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단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의 성’ 방문

 

정말 모처럼 꿈같은 휴가를 맞이했다. 단 며칠이지만 처음에는 어디 제주도라도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무더위가 계속되자 장소를 바꿔 1박 2일로 다녀올 수 있는 강원도로 향했다. 우선은 그곳에 꽃 필요한 볼일이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의 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화진포의 성은 ‘김일성 별장’으로 유명하다. 잠시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가 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화진포의 성을 찾아간 것은 13일이다. 해수욕장은 징검다리 연휴로 해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정작 바다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하천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다. 커다란 파도가 넘실대면서 해안가로 밀려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들 정도이다.

 

 

금구도 광개토대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징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재임 당시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성을 함락시켰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긴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왕 3년인 304년 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년 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년(장수왕 2년) 9월 29일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파도가 치는 날 찾아간 김일성 별장

 

금구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소나무숲을 걸어 화진포의 성이라는 김일성 별장으로 향했다. 먼 길을 달려 예까지 왔는데 정작 바닷물에 발로 담그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휴일을 맞아 마지막 피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별장으로 몰려들어 북적인다. 맨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진포는 가히 절경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원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이곳 화진포에는 이승만 정 대통령의 별장과 이기붕의 별장도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도 소나무숲이 우거져있지만 김일성 별장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는다. 경치가 떨어지기 때문인 듯하다.

 

모처럼 맞은 휴가를 이용해 찾아 온 고성군 화진포. 그곳에서 올 여름 바닷바람으로 맞으며 피서를 즐긴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앞으로 남은 3일간을 또 어디를 향해 길을 나서야할지 깊은 생각에 빠진다.

 

고려의 왕족이 살던 곳이라는 옹진군 영흥도를 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은 섬이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해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흥도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 개통 후부터이다. 선재도와 함께 뭍과 이어진 영흥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던 영흥도. 영흥대교가 개통이 되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나 인근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다.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가다

 

영흥도는 섬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10일 간간히 비가 뿌린다. 메주 목요일이면 인근 문화재 등을 답사하는 것이 한 주간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다. 아침 일찍 영흥도로 향했다. 간간이 비가 뿌리지만 마침 날도 선선하고 답사를 하기 딱 좋은 날씨이다.

 

영흥도를 찾아간 것은 십리포 해수욕장에 방풍목으로 심었다는 소사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그동안 영흥도를 몇 번인가 찾아갔지만 여름철에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소사아무의 상태도 궁금하고 더구나 막바지 더위가 한물 가시는 계절에 해수욕장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영흥도는 인신 대부도에서 연육교로 선재도를 가쳐 들어가지만 경기도가 아닌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한다. 가는 길은 대부도를 거쳐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천광역시라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지만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모순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그저 가는 길은 경기도를 통해야하지만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하고 하니 괜히 멀게 느껴지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소사나무에 빠지다

 

소사나무는 중부이남 해안과 섬 지방에서 자란다. 나무는 다 자라도 수고 15~20m에 지름이 한두 뼘 정도가 고작이다. 소사나무의 매력은 똑바로 선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군데군데 소금덩어리가 매달린 것 같은 옹이가 달려있다. 그래서 이 나무가 더 매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사나무는 소금기에 강해 줄기가 잘려져도 새싹이 잘 나오는 등 척박한 조건에 잘 적응하는 나무로 유명하다. 하기에 소사나무는 바닷가 방풍목으로 식재한다. 소사나무는 빨리 자라지 않고 생명력이 강해 소금기가 많은 바닷가 등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영흥도 소사나무숲은 350그루 정도가 자라고 있으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19971230일 지정되었다.

 

이곳 영흥도 소사나무숲의 나무들은 수령이 100~150년 정도 되었으며 영흥면 내리 신91-4에 소재한다. 이곳의 소사나무 군락지에는 수고 20~30m 정도에 나무둘레 0,7~1.5m 정도이다. 피서철이라 그런지 소사나무 숲에는 피서객들이 천막을 치고 여기저기 더위를 피하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니 시원하다. 소사나무숲은 여름에는 에어컨처럼 시원하고 겨울이 되면 따듯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사나무가 자라고 있는 이곳 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온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은 소사나무숲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고 카페며 각종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소사나무숲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바닷가로 달려간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각종 조개며 낙지 등을 잡고 물이 들어오면 수영을 할 수 있는 곳. 이곳 소사나무숲이 있는 십리포 해수욕장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이다.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소사나무를 본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린다. 내년에는 여름에 꼭 이곳을 다시 찾아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농민회관 앞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을 돌아보다

 

바람이 심하다. 거기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심하게 날린다. 나들이를 하기에는 좋지 않은 날이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글만 쓴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바람이라도 쏘일 겸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일 때는, 숲이 좋다고 했으니 나무가 무성한 옛 농촌진흥청 자리를 찾았다.

