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어느 정도의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소우도라고 불린 이 섬은 1871년 전후부터 선재도로 개칭되었다. 선재는 목장지로 조선초기부터 남양도호부에 예속되었으며, 대부도에 진이 설치되면 대부진에 속하였고 대부진이 폐지되면 다시 남양도호부와 남양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1914년에는 영흥도와 함께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에 속해 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던 곳

 

영흥면 선재리는 선재도 전체를 관할하는 행정리로 섬의 주변에 아름다운 곳이 많고 물이 맑아서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던 곳이라 하여 선재리라 하는 이 지역은 원래 남양부 영흥면 지역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도, 호도, 칙도, 주도를 병합하여 선재리라 하여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지난 4일에 찾아갔던 선재도와 영흥도.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선재도와, 선재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영흥도는 한가한 서해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 썰물 때라 그런가 갯벌에는 배들이 한가하게 쉬고 있고, 선재도 길 한편에서 만난 작은 강아지 한 마리는 사람들의 손길이 그리운 듯하다.

 

고려의 왕족이 살던 곳 영흥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도.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하면서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흥도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 개통 때부터이다. 선재도와 함께 뭍과 이어진 영흥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던 영흥도. 영흥대교가 개통이 되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나 인근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다.

 

 

영흥도는 섬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영흥도에서 입구에 조상한 진두선착장. 영흥대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보이는 진두선착장은 섬의 활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선착장 한편에서는 굴, 소라, 해삼 같은 어물을 진열해놓고 흥정을 벌이는 장사꾼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찾아갔던 날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한가함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두선착장을 한 바퀴 돌아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찾아들었다. 소사나무 숲과 물 빠진 갯벌에서 조개 등을 캐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정겹다. 그저 마음 편하게 돌아본 선재도와 영흥도의 모습이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도. 이 섬에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하면서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

 

 

십리포를 찾아가다

 

영흥도에는 십리포 해수욕장이 있다. 이 십리포 해수욕장을 들어가는 길 좌우에는 소사나무라고 하는 숲이 있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활엽 소교목으로 잎은 달걀형이고 길이 2~5cm 정도이다. 잎의 끝은 뾰족하고 겹 톱니가 있으며 뒷면 맥 위에 털이 많다. 측맥은 10 ~ 12쌍으로 햇가지와 잎자루에 털이 많고 턱잎은 줄모양이다.

 

소사나무는 온대지방으로부터 난대지방에 걸펴 자생하며, 1,000m이하의 해변 산기슭의 암석이 많은 건조한 곳에 자란다. 내한성이 강하여 내륙지방에서 겨울나기가 잘되고 양지에서 생장한다. 한국에는 전남, 충남, 경기, 황해, 강원 등지에 분포한다. 5월에 단성화가 암수한그루에서 피고 열매는 견과로 10월에 익는다. 목재는 가구재나 땔감으로 쓰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영흥도의 소사나무 숲은 1997년에 산림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이 되었다. 이 숲은 수령 130년 정도의 소사나무가 350본 정도가 자라고 있으며, 나무의 수고는 3~5m에 나무의 둘레는 0.5~1m 정도이다. 이 나무는 해풍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해풍을 맞아서인지 이 곳의 소사나무들은 가지가 옆으로 누워서 자라고 있다.

 

물 빠진 갯벌에 아낙네들 노랫소리가

 

평일이라 그런지 십리포 해수욕장 인근이 한산하다. 주차장에도 차가 몇 대밖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까지 불어 썰렁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소사나무 촬영을 하기 위해 백사장 쪽으로 옮겨가니 물이 빠진 갯벌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열심히 잡고 있다.

 

이곳은 물이 빠지고 나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굴도 캐고 조개와 낙지도 잡을 수 있어요. 이 굴이 자연산인에 좀 사가지 그래요

 

 

소사나무 진입로에서 깐 굴을 조금씩 담아놓고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의 이야기다. 한적한 십리포에 노래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갯벌에서 좋은 것이라도 잡았는지 절로 노래가 나오는가 보다. 하긴 우리민족만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그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노래 한 자락 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 같아서는 신발을 벗고 갯벌로 들어가고 싶지만, 답사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 놓았으니 어쩌랴. 그저 아낙네의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한 겨울에 만나는 잎이 없는 소사나무의 가지들이, 무슨 옛 이야기라도 해줄 듯 신비롭다. 답사를 하러 다니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그런 재미들이.

