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만나는 여주 5일장은 어떤 모습일까? 30일(토) 날이 저물고 난 뒤 5일장을 찾아 나섰다. 한편에서는 파장 때라 짐을 챙기고 있는데, 아직도 장거리는 부산하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것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5일장 거리를 누비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손에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5일장에 나와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한 것 같다.

 

'5일장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태국에서 왔다는 한 이주노동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다가가보니 닭발 볶음이다. 그것을 맛있게도 먹는다.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먹는 모습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저 잘해요"

"5일장은 자주 나와요?"

"자주는 못 나와요. 일 끝나고 이렇게 밤에 나와요"

"장에 나오면 주로 무엇을 하세요?"

"친구 만나고요. 맛있는 것 사먹고요. 그리고 구경도 하고요. 정말 좋아요. 5일장"

 

이주노동자들이니 당연히 일을 마치고 나올 것이다. 한국에 온지 2년째라는 이분. 우리말도 꽤 잘 하신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5일장이 최고라는 것이다.

 

5일장의 밤 거리에 모여있는 이주노동자들. 이제는 이들을 5일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는 곳

 

돼지껍질 요리를 하는 집을 찾아들었다. 이곳에도 역시 몇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5일장 어디를 가도 이주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끼어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 먼 타국으로 온 사람들. 돼지껍질 볶음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들은 이제는 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것 좋아하나 봐요"

"맛있어요"

"소주도 잘 드시네요"

"좋아요"

 

아직은 우리말이 서툰 사람이다. 나이가 25살이라고 하는 필리핀에서 왔다는 이주노동자. 그저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날이 5일장 날이라는 것이다. 이날 나오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어, 이곳이 흡사 고향의 장 같다고 한다.

 

"저 사람들 장날마다 나와요"

"많이들 오시나 보죠"

"장날이면 우리 집에만 한 20여명 정도 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5일장이 저 사람들한테는 고향과 같은가 봐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 멀리 온 사람들. 그들에게 5일장은 아마도 고향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제일 좋은 곳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많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가 밀린 이야기도 하고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니.

 

돼지껍질과 닭발을 파는 가게. 그 안에도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주노동자들이 즐겨 찾고 있다.

5일장은 또 다른 고향

 

5일장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은 분위기가 다르다. 오래 전 잊었던 친구를 만나는 그런 느낌이다. 돼지껍질과 닭발, 그리고 막창 모듬을 앞에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래서 5일장은 늘 정겨운 곳인가 보다.

 

5일장에서 만난 많은 이주노동자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5일장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결국 그들도 같은 사람들이기에, 우리 5일장이 또 다른 고향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5일장의 분위기에 녹아든다. 우리가 하는 그대로를 하고 있다. 그래서 5일장에서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은 남 같지가 않다.

 

"아줌마 돼지껍데기 한 접시 더요"

 

5일장의 인심은 아직도 넉넉하다. 돼지껍질과 닭발, 그리고 막창 등을 놓고 막걸리를 한 잔 마시면, 그 무엇도 부럽지가 않다.

주인을 소리쳐 부르는 모습까지 우리를 닮았다. 피부색깔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다를 뿐. 5일장은 그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가 보다. 아니 그들 스스로가 5일장의 구성원이 되어 가는가 보다. 그래서 5일장은 늘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나온 5일장은, 어느새 파장이 되어 캄캄하게 변해 있다.

여주 장에 가면 꼭 들려야 할 집이 있다. 5일만에 서는 여주 5일장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5일장 에서는 두 번째로 큰 장이다. 여주는 5일과 10일이 장날이다. 5일장은 어떤 것보다도 먹거리가 많다는 것이 즐거움이다. 장을 돌다가 보면 하루 종일 먹어도 먹을 것이 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5일장은 풍성한 곳이다.  

 

그래도 5일장은 생명력이 있어

 

대목이 되면 5일장은 온통 난리 법석이다. 아마도 제수 준비를 하느라 나온 사람들이다. 5일장은 아무래도 대형 장  보다도 30% 정도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 여주장은 서울 등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만큼 많은 물건과 좋은 것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여주장에 나갈 때마다 뵙는 노점상 할머니는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매번 장에 나갈 때마다 뵙는 할머니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장에 나오셨다. 이것저것 저렇게 챙겨서 나오시려면 힘도 드셨을 텐데. 사람들은 그래도 평소에 30% 정도의 장꾼들이 나온 5일장을 찾는다. 먼 길을 걸어서 나오셨다는 한 분은 '그래도 5일장이라 이렇게 장이 서지'라고 하신다. 끈질긴 5일장의 생명력이다. 비가 오고 날이 아무리 추워도, 5일장은 거르는 법이 없단다.