 

팔달구 화서동 436-3에 소재한 농민회관 앞은 서호가 있고, 주변에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있는 곳이다. 물과 숲, 거기다가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동안 수원에 거주하면서 나름 좋다는 곳을 다 다녔지만 이곳은 딴 곳에 비해 볼 것이 많은 곳이다.

 

우선 옛 농촌진흥청 안쪽에 자리한 여기산은 선사유적지이다. 특히 여기산에는 화성 축성 당시 성돌을 뜨던 자리가 남아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토성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거기다 서호는 낙조로 유명한 곳이다. 서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민으로도 별천지란 느낌이 든다. 일몰시간에 찾아갔다면 절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그래도 좋다

 

농민회관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들이 꽉 들이찼다. 6일 토요일 오후에 농민회관 웨딩홀에서 결혼을 하는 젊은 부부들이 많은 모양이다. 카페도 온통 사람들로 들이찼다. 이건 카페가 아니라 완전 시장바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왜 그렇게 높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한 식사를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바람에 흙먼지와 함께 송화가루, 민들레 씨앗까지 함께 날려 검은 옷이 금방 하얗게 변해버린다. 하지만 이곳 숲을 걷기위해 찾아오지 않았든가? 길을 건너 서호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순간 이곳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고 눈을 이심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연분홍 영산홍 단지가 펼쳐진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뭇잎이 모두 한편으로 기울었는데, 그런 것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꽃밭의 장관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수원 곳곳을 그렇게 다녔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을 몰랐다는 것이 후회가 된다. 서호 위를 날고 있는 새들도 바람에 날개 짓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서호 주변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서호공원에서는 이 먼지에도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곳으로 가다보니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이라 쓴 석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텃밭들이 있다. 언제 이런 텃밭이 이곳에 생겼을까?

 

                        

 

살기좋은 수원, 아름다운 길이 많아 좋다

 

작은 텃밭에는 갖가지 야채들을 심었다. 대파, 마늘, 고추, 토마토, 참외, 쪽파 등. 정성들여 가꾼 텃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한 편에 쉼터에 다리를 뻗고 앉아 서호를 바라다본다. 서호의 본래명칭은 측만제이다. 축만제는 조선 정조 23년인 1799년 농업용 저수지로 축조됐다. 당시에 만석거와 만년제, 축만제 세 곳에 저수지를 조성했는데, 그 중 서쪽에 있어서 서호라고 불렸다.

 

예전부터 서호는 낙조와 겨울철새 들이 찾아드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잉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마 화성유수 박기수도 이곳 서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시 한 구절을 짓지는 않았을까? 그만큼 수원에는 아름다운 길과 명소가 즐비하다. 언제 찾아가도 나름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런 수원이 있어 좋다. 오랜만에 찾아 온 서호. 그 주변에 늘어선 숲과 꽃길, 그리고 새들의 소리가 즐거운 곳. 서호가 있어 행복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항미정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세먼지가 나쁨이라는 날 찾아간 서호 주변. 난 그곳에서 또 다른 아름다운 길을 만났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어떤 공룡인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일대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14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를 처음 찾아갔던 것은 2004년으로 기억난다. 이곳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주말이면 공룡알 화석을 보기 위해 어린이를 동반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9일 번잡한 때를 피해 고정리 화석산지를 찾아갔다.

 

넓은 공룡알 화석산지는 사람하나 찾을 수 없다. 공룡알 화석산지 입구에 마련한 방문자센터에도 근무자를 제외하면 관람자는 우리 일행뿐이다. 방문자센터도 4년 전 방문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변했다. 외관부터 새롭게 조형을 하고 화석산지는 철제문을 달아놓고 시간을 정해 사람들에게 개방을 한다는 안내표시를 걸어놓았다.

 

  

 

한반도 최초의 뿔공룡이 발견된 화석산지

 

화성 고정리는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다. 옛 지도를 보면 송산면 천등산까지는 육지였고 현재는 육지로 연결된 우음도와 닭섬 등은 섬이었던 곳이다. 이런 곳이 시화호 물막이 공사가 끝나고 난 뒤 공룡알 화석산지가 육지가 된 곳이다. 물막이 공사를 마치고 난 뒤 이곳에선 현재까지 공룡알 200여개와 둥지 30여개가 9개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는 20003월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고정리의 공룡알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300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이전에는 섬이었던 곳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으나 고정리처럼 많은 공룡알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뿔공룡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고된 뿔공룡이다. 2008330일 화성 전곡항에서 열렸던 제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던 중 화성시 공무원인 김경하에 의해서 화석이 발견되었고 화성에서 발견된 한국 뿔공룡이란 뜻에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중생대 백악기인 약 11000년전에 한반도에 살았으며 전체길이는 1.7~2.3m 정도로 추정된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이족보행에서 사족보행으로 진화과정을 거친 뿔공룡으로 꼬리뼈에 척주뼈보다 5배나 긴 신경배들기와 독특한 모양을 가진 복사뼈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뿔공룡의 넓적한 꼬리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찬바람을 맞으며 화석산지를 걷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진 주말이다. 방문자센터를 돌아보고 난 뒤 화석산지로 향했다. 벌써 10여 번 이상을 들러본 화석산지이다. 화성시는 화석산지를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위해 방문자센터에 간단한 소개책자를 마련해 관람자들을 돕고 있다. 너른 벌판에 갈색으로 물든 풀들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잎을 한편으로 뉘이고 있다. 조형으로 만들어 놓은 공룡 한 마리가 찬바람에 더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다.