 

우리나라에 지정된 천연기념물 중 가장 넓은 지역을 가진 것 중 한 곳은 바로 천연기념물 제171호인 설악산 천연보호구역(雪嶽山 天然保護區域)’일 것이다. 사실 천연기념물이라고는 하지만 광대한 지역의 자연보호 구역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인 아닌 보호구역으로 설정을 해놓았다.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강원도 속초시와 인제군, 양양군, 고성군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설악(雪岳)’이란 이름은 주봉인 해발 1708m의 대청봉이 1년 중 56개월 동안 눈에 덮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눈에 덮힌 큰 산이라는 뜻으로 삼산오악 중 오악에 한 곳이다.

 

 

화강암 암반으로 조성된 수려한 경관

 

설악산은 연평균 기온이 10를 넘지 않는 저온지대에 속하며, 연 강우량은 내설악이 1,000정도, 외설악이 1,300정도이다. 설악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대규모의 화강암 관입과 더불어, 암질과 절리의 차이에 따른 차별침식의 결과로 보고 있다. 곳곳에 화강암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설악산은 사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을 이루고 있어, 각 지역마다 계절별 풍광이 다르다고 한다.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설악산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런 아름다운 경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설악산이 가을 단풍이 들면 설악이 불이 붙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답다. 눈산이라는 설악이 단풍까지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산의 다양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동식물의 보고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내의 식물은 약 1,013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신갈나무, 당단풍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활엽수림과 소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섞여 숲을 이룬다. 그 밖에 금강배나무, 금강봄맞이, 금강소나무, 등대시호, 만리화, 눈설악주목, 설악아구장나무, 설악금강초롱, 솜다리 등 특산물 65, 눈측백 노랑만병초, 난쟁이붓꽃, 난사초, 한계령풀 등 희귀식물 56종이 보고되고 있다.

 

천연보호구역 내의 동물은 1,562종이 보고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반달가슴곰(천연기념물 제329), 사향노루(천연기념물 제216), 산양(천연기념물 제217), 수달(천연기념물 제330),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 황조롱이(천연기념물 제323-8), 붉은배새매(천연기념물 제323-2), 열목어(천연기념물 제73), 어름치(천연기념물 제259) 등은 별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할 설악산

 

천연기념물인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특별히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지질과 지형 및 동물과 식물 자원이 풍부하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전통 사찰 등 많은 문화유산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 중의 하나이므로, 설악산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서 그 산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산은 그저 경치나 구경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오르는 곳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적어도 산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설악산의 경우는 신령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이 산에서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를 훼손하는 행위는 곧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받은 만큼 우리가 돌려줄 것은 바로 자연 그대로의 보전이다.

나무 한 그루가 나에게 주는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한 두 번 본 나무가 아니지만, 그 나무 앞에만 서면 난 늘 작아지고는 한다. 그 나무의 위용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그 나무의 연륜 때문이다. 1100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서 지난 세월의 역사를 보고 있었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수령을 지니고 있는 나무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은행나무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라고 한다. 은행나무는 여러 가지 약재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다. 또한 열매는 사람들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나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 최고령의 은행나무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1100년 정도로 추정한다. 나무의 수고는 42m, 밑동의 둘레는 15.2m 정도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고 있는 많은 은행나무 가운데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이 나무를 따를 것이 없다. 또한 줄기 아래에는 커다란 혹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다섯 번째인가 만난 것은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8월이었다. 용문사 진입로 앞에 차를 대놓고 천천히 빗길을 걸어 들어간다. 차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용문사는 굳이 그럴 생각이 없다. 그저 걷기만 해도 주변 경관이 뛰어나 즐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굳이 차로 가도 될 것 아니냐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그리 넓지도 않은데 차로 이동을 한다면 죄스럽기 때문이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는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일설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난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에 무게를 둔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많은 전설 가운데는, 고승들이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그리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고승이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지만, 그 지팡이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나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무가 되었다는 설은 조금은 황당하기 때문이다.

