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천 발원지 지정 조건 갖추지 못해

 

강이나 하천의 발원지(發源地)는 어느 곳이나 지정을 할 때 몇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발원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반드시 물이 솟는 용천수라야 한다. 흐르는 물이 고이고나 주변의 물이 고이는 현상으로 물이 모이는 곳은 발원지가 될 수 없다. 발원지란 발 그대로 물이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1365일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른다고 하면 그런 샘은 발원지가 될 수 없다. 한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 옆으로는 커다란 물줄기가 위에서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곳을 발원지로 정하지 않고 검룡소로 정한 것은, 그 물이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셋째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먼 곳을 지정한다. 하기에 발원지의 지정 조건은 물이 땅에서 솟는 용천수며, 일 년 동안 마르지 않는 곳을 발원지 지정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삼게 된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금강의 발원지 뜸봉샘, 낙동강의 발원이 황지,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등은 모두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원천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20133월 수원시에서는 일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 광교산 절터약수터를 놓아두고, 통신대방향으로 오르는 광교산의 고도 425m, 위도(3720‘ 57“ N), 경도(1271’ 1” E)골짜기를 수원천 발원지로 지정을 했다. 수원하천유역 네트워크와 전문가들이 이곳을 수원천 발원지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수원천 발원지 표지판을 세우던 날도 이곳은 발원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를 했다. 발원지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 한 방을 솟아오르지 않아 기포조차 생겨나지 않는 곳을, 어떻게 이곳에서 물이 솟는 발원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수원시는 절터약수터를 놓아두고 이곳을 발원지로 지정을 했다.

 

 

 

 

발원지에 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아

 

24일 오후, 수원천 발원지를 찾아 광교산을 올랐다. 지난주에 연이어 비가 오는 바람에 개울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 정도 물이 흐르면 발원지에도 물이 고여 흐르겠지 하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올라 발원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일까? 발원지 인근에는 흐르는 물도 보이지 않고, 안내판 아래는 물 한 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발원지라는 안내판이 무색하다.

 

, 쌓인 낙엽 안에 물길이라도 있을까 싶어 낙엽을 해쳐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물에 젖어 흙만 축축할 뿐 고여 있는 물조차 없다. 그런데도 이곳을 발원지라고 우길 것인가? 발원지의 지정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발원지. 수원시는 이곳에 세운 발원지 안내판을 절터약수터로 옮기고, 발원지 지정을 해제해야 한다. 물이 없는 발원지는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궐리사 은행나무가 주는 교훈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인 오산 궐리사는 오산시 궐1147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사당이다. 궐리사는 공서린(孔瑞麟) 선생의 사당으로,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서린 선생은 당시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대왕이 화산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다. 또한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궐리사(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수세가 당당한 궐리사 은행나무

 

무덥던 날 찾아간 궐리사.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하늘 높게 솟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보기에도 당당한 것이 나무의 생김새로 보아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다. 공서린 선생이 식재했다고 하는 이 은행나무는, 공서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 36년인 1541년에 함께 고사했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심고, 이곳에 북을 매달아 놓고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공서린 선생. 그가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나 옛 은행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일 년에 수 길씩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죽고 살기를 반복한 것이다.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은행나무

 

날이 무덥다. 잠시 나무 옆에 마련한 의자에 걸터앉는다. 땀을 닦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바람 한 점이 불어온다. 이런 바람 한 점도 고마운데, 은행나무 그늘이야 더욱 고맙지 아니한가? 잠시 은행나무의 푸른 잎들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은행나무를 보면서 인간이 참 간사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잠시의 더위를 참지 못해 나무그늘로 찾아들고, 그리고 바람 한 점과 그늘에게 다시 감사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표리부동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사에 감사를 한 뒤에도 언젠가는 돌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보다 못한 인간들이 세상천지에 깔려 있는 모양이다.

 

요즈음 세 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로 마주하고 웃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엔가 얼굴을 붉히고 으르렁댄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가차 없이 내민 손도 거절해버린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다. 주변에 들리는 이야기마다 한심한 사람들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궐리사 은행나무는 달랐다. 공사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고사했다. 말 못하는 한 그루 나무에 불과하지만, 선생에 대한 예의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후 다시 소생을 했다. 그 나무는 지금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죽고 살기를 반복했지만 나무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궐리사 은행나무 옆 비문에 적혀있는 글을 읽으면서 괜히 낯이 뜨거워진다. 부끄러운 것이다. 나무보다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을 폄훼하고 말을 만들기 전에, 먼저 궐리사 은행나무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곳에 가서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통에는 위험을 알려주는 느티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신령한 나무들이 상당히 많다. 짧게는 500, 갈게는 천년 이상을 한 자리에 서 있는 고목(古木)들이다. 나무마다 전하는 설화도 다양해서 어느 나무는 나무껍질이 뱀 허물을 닮았는데, 그 나무껍질을 벗긴 사람이 온 몸에 마치 비늘처럼 이상한 피부병이 걸렸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천년 이상이 된 은행나무 가지를 주어다가 땐 사람이 벌을 받기도 했단다. 대개 지역마다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 혹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들은 대개 이런 설화 한 마디씩은 꼭 전하는 법이다. 하기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나무들을 신령한 나무로 여기고 나무를 해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정성을 다해 섬기는 마을도 있다.