 

화석산지 관람은 정해진 관람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은 아직도 더 많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관람로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게 공룡알 화석을 만날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3개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룡알 화석산지 관람은 방문자센터 - 전망데크를 1구간으로, 전망데크 - 상한염 - 중한염 - 누드바위를 2구간으로, 누드바위 - 래식동굴 - 하한염 - 무명섬을 3구간으로 정해놓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곳이 없는 공룡알 화석산지를 찾을 때는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두툼한 외투는 필히 갖추어야 한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걷기조차 힘든 날이다. 그래도 이왕 이곳을 찾았으니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 때문에 화석산지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주변경관과 방문자센터가 예전보다 관람자를 위한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늘었을 뿐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자료를 남기고 시간이 얼마간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가는 것은 문화재보존에 필수과정이란 생각이다. 그렇게 비교함으로써 훼손이 된 곳은 없는지 문화재 보존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남겨놓은 자료가 후일 정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기에 문화재답사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할 나의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당산나무 인근에 당집 건축해 보존해야

 

오산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재인무대를 마치고 난 뒤 오산은 더 이상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이란 행사를 위한 일회성 동선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노력해야하고 무엇인가 태동의 움직임이 보여야 한다. 쉬지 않고 이어나가는 끈질김만이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현재 부산동에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당집이 있다. 당집 인근에는 당제에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 이곳에서 물을 길어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산동 당집 인근에 아파트가 건설 중에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건물이 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당집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주민들의 대다수가 이주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어 부산동 당제가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는 이 당집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산동과 경기재인청을 연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 당집이 사라지고 당제가 소실된다고 하면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당집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져야 한다. 당집을 지키는 일만이 전국의 모든 재인을 관장하던 오산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당산나무 사이에 당집 건축하고 재인청 복원 서둘러야

 

부산동에 소재하고 있는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무속인들이 정월 등 기도를 드릴 때 찾아드는 신목(神木)이다. 이 부산동 도로 가운데 서 있는 왕버드나무는 부산동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와 연관이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과거 부산동에 거주하던 화랭이 이용우 가문의 선대들이 주축이 되어 당굿을 열면 이 나무까지 내려와 돌돌이를 돌았다고 전한다.

 

한 마디로 이 왕버드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이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정월이 되면 무속인들이 찾아와 나무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왕버드나무를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라고 하여 나무에 오색천을 두르고 이곳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수시로 이 나무를 찾아와 불을 밝히고 기원을 한다.

 

이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지난해 오산시의회 김영희 의원이 왕버드나무의 생육상태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박사인 경북대학교 박상진 교수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초빙해 왕버드나무의 보존가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 집행부 관계 공무원과 함께 현장에 나가 실태 점검을 실시하는 등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왕버드나무 보호의 체계적 관리를 추진했다.

 

김영희 의원은 시 집행부 관련 부서(건설도로과/농식품위생과)와 연계하여 생육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버드나무 주변 아스콘 제거와 도로선형 변경과 주변 휀스 설치공사를 2개월간의 걸쳐 실시하여 버드나무 생육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당산나무인 이 왕버드나무를 당할아버지, 당할머니나무라 부르고 았는 것으로 보아 이 왕버드나무는 도당굿을 하던 부산동 산이들이 이곳까지 돌돌이를 돌고 당으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을 지키는 일 오산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문제는 당집이 사라진다고 하면 결국 부산동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 되며 이 왕버드나무 역시 무속인들이 위하는 의미없는 나무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시에서는 현재 부산동 마을 뒤편 산중턱에 있는 당집을 이곳 왕버드나무 사이에 기와팔작집으로 조성하고 이곳에서 매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도당굿 남부지부(지부장 승경숙)를 당집과 당산나무를 보호할 수 있는 단체로 고지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럴 경우 오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되는 것은 물론 300년 예인의 가문을 지켜 온 이용우 일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련행정 기관과 오산시민 모두가 힘을 합해 지키려고 노력할 때야 비로소 오산이 전국 재인들을 총괄하던 위상을 다시 찾게되는 것이다. 오산의 뿌리를 지키는 일에 오산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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