 

당상관 품계를 받은 은행나무

 

그밖에도 용문사 은행나무에 대한 설화는 많다. 누군가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며, 1907년에 일어난 정미의병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 은행나무가 소리를 내어 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행나무가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면 울었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충남 금산 보석사의 은행나무도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우리나라 곳곳에 전하고 있다. 하기야 1000년이란 세월을 한 자리에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니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을 수밖에.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 때 정3품 벼슬인 당상관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졌다. 나무가 이렇게 벼슬아치가 된 것은 보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에 서 있는 정이품 소나무도 있다. 나무도 벼슬을 줄 수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 이런 것만 보아도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이 얼마나 팍팍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를 정리하면서 올해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다.

 

사진설명 1. 비오는 날 만난 용문사 은행나무

2. 용문사 경내에서 바라 본 은행나무

3. 은행나무의 밑동

4. 중간 갈래로 뻗은 즐기

5. 가을철 단풍이 든 은행나무(문화재청 사진)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만나는 많은 문화재 중, 그래도 마음이 더 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고목이 된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 등으로 지정이 된 나무들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전국에 산재한 많은 나무들만 보아, 책으로 엮어도 재미있을 듯하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은, 대개 한 가지의 이야기쯤은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 나무들을 만나면 그 나무들에게서 받는 기운이 있는 듯하다. 문화재 답사라는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나무들 때문이기도 하다. 보령시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끝으로 만난 문화재가, 바로 귀학송이라는 소나무였다.

 

 

충남기념물 제59귀학송(歸鶴松)’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70-2, 오서산 명대계곡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도로변에 서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한산이씨 동계공파에서 소유하고 있는 이 소나무는 귀학송, 또는 육소나무라고 부른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산해(15391609)의 이복동생인 이산광(15501624)이 낙향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귀학송의 수령은 460년을 넘었을 것으로 전해진다. 이색의 7세손인 동계공 이산광이 명대로 낙향하여 심었다는 소나무. 귀학송은 둘레 5.5m, 높이 25m 정도의 소나무이다. 한 뿌리에서 6개의 가지가 있어서 육소나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아쉽게도 한 가지가 죽어서 5가지만 남아있다.

 

이산광은 광해군의 폭정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했다. 이곳에 귀학정(歸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와 글을 쓰며 후진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자신이 낙향하여 심어놓은 소나무 곁에 지은 귀학정에 학들이 날아들자, 정자 이름은 귀학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를 귀학송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와 이산광

 

이복형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산해의 내력을 알면 이산광을 알 수가 있다. 아계 이산해는 중종 34년인 1539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내자시정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지번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이며, 작가 겸 문장가 이산보는 그의 사촌 동생이었다.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은 아버지 이지번의 동생이다. 토정 이지함이 이산해와 이산광의 삼촌이 된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5대조 이계전이 조선 세종, 문종, 단종조를 거쳐 조선 세조 때 정난공신이 되었고, 고조부 이우는 공조참판과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고조부 이우의 사촌 형제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 이개였다.

 

형제자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형제로는, 계모 충주지씨에게서 10년 터울의 이복동생 인 이산광이 있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글씨에 능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했다

 

아마도 보령은 이산해와 이산광의 은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귀학정을 짓고 후진들에게 글과 시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이산광도, 이복형인 이산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환란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피해 이곳 명대계곡으로 낙향하였기에, 그의 여생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곳이 오기(誤記)일까?

 

문화재 답사를 나가기 전에 대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답사를 할 문화재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지역과 문화재에 대한 상식 등을 깨우쳐 간다. 그래야만 편안하게 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이 귀학송은 이산광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현장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산광의 6대손인 이실이 심었다고 표기가 돼 있다. 6세손이면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실제로 귀학송이 수령은 500년 가까이 보인다. 그런데 왜 이산광이 아닌 이실이 심었다고 보령시 현장 안내판에는 기록을 한 것일까?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말로만 하는 문화재 사랑. 이 내용을 알게 될 후손들에게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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