 

 

 

 

수령 530년의 단오공원 느티나무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1047-3에는 수령 530년이 지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영통 단오 어린이 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이 느티나무는, 19821015일 수원-11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넓은 차도를 지나면서 바라다 보이는 이 나무는 멀리서보아도 그 나무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이다.

 

가슴높이의 둘레는 5.1m에 높이가 19.3m에 달하는 이 느티나무는 지역에서 자랑을 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매년 단오 때를 맞아 이 나무 앞에서는 단오청명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 느티나무에서 예전에는 마을굿을 열기도 했다고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도당굿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 선생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이 나무는 모양이 좋고 잘 자라고 있다. 가끔은 이렇게 생육이 좋은 나무가 왜 도 지정 기념물이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받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때가 있다. 이렇게 잘 생긴 나무를 보기도 힘들지만, 이 나무보다 못한 나무들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느티나무가 소리를 내지 않았다.

 

16일 오후 찾아간 영통 느티나무. 이 나무는 위험을 알려주는 나무라고 한다. 예로부터 이 느티나무는 전쟁처럼 나라에 큰 위험이 닥치면 구렁이 울음소리를 내어 위급함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가 구렁이 울음소리를 내면 사전에 미리 방비를 했기 때문에,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할 때 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 서까래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이 나무 어디를 보아도 가지를 자른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나무가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소리를 냈다고 하니, 궁금해서 찾아간 것이다. 무슨 이야기라도 들을 수가 있을까 해서가 아니다.

 

 

그런 나무라면 요즈음처럼 힘든 시기에 나무가 이상 징후라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느티나무는 아무런 이상도 없이 굳건히 서 있다. 나무주변이 어린이 공원이기 때문에 찾아갈 때마다 많은 어린이들과 부모님들을 볼 수 있었는데 조용한 것이 사람들이 보이질 않을 뿐이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으니 혹 이 나무에서 무슨 소리라도 났는지 알아볼 길이 없다. 길 건너 상가에 가서 저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어요?”라고 물으니, 나를 정신병자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을 보니 나무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인 듯하다. 수원은 메르스 방역이 워낙 잘 된 곳이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위험을 알려주는 느티나무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것은, 수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닐까? 괜히 멋쩍게 웃으면 뒤돌아서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른.

 

 

노송지대 도로 양편 말끔히 정리해야

 

노송지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은 소나무 길이다. 이 노송지대는 수원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품고 있는 곳이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대개가 고사 하고, 현재는 정조대왕 당시에 심은 소나무들은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 삼풍가든 부근에 21,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27일 오후 노송지대로 접어들었다. 번호를 단 소나무 사이에 커다랗게 자란 영산홍이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 어느 나무는 벌써 잎이 무성하게 자라 그 틈으로 꽃 몇 송이가 겨우 보일정도이다. 노송지대에 소나무들도 잎을 촘촘히 달고 있는 모습으로 서 있어, 이 계절에 소나무의 정취를 느끼며 걷기 좋은 길이다.

 

 

 

 

지난해보다 생육이 좋은 노송지대 소나무들

 

장안구 장안로 368에 소재한 한우마을 앞을 지나 노송지대로 접어들었다. 높다랗게 가지를 뻗고 있는 노송들이 그늘을 만들고 있다. 4월인데도 불구하고 낮의 날씨는 벌써 땀이 흐르게 만든다. 천천히 걸으면서 노송들의 생육상태를 살펴본다. 지난해보다는 잎들도 진한 초록빛을 띠고 있어 안심이 된다.

 

삼풍가든 앞까지 천천히 아름다운 길을 마음껏 즐기며 걷는다. 갑자기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린다. 차도 별로 없고 사람들도 지나지 않는 이 길에서 꼭 저렇게 듣기 싫은 소리를 내야할까? 그 소리에 괜한 짜증이 난다. 꼭 이 거리에서 저렇게 시끄럽게 해야만 할까? 정말 문화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도로변에 보기 흉한 모습이 보인다. 누군가 이곳에서 밭농사를 지었는지 도로 쪽에 칸막이를 해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지저분한 것들이 쌓여있다. 무슨 종이가 붙어있어 길을 건너가보니, 수원시 공원녹지사업소에서 녹지공간 조성 예정지니 시설물 적치를 금지하고 시설물을 신속히 철거하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문화재보호구역 정리 확대해야

 

노송지대는 경기도 지정 기념물이다. 이는 이 지역일대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유산을 말하며, 역사적이나 예술적, 혹은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다.

