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갓바위다. 바위 모양이 갓처럼 생겼다고 해서 갓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바위는 사람이 갓을 쓰고 있는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개의 바위가 비슷하게 생겼지만 하나는 중바위, 그리고 하나는 삿갓바위라고 한다. 큰 바위는 8m 정도이며, 작은 바위는 6m 정도다. 영산강 하구를 바라다보고 있는 갓바위. 제대로 보려면 물이 차 있어 배를 타고 앞쪽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럴 수 없어 옆모습만 찍어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갓바위를 가는 길목은 문화의 거리라고 하여서 문화예술회관, 무형문화재전수관, 해양박물관 등 볼거리가 즐비하다.   

 

갓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보편적으로 전설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더해지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면서 그럴듯하게 꾸며진다. 입담이 좋은 사람이라면 전해지는 설화에다가 자신의 구비 능력을 더하여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갓바위도 그래서 몇 가지의 전설이 조금씩은 다르게 전해지고 있어 더욱 재미있다.

 

 

제일 처음 전설은 도를 깨친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다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은 는 전설이 있다. 월출산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 상좌를 데리고 목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영산강을 건너려고 했다. 그런데 따라 온 상좌는 따라서 건너지를 못하는 바람에 두 사람이 돌로 굳어졌다는 설이다. 이 두 번째 전설은 첫 번째보다 조금은 억지스럽다. 축지법을 쓰시는 스님이라도 건넜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다 못 건넜다는 설정이 좀 그렇다. 하지만 이 조금은 억지스러운 전설을 잘 음미해보면 우리네 정서 속에 흐르는 여유를 볼 수 있다.

 

, 혼자라도 갈 수 있을 것을 함께한다는 공동체의 미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 건너지를 못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세 번째의 전설은 전해지면서 보태고, 빠지고를 반복하다가 정리가 된 전설이다. 아주 오랜 옛날 목포에는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이는 목포근방을 드나들며 소금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병든 아버지를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효심이 지극한 젊은이었다고 한다. 젊은이는 늘 생각하기를 아버지께서 아직 병환이 낫지 않으신 것은 나의 정성이 모자라는 것이다.’라며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겠다고 마음을 먹고 갓바위 부근의 부자집에 기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일을 열심히 하던 젊은이는 아버님의 약을 구하기 위해 주인에게 당부를 했다. 머슴살이 세경을 조금 당겨 주십사하는 그런 부탁이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주인은 한 마디로 젊은이의 청원을 거절하고 갓바위가 있는 자리에 와서 먼 산만을 바라다보면 한숨을 짓고 있었단다. 그때 그 곁을 지나가던 스님이 까닭을 물으니 젊은이는 아버님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을 소상히 말씀드렸다.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한 달이나 집에 가지를 않았으면 아버님이 어찌 되셨을꼬?’라며 말을 하자, 젊은이는 정신이 들어 한 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이하랴 아버님은 이미 싸늘한 싯긴으로 변해버린 것을. 젊은이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님을 양지 바른 곳에 묻기로 하고 갓바위 근처로 관을 메고 올라갔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관을 바위 아래로 떨어트리고 말았단다. 바다로 떨어진 관은 찾을 수가 없었고, 젊은이는 자신은 하늘을 올려볼 수가 없는 죄인이라며 큰 삿갓을 쓰고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단다. 후에 먹지도 않고 아버님의 극락왕생을 빌던 젊은이는 그 자리에 굳어 바위가 되어버렸는데 그 바위는 삿갓바위가 되고, 함께 있던 스님은 중바위가 되었단다. 전설은 슬프게 끝나버렸지만 효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오늘도 갓바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영산강 하구를 바라다보고 있다. 그런 애잔한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갓바위 위쪽으로 올라가니 저만큼 낮은 산봉우리는 돌이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있다. 혹여, 저 바위에도 무슨 전설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위에 떠서 미동도 않는 큰 배들 사이로 고깃배인 듯한 작은 배 한척이 고동을 울리며 지나간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2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261호 온달동굴. 단양읍을 벗어나 좁은 산길을 돌아 영춘으로 가면, 한창 인기리에 방영이 된 연개소문의 드라마세트장을 볼 수가 있다. 세트장 뒤편 산 위에는 사적 제264호인 온달산성이 자리하고 있어,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는 관광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연신 주차장으로 차들이 밀려들어온다. 사람들은 드라마세트장을 한 바퀴 돌아 온달동굴로 향하는데, 모든 것을 다 관람할 수 있는 입장료가 성인기준 5,000원이다. 나야 드라마세트장은 건성이고, 온달동굴로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온달동굴은 옛 부터 영춘남굴(永春南窟)로 알려진 석회동굴이다. 또는 성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성산동굴로도 알려져 있다. 이 동굴은 고구려 평원왕 때 온달장군이 성을 쌓은 온달산성 밑에 있으므로 온달동굴로 유명하다. 남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이 동굴 내에 침수하여 훼손된 흔적이 많은 동굴로 석회동굴이다. 하지만 남한강이 수위가 높아지면 물이 동굴로 침수하기 때문에, 2차 생성물인 자연경관은 화려하지가 않다.