 

전 한 장에 1,000원이다.

 

2,000원의 행복,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 한잔

 

5일장을 찾으면 가끔 들르는 집이 있다. 빈대떡도 있고, 돼지껍데기 볶음도 있다. 내가 이 집을 찾는 이유는 2,000원만 가지면 5일장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전이나 메밀전 한 장에 단돈 1000원, 그리고 막걸리 한 잔에 1,000원이다. 2,000원만 가지면 허기도 면할 수 있고, 장 분위기를 혼자 다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싸게 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5일장이다.

 

"많이 파셨어요?"

"손님이 없어서 팔지도 못했어."

"그런데 빈대떡 한 장에 1000원 받고, 막걸리 한잔에 1000원 받아도 남는 것이 있나요"

"남기는 하겠지. 그런 것은 계산 안 해보았어."

"그렇게 싸게 파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어르신들 때문이지. 요즈음은 장에 나와도 재미가 없다고들 하시거든. 이렇게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 한잔이면 속이 든든하시다는데. 그 어르신들 때문에 이것은 빠트릴 수가 없어. 이게 다 정이지."

 


 양은 대접에 가득 떠 막걸리가 한 잔에 1,000원이다.

 

가족들과 함께 장에서 식당을 하시는 이종진옹(73세). 연세가 적지 않으신 분이 꼭 '어르신들'이라고 하신다. 평소에는 식당을 하시지만, 장날이 되면 식당 앞에 난전을 펴시고, 천 원짜리 빈대떡과 천 원짜리 막걸리를 파신다. 2000원의 행복을 파시는 셈이다. 늘 해오시던 것이라 오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혹 한 분이라도 장에 나오셨다면 막걸리 한잔 드시러 오셨는데, 드실 수가 없으면 서운하실까봐 오늘도 난장을 펴셨단다.

 

5일장의 훈훈한 인정이요, 끈질긴 생명력이다. 5일장 안에는 오늘따라 장사치들의 고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하나라도 팔고 들어가야지'라는 생선가게 아저씨의 외침소리다.

5일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끌벅적 한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된 5일장이 장사꾼 10여 명에, 찾는 사람도 한가하다고 하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런 5일장인 여주 대신장을 찾아갔다. 4일과 9일에 서는 대신장은 대신면사무소 앞에 선다. 고작 장사꾼 몇 사람과, 장을 찾는 이 몇 사람이 장터 안에 있는 모두이다. 다 합해보아야 20명 남짓하다. 5일장의 한가한 모습이다.

 

한 때 중단했던 대신장

 

장이라고 돌아볼 것도 없다.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장에서 만난 이창호(70·여주군 대신면 율촌1리) 어르신은 대신장이 한 때 중단 되었었다고 하신다.

 


 

"대신장은 중단 되었다가 다시 시작한 지가 한 60년 되었네. 내가 소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몇 년 장이 서지 않다가 다시 시작했지."

"그 때는 지금보다 장이 컸나요?"

"그 때도 지금보다 별로 크지 않았지. 그래도 5일장이라 살만한 것들은 다 나와."

 

장을 둘러보니 젓갈 등 찬을 파는 노점, 과일, 건어물, 옷, 채소, 양말 등을 파는 노점, 생선, 이불, 그리고 한 쪽에 뻥튀기가 다다. 5일장치고는 정말 규모가 작다.

 

"항상 이 정도였나요?"

"백중장은 꽤 크게 서지. 씨름판을 벌이기도 하니까. 그 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장사하시는 분들은 항상 오시는 분들인가요?"

"그럼, 이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지. 양평, 양수리, 지평 등에 사시고."

 

장꾼들의 사는 곳까지 훤히 꿰고 계시다. 그만큼 작은 장이다. 한창 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한 편에서 '뻥'소리와 함께 자욱한 김이 일어난다.

