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문화재는 근대 수원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大韓民國 登錄文化財)는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느껴 문화재로 지정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등록문화재는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에 생성·건축된 유물 및 유적이 중점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 수원에는 모두 6점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팔달구 교동 741에 소재한 구 수원문화원 건물과, 등록문화재 제598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달구 매산로 119(교동, 가족여성회관)에 소재한 구 수원시청사, 등록문화재 제688호인 팔달구 효원로 1(매산로3가, 경기도청)에 소재한 경기도청사 구관, 그리고 등록문화재 제689호인 팔달구 고화로130번길 21(화서동, 경기도청어린이집)에 소재한 경기도지사 구 관사이다.
그리고 국가등록문화재 제697호인 구 소화초등학교와 제698호로 지정된 수원 구 부국원 건물이 있다. 수원 구 부국원은 옛 가로의 근대적 경관 형성과 도시의 역사적 변화를 보여주는 옛 관청 건물로, 근대기 농업행정과 농업연구의 중심지로서 수원의 역사와 정체성을 말해주는 건물이다. 이 중 경기도청 건물과 화서동 경기도청어린이집은 경기도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남은 네 곳의 등록문화재는 수원사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테마여행으로 돌아보는 등록문화재, 더 많은 관심 가질 수 있어
수원여행을 하면서 주제별 테마여행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하면 오래지 않아 기억에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주제별 테마여행을 하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30여 년 동안 잔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많은 자료를 아직도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제별 테마여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6일 아침, 이번에 수원여행은 국가등록문화재를 돌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먼저 등록문화재 제697호인 구 소화초등학교를 찾아갔다. 현 수원성당 내에 소재하고 있는 구 소회초등학교는 1934년 성녀 소화테레사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으로, 1934년 10월 1일 ‘애주애인(愛主在人)“을 교훈으로 4년제 교육과정으로 소화강습회를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현재 소화초등학교라는 명칭은 1946년 1월 24일 6년제 장규 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아 같은 해 10월 1일 수원소화국민학교로 개교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원성당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들려 현재 소화초등학교 건물을 무엇으로 사용하고 있느냐고 관리자에게 묻지 “현재는 뽈리화랑으로 사용 중”이라면서 “전시를 할 때는 1층을 주로 사용하고 2층은 교육장소로 사용한다”고 대답한다.
허락을 받고나서 뽈리화랑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 소회초등학교로 들어섰다. 겨울이라 전시가 없어 실내는 썰렁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벽면에 ‘소화초등학교 옛 교장에서 보이는 풍경’이라는 글이 보이고 한편에 옛 전시된 기물이 있지만 어두워서 제대로 판별하기 어렵다. 소회초등학교 관람은 봄이 되면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
구 수원문화원과 구 수원시청사를 돌아보다
구 소회초등학교를 돌아보고 난 후 화성행궁 앞을 지나 행궁동 공방길과 로데오거리를 거쳐 국가등록문화재 제597호인 구 수원문화원과 598호인 구 수원시청사를 방문했다. 구 수원문화원 건물은 과거 수원문화원(당시 원장 고 심재덕)으로 사용할 당시부터 수시로 드나들었던 건물이라, 그 곳의 옛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598호인 구 수원시청사도 수원에서 생활할 때 팔달구청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현재는 수원가족여성회관으로 사용 중인 구 수원시청사를 먼저 방문하여 건물 안내자에게 구 수원문화원 건물을 어떻게 시용하는가를 물었다. 안내자의 답변은 “아직은 날이 추워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2월부터 각종 전시가 열린다”고 대답한다. 수 수원시청사 1층은 현재는 기온나레라는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구 수원문화원과 구 수원시청사를 돌아보고 난 후 가족여성회관 뒷길에 있는 구 부국원건물을 찾았다. 현재 이 건물은 근대문화공간 수원 구 부국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으며 전시공간과 체험행사 등을 운영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수원시의 국가등록문화재 6점이 모두 팔달구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돌아보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수원은 주제별 테마관광 자료가 상당하다. 어느 특정장소를 돌아보는 것보다 이렇게 주제별 테마관광을 하면서 그 시대의 시대상이나 역시적인 일을 기억해 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이들과 동행하여 수원관광에 나선다면 난 필히 주제별 테마여행을 하기를 권하고 싶다. 국가등록문화재가 갖고 있는 옛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경기재인청 페청 100년이 지난 세월, 이제 정체성 찾을 때
수원은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지였다. 한 때 수원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이 집약된 곳으로 전국을 누비는 재인들이 모두 수원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그런 수원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전통문화와는 거리를 두고 서구문화에 치중한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지역이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산실이요 수백 년 동안 전통문화를 이어가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에 들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내팽개친 꼴이 되었다.. .