 

 

 

 

형성시기가 최장 45천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 온달동굴. 입구에는 반드시 안전모를 착용할 것을 권유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안쪽이 지대가 높은 온달동굴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동굴 입구 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시냇물이라도 흘러내리는 듯 하다. 이렇게 흐르는 동굴내부의 물이 윤달이 드는 해 2월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니, 그 또한 기이한 현상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 동안 보아왔던 동굴들보다는 경관이 빈약하다. 그리고 천정이 낮은 곳이 많아 몸을 낮추어야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동굴이다. 이 온달동굴은 1966년에 최초로 동굴학술조사를 실시하고, 1975년에 일반에게 잠시 개방이 되었다. 그 후 다시 폐쇄를 하였다가 1997년부터 전면 개방을 한 동굴이다.

 

 

 

 

총 연장이 약 800m에 이르는 온달동굴은 입구에서 동쪽으로 길에 뻗어나갔다. 관람시간은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안으로는 주굴이 있고, 다섯 갈래의 지굴이 있으며, 여섯 곳의 광장이 있다. 여러 가지의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있으나, 화려하지가 않다. 한 바퀴를 돌아보니 땀이 흐른다. 사계절 동굴내부의 온도가 16C 정도를 유지한다고 하는데, 그 온도보다는 구부리고 다니는 곳이 많아서 힘이 들었는가 보다. 땀을 닦으며 나오니 동굴 밖으로 부는 시원한 바람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오늘 자연의 신비를 또 한곳을 접하면서, 갈길이 점점 바빠짐을 느낀다.

 

여름철이 되면 무엇보다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 중에도 물이 깨끗하고 시원한 동해안이 가장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며,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 소재한 최북단 화진포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동해안을 끼고 가는 곳마다 해수욕장이다. 여름철이 되면 방을 구하기조차 힘들다고 하는 동해안 고성의 해수욕장은 사람들로 넘쳐나야 하지만 워낙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정작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를 출발해 영동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거나, 2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고속도로와 국도 등, 속초를 경유해 고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수원에서 어느 도로를 이용하던 간에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한 여름 피서철에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나는 여름철 고성을 갈 때는 주로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여주에서 양평을 거쳐 강원도로 들어서 홍천, 인제, 원통, 진부령을 넘는다. 찾아가는 길에 절경을 만날 수도 있고 여기저기 볼 것이 많아 구경도 하고 중간에 먹을거리도 찾아보며 천천히 간다. 피서라는 것이 더위를 피하는 것인데 굳이 마음 급하게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화진포의 성 등 볼거리 많아

 

화진포를 찾아가면 주차장 안쪽 동해를 바라보는 돌로 축조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김일성별장이라고 하는 화진포의 성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은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는 일 년이면 적어도 5~6번 정도는 찾아가는 곳이다. 화진포 인근에 볼일이 생기기 때문에 찾아가면 일부러 화진포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도 이곳의 경치도 일품이지만 주차장 주변으로 펼쳐진 노송 숲과 화진포의 성 등 만나기 힘든 경관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인근에는 이승만의 별장과 이기붕 별장도 자리하고 있어 이곳의 경관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금구도 광개토태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장 앞쪽인 초도리 앞 500m 정도 해상에 1,000여 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농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화진포팔경 중 한 곳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김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태왕 3년인 3048월 경 이곳 거북섬이라는 금구도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일 광개토태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인 금구도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화진포 팔경을 느껴볼 수 있는 곳

 

1997년 고성군문화원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화진포 팔경 제1경은 원당리 마을 앞에 호수에 비친 반달 그림자와 누런 가을곡식,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월안풍림(月安楓林)'이라 했으며, 2경은 화포리 찻골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한 폭 그림 같다하여 '차동취연(次洞炊煙)'이라 했다.

