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이며, 가래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주로 경기도 이남에서 유실수로 많이 심고 있다. 키는 20m에 이르며 수피는 회백색으로 밋밋하지만, 점차 깊게 갈라진다. 흔히 호두나무라고도 하는데, 이 나무 이름을 들으면 ‘천언 명물 호두과자’ 생각이 먼저 든다. 

천안 명물 호두과자가 생긴 이유도, 알고 보면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641 - 1번지에 소재한 광덕사 호두나무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호두나무는 수고가 18,m가 넘는 거목으로 수령이 400년이나 되었다. 약 700년 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호두나무를 들여와 심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하니, 광덕사는 우리나라 호두나무의 시배지가 되는 셈이다.



표피에 붙은 이끼가 연륜을 말해

날이 무더울 때 답사는 괴로움이 따른다. 그렇다고 찬물에 발을 담구고 가만히 붙어 있지를 못하는 성미인지라(사실은 지독한 역마살이 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광덕사로 향했다. 들어가는 입구가 비좁아 차를 들이대기도 미안해, 입구 앞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보니 기온이 33도나 되어서인가 땀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얼마 걷지 않아도 되는 광덕사 입구길이 백리는 되는 듯하다. 여름만 되면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사람들을 만나면 일부러 멀리 피해야 한다. 흐르는 땀으로 인해 몸에서는 쉰내가 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 해도, 상대방이 기분 좋을리가 없으니 말이다.




광덕사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입구에 서 있는 호두나무 한그루. 그 크기만 보아도 대단하다. 나무에는 파란 이끼가 끼어있고, 표피는 마치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다. 한 마디로 연륜을 느낄 수 있는 형태이다. 이곳에 처음으로 호두나무가 심어진 것은 고려 충렬왕 16년인 1290년 9월이라고 하니, 올해로 720년이 지난 셈이다.

영밀공 유청신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호두나무의 묘목과 열매를 가져와,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열매는 자신의 고향집 뜰에 심었다고 전한다. 유청신은 고려 후기의 역관으로 전남 고흥사람이다. 고흥에도 이만한 호두나무가 자라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곳을 우리나라 호두나무의 시배지라 부른다.





광덕면 곳곳에 퍼진 호두나무

현재 광덕면 일대에는 유청신의 후손과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약 25만 8천여 그루의 호두나무가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천안 명물 호두과자가 이곳에서 명성을 얻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만큼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있게 된 것으로 본다.

광덕사 입구에 서있는 호두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육상태가 좋은 편이다. 여기저기 무수히 많은 열매를 달고 있어, 자기가 휘어 받쳐놓을 정도이다. 밑에서는 두 갈래로 크게 올라와, 지상 60㎝의 높이에서 두 개 줄기로 갈라져 있다. 가슴높이의 둘레는 각각 2.6m와 2.5m 정도이다.




400년이 넘도록 숱한 풍상 속에서 견뎌낸 광덕사 호두나무.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만큼 보존이 잘되어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은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후손들에게서 빌려왔다는 생각을 저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이 호두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일반적으로 탱자나무의 키는 보통 3m 정도 자란다. 탱자나무는 줄기와 가지 곳곳에 커다랗고 뾰족한 가시들이 달려 있다. 이 가시는 단단해 촘촘히 심으면 아무도 근처에 얼씬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남쪽 지방에서는 탱자나무를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있다. 탱지니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한국에서도 자생해왔다고 주장하지만, 오래 전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견해가 많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에 소재한 장수황씨 종택,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보면 탱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탱자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지난 것으로,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135호이다.


황희정승의 후손이 심은 탱자나무

이 나무는 일반적인 탱지나무보다 생육이 좋다. 높이는 6m에 이르고, 나뭇가지는 동서로 10,8m, 남북으로는 11,2m나 되며 수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탱자나무는 사실은 두 그루이다. 마치 한 그루가 자라난 것 같지만 밑 부분을 보면 두 그루가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이 400년이나 되었다고 보는 것은, 황희정승의 7세손인 칠봉 황시간(1558 ~ 1642)이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으면서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돌아보니 밑 부분은 수술을 하였다. 강화 등지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기도 하지만, 전국을 돌아보아도 이렇게 생육이 좋은 나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가 붙어 몇 개의 가지를 위로 뻗고 있다. 밑 부분은 많이 파여 수술을 했으나, 가지 등을 보면 아직도 건재하다.




탱자나무를 보면 마음 아픈 사연이

푸른 나뭇잎들이 달려있는 나무에는 열매도 보인다. 나무의 크기답게 긴 가시들이 사람을 위협을 한다. 이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 아픈 기억이 새롭다. 예전 경상북도 영주시를 답사할 때인가 보다. 소수서원 건너편에 보면 금성단이 있다. 이 금성단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나온다.