 

기념물에는 절터, 성곽 등 사적지뿐만 아니라, 경치 좋은 곳과 동물의 서식지와 번식지, 도래지 등이며, 식물과 그 자생지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 외에도 광물, 동굴, 지질, 생물학적 생성물 및 특별한 자연현상 등도 포함한다. 노송지대는 역사적인 소나무들의 식재구역으로 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념물인 노송지대가 주변이 정리가 되지 않아 볼썽사납다. 여기저기 흉하게 널브러진 지저분한 것들이 아름다운 노송 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옥에 티기 되고 있다. 노송지대와 같이 기념물은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또는 특별자치도지사가 문화재보호법 제71조 제1항에 따라 지정한 문화재를 말한다.

 

지정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문화재보호구역의 지정범위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각 시, 도 등 지자체에 위임되어 있으며, 각 지자체는 조례에 의하여 그 지정범위를 달리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노송지대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확대, 정리하여야 한다. 500주의 소나무 중에서 이제 남은 것은 고작 38. 화성과 함께 정조대왕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노송들의 보존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동쪽 해안에 있는 간절곶. 곶이란 내륙이 바다 쪽으로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간절곶이 유명한 것은 새천년을 맞는 200011일 동북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해가 뜬 시간은 오전 73117초였다.

 

부산 광안리를 떠나 해운대를 거쳐 기장을 지나고, 31번 국도를 이용해 도착한 간절곶. 시간은 이미 점심을 지나고 있었다. 정자를 찾아 떠난 길에 정자는 찾지 못하고 대신 간절곶의 등대가 반기는 듯하다. 간절곶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바로 등대다. 등대야 어느 곳이나 있겠지만 그래도 저 등대 자리에서 새천년의 해를 제일 먼저 보았다니,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망우체통에 편지를 쓰다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두기를 좋아하는 우리네로서는 아마 그만한 의미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등대 앞 길 건너 바다 쪽에는 커다란 우체통이 하나 서 있다. 간절곶 소망우체통이란다. 높이가 5m에 무게가 7톤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에 엽서가 준비되어 있어, 그 자리에서 엽서를 써서 우체통 안에 넣으면 매일 오후 1시에 걷어간단다.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에는 거두지를 않지만. 우체통 안을 들여다보니 한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다. 참 좋을 때다. 부럽다. 우리는 자랄 때 저렇게 해보지를 못했으니 더욱 부럽다.

 

바닷가 쪽으로는 소망을 담은 돌무지가 몇 개 서 있고, 옆으로는 조각상들이 보인다. 바다를 향해 팔을 힘차게 내뻗은 남정네며, 새천년의 비상이라고 음각한 비도 보인다. 그 옆 한편에는 남녀가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대느라 부산하다. 그런데 그 앞에 두 딸을 데리고 서 있는 어머니의 상이 있다.

 

 

 

 

설명을 보니 박제상의 처란다. 예전 글을 쓸 때 자주 이름을 올리던 박제상의 처라니. 그럼 여기서 치술령이 얼마나 떨어져 있다는 말인가. 신라의 재상인 박제상은 충신이었다.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의 두 동생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갔는데 박제상이 먼저 고구려에 가서 눌지왕의 동생인 복호를 구해냈다.

 

그 뒤 왜국으로 간 박제상은 미사흔도 구출해 내어 신라로 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탈출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안 왜국의 왕은 박제상에게 신하가 될 것을 강요했지만 박제상은 끝내 거절을 하여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왜국으로 떠난 후 박제상의 처는 두 딸을 데리고 날마다 치술령 위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되고 말았단다. 그 뒤 박제상의 처는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치술령의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다.

 

 

호랑이 꼬리 호미곶에 도착하다

 

간절곶을 돌아보는 사이에 날이 심상치가 않다.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만 같은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찌하랴 만행을 떠난 길이니 여정을 재촉하는 수밖에. 절집은 이미 세 곳을 다녔으니, 정자 하나라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포항으로 올라와 처음 만난 곳이 바로 호랑이 꼬리라는 호미곶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 하여, 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선생은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이며,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 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간절곶을 떠나면서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호미곶에 도착하니 제법 빗방울이 거세졌다. 바람까지 불어 사진을 촬영하기도 힘들다. 포항시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도 2004년에 가장 먼저 해가 뜬 곳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호미곶 광장에는 기념조형물(상생의 손), 성화대, 영원의 불씨함, 채화기 (천년의 눈동자), 캐릭터상품특판장, 공연장, 주차장, 관리소 등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200411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 것을 기념하기 위해 2만 명분의 떡국을 끓이려고 준비한 거대한 가마솥이 있다.

 

 

이왕 왔으니 사진 몇 장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만행에 동행을 한 스님은 비가 오니 아예 차에서 내릴 생각도 안한다. 혼자 우산 하나를 받쳐 들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대지만, 비가 계속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 사진을 찍기가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겨우 사진 몇 장을 담아낸다. 호랑이 꼬리라는 호미곶. 참으로 오랜만에 들려본 곳이다. 그동안 많이도 변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고 서로 내세우는 간절곶과 호미곶. 오늘 여정은 아무래도 이곳에서 접어야만 할 것 같다. 비가 오는 날 정해진 일정을 취소할 때마다 늘 마음만 바쁘다. 정작 바닷가에 정자는 아직 한 곳도 찾아보지를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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