 

3경은 호수 주변 모래밭에 피는 빨간색 해당화가 봄에 피는 모습이 영롱하여 '평사해당(平沙海棠)', 4경은 호수동편에 있는 장평부근에 찾아오는 많은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청명하여 '장평낙안(長坪落雁)', 5경은 화진포 앞바다에 떠있는 금구도(金龜島)의 모습이 한가로워 '금구농파(金龜弄波)', 6경은 화진포 호수의 물이 바다로 빠지면서 바닷물과 부딪치며 물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용()이 물을 차는 듯하여 '구용치수(龜龍治水)'로 정했다.

 

7경은 풍암별장에서 보이는 돛단배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정겨워 '풍암귀범(楓岩歸帆)'이라 했으며, 8경은 모화정리(茅花亭里:지금의 죽정1)의 호수변의 모래밭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 '모화정각(茅花亭閣)'이라 칭하는데 조선시대의 풍류시인인 김삿갓이 화진포에 머무르는 동안 이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금구도는 신라시대 수군기지가 있었단 곳으로 밝혀졌다.

 

 

시인묵객이 사랑한 곳, 화진포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사랑한 곳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 이곳 해수욕장에 널린 백사장을 밟아보면 밀려드는 파도로 인해 폭염의 햇볕과는 달리 동해바다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오고가는 길이 조금 버겁기는 하지만, 이 여름 화진포를 찾아가면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시원한 동해의 너른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지역주민들 매년 단오 날 나무인근서 성황제 등 지내는 신목(神木)

 

수원시에는 모두 24주의 보호수가 있다. 그 중 영통구 단오어린이공원 안에 서 있던 수령 530년 된 느티나무가 26일 강우와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찢겨지면서 쓰러졌다. 영통구 느티나무는 26일 오후 3시께 내내 불어온 비바람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무 밑동 부분부터 찢기듯 부러졌다.

 

나무 높이 3m 부분에 자리한 큰 가지 4개가 원줄기 내부 동공(洞空)으로 인해 힘을 받지 못하고 바람에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고 직후 현장을 찾은 염태영 수원시장은 “500년 넘게 우리 시와 함께해온 느티나무가 한순간에 쓰러져버린 처참한 모습에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면서 불과 열흘 전 영통청명단오제에서 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염태영 시장은 이어 전문가들과 함께 복원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보존 방안을 강구하라영통청명단오제 위원 등 지역 주민 의견을 수렴해 사후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라고 주문했다.

 

 

수원시는 사고 직후 지역 주민과 함께 느티나무를 위로하는 제()를 올리고, 주민 안전을 위해 부러진 가지 등 잔해 수거에 나섰다. 밑동의 부러진 날카로운 부분도 당일 내 다듬어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계획이다. 또한 수원시는 쓰러진 느티나무 밑동은 보존할 계획이다. 밑동 주변에 움트고 있는 맹아(萌芽)를 활용하는 방안과 후계목을 육성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느티나무 복원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나무병원 전문가 자문과 주민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기로 했다.

 

또 시에 있는 나머지 보호수 23주에 대해서도 유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문가 현장 점검을 진행하고, 안전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수령(樹齡)530년 이상인 영통구 느티나무는 198210월 보호수로 지정됐다. 나무 높이가 33.4m, 흉고(胸高)둘레는 4.8m에 이른다. 이 느티나무는 1790년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나뭇가지를 잘라 서까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칠 무렵 나무가 구렁이 울음소리를 냈다는 전설이 있다.