위리안치란 형벌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운 형벌로 알려져 있다. 신체적인 고통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그 어느 것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인가도 없는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구덩이는 돌로 둥그렇게 앃은 후 맨바닥이라, 사람이 재데로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물론 그 안에 갇힌 사람은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주변을 바로 이 탱자나무로 두른다. 입구 한 편만 열어놓는데, 그곳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촘촘히 심어놓은 탱자나무는 틈이 없다. 나뭇가지를 벌린다고 해도, 그 가시들 때문에 손으로 잡기도 힘들다. 결국 사람도 없는 웅덩이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탱자나무를 볼 때마다 금성대군이 갇혔던 위리안치지가 생각이 난다. 그 안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약재로 사용하는 탱자나무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모진 나무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장수황씨 종택의 탱자나무는 사랑채와 사당 앞에 심겨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같은 나무이면서도 어찌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까? 그것이 세상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탱자나무를 보면서 가슴이 아프다. 미처 몰랐다. 이 나무 하나가 주는 아픈 기억이 그리 오래 갈 줄은.


예전에 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앞으로 며칠은 더 이런 찜통더위가 계속될 것만 같다. 해안가도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열대야 때문에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요즈음의 일기다.

 

이럴 때는 바닷가도 좋지만 그보다는 시원한 그늘이 있는 계곡이 차라리 제격이다. 여름 피서야 바닷가가 제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계곡에 맛을 들이고 나면, 쉽사리 계곡을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계곡 피서 더운 날에는 시원한 계곡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계곡을 찾아가는 것은 좋은 일인데

 

이렇게 더운 날 아이들과 함께 계곡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더위에 허덕이고 집에 있으면서 에어컨 바람을 쏘이느니, 시원한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구면 그보다 시원할 수가 없다. 시원한 세족이란 여름 날 제격이니 말이다.

 

전국의 계곡은 요즈음 사람들로 인해 몸살을 않고 있다고 한다. 사무실에 앉아 있자면 숨이 턱에 막힌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곳은 주변 건물에서 에어컨을 틀면서 내뿜는 열기가 쌓여 더욱 덥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계곡 맑은 물이 돌틈을 흐르는 모악산 계곡

가까운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다. 완주군에 있는 모악산은 우리나라에서는 손꼽히는 청정지역이다. 이는 모악산을 관통하는 찻길이 나지 않아, 아직도 수많은 생명들이 모악산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돌 틈을 따라 흐르는 물들은 맑은 소리를 낸다. 물이 모인 소에는 1급수에만 산다는 작은 물고기들이 유영을 하는 모습이 한가하다.

 

물고기가 하나도 없네!

 

씨가 말랐다는 표현을 한다.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 하는 말이다. 모악산을 오르내리면서 물속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 속에서 자연의 여유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물고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더운 날 사람들이 계곡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 많던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 그물까지 동원해 잡고있다

요즈음 계곡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에 아이들이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다. 심지어는 잠자리채 같은 그물망으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아이들은 작은 돌들을 들어내고 다슬기를 잡느라 아우성이다. 재미로 잡는다고 하지만 다슬기가 있어야 반딧불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런 행동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도 말리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피서객들이 떠난 계곡에는 깔고 있던 자리와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계곡을 찾아오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에게 먼저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연을 지키지 않으면 그 해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흙탕물이 되어 흐르는 계곡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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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기온은 30도를 훌쩍 넘었다. 비라도 한 줄기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면서 내려다보는 금강이 온통 벌겋다. 예전에는 그리도 맑던 물이었는데. 여기저기 오탁방지막을 쳐 놓은 것이 꽤나 눈에 거슬린다. 가파른 길을 내려 공산성 안에 있는 영은사로 향했다. 영은사 앞마당에 여기저기 현수막이 걸려있고 천막이 있다. 금강선원이다.

선원의 앞 커다란 나무 밑에는 한 사람이 앉아있다. 릴레이 단식투쟁 중이라고 한다. 대전 충남, 충북의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단식투쟁. 하루 종일 이 무더위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저리 앉아 말없는 함성을 지르고 있다.

