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작가 ‘엉겅퀴 소풍전’을 만나다
행궁동 크로키에서 6월 말일까지 전시
작가 이주영. 중앙대 서양학과를 졸업한 이주영 작가는 2003년 수원미술전시관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 후 2009년과 2011년 동 장소에서 2회와 3회 개인전을 열었다. 딴 작가들보다는 개인전을 연 횟수가 그리 많지 않다. 2013년 해움미술관에서 제4회 개인전을 연 후 2016년 수원미술관에서 제5회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주영 작가와 형·아우로 부르는 사이이다 보니 굳이 작품전이라서 찾아갔다고 하기보다는 소식이 궁금해 찾아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벌써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이주영 작가의 그림 속에는 민초들의 모습이 있다. 제4회 개인전을 찾아갔을 때는 지동과 행궁동의 골목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늘 그런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주영 작가의 그림이다.
3일,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81-13에 소재한 크로키에서 5월 1일부터 전시를 시작한 이주영 작가의 ‘엉겅퀴 소풍전’을 보기위해 크로키를 찾았다. 크로키는 지역 화가들이 즐겨 전시하는 공간이다. 오후 늦은 시간 키로키에 몇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크로키는 저녁에만 문을 여는 전시공간 겸 음식점이다.
“제주도로 내려가서 고생 좀 했어요. 그곳에서 몸도 많이 상했고요. 무엇보다 생활을 하면서 막노동 등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정말 힘든 나날을 보냈죠. 그래도 작업을 할 수 있어 버틴 것이죠. 이번에 엉겅퀴 소풍전에 걸린 작품들도 제주도에서 생활하면서 그린 것이고요”
이주영 작가는 현재 공방을 열고 있는 곳이 제자가 준비해 놓은 장소라고 한다. 그곳이 넓기 때문에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이주영 작가에게 언제인가? “왜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에 “그려야 하니까요. 저에게 그림은 운명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죠. 좋아하는 것들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잘 맞는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 작가는 제주도로 내려가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그림을 이번에 전시를 열게 된 것이다. ‘엉겅퀴 소풍전’은 어찌 생각하면 작가 스스로가 제주도의 생활에서 어려운 시간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세월의 아픔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엉겅퀴가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이주영 작가는 자신의 행복이 바로 그림에 있다고 했다. 이주영 작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돈으로 따지면 엄청날 것 이라고 하며 웃은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웃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작가가 제주도의 생활을 마치고 수원으로 올라와 첫 번째 전시를 크로키에서 연 것이다
엉겅퀴는 전국의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열매는 수과로 식용 및 약용으로 쓰인다. 그런 엉겅퀴를 소재로 작품전을 연 이주영 작가는 “제주도에서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바람에 날리면서도 잘 자라고 있는 엉겅퀴를 작품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작품활동이 힘든 제주도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있도록 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이주영. 그는 1980년대부터 1990년 초까지 격동의 세월에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민초들이 한이 깃들어 있다. 그의 작품소재가 항상 자연과 더불어 우리가 늘 만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풍경인 것도 이주영 작가의 작품을 담아내는 특징이다. 행궁동 크로키에서 전시중인 이주영 작가의 ‘엉겅퀴 소풍전’. 시간을 내어 전시공간을 찾아가 작가의 그림세계에 대한 이야길 나누어보길 권한다.
지역 통장들도 모르는 구조물 누가 세웠나?
시와 지역이 소통 안되는 일방적인 관계부서
“이게 뭐예요? 치워주세요.”
“지동 통장들과 상의도 안 된 이런 쉼터가 왜 있어요? 그것도 쓰레기적치장 옆과 냄새나는 하수구 옆에 만들어 놓고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을”
2일 팔달구 지동 통장들 모임인 통친회 카톡방에 비난이 난무한다. 그것은 비로 지동 12곳에 설치된 노인들을 위한 의자 때문이다. 지동은 수원시에서도 노인층이 가장 많은 마을이다. 수원시 노인층이 9%인데 비해 지동은 그보다 높은 14%나 된다. 그것은 팔달구 지동이 오래된 마을이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도 40~50년 이상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지동이 올해까지 ‘안전마을 만들기’ 지역으로 선정돼 그동안 안전마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 안전마을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어르신들이 길을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쉴 수 있는 쉼터를 마을 곳곳에 조성한 것이다. 그런 쉼터가 여기저기 만들어져 팔달문 앞에 소재한 전통시장을 보고 돌아오는 어르신들이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설치장소 지역주민들과 상의는 해 보았나?