 

 

대를 이은 뻥튀기 아저씨

 

5일장에서 그래도 인기가 최고인 것은 뻥튀기다. 뻥튀기를 하는 장창근(49·양평군 지평면)씨는 대를 이어서 5일장마다 다니며 뻥튀기를 한단다. 딴 곳은 한가한데 비해, 뻥튀기를 하는 곳만 사람들이 늘어선다. 쌀이며 누룽지를 갖고 와 뻥튀기를 해가려는 것이다. 간식으로는 역시 튀밥이 최고라고 한다.

 

"얼마나 뻥튀기를 하셨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노는 날과 방학을 하면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했어요. 2대 째 하고 있죠."

"꽤 오래 하셨겠네요?"

"벌써 한 30년 넘게 했어요."

 

깡통에는 쌀과 누룽지를 담은 것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다. 뻥튀기 기계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곳 대신장을 장날마다 오래 다니다가 보니, 주변 사람들과도 흉허물이 없이 지낸다. 맞은편에서 젓갈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한 마디 거든다. 장창근씨의 형님도 뻥튀기를 하는데, TV에도 나왔다는 것이다.


 

대를 이은 뻥튀기, 그래도 자랑스럽다

 

많이 튀길 때는 하루에 100번 정도 뻥튀기를 했다고도 한다. 그러던 것이 점차 줄었다가 한 4~5년 전부터 다시 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사 먹이는 과자가 믿음이 가질 않는다는 어머니들이, 튀밥으로 간식을 마련하기 때문이란다.

 

"기계가 오래 묵은 것 같아요."

"아버님이 쓰시던 것이죠. 이 기계는 처음 나온 것이라는데, 쇠가 지금 것들 하고는 달라요. 단단하고 좋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다는 것이 좋기도 하고요. 골동품이죠 이제는."

"장마다 매번 나오시나요?"

"아닙니다. 봄, 가을, 겨울에는 장에 나오고, 여름에는 덥기도 해서 건축 일을 하고 다니죠. 여름에는 뻥튀기도 잘 안되고요."

"몇 분에 한 번씩 튀기나요?"

"처음에 기계가 열을 받지 않으면 10분 정도 걸리고요. 그 다음에는 한 7~8분 정도 돌려요. 요즘에는 하루에 한 30~40번 튀기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뻥튀기를 하면서 5일장을 다니지만, 자랑스럽다고 한다. 주로 여주 대신장, 양평 지평장과 용문장을 다니면서 뻥튀기를 한다는 뻥튀기 아저씨 장창근씨. 장을 찾는 사람들은 참 근면한 사람이라고 칭찬들을 한다. 5일장마다 뻥튀기를 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뻥"하고 자욱한 흰 김을 내면서 튀밥이 나온다.

 

"저 사람은 남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지. 저렇게 튀겨서 부풀러 주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돈도 저 기계에 넣고 한번 튀겨보았으면 좋겠어."

 

너털웃음을 웃는 어르신들의 웃음이 있어, 더욱 좋은 5일장이다. 

여주읍에서 신륵사 입구를 지나 북내면 소재지를 지나면 양평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구불거리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금당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석우리 선돌>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장암리 방향으로 600m 정도를 들어가면, 양어장 안에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그 안쪽에 서 있는 것이 경기도 기념물 제 132호인 석우리 선돌이다.

 


 

석우리 선돌이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석우리는 1895년까지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에 속해 있었다. 1895년 여주군에 편입이 되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통폐합에 따라 석장, 입석, 장우동을 병합하여 석우리라 하였다.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행정통폐합은, 우리나라 마을의 고유한 이름을 모두 잊어버리고 뜻도 없는 마을이름으로 바뀐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지금도 안타깝다.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선돌이 서 있는 근처의 마을이름이 북쪽 마을은 '담모랭이' 라 하고, 남쪽 마을은 '돌담'이라 부르는 것도 이 선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 경계 표시로 선돌을 세우면 주변을 돌담으로 쌓기 때문에, 그 돌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담모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돌담은 아마 남쪽마을이 담을 끼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석우리 선돌은 양어장이 길 쪽을 제외한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선돌이 선 곳은 큰 나무들이 서 있으며, 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선돌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앞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이 흐르고 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다.


