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무관의 공신상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

 

사람들은 문화재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접근하기 수월한 성곽이나, 사찰, 석불, 석탑 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문화재의 종류는 그 가짓수가 엄청나게 많다. 그 중 우리가 문화재라고 해서 가장 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초상화는 대개 전각의 안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 전시실 2층에는 보물 제1489호인 박유명 초상화 한 점이 유리로 막아놓은 전시공간 안에서 사람들과 만난다. 20061229일 보물로 지정된 박유명 초상화 외에도 수원시에는 채제공 초상(일괄 시복본)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오위장을 역임한 박유명의 무관 초상화

 

박유명의 초상화는 가로 88.3cm에 세로 170cm인 족자형이다. 본관이 상주인 박유명은 선조 15년인 1582년에 출생하였다. 박유명의 부친은 찰방 박치관이며, 증조부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더불어 화를 입은 문강공 박세희이다.

 

 

 

박유명이 11세가 되던 선조 25년인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623년에 덕원부사로 재직할 때 이귀의 별장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상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6년인 1628년에는 가선대부로 가자되었으며, 그 뒤 당상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을 역임하였다.

 

오위장은 왕의 주변에서 군대를 통솔하던 관직이다. 오위장은 종2품의 벼슬이며 오위의 군사편제와는 무관하게 왕이 낙점하여 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기에 오위장은 임금이나 대군의 신임을 받는 무관들이 그 중책을 맡았다. 박유명이 오위장으로 발탁된 것은 인조반정에 가담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수원박물관에서 만난 무장 박유명

 

21일 오전 수원박물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수원박물관을 수차례 찾아갔으면서도 박유명의 초상화만 보고 왔지, 정작 무관인 박유명에 대해서는 글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박유명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초상화 등 미술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원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보물 한 점을 소개할 수 없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는 했다. 현재 수원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박유명의 초상화는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을 때 그린 공신상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초상화는 1623년경에 그린 초상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산군수, 당상선정관, 오위장 등의 벼슬을 거친 박유명은 사후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박유명 초상은 17세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호랑이 흉배의 무관초상화로서 주목된다. 이 외에도 후대의 이모본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한 점 있다. 이 이모본은 원본과 거의 동일한 형상이며 안료는 보다 선명하다. 하지만 이모본은 원본과 양식적으로 상이하며 작품의 수준도 다소 떨어져 원본만 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박유명 초상은 오사모에 운문이 없는 단령을 입은 채 공수자세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 초상은 17세기의 전형적인 공신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미간에 나타난 가는 세로주름과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표현한 얼굴은 무관의 강인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수원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 제1489호 박유명 초상. 비단에 채색을 한 이 초상화 한 점 때문에 수많은 자료들을 검색해 보고는 했다. 공부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경북 김천시 대항면 북암길 89(운수리) 직지사 대웅전 앞에 보면 두 기의 석탑이 마주하고 있다. 보물 제606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聞慶 道川寺址 東西 三層石塔)’ 이 탑은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 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웅전은 보물 제1576호로 임진왜란 직후 재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과 앞에 동,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두 탑으로 인해 직지사는 2탑식 중정형 가람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두 탑은 생김새가 거의 같게 조성을 했으며, 각 부분의 조성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한 자리에 보물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은 그리 흔치가 않다. 직자사에는 이 외에도 석탑 두 기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어 가히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석탑들은 모두 직지사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다. 대웅전 앞 석탑 2기는 문경 도천사지에서, 그리고 경내에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은 도천사지와 강락사지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들이다.

 

 

 

 

닮은꼴로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인 418년에 아도 화상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 되었다 벌써 16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낸 고찰이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두 기의 석탑은 마치 쌍둥이를 보는 듯하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짠 기단은 4면의 모서리에는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고, 중앙에는 탱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우주를 새겨 놓았다.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게 조성을 했으며, 밑면 받침은 1층과 2층은 5, 3층은 4단으로 조성했다.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위로 들려져 있으며, 꼭대기에 올린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탑들은 대개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준다. 직지사 문경 도천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대웅전도 보물 제1576호로 지정

 

직지사에는 원래 조선초기의 건물인 대웅광명전이란 전각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선조 35년인 160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절의 준심 전각인 대웅전에는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셔 놓았다.

