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이상 묵은 소나무와 석실 안 성황지신 민속적 가치 높아

 

흡사 벅수처럼 석주형 돌기둥 안면을 돌을 쪼아내듯 조각을 했다. 복판에는 흐릿하게 성황지신(城隍)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네모난 돌에 벅수형태로 조형을 한 성황지신의 얼굴에는 흡사 면사포를 씌우듯 한지로 가려놓았다. 이 돌 성황을 석실 안에 모셔놓고 매년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마을회관 뒷산에는 수령 400년이 지났다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정일이 되면 음식을 마련해 이 나무에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 두 그루의 소나무가 바로 성황나무인 것이다. 그러던 것을 70여 년 전에 주민들이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석주로 된 성황신을 모셨다고 한다.

 

 

13일 오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수백 년이 지난 석실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산학리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 도공 김원주(, 54)가 작업을 하고 있어서 함께 동행하여 나지막한 신을 올랐다.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지만 사진으로 보내준 석실의 정확한 용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날이 워낙 덥다보니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마을회관 뒤편 소로를 이용해 산을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옆에 돌을 쌓아 만든 석실이 보인다. 얼핏 예전의 고분인 석실을 연상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돌의 재질이 옛 것이 아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니 석주에 성황지신의 안면을 새겨 놓았다.

 

이런 형태의 조각은 처음예요. 투박하긴 하지만 우리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정성을 드린 흔적도 넘어있고요

 

도공 김원주는 지리산 삼성궁에서 수년 째 돌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석실 안에 놓인 석주형 성황지신을 보고 투박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석실이 궁금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 한분이 밭을 지나가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70여 년 전에 석실을 조성했다는 증언

 

마을 어르신은 자신이 산학리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고 하신다. 올해 79세라는 것이다. 다행히 어르신은 이 성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셨다.

 

그 소나무는 400년이 지났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어요, 매년 정월 초정일에 그 나무아래서 성황 제사를 모셨는데 내가 어릴 적 저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성황신을 모시는 작업을 한 것을 내가 본 것을 기억해요

 

마을어르신이 증언대로라면 이 석실을 조성한 것은 70년이 조금 지났다. 하지만 성황목인 소나무에서 성황제를 지낸 것은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이곳 산학리는 성황지신이 지켜온 마을이라는 것이다. 한 마을의 구심점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온 이유는 바로 산학리 선황지신이라고 볼 수 있다.

 

 

단절된 위기에 있는 400년 전통의 성황제

 

우리 마을 건너편 산학산성 마루턱에 서 있는 소나무 아래도 성황이 있어요. 그곳도 이곳처럼 성황이 있는데 석굴은 없어졌죠. 그리고 이 산 너머에도 이목나무라는 부르는 성황나무가 있어요

 

마을 어르신이 증언해 준 이곳의 성황제는 온 주변에서 다 함께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종 제대로 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산학리의 성황제 당산이다. 이런 정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성황제 당산이라면 향토유적으로라도 지정하여 지켜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더욱 요즈음 들어 마을에서는 이 성황지신 터를 지켜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다.

 

마을어르신들이 말씀을 하시는데 이제 성황제를 모시는 것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젊은이들이 어르신들 대까지 모시고 나면 더 이상 성황제를 모실 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걱정을 하시는 것도 마을의 전통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마을의 한 주민이 전해 준 이야기에 찾아간 산학리 성황지신 터.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에서부터 전해진 성황제가 이미 400년을 넘었다. 현 시대에 그런 제가 무슨 필요 있느냐고 하지만 그 제로 인해 마을주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모두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팽배해 있을 때 유일하게 공동체를 버텨낼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400년을 이어 온 성황제이다.

 

전통은 지켜지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산학리의 성황제는 그렇게 주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켜냈다. 고성군에서는 이 성황지신의 석실과 석주형 성황, 그리고 소나무 등을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한 뒤 향토유적이라도 지정을 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번 사라진 전통을 다시 되살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신립장군의 한이 서렸다는 바위에 전하는 전설하나

 

곤지암(昆池岩)’은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로 72 2필지에 소재한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는 바위 한 기를 말한다. 원래 이 바위 주변엔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그 연못도 이 바위가 생긴 내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하천과 연결되었었다는 이 바위는 현재 주변이 복개되어 학교 담장과 주변 주택가로 변하였다. 바위 위에는 수령 400년도 된향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신비함을 더해준다.