예전에 이 선돌의 기능이 어떠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던 석우리 선돌. 대개는 경계표시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신앙적 거석문화로 볼 수도 있다. 단순히 경계표시로만 세웠다면, 마을에서 굳이 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석우리 선돌의 주변에 있었다는 지석묘를 보아도,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물의 한 형태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여름철 주변 숲이 무성할 때 다시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보다는 좀 더 운치 있는 모습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주에 있는 사적 제195호 영릉은 조선 제17대 효종대왕(1619 ~ 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효종대왕릉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 건원릉(현 구리시)의 서쪽에 조성하고, 능호를 익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능 앞에는 제례를 올리는 준비를 하는 재실을 건립하였다. 이후 현종 14년인 1673년 석물에 틈이 생겨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재실이란 제관의 휴식을 위한 공간과 제수의 장만 및 제기 등을 보관하고,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효종대왕의 재실은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왕릉의 재실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멸실되었는데,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이 재실은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대표적인 조선시대 재실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담벼락 속에 들어간 굴뚝, 최고의 걸작품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현재 효종대왕릉 정문 바로 안에 자리하고 있다. 능으로 오르는 길  우측에 자리한 재실은 주변을 모두 담장을 둘렀다. 솟을대문의 양 옆으로 자리를 한 대문채는 방과 부엌, 그리고 대청 등으로 꾸며졌다. 들어가면서 좌측의 대문채는 끝에 대청과 방을 드린 날개채를 두고 있고, 그 뒤편에 다시 건물을 덧붙여 방과 헛간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대문채에는 방은 있는데,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굴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대문채는 바깥 담장을 벽으로 쓰고 있는데, 이 담장에 보면 중간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사이를 띄운 기와 몇 장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구멍은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 얼핏 보면 바람이 통하게 하는 바람구멍과 같이 생겼다. 그 구멍이 있는 뒤편으로는 모두 방을 드렸다. 이 구멍은 무엇일까?

 

이 담장 중간에 네모나게 만든 구멍이 바로 굴뚝이다. 부엌에서 불을 떼면 방안에 고래를 돌아 온 연기가, 바로 담장 안에 있는 연도를 통해 이 구멍으로 빠지게 되어있다. 최고의 건물에 가장 아름다운 굴뚝의 미학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예술적 감각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담장 안에 숨은 굴뚝.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아름다움마저 숨기는 이러한 건축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돌로 쌓은 외곽 담장이 아름다운 효종대왕릉의 재실


 

 

 

외곽 담벼락에 난 이 구멍들이 바로 연기가 빠지는 굴뚝이다. 이 담방 안에 연도가 숨어있다.

 

 

 

 

 

 

 

 

 

 

 

 

재실 외벽의 아름다움

 

현재 보물 제153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효종대왕릉의 재실은 제관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인 재실과 행랑채를 겸한 대문채, 그리고 제기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와 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등이 있다. 재실의 경내에는 우물과 천연기념물 제459호인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과 고목 등이 있다.

 

이 재실에서 제관들이 쉬는 공간은 솟을대문을 들어선 후, 정면의 일각문을 지나 서 있는 재실이다. 그런데 이 재실의 심벽은 처마 있는 곳까지 쌓아올렸다. 이런 형태의 모습은 어느 전각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다. 이 건물의 양편 외벽만을 이렇게 꾸며 놓아, 이곳의 특별함이 눈에 띤다. 효종대왕릉의 재실이 건축학으로 보아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하나하나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재실 외벽의 심벽. 처마있는 곳까지 전체를 다 꾸며서 특별한 건물임을 알려준다.

 

 

 

 

안양청의 건축미학 돋보여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아 올린 안향청. 제사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던 건물이라고 한다. 이 안양청은 앞에서 바라보면 좌우에 방문과 같은 여닫이 창호가 있고, 중간에는 대청문과 같이 꾸며졌다. 그런데 정작 방은 우측에 문 안쪽이 방이다. 그것도 전체적으로 다 방을 꾸민 것이 아니고, 반을 나누어 앞쪽에는 방이 있고, 뒤편으로는 마루를 깔았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모두 마루를 깔았다. 결국 중앙에 둔 대청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어 있는 방과 같은 창호는 우측만이 방이 된다. 더욱 이 방의 마루를 향한 창호는 특이한 문양으로 꾸며졌다. 이 창호는 '교실팔각불발기'란 방법으로 중앙을 꾸미고, 나머지는 격자살로 조형미를 돋보이게 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 효종대왕릉의 재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담장 안에 둔 굴뚝과 위까지 끌어올린 심벽, 그리고 안향청의 독특한 건축방법 등. 이 재실의 아름다움은 그 어느 고택보다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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