과거 일제치하에서도 수원은 우리나라 모든 재인이 거쳐 기던 곳이다. 제인청은 광대청(廣大廳)·장악청(掌樂廳)·신청(神廳)·풍류방(風流房)·공인청(工人廳)이라고도 하였다. 한말 재인청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삼도에 두었는데, 경기도의 재인청은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현 오산시 부산동)에 있었다.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우리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재인청이 폐청됐다. 폐청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해있던 재인의 수는 전국에 4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1925년 당시 인구 12,997,611명) 그 방대한 조직은 현재의 예총이나 민예총을 능가하는 대단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재인청의 조직을 관리하던 곳이 바로 삼도의 재인청 중 당시 수원군에 소재하고 있던 경기재인청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재인청 직제는 도 재인청을 비롯해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 하고, 군 소재 재인청의 우두머리는 청수(廳首)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 도 재인청의 총수였던 대방의 아래 두었던 각 도의 책임자인 도산주(都山主)로부터 행정적인 지시를 받았다. 어느 지방이던 재인청에 매였던 광대나 재인들의 행정적인 업무는 청수가 거느린 공원(公員)과 장무(掌務)에 의하여 처리되었다.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은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한 기, 예능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아키바 다카시의 <조선 무속의 연구>에 의하면 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모든 재인(광대, 재인, 소리꾼, 화랭이, 춤꾼 등을 합친 모든 예술인)들을 총괄하는 자리였으며, 그 밑에는 좌우도산주가 있어 재인들을 관리했다. .
재인청의 폐청으로 뿔뿔이 흩어진 재인들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년에 걸쳐 경기, 충청, 전라 삼도에 존속했던 재인청은 폐청 이후 제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이 배운 학습을 이용해 단체를 조직해 맥을 이어갔다. 그들 중 일부가 오산 부산리에 거주하던 이용우 가계로 12대 째 대를 물린 전형적인 산이계열의 집안이다.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의 경기재인청 도산주인 이종하의 집에는 『경기도 창제도청안』1책, 『경기도 재인청 선생안』 1책, 『경기도 창재청』 2책이 있어서, 1784년부터 1920년까지 130여 년에 걸쳐 재인청에 소속되었던 재인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아 우리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 활동무대는 수원화성이었다.
이렇게 방대한 조직으로 운영되던 재인청이 사라지고 난 뒤, 현 수원화성행궁 운한각 옆 풍화당에 거주하던 고 이동안은 이곳에서 재인청 춤 선생인 스승 용인춤꾼 김인호로부터 전수받은 경기재인청춤을 제자들에게 전승시켰다. 또한 이용우도 수원영동거북산당을 근거지로 경기도당굿을 전승시켰으며 인천 동막, 부천 장말 도당굿 등에서 지역에 전승되던 전통예술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재인청이라는 거대한 민간예술조직이 와해되고 난 후 기능을 가진 각 예인들은 파별로 전통문화를 이어나갔다. 그 중에서도 이용우와 이동안의 예술세계는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산주 이종하의 아들 이용우는 많은 재인의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기도당긋이 1990년 10월 10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화성출신 이동안 역시 경기도재인청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 이동안은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손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화실은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동안은 용인의 재인청 춤꾼 김인호로부터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는 줄타기를 전수받았다. 하지만 그는 춤으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로 지정받았다.