며칠 전부터 지동에 설치하기 시작한 쉼터는 하필이면 쓰레기적치장 옆과 냄새나는 하수구 옆, 어르신들이 쉬기 위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에 마련됐다. 쉼터는 CCTV가 있는 옆에 마련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지역주민들과 상의 한 마디 없이 장소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시에서 주관하면 지동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일까? 소통이 되지 않는 일방적인 시 관계부서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영호 지동주민자치위원장도 이렇게 마련해 놓은 쉼터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쉼터를 마련하면서 지역 행정복지센터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설치했다는 것인데, 이런 소통없는 행정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통장들이 분개하고 있다. 2일 오전에 팔달구 새마을협의회 문강오 회장과 쉼터를 돌아보면서 한숨밖에 안 나온다.
‘이런 것을 마련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어요. 의자를 놓은 곳이 정말 어이가 없네요. 통장님들이 화가 난 것도 당연하잖아요? 왜 하필이면 쓰레기적치장 옆과 냄새나는 하수구 옆일까요? 안전마을을 조성한다고 어르신들이 걷다가 쉴 수 있는 의자를 마련한 것은 좋은데 마을 주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이야기밖에 안되죠.“
지역과 소통하는 행정 필요해
안전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 안전마을이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인지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일방적인 밀어붙이기 식이라면 과연 그것이 안전마을을 조성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어르신들이 다리가 불편해 쉴 수 있는 쉼터를 찾아다니다 보니 수원제일교회 펜스에 붙여진 구조물이 보인다.
지동이 안전마을이라고 펜스에 붙어있는 지동안전마을 안내. 한마디로 자랑을 하기위해 마련한 것일까? 정작 안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구조물을 왜 예산을 들여 만들어놓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단지 안전마을을 만들었다고 자랑할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 비탈이 진 교회 담벼락에 조성한 안전마을 자랑거리. 그것을 보면서 속이 불편하다.
지동은 문화재보호구역 지정과 주택재개발사업 지연으로 인해 최근 15년간 지역인구가 5,122명이 감소했으며, 공가 및 폐가의 방치로 우범지대로 전락할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에는 지역안전지수 가운데 범죄분야 4등급으로 개선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강력범죄사건과 침입절도 및 강도 등 지역주민들의 불안감이 극에 달했던 지역이다.
이런 지동의 안전마을 조성사업은 지역주민 누구나가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안전마을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이 필요한 것이라야 한다. 그것과는 무관한 이런 거리의 쉼터나 펜스에 자랑을 하는 문구는 곤란하다. 안전마을은 지역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민자치위원이나 통장들이 필요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 “통장들과 상의해서 설치장소를 바꿀 것”이라는 대답이지만, 그전에 제대로 설치를 했으면 이런 볼멘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5월에는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찾아가자
다양한 볼거리 가득한 팔달구 지동 창작센터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가 2019년 들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창작센터 근무자로 지난 달 새로 부임한 시인이자 미술인문학강사, 칼럼리스트인 우경주씨가 창작센터 근무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제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던 창룡마을 창작센터 활성화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렇게 좋은 공간을 왜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공간은 수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요. 이런 공간을 잘 활용하면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는 수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문화공간이 되고, 주민들이 이곳을 이용해 문화적으로 다양한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는데 말이죠”
우경주씨는 잘 꾸며진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방치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앞으로 창작센터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명실공이 수원에서 가장 알찬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한다. 그렇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가 어느 곳보다 문화적인 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행사 준비하는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우경주 씨가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근무를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동아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우경주씨는 동의중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며 서울대학교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아이파크미술관 등에서 도슨트로 교육담당을 맡기도 했다. 또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예술문화 칼럼을 맡아 기고하기도 했다.
그런 우경주씨가 창룡마을 창작센터가 카페 외에는 전시관이나 강의실 등이 활성화 되지 못하고, 제대로 된 활용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5월부터 본격적으로 이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우선은 2019년 상반기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한다.