 

지난 2일 비가 온 뒤 습한 날. 무던히도 찌는 듯한 더위에 찾아간 광주시 곤지암읍. 도척면 추곡리 태화산에 소재한 백련암 부도를 돌아보고 찾아간 곳이 바로 곤지암이었다.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곤지암은 광주시 실촌읍 곤지암리였는데 현재는 곤지암읍으로 바뀌었다.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바위이기에 인근을 지날 때마다 한번 씩 들리고는 하는 곳이다. 전설만큼이나 기묘한 향나무의 안위가 궁금해서이기도 하다.

 

경기도는 이 바위를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곤지암의 주변은 보호철책을 둘러놓았고, 화강암의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기가 조금 떨어져 있는 곤지암의 큰 바위는 높이 3.6m에 폭이 5.9m이고, 작은 바위는 높이 2m에 폭 4m 크기다. 큰 바위 중간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향나무가 이 바위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명장 신립과 임진왜란

 

곤지암은 조선 선조 때 원통하게 죽은 명장 신립(15461592)장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선조 16년인 1583, 그는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퇴해 육진을 지킨 명장이다.

 

 

 

여진족의 장수 니탕개는 선조 16년인 15831월에 인근의 여진족을 모아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경원부로 침입했다. 조정에서는 신립을 시켜 니탕개를 토벌할 것을 명했고, 신립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첨사 신상절과 함께 토벌에 나서 적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반란군의 수는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20만 병력이 부산진에 도착했고 무방비였던 부산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초토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상주에 내려 보낸 뒤 여진족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임명했다. 왕은 신립에게 직접 보검을 하사한 뒤 충주로 파견했다. 충주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다. 적의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니 이를 본 신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달려 주성으로 나아가니 군사들이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져버렸다. 성중의 적이 나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적이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했으며 적이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말을 돌려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 선조실록 권 26>

 

왜적의 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선조로부터 왜군을 물리치고 오라는 명을 받고 김여물과 함께 싸움터로 향한 신립은 충주 달천평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수만 명의 왜군과 싸우다 참패를 당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흔히 탄금대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투는 달천평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신립의 한이 서린 곤지암

 

곤지암에 전하는 전설은 달천평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 장군의 시신을 건졌을 때 장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으면 눈을 뜨고 죽은 시신이 당장이라도 호령을 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장군의 시체를 이곳 광주로 옮겨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신립장군의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95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곤지암에서 멀지 않은 곤지암읍 곤지암리 산1-1에 소재한다. 신립장군의 묘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누구든지 이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한 장수가 이 앞을 지나다가 왜 오가는 행인을 괴롭히느냐고 소리를 쳐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벼락이 때려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의 윗부분이 땅에 떨어지고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곤지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충주 달천 전투에서 패해 죽은 신립을 광주 곤지암에 묘를 쓰게 되었는데, 충주에는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하게 된 이유가 한 처녀의 원혼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이 어느 민가에 묵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집 처녀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처녀가 신립에게 자신을 배필로 삼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신립이 이를 거절했다. 총혼을 거절당한 처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해서 귀신이 되었는데, 그 처녀 귀신이 신립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로 가라고 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충장(忠將)’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은 신립. 탄금대전설이나 곤지암전설이나 어찌 보면 당대를 풍미하던 한 장군의 죽음이 안타까워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한 낮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400여년을 지키고 있는 저 향나무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곤지암을 떠나면서 괜한 생각을 해본다.

 

경기도기념물 노송지대 소나무가 위험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년 7월 10일에 지정된 파장동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의 효심이 가득 담고 있다. 요즈음 이 노송지대 소나무들이 주변이 더럽혀지고 많은 차량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효행의 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오랜 수령을 자랑하 듯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대왕 당시에 료심으로 심은 소나무들은 대개가 고사하고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소나무 중 현재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주, 삼풍가든 부근에 21주,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노송지대는 경기도 지정 기념물이다. 이는 이 지역일대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유산을 말하며, 역사적이나 예술적, 혹은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다.