 

인조 27년인 1649년에 중영이 있었고, 영조 11년인 1735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직지사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은 중심 법당답게 짜임새가 있으며 천정을 높이하고 절제된 장식으로 치장을 해 장엄함이 엿보인다. 대웅전 안에 부처님을 모신 수미단은 효종 2년인 1651년에 조성한 것이다.

 

 

 

 

직지사 대웅전은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까지는 좌측의 계곡을 끼고 지형에 맞추어 휘어져 올라온 북쪽에 위치하며, 만세루에서 대웅전에 이르기까지는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선당이 위치해 있으며, 길이 9m에 이르는 수미단에는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을 소박하게 조각해 놓았다.

 

대웅전은 뒷벽이 떨어져 나간 곳도 있으며 후면 전체를 문을 달아 놓았다. 특히 덤벙주초를 놓은 위에 올린 기둥은 일정하지 않게 구부러진 나무의 형태를 그냥 사용하여 자연스런 미를 더하였다.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전각으로 우리 건축시 연구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 (중산리) 보경사 경내에는 고려시대 5층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보경사 적광전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금당탑이라고 부른다. 높이 약 5m 정도의 오층석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고려 현종 14년인 1023년에 건립하였다.

 

보경사는 내연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명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 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지명법사와 함께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고 보경사라고 했다. 경내에는 보경사원진국사비(보물 252)와 보경사부도(보물 430)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 및 5층석탑 등이 있다.

 

 

 

 

단아한 보경사 오층석탑

 

고려시대 탑의 특징은 화려하지 않다. 단아한 모습으로 석재를 올려 탑을 쌓는 것이 특징이다. 보경사 오층석탑 역시 탑이 단아하다. <보경사 금당탑기>에 보면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 등이 고려 현종 14년이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오층석탑을 쌓았다.

 

 

보경사를 찾아간 날은 날이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 같은 날 오후였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니 늘어선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대웅전에 들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절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소나무 향이 짙게 드리운 것이 곧 비가 내릴 모양이다.

 

멀리까지 나갔으니 길을 재촉하야만 했다. 날이 흐려 금방이라도 어두움이 내리 깔린 것만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보물 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를 촬영하고 난 뒤,오층석탑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절을 찾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이렇게 귀한 문화재 앞에서면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는 한다.

 

 

 

 

중간에 보충이 된 보경사 오층석탑

 

보경사 오층석탑은 아래에 4매의 지대석을 놓았다. 그 위에 기단을 올렸는데 기단 받침은 새로 보충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석재의 색이 다르다. 기단의 면석은 4매로 남쪽과 북쪽의 2개의 면석이 동서면석 사이에 끼여져 있다. 동서 면석 역시 새롭게 조형한 것이다.

 

1976년 이 오층석탑을 보수하였는데, 보수할 당시 기단과 4, 5층의 몸돌, 그리고 5층 지붕돌 등이 새로 보충이 되었다고 한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비례가 잘 맞아 안정감이 있다. 높이가 5m에 달하는 석탑치고는 균형이 제대로 잡혀있는 형태이다. 1층 몸돌에는 잠을통이 새겨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층석탑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균형이 잘 맞고 단아한 형태로 서 있어 안정감이 있다. 만일 이 오층석탑이 제대로 보존이 되었었다고 하면 수준급의 석탑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석탑의 층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으며, 머릿돌의 처마는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문화재는 소중한 유산이다. 그것이 어느 시대이건, 어느 종목에 해당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문화재 하나가 그 자리에서 천년세월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보경사 오층석탑 역시 중간에 보수를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전주, 완주, 김제를 아우르는 모악산은 깨달음의 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악산의 금산사와 뒤편 대원사를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과,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으로 대원사에서 오랜 시간 정진을 한 진묵대사, 그리고 근세에 들어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과 원불교 소태산 등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을 했다.