우경주씨는 5월 9일과 30일 두 차례에 걸쳐 ‘시와 그림으로 여는 행복하나 봄’이라는 주제로 창작센터 2층 갤러리에서 마르크 샤걀과 피에르 오귀시트 르누아르 등에 대해 미술인문학 강의를 하겠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정인성, 정다겸, 정다운 등의 시낭송가가 함께 아름다운 시낭송도 들려준다는 것이다.
한글 깨우치지 못한 어르신을 위한 문해교육 프로그램도 준비
지동은 수원시 각동 중에서도 노인인구가 가장 높은 마을이다. 그 중에 아직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문해교육 프로그램으로 ‘배움으로 기쁜 날’이라는 한글학교를 연다.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전반기에는 모음과 자음, 단어 등 기본기를 익히고, 후반기에는 짧은 글씨기와 자서전 쓰기 등 교육을 통해 어르신들이 글 솜씨를 자랑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한 5월 29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는 지동 창작센터 플리마켓을 열겠다고 한다. 이 플리마켓에는 핸드메이드 제품, 제작과 중고물품 판매를 하며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이렇게 창룡마을 창작센터의 활성화를 위해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 우경주씨는 자신의 인맥과 재능가부 등으로 모든 행사를 마련하겠다고 한다.
“제가 이곳 창룡마을 창작센터에서 근무하는 동안 무엇인가 이 좋은 공간을 이용해 다양한 행사를 가져 활성화시키려고 합니다. 저는 이 좋은 공간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그렇다고 예산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제가 많은 곳에서 강의활동 등을 하면서 도움을 주었던 분들과 함께 재능을 기부하려고 하는 것이죠”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기 때문에 창룡마을 창작센터가 휴무인데도 불구하고 9일에 열릴 행사준비를 위해 시낭송가들과 준비를 하고 있던 우경주씨는 앞으로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한 사람의 노력이 침체되어 있던 공간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경주씨의 그런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돕고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 아닐까 한다.
내차만 주차할 수 있다면 화분쯤이야 치워도 되지
팔달구 창룡문로 34번길(지동)에 소재한 창룡마을 창작센터는 지동 주민들이 이용하는 다목적 이용공간이다. 지동(동장 이현희) 창룡마을 창작센터에는 공구도서관을 비롯하여 카페, 강의실, 전시관 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동주민들은 물론 지동 벽화길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나 창작센터를 이용해 모임을 갖는 동아리 회원들이 자주 들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더욱 지난해부터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화성 성 밖 오래된 집들이 보상을 받고 떠난 자리에, 지동행정복지센터에서 각종 야생화 및 메밀꽃, 코스모스 등의 씨를 뿌려놓았기 때문에 지천으로 피는 꽃을 관람할 수도 있다. 수원화성사업소 측에서는 이곳 창작센터를 통해 화성으로 바로 오를 수 있는 산책로 진입도로까지 확보해놓은 상태이다.
이렇게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창작센터 출입문을 막아 함부로 주차를 해놓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지동에서는 이곳에 원형화분 및 네모난 목재화분 등을 설치해 놓았다. 이렇게 화분 등을 이곳에 놓은 것은 차량들이 주차하면서 화성을 바라볼 수 있는 경관 및 창작센터를 이용하는 고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화분을 이곳에 설치하자 창작센터를 이용하는 주민 및 관광객들도 ‘보기 좋다’는 평을 하면서 반기는 모습이었다.
화분 함부로 이동하고 차를 주차하는 몰지각한 사람들
지동행정복지센터는 이곳에 나무와 다양한 꽃을 심어놓은 화분을 설치해 창작센터 정원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해 놓았다. 그런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찾아오는 관람객과 주민들도 창작센터 앞마당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차를 한 잔하면서 수원화성을 관람하기도 하고 앞에 핀 꽃을 감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곳 창작센터 앞에 조경과 차량들의 주정차를 방지하기 놓은 화분이 제자리를 떠나 화단 안이나 둔덕 위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이곳에 차를 세우기 위해 사람들이 회분을 함부로 자리를 이동시킨 것이다. 마을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철마다 꽃을 바꾸어 심어놓으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화분이 일부 몰지각한 운전자들에 의해 훼손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주차공간이 부족하다고 이렇게 함부로 화분을 옮겨놓고 차를 주차하면 되겠어요. 사람들이 기본적인 주차질서는 지켜야하는데 말이죠. 저것보세요 화분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단 한 개도 없어요” 창작센터에서 일을 돕고 있는 봉사자들의 볼멘소리다.