 

 

 

노송지대 소나무 관리해야

 

3월 2일 이른 시간에 노송지대를 찾아가보았다. 노송지대 사이로는 2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들은 자동차 매연에 약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곳 노송지대 소나무들은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정조대왕 당시 식재를 했다고 하면 벌써 200년 이상의 수령을 갖고 있는 소중한 나무들이다.

 

이곳 소나무들은 그 의미가 깊다. 노송지대의 소나무를 보호해야 한다고 그동안 입이 닿도록 주장을 했다. 이 소나무들이 갖고 있는 뜻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곳에 번호표를 달고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의 발로이다. 하기에 이 나무들은 교육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갖는다.

 

시에서는 이곳 기존의 차선 옆으로 다시 도로를 개설했다. 아직 개통은 하지 않았지만 모든 공사가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존의 도로인 노송지대 사이를 통과하는 차량들은 이 소나무의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린다. 차에서 뿜어내는 매연 또한 적지 않다. 이 길은 근처 소나무와 숲에서 발생하는 피톤치드로 인해 걸으면 상쾌해야 할 텐데 매캐하기만 하다.

 

 

노송지대 공원으로 조성해야

 

지금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나무들을 관리해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곳을 공원화 하는 방법이다. 노송지대 사이로 난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사람들이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야 한다. 길 좌우에 지저분한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쾌적한 길로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공원에는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릴 수 있는 시설물이나 간단한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2일 돌아본 노송지대 입구 한편에는 축대 위에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깔려있다. 한편에는 중고차매장이 있어 문화재보호구역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이 우선 정리되어야 한다.

 

걸으면서 정조의 효심을 기억하고 우리 문화재의 중요성과 건강을 생각할 수 있는 노송지대 소나무길.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이곳을 문화재공원이나 소나무공원 등으로 지정하고 주변 정리를 먼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문화재구역을 나 몰라라 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소재하고 있는 수원시로서는 명성에 누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안녕과 마을 주민들의 풍년을 기원하는 ‘지리산 천년송 당산산제’가 오는 17일 11시에 마을주민과 관광객 등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하여 구름도 쉬어간다는 남원시 산내면 와운(臥雲)마을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지리산 품안 깊숙한 남원 산내면 뱀사골의 구름도 누워간다는 와운(臥雲)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정착한 이후로 5백여년 동안 이 마을을 지켜보던 한아씨(할아버지) 소나무와 할매(할머니) 소나무에게 매년 음력 1월 10일에 당산제를 지내 오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관련 자연유산 민속행사 지원으로 준비되는 당산제는 주민들이 한달전부터 정성껏 제수용품을 준비하고 농악단 터울림행사, 천년송 소원빌기 등 성대하게 꾸려 오는 2월 17일 수요일 오전 11시에 와운마을 지리산 천년송 앞에서 열렸습니다.






와운마을 사람들에게 있어 천년송은 마을의 다산이자 풍요로움의 상징이며, 더 나아가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없도록 지켜주는 수호신의 의미를 갖습니다.

마을 당산목으로서 와운마을 뒷산에 있는 한아씨 소나무와 할매 소나무는 임진왜란 전부터 자생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20m 간격을 두고 마주보며 서 있습니다.



 




이중 더 크고 오래된 할매 소나무는 지리산 천년송(千年松)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2000년 10월 13일에 천연기념물 제 424호로 지정되어 오랜 역사와 더불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높이가 20여미터에 달하고 둘레는 6미터정도이며 가지 끝 사이의 폭은 12미터에 이를 정도로 매우 웅장하지요.



 

 
 

지리산에서 들러야 할 필수 명소로 꼽히는 천년송은 연간 34만 여명의 관광객이 찾아 오며 천년송의 뜨거운 기운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구름도 누워가는곳, 와운마을. 그 아름다운 곳에서 열리는 지리산 천년송 당산제는 우리 모두의 축제로 한해의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소중한 제사입니다.



 

 

(자료 / 남원시)

 

 

눈길에 찾아 나섰던 단양팔경, 설경의 극치

 

단양팔경은 중국의 소상팔경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한다.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상류에 도담삼봉과 석문, 충주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구담봉, 옥순봉과 선암계곡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그리고 운선구곡에 있는 사인암을 합해 단양팔경이라 이른다.