재인청 폐청 100년의 아픔, 이제 수원에서 되살려야 한다
이렇게 많은 뛰어난 예능을 보유하고 있던 재인들이 모인 경기재인청. 이동안이 수원화성 운한각 풍화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수원은 전국의 수많은 예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런 경기재인청이 폐청된지 올해로 100년. 그 10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일 년 동안 수원에서 무대에 오르는 전통공연을 보면 미비하다. 그래도 이용우 가계와 이동안 가계로 이어진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몇몇 후학들이 애를 쓰고 있지만,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지원은 극히 미비한 상황이다. 40여 년 동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년 공연을 두 차례씩 벌이고 있는 안택굿 명인 고성주는 한 번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늘 자비를 들여 무대를 마련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국의 수많은 전통예술인들을 관리하고 전통문화를 지켜왔던 경기재인청. 그 중심에 있던 수원으로서는 재인청 폐청 100년이 지난 2020년을 맞아 수원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는 경기재인청에서 이어진 전통예술을 찾아 그 정체성을 지켜가야 할 것이다.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활용한다
“그동안 지동 창룡문로 34에 소재한 창룡마을 창작센터가 정작 주민들의 공간으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동은 마을에 노인층이 두텁고 다문화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소통이 어느 곳보다도 활성화가 돼야 하는 곳입니다. 저희 창룡마을 창작센터는 앞으로 온전히 주민들이 즐겨찾는 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지동행정복지센터 김민수 동장은 “그동안 창룡마을 창작센터가 일개인의 창작공간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었습니다.”라면서 2020년은 그동안 창작센터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작가들을 내보내고, 창작센터를 활용하여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곳으로 활용하겠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면서도 주민들이 즐겨 찾지 못하는 곳으로 그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는 근 10년간이나 지역에 흉물로 방치되어 있던 구 서울목욕탕을 긴 시간 우여곡절을 거친 후 시비를 들여 구조변경 후 새롭게 창작센터로 문을 연 곳이다. 2016년 4월 29일 오후 지역주민 300여 명이 모인가운데 개관식을 가진 창작센터는, 개관식을 가질 때만해도 지역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기대했다.
개인의 창작공간으로 변한 창작센터
그러나 주민들의 기대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창작센터에 입주한 작가가 창작센터를 자신의 전용공간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1층 소통마루는 물론 3층 작업실까지 작가는 창작센터가 개인의 작업공간인 듯 활용해왔다. 물론 작가로 인해 지동이 몰라보게 달라진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나 개인을 위한 작업장으로 창작센터 전체가 변해가는 것에 대해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민수 지동장은 그동안 창작센터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가, 올해부터 창작센터 전체를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2020년 1월부터 이곳을 이용해 동아리 강좌를 시작했다. 현재 창룡마을 창작센터에서 지역주민들이 배울 수 있는 과목은 플루트(목), 보타니컬 아트(화), 캘리수채와 토탈공예(수), 연필 인물화(화). 어린이 아이클레이(목) 등 모두 다섯 강좌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처음 시작단계라 많은 분들이 수강신청을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홍보를 하고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지역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한 곳이니, 지역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바꿔야죠. 3층 공간은 동아리방으로 한누리, 가온누리, 밝은빛누리 라는 명칭으로 동아리방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창작센터 전체를 온전히 지역주민들에게 돌려줄 것
9일 오전, 창룡마을 창작센터를 찾아갔다. 그동안 거의 시용하지 않고 있던 3층에서 플루트 소리가 들린다. 목요일에 강습하는 플루트 동아리들이 강사의 설명을 듣고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다. 2020년부터 이곳을 온전히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는 1층에는 북카페와 각종 공구를 실비로 대여할 수 있는 공구도서관, 주민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소통마루가 자리하고 있다. 2층은 갤러리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은 전시는 물론 세미나와 강습회, 시낭송회, 각종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3층과 지하는 동아리방으로 주민들이 활용하여 문화예술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간이다.