심지어는 남의 집 앞에 놓은 화분도 들고 가
지동은 비탈길이 많은 곳이다. 겨울철이 되면 비탈길을 오르내리던 차들이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한다. 그런 빙판사고로 인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집들도 있다. 도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집들 중에 외벽으로 도시가스관이 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들이 미끄러지면서 도시가스관과 충돌하면 대형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그런 주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안전한 마을을 추진하고 있는 지동에서는 가스관이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는 곳을 펜스로 차단하고 그 앞에 화분을 놓아 차들이 주차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펜스 앞에 놓은 화분을 누가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지동 271~222, 가스관 앞에 차들이 주차할 수 없도록 놓은 화분을 누군가 가져간 것이다. “꽃씨까지 뿌려놓았는데 누군가 지난밤에 가져갔어요, 사람들이 기본적인 양심을 갖고 살아야 하는데 이젠 그런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않네요”
비탈길 도로변에 사는 것이 늘 불안해 화분과 펜스로 경계를 삼아 안심이 되었는데 그런 차량충돌을 막을 수 있는 화분까지 가져가 버렸다고 271~222에 거주하는 이아무개 할머니는 속상해 한다. 아무리 나만 편리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행정이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하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연등행렬 장관
5월 8일이 음력 4월 초파일, 사전에 축제분위기
‘부처님 오신 날’은 5월 8일이다. 음력 4월 초파일이 부처님 오신 날인데 그 전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알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난타의 공양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이란 생각이다. 부처님이 영취산에 계실 때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등을 받쳤는데 지극한 정성과 발원으로 바친 난타의 등불만이 다른 모든 등불들이 꺼진 후에도 홀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본 부처님께서 난타의 지극한 정성을 알고 "이 여인은 등불공양의 공덕으로 성불할 것이며 수미등광여래라 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연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연등은 불교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동진의 승려인 법현이 인도를 다니면서 쓴 구법기행기(339-414년)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연등에 관한 기록이 보인 것은 신라 경문왕 6년(866)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15일에 황룡사로 행사하여 연등을 켜고 꺼지지 않도록 간등(看燈)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진흥왕 때는 팔관회와 함께 연등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등의 습속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등회의 유풍인 연등행렬
연등회는 고려 태조 때 <훈요십조>에 의해 거국적인 행사로 행해졌다. 이후 성종 때 유학자들의 강한 반대로 일시 폐지했다가 현종1년인 1010년 윤3월에 다시 행했다. 그로부터 매년 2월 보름에 연등회를 베풀었다. 초파일 연등은 석가 탄생을 축하하는 연등으로 현재 인도를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불교의 가장 신성하고 장엄한 행사이다.
4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의종 때 백선연이 4월 8일에 점등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초파일 연등을 열면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등회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의 음력 4월 초파일에 행하고 있는 연등회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팔관회와 연등회, 그리고 1414년부터 기록에 보이고 있는 수륙제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인 음력 4월 초파일이 되면 사람들은 등을 밝히고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등공양으로 연등회를 열고 있다.
행궁 광장 낮부터 시끌벅적
연등행렬이 이루어진다는 27일 오후 행궁광장으로 나갔다. 오전부터 부스를 치고 각종 체험과 놀이 등으로 행궁광장이 시끌벅적하다. 이렇게 하루 종일 북적대던 연등축제는 오후에 점등식을 갖고, 이어 모든 수원의 불자들이 행궁광장을 출발해 팔달문을 거쳐 장안문을 돌아오는 연등행렬로 장관을 이룬다.
불교에서는 육법공양이라는 것이 있다. 육법공양(六法供養)이란, 향․초(등)․꽃․과일․차․쌀의 여섯 가지 공양물을 부처님께 올리는 의식으로, 그 공덕을 시방 삼세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여, 나와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탈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의식이다. 그 중 두 번째로 올리는 등(초)을 ‘반야등(般若燈)’이라고 부른다.
연등행렬을 보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로 나왔다. 그 틈에서 사진촬영을 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 9시에 집을 나서 하루 종일 취재를 하다 보니 밤 9시가 다되었다. 이렇게 돌아치는 날이 되면 몸은 파김치가 된다. 그래도 하루해를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감하는 연등행렬. 그 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나도 하나의 연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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