채를 달았다. 안채의 지붕이 높여 날개채와 구분을 한 것도 이집의 재미있는 모습이다.


철저하게 안채 출입이 통제된 가옥

날개채에는 양편 모두 광을 달았고, 서쪽 날개채는 부엌과 연이어져 있다. 동쪽의 날개채의 끝은 일각문과 연결이 되어 사랑채와 연결되고, 서쪽의 대문은 사랑채와 날개채를 연결하고 있다. 결국 두 곳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50년 전만 해도 마을사람 반도 이 집을 드나들 수가 없었다'는 김영구옹의 설명대로 이 집은 어느 누구도 안채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집이었다. 그만큼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이 되어 있다. 경기지방의 보기 드문 가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 집은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온 집이여"

집을 여기저기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집 주인인 김영구옹이 말씀을 하신다.



"여기 이 집은 신문 방송에서 많이 촬영해갔어. 이집에서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왔거든."
"어르신은 어떻게 이 집에 살게 되셨어요?"
"우리 선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는데, 이 집이 판다고 나왔어. 나도 자식들을 키우고 있으니 이집을 사면 아이들이 잘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자녀분들은 다들 잘되셨나요?"
"탈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들 살고 있으니 그 정도면 됐지."

김영구 가옥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이 집에서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왔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을중앙에 조금 높게 앉아있는 이 집은, 얼핏 보기에도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김영구옹의 말씀대로 이 집에서 그렇게 많은 정승 판서가 나왔을까? 좀 더 세세하게 이 집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집을 지은 석재나 기둥, 처마 등을 보면 이 집은 지방의 공인이 지은 집이 아니다. 석재는 모두 잘 다듬어져 있다, 계단을 쌓은 석재나 주추로 사용한 석재들이 모두 일반적인 자연석을 주추로 사용을 한 것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석재와 누마루를 놓은 형태. 그리고 처마 등을 살펴보면 한양에서 집을 짓던 경장(京匠) 등을 데려다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해시계가 왜 여기 있을까?

김영구 가옥의 안채로 들어가면 사랑채 뒤에 붙은 높은 굴뚝이 있다. 그 굴뚝 앞에는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고, 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해시계가 있다. 별 장식이 없이 화강암으로 만든 이 해시계는 높이 0.76m에, 위 평면의 넓이는 25cm 정도가 된다. 가운데는 깊이 1cm 정도의 구멍 흔적이 있다. 아마 이곳에 나무 같은 것을 꽂아, 태양의 일주운동에 따라 그 그림자로 시간을 쟀을 것이다.

이 해시계에는 명문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가 없다. 이 해시계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조선 세종 16년인 1434년 세종의 명에 의해 장영실이 해시계를 만들어, 흠경각에 처음으로 설치를 하였다. 그리고 서울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를 했다고 하는데, 이 집에 있는 해시계는 언제 제작된 것일까? 명문이 없어 제작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이 집을 지었다는 조석우는 고종 때 판서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해시계도 당시에 이집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랑채에 달아낸 누정이 압권

김영구 가옥의 사랑채 서쪽에는 누정이 붙어있다. 마루로 놓인 이 누정은 김영구 가옥의 모습을 뛰어나게 만든다. 누정은 밑을 잘 다듬은 돌로 주추를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정자는 삼면이 모두 들창으로 되어있으며, ㅡ 자로 되어있는 사랑채에서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그 누구도 집안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도록 구조가 되어있다. 대문을 열어놓아도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든 것도 이집의 특징이다. 대문 안은 바로 서쪽날개채의 벽이기 때문이다. 대문을 열어도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날개채의 벽이 바람을 막는 방풍의 역할도 하고 있다. 둘러볼수록 빠져드는 집이다.

김영구 가옥의 또 하나 특징은 바로 작은 사랑채다. 사랑채와 동편 날개채가 붙은 일각문 옆으로 사랑채와 같이 ㅡ 자로 붙어있는 작은 사랑채. 이곳도 방과 마루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작은 사랑채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사람들을 접대하기도 하고, 이곳에서 손들이 묵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사랑채도 일각문을 열어야 안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어, 결국 이집은 밖에서 외부인들이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행랑채 앞에 솟을대문이 있었다고 하는 여주 김영구 가옥. 그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안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열린 대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집 하나하나에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충격이였습니다. 20여 년간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나름 꽤 많이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주 고달사지에서 만난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탑을 보는 순간, 내 20년간의 답사가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적기 위해 오랫만에 집을 찾아들었습니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늘 시간에 쫒긴 것이 화근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더 꼼꼼히 답사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정말 마음을 놓고 문화재를 만나고, 글을 쓸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입적한 고승이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번지 혜목산 고달사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이 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고달사지 절터 안에 있는 석조 유물들 가운데, 탑비의 귀부, 이수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몸돌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귀꽃을 이중으로 새긴 지붕돌

탑의 맨 위에 있는 상륜부인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약간 위로 향하고 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끝에는 꽃장식인 귀꽃을 큼지막하게 새겨 넣어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 위에도 지붕돌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인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놓여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탑신은 4면에는 문 모양을 새겨 넣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구름 위에 올려놓은 사천왕상은 힘이 있게 조각이 되어, 탑 안에 있는 복장물을 지키는 듯하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 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하지만,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화려한 기단부의 조각이 뛰어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인 앙화가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는 용과 구름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중대석에는 윗부분에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한 조각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들이. 그 사이에 가득 새겨 넣은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형상이다. 위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조각수법이다.



기단부에 들어있는 귀부, 무지의 극치인 나

그동안 전국을 돌면서 숱한 문화재와 만났다. 그렇게 세월이 한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문화재를 보는 안목도 조금은 높아진 듯도 하다. 스스로도 문화재에 대해 ‘수박 겉핥기’는 조금 지났다고 생각을 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우리 문화재에 미친 사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는 것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종대사탑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것이 보인다. 한 면에 세 마리의 용머리가 보이는데, 중간에 용머리가 크고 한편으로 돌려져 있다. 벌써 몇 번인가 본 원종대사탑이다. 한 번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만큼 부끄럽다. 그 가운데 목을 비튼 용두는 바로 귀부의 머리였던 것이다.



그 용머리 밑으로는 거북의 등이 조각이 되어있고, 양편으로는 앞발이 힘차게 표현이 되어있다. 한 마디로 놀라움이다. 왜 아직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바로 귀부의 앞부분이 조각이 되어있다. 탑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곳에는 귀부의 뒷부분인 꼬리와 귀갑을 선명하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이다. 탑의 기단부에 귀부를 넣어 놓은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 몇 번을 보았으면서도 이런 대단한 조각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니. 그동안 나름대로 문화재를 보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문화재의 구석구석을 다시 살펴야겠다. 20년간의 답사가 이렇게 부끄럽게 무지를 보이다니. 하지만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더 늦지는 않았으니.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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