김민수 지동장은 그동안 지역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작가의 공을 잊지는 않겠지만, 이곳은 일개인의 작업실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공간이라면서 작가에게도 자신의 물건을 모두 치워줄 것을 통보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마음 편하게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공간,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장소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이 즐겨 이용해야 할 공간이 그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는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지하에서 3층까지 이제는 전체를 주민들의 공간으로 활용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과 수원시의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수원시 권찬호 제19대 팔달구청장 취임식 열려
구민. 공무원간 신뢰·소통·첵임행정 등 강조
“권찬호 팔달구청장은 1982년 8월 처음 공직에 입문하였습니다. 2011년 지방행정사무관으로 승진 후, 매탄2동장, 광교동장, 시민소통기획관 등 주요 부서를 두루 거쳤으며, 2018년 7월 지방서기관으로 승진 후 수원시 행정지원과장과 복지여성국장을 역임하고, 2020년 1월 2일자로 팔달구청장으로 취임했습니다.”
2일 오후, 팔달구청 3층 대회의실에 모인 축하객 200여명은 권찬호 팔달구청장이 행사장으로 입장하자 모두 일어나 큰 박수로 맞이했다. 이날자로 팔달구청장으로 취임하는 권찬호 청장은 하객들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팔달구 한장수 행정지원과장의 소개가 끝난 후 권찬호 구청장은 취임사에 응했다.
이날 권천호 팔달구청장의 취임식은 팔달여성합창단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됐다. 축하공연에 이어 사회자가 참석인사를 일일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축하객으로는 지역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지구당위원장, 경기도의원, 수원시의원, 팔달구 각 단체장. 팔달구청 공무원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신뢰와 소통, 책임행정, 노민권상(勞民勸相) 의미 강조
권찬호 신임 팔달구청장은 단상에 올라 “지난해까지 팔달구를 위해 애쓰신 이훈성 전 구청장님의 뒤를 이어 수원시의 중심인 팔달구청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어깨가 무겁습니다”라면서 “팔달구는 수원의 중심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이 있는 수원의 중심구로 14개의 전통시장을 포용하고 있는 수원의 경제의 중심이자 역사적인 곳입니다”라고 취임인사말을 시작했다.
“저는 팔달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 팔달구민들과 팔달구 공무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이행해 줄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가장 먼저는 신뢰입니다. 신뢰는 구행정을 펼치는데 있어 기본입니다. 신뢰가 쌓이지 않으면 어느 누구라도 구행정을 따라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기에 모든 공무원들은 신뢰를 먼저 쌓아야합니다”라고 신뢰를 가장 먼저 쌓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권찬호 신임팔달구청장은 소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과 구민,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공무원들 간에도 소통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세 번째는 책임행정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하는 일에 대해 자신이 서질 않습니다. 모두가 내가 하는 일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합니다”라면서 마지막으로 수원시의 올해 화두인 노민권상(勞民勸相)의 의미를 깊이 새기자고 했다.
신임구청장에게 거는 기대 크다
이날 권찬호 팔달구청장 취임식은 식전공연, 참석인사 소개, 국민의례, 권찬호 구청장 약력소개, 구청장 취임사, 내빈축사, 꽃다발 증정, 기념촬영 순으로 이어졌다. 이병학 대힌노인 회 팔달구지회장은 축사를 통해 “권찬호 팔달구청장의 취임을 축하합니다. 엊그제 전임 이훈성 구청장의 퇴임식에 참석했는데 며칠 만에 신임 구청장님의 취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리면서 “흰쥐의 해라는 경자년을 맞이해 팔달구는 다산과 풍요로운 구행정을 펼칠 것으로 기대됩니다. 권찬호 구청장님은 수원시 복지여성국장의 직임을 잘 마치시고 오셨기 때문에, 팔달구 복지가 앞으로 더욱 기대됩니다.”라고 했다.
이날 취임식에 참석한 한 구민은 “앞으로 팔달구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복지와 여성문제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는 구청장님이 취임하셨으니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 많은 복지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원의 중심인 팔달구가 인계동, 메교동 등 재개발을 마치고 나면 아마도 수원의 중심구로써 모든 것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됩니다”리면서 팔달구의 행정이 변모할 것이라면서 팔달구에 거는 가대가 크다고 했다.