 

모악산은 고려사에 보면 금산(金山)’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금산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사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정상 근처의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위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엄뫼라고 부르던 것을 의역하여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모악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석종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인 600년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 국보 미륵전의 우측에는 높은 축대 위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이 있다. 이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탑의 외형이 범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불린다. 이 방형의 석조로 구성한 방등계단은 바로 불교의식의 하나인 수계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있고, ·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석종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9마리의 용이 끌어 올리는 석종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이 방등계단은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진신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종은 방형으로 상·2단의 기단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이 방등계단은 1918년에 발행된 Korean Buddism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것을 보면, 미륵전 앞에서 바로 방등계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와타나베 아키라의 편집본인 금산사관적도보(金山寺觀跡圖譜)에 수록된 방등계단 일대를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때에 방등계단을 송대(松臺)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탑

 

이 방등계단과 불사리탑은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방등계단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적멸보궁이 보인다. 적멸보궁이란 방등계단에 놓인 탑을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배전이다. 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적멸보궁의 유리벽 밖으로 보이는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탑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는다.

 

 

 

모악산이기에 이 방등계단에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봉안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당시의 선대들이 미처 얻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정진하는 사람들.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오늘도 그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 남은들 상여를 찾아내다.

 

며칠 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몇 년이 넘게 현장에서 취재를 해온 수많은 자료가 CD에 들어있어 한번 찾으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3,000여 점 가까운 문화재를 찾는 것이 어려워 외장하드에 중요한 부분만 따로 저장을 해 놓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 분류작업에서는 적은 용량이라고 해도, 따로따로 구분을 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나누고 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이 바로 대분류를 하는 일이다. 우선은 불교유적인 절, 사지, 불교관련 문화유적을 비롯해 정자, 향교와 사원,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 고궁과 능원, 박물관과 전시관, 자연생태, , 식물, 공연, 무속자료, 축제자료 등을 하나하나 세분하고 있다.

 

 

 

보관과 자료인용을 제대로 하기 위한 작업

 

워낙 많은 분량이라 그것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또 외장하드에 그것을 다시 복사를 해 나누어 보관할 생각이다. 그렇게 하고 목록을 만들어 둔다면, 언제라도 쉽게 찾아낼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꺼내어 검토를 하다가 보니, 이제 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참 많이도 돌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 중에는 날짜와 장소 등이 없어 이곳이 어디일까 하는 정도로 생소한 것들도 있다.

 

그 중에서 하나가 바로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인 <남은들 상여>이다. 남은들 상여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상여를 말한다. 이것을 행상, 영여, 온량거라고도 하며, 보관을 하고 있는 곳의 지명이 남은들이기 때문에(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 상여로 불린다. 남은들 마을입구 상여막에 보관되어 있는 이 상여는 보통의 상여처럼 상여를 해체하여 보관하지 않고 조립된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10년 전에 답사한 자료, 지금은 장소도 옮겨져 있어

 

답사는 현장을 찾아가 촬영을 하고 주변을 조사하여 기록하여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남은들 상여를 답사한 날자가 200525일이니 만 10년이 지났다. 당시에는 이 남은들 상여가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에 보관되어 있었다. 맞배지붕으로 지은 크지 않은 전각을 짓고 그 안에 상여를 그대로 보관해 놓았었다.

 

 

 

당시 남은들 상여를 답사할 때는 이 상여를 보관해 놓은 전각이 굳게 닫혀있고, 마을에 수소문을 해보아도 상여막을 열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전각 외부에 난 살창 안으로 겨우 상여 두 세장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답사를 하다보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이렇게 사진 한 두 장이 고작인 자료들이 상당히 많다.

기록으로 미루어 남은들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이 탄생한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525일 찾아간 상여막 안에 있는 남은들 상여는 비록 오래되어 그 채색은 다 빛이 바랬다고 하지만,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자리까지 옮긴 남은들 상여

 

남은들 상여는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상여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더 큰 남은들 상여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이 남은들 상여자료를 정리하다가, 문화재청 자료를 찾아보니 소재지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번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되어있다.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상여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것일까? 오랜 시간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답사를 하다가보면, 가끔 이렇게 자리를 옮겨놓은 문화재들이 생기게 된다.

 

수많은 문화재를 밤새 정리를 하다 보니 이런 소중한 자료들이 답사를 한 자료 중에 들어있다. 자료가 많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중한 많은 자료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렇게 소중한 자료를 손실이 되지 않도록 외장하드에 담아 보관하는 일에서 찾아내는 작은 기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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