 

지난 해 눈이 많이 온 날 단양팔경을 이틀에 걸쳐 답사한 자료가 모두 소실이 되는 바람에, 설 연휴에 다시 찾았다. 아직도 계곡에는 눈이 쌓여 발목까지 빠진다.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옥순봉과 구담봉, 그리고 도담삼봉은 그래도 편히 촬영을 하였으나, 남은 곳은 눈이 쌓이고 얼어 미끄럽다.

 

중선암은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눈 밑에는 얼어있어 몇 번이고 미끄러질 뻔 했다. 그래도 겨우 답사를 마쳤는데 이번에는 사인암의 동영상 자료가 빠졌다. 할 수 없이 사진을 이용한 동영상 자료를 대신 만들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경의 단양팔경을 담고 싶어 몇 번인가 벼르고는 했지만, 결국 지난해도 흡족한 자료를 얻지 못했다. 올 겨울에는 다시 한 번 찾아가 제대로 된 설경을 담아보아야겠다.

 

 

 

도담삼봉

남한강의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한가운데 세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가운데 봉우리는 늠름한 장군처럼 위엄 있는 자태를 하고 있는데 이를 남편봉이라 부르고 그보다 좀 작은 북쪽 봉우리는 처봉, 남쪽 봉우리는 첩봉이라 부른다. 이 삼봉 가운데 처봉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모습을 하고 있고 첩봉은 아기를 밴 모습으로 남편봉을 바라보고 있다.

 

 

 

석문

수 십 척에 달하는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 나타나는데 신선들이 드나들고 천상의 선녀들이 하늘하늘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노래를 불렀음직하다. 석문 우측 아래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굴속에 깔린 암석은 아흔 아홉 개의 논다랭이를 이루고 있다.

 

 

 

구담봉

깎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절벽 위의 바위가 흡사 거북을 닮아 구담봉이라 한다. 조선인종 때 이지번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푸른 소를 타고 강산을 청유하며 칡넝쿨을 구담의 양쪽 언덕에 매고 비학을 만들어 타고 왕래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신선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순봉

희고 푸른 바위들이 대나무 순 모양으로 천여 척이나 힘차게 치솟아 절개 있는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봉우리를 옥순봉이라 한다. 여러 개 기이한 봉들은 조화의 묘를 다하였으며 산세의 기복과 굴곡이 자유분방하다. 옥순봉은 소금강이라는 별칭을 가질 정도로 비경인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연산군 때 문신 김일손(金馹孫)도 이곳을 탐승하면서 절경의 협곡을 극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상선암

크고 널찍한 바위는 없으나 작고 올망졸망한 바위들이 서로 모여 있는 모습은 소박하고 정겨운 한국인의 이웃을 연상케 한다. 양안의 기암과 밤낮없이 흐르는 계류의 청음은 울창한 숲에서 사방 우짖는 새소리와 함께 현유선객들의 탐승의 흥취를 돋워주고 있다.

 

 

 

중선암

조선 효종조의 문신인 곡운 김수증 선생이 명명한 곳으로 삼선구곡의 중심지이다. 흰색의 바위가 층층대를 이루어 맑은 계류와 더불어 여름철 유람과 휴양지로서 최적의 절경을 이룬다. 골짜기로 흐르는 맑은 물속에서 쌍용이 승천하였다는쌍룡폭포가 있고 백색의 웅장한 2개의 바위가 있으니 하나는옥염대또 하나는명경대라 부른다.

 

 

 

하선암

단성면 대잠리 575지방도 아래 위치한 하선암은 삼선구곡을 이루는 심산유곡의 첫 경승지로 3층으로 된 흰 바위는 넓이가 백여척이나 되어 마당을 이루고 그 위에 둥글고 커다란 바위가 덩그렇게 얹혀 있어 가관인데 처음에는 부처바위(佛岩)로 불리다가 성종 때 군수 임재광이선암으로 고쳐불렀다. 후에 퇴계 이황선생이 하선암(下仙岩)이라고 하였다.(팔경 해설/단양군청)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