이날 권찬호 팔달구청장의 취임식에는 유난히 여성참석자들이 많았다. (사)경기여성단체수원시협의회 최수아 회장과 임원들도 취임식을 갖는 권찬호 구청장에게 축하꽃다발을 전달하는 등 많은 단체들이 축하꽃다발을 전달했다.
“내 나이 일흔여덟에 선생님이 생겼다”- 창작센터 언니들 시회전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김영화·최정란 사에서 보이는 인간승리
“육남매 맏이로
동생들 키우느라
학교를 못 갔는데
일흔여덟에
내게도 선생님이 생겼다.“
19일 오후,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2층 전시실 벽에 걸린 ‘선생님’이라는 올해 일흔여덟이 되신 김영화 할머니가 쓴 글이다. 어려서 동생들 키우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해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한 김영화 할머니는,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올해 5월부터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에서 시작한 우리말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에 우리글과 말을 배워 시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인간승리’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창룡마을 창작센터 근무자인 우경주 강사가 지역의 어르신 중에서 한글을 베우지 못한 분들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은 올해 5월이다. 매주 일주일에 2일씩 어르신들과 함께 공부를 하면서 음악도 들려주고 시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직접 일기를 쓰도록 권유했다. 그 결실이 글을 모르던 두 분의 어르신이 시를 창작할 수 있도록 된 것이다.
“세 분이 시작했는데 한 분은 중간에 포기를 하셨어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파요. 두 분 할머니들은 일주일에 두 번, 한 번에 세 시간씩 공부를 하셨어요. 그리고 오늘 시화전을 열게 된 것이죠” 우경주 강사는 “두 분 할머니들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셨어요.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전시회를 갖게 된 것을 보아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심을 그대로 간직한 ‘창작센터 언니들’의 글
시라고 하기보다는 동시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지만 단 몇 개월 만에 이렇게 자신이 직접 글을 짓고 그것을 써서 전시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다. 얼마나 그동안 한이 맺혔던 것일까? 글에서 나타나는 내용 그대로를 보아도 즐거움이 넘쳐난다.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는 것이 큰 자랑일 수밖에 없다.
“쇼팽의 야상곡 2번
샤갈의 그림감상
오늘의 단어 받아쓰기
나태주의 풀꽃 시 암송
내 나이에 처음으로 받은 선물, 공부“
올해 65세의 최정란 어르신은 나이가 들어 받은 선물인 공부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창작센터 2층 전시실에 19일부터 말일까지 전시되는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언니들‘의 시는 보기만 해도 코끝이 찡하다. 짧은 단 몇 구절의 글에 배움에 대한 열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보아주는 이 많지 않아도 마음 흐뭇해
19일 오후 4시 반에 시작한 시회전의 개막식에 모인 사람은 불과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창작센터 우경주 강사와, 이들 창작센터 언니들의 시화전에 축시를 낭송하기 위해 찾아온 안혜숙 시장송가, 그리고 지동행정복지센터 헹정민원팀 김경희 팀장과 주무관 한사람, 이날 시화전을 연 김영화 어르신과 최정화 어르신뿐이다.
하지만 이 행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행사였다. 그 의미나 뜻을 보아도 우리가 평생 만나지 못할 소중한 전시였기 때문이다. 글을 배우고 읽을 줄 알게 돼 직접 글까지 적어 전시를 하는 두 분을 위해 안혜숙 낭송가는 직접 한복을 차려입고 신경림의 ‘날자 더 높이 더 멀리 솔개를 위하여’를 낭송해주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했던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두 분의 어르신들.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보면서 “이분들의 삶은 말 그대로 정말 인간 승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동 창룡마을 창작센터 인근을 지나는 길이 있다면 전시실을 찾아가, 이분들에게 더 용기가 될 만한 글을 한 줄 남겨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맘이다. 정말 대단한 언니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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