 

영통동 주민들은 매년 단오에 나무 주변에서 영통청명단오제를 열고 있다. 축제는 청명산 약수터에서 지내는 산신제로 시작돼 느티나무 앞 당산제로 이어진다. 영통구 느티나무는 20175대한민국 보호수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음력 단오는 설날과 추석, 한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한 날이다. 단오는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五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하는데 이 날은 양수가 겹치는 날로 가장 양의 기운이 강한 날이라고 한다. 단오를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리란 수레의 바퀴를 뜻하는 것으로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수레의 중요성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추정한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단오를 술의일(戌衣日)’이라고도 불렀는데 술의는 우리 발음으로 수레의 뜻이고, 이날 속가에서는 쑥잎을 찧어서 팥가루를 넣고 푸른빛이 돌게하여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게 떡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전한다.

 

단오가 되면 마을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정성으로 각종 제수를 마련해 제를 올렸다. 요즈음이야 청명단오제라는 명칭으로 지역 축제화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거목에 지내는 목신제나 거리제, 성황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가내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의식이었다. 영통 느티나무에서 지내던 청명단오제 역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의식이다.

 

 

요즈음처럼 일기가 불순하고 강한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거목(巨木)들은 언제 어떻게 화를 당할지 모른다. 사전에 방비를 한다고 해도 가지에 철주로 버팀기둥을 만들어 놓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영통 느티나무는 지난 15일과 16일 이곳에서 단오청명제를 지낼 때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첫 장마에 화를 당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원시는 영통 느티나무 밑동에 자라고 있는 맹아를 이용한 복원계획을 세우겠다고 했다.

 

령 천년 반룡송의 위엄과 매애보살의 자비를 만나다

 

그동안 한참이니 잊고 있었던 문화재답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인지 모처람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봄까지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문화재답사를 했지만 근 1년 여 동안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지 못했다. 328일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마을에 산수유가 피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 명이 함께 길을 나섰다.

 

도립리는 46일부터 산수유축제를 열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있다. 남들보다 먼저 산수유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인 듯하다. 산수유마을을 돌아보고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을 찾아갔다.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인 반룡송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찾아보는 나무지만 올해 나무는 그동안 보던 때와는 다르다. 생육이 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벌써 반룡송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룡송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국사의 속성은 금씨이며 통일 신라 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반룡송을 도선국사가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 등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그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미 이 소나무의 수령은 1,100년이 지났다는 것을 뜻한다. 반룡송은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소나무의 껍질이 마치 용비늘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만년을 산다는 뜻으로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불러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몇 번이고 이곳을 찾아 반룡송을 보았지만 올해처럼 솔잎이 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반룡송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고 생각한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은 대개 나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반룡송 또한 구전에 의하면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그렇기에 아무도 반룡송에 해를 가하거나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반룡송의 솔잎 색이 푸르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것을 뜻한다. 함께 답사에 동행한 사람이 묻는다.

선생님은 왜 같은 문화재를 반복해서 답사하세요?”

문화제는 늘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해요. 계절별로 다르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지니까요

그렇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요?”, 신경을 쓰면 쓸수록 문화재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니까요

 

30년 세월 문화재답사를 하고 다니면서도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했다. 지난번에 멀쩡하던 문화재가 길지 않은 시간 돌아보지 않아 훼손된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는 지나칠 때마다 쉬지 않고 찾아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 문화재를 온전히 지킬 방법이기 때문이다.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을 다시 만나다

 

반룡송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 마애보살의 뒷면에 음각으로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고려 경종 6980)'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경우이다 조성년대를 확실하게 기록해놓아 명마애보상좌상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장암리)에 소재한 고려 때 마애불인 보물 제982호인 이 마애불은 큰 길에서 안으로 들어가 논길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쪽 논을 마을 사람들은 넘어새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큰 바위를 미륵바우라 부른다,

 

마애불은 바위의 한 면을 음각으로 깎아내 부조로 조성하였다.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마애보상좌상은 인근의 누군가 관심을 갖고 돌보고 있는 듯하다. 갈 때마다 주변정리가 잘 돼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문화재담당부서나 관리청보다 오히려 지역에서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 보존에 대해 더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화강암의 재질에 조형된 이 마애불은 도드람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물 제982호 마애보살좌상은 이 바위에 옅은 부조로 새긴 3.2m의 보살좌상이다. 동행한 일행들에게 마애보살좌상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없음에 마음 한편이 아쉽다. 많은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봄날 산수유 꽃을 보기 위해 떠난 길이 답사가 되었지만 예전처럼 혼자가 아닌 일행이 함께였다는 점에 마음이 들뜬다. 앞으로 더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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