금강선원 이 더위에 천막 안은 그야말로 찜통이다 

맑던 금강이었는데...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몇 사람의 관광객이 혀를 찬다. 맑았던 금강이 이렇게 벌건 흙탕물이 되었다는 것에 우려를 나타낸다. 그래도 나중에는 괜찮을까? 라는 질문을 해보지만 딱히 올바른 해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해우소 앞에 걸려있는 문구가 크게 보인다. ‘청계천으로 됐다. 4대강 사업 중단하라’

무엇을 위한 공사인지 정확한 것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있고, 그 반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무더위에 나무 그늘이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먹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있다가는 탈진이라도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생명 금강에 사는 생명들을 표현했다.
삽질 삽질을 멈추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외침이...


‘문수스님도 이 절에서 정진을 하셨는데’

더위에 오르막길을 올라서인가 땀이 주체를 하지 못하겠다. 잠시 인법당 마루에서 쉬겠다고 하니 뒤편에 시원한 지하수 물이 있다고 좀 씻으라고 하신다. 단식 중인 분을 보면서 그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선뜻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를 못한다. 마루에 앉아 계시던 스님이 냉커피 한 잔을 타오라고 하신다. 더위에 물을 목으로 넘기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무더위에 저렇게 하루 종일 버티고 있는데.


기와 한 장 분향소를 알리는 기와와 찜통이 된 분향소 안


기와 한 장에 글이 쓰여 있다. 문수스님 분향소라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내 땀이 배어나온다. 조촐한 분향소 옆에 자리한 문수스님의 사진. 처음 군위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부터 많이도 보아왔던 사진이다. 그런데 벌써 잊혀 가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들인가 보다.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돌아선다. 마루에 앉으니 스님께서 한마디 하신다. “92년인가 문수스님이 이곳 영은사에도 한 6개월 정도 정진을 하셨는데”.  이곳에 금강선원이 자리를 한 것도, 문수스님의 분향소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도 그래서인가.

단식 릴레이 단식투쟁 중인 사람들.


저렇게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는 것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그런데 왜 이래야만 할까? 아직도 그치지 않은 소리 없는 함성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저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속이라도 덜 답답하게.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국도변을 지나다가 보면,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한 마리의 용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 같은 이 소나무는, 수령 400년이 지난 천연기념물 제426호 대하리 소나무이다.

대하리 소나무는 반송의 일종으로 그 줄기가 마치 용이 뒤틀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2개의 우산을 맞대어 놓은 것 같다는 대하리 소나무. 그 모습은 여느 소나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26호 대하리 소나무

마을의 수호신이었으나 이제는 시들해

대하리 소나무는 높이가 6m, 가슴 높이의 둘레가 3m가 넘는다. 가지는 동서로는 15m 정도에 남북으로는 20m가 넘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가까이 가서보니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오랜 세월을 지나다가 보니 그런 세월의 아픈 상처가 생기는가 보다.

대하리 소나무는 주변에 황희선생의 영정을 모신 장수황씨 종택사당과 사원이 있어, 마을 이름을 ‘영각동’이라 불렀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과 가내의 안녕을 기원하는 영각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소나무 잎에 돌이 음식을 진설하는 지석이었다.

소나무의 앞을 보니 제단으로 사용했을 지석이 보인다. 사람들이 그동안 이 소나무를 얼마나 정성을 다해 위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영각동제도 중단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변하면 사람들도 그러한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주인의 마음이 2세를 키우고 있어

소나무를 찍으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식당에서 한 분이 나와 제지를 한다. 이유를 알고 보니 대하리 소나무가 있는 대지의 주인이란다. 소나무야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하는 것이지만, 이 땅의 주인이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 분이 주인이 되는 셈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사진을 찍는다고 소나무를 해칠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대하리 소나무는 반송의 일종으로 마치 용이 뒤틀고 있는 형상이다.

미처 이야기를 하지 못했음을 사과를 하고, 소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소나무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소나무로 인해 주변 정리를 함부로 할 수도 없어서 많은 불이익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러다가 따라오라고 하여 건물 뒤로 따라갔더니, 작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바로 천연기념물인 대하리 소나무의 2세라는 것이다. 그저 지정만하고 아무 대책도 세워놓지 않아, 수령이 많아 죽어간 나무들을 보아온 터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는데, 대하리 소나무는 2세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제법 큰 나무들도 보인다.


수술을 안 부위가 안에서 썪어가고 있다고 한다.
식당 건물 뒤편에 자라고 있는 대하리 소나무의 2세들.

나무가 상해 잘라내고 외과수술을 한 곳이 드러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 이렇게 방치를 할 수가 있나 싶었는데, 그나마 2세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수많은 천연기념물들이 훼손이 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정성을 드리고 있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탁주라도 한 잔 마시면서 오랜 시간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정해진 일정 때문에 소나무를 뒤로한다. 매번 상처를 받아 돌아오는 답사 길이었는데, 모처럼 찡그리지 않는 날이었던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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