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와 제천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두 번째로 들린 빈신사지. 문화재란 볼 때마다 조금씩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아마 그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나름대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제천시 한수면의 빈신사지 석탑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사자 석탑이 몇 기가 전하고 있는데, 제천 빈신사지 석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라 때 석탑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연대와 이유가 확실한 빈신사지 석탑

 

문화재는 대개 그 형태 등으로 보아 연대를 추정한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이들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복장물 등이 모두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덤에서 빈신사지 석탑은 조성 연대와 목적이 확실하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단에 명문을 음각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문에 적힌 것을 보면 빈신사지 석탑은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조성을 했으며,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으로 인해 적국인 거란족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기를 염원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석탑은 명문을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는 9층 석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돌 위에는 사각의 하대가 놓여있고, 상부에는 두터운 테를 둘렀다. 그 밑에는 각 면을 파서 3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꽃문양이 그려진 안상은 고려시대 석탑 등의 기단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1079자의 글이 명문으로 음각되어 있다.

 

 

아름다운 상층 기단은 뛰어난 작품

 

상층 기단의 중석은 이 빈신사지 석탑의 백미라고 보여진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갑석을 이고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갈기를 세운 네 마리의 사자 중 앞쪽에 있는 좌우 두 마리의 사자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사선으로 밖을 보고 있다 뒤편의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안에는 비로자나불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을 담은 탑에 비로자나불을 조각한 것일까? 아마도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온 세상에 미치듯, 북방정벌을 위한 고려의 염원이 그렇게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이 연꽃은 가운데 연밥을 두고 주변에 꽃잎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는 위로 5층의 몸돌과 4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탑만으로도 고려 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네 마리의 돌사자는 그 모습이 다르게 조성이 되었다. 정면 좌우에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무엇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뒤편에 있는 두 마리는 입을 다문 형태이다. 이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어, 수사자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자는 힘차게 조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고려의 기상을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에 조성된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을 조성하면서 새겨 놓은 명문대로 거란을 영원히 물리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왕이 장수할 것을 바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기능은 호국탑으로 세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는 빈신사지 석탑. 오늘 이 빈신사지 석탑이 더욱 마음 안에 다가오는 것은, 혼란한 이 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났다. 그렇게 만난 문화재들이 3,000점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내가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문화재 중 극히 일부만을 만났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하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시간들이도 돈 써가면서 이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경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수입의 대다수를 이렇게 문화재를 답사하고 소개를 하기 위해 써버린 세월이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집 몇 채 값이 날아갔다. 하지만 이 답사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은, 바로 답사에서 만나게 되는 소중한 문화재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만날 수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숱한 문화재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는 국보급 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한 체,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양으로는 10%를 빼앗겼지만 질로는 90%를 도둑맞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래 국보급 문화재들이 열강에 수탈당해 아직도 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절골에 소재한 보물 제17호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를 보면 그 아픔이 더하다. 대사자등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당하고, 그 비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17호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는 충주호로 인해 수몰지역내 정토사지에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탑비는 커다란 지붕을 만들어 보호각을 삼고 있다.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는 고려 태조 26년인 943년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탑비만 보아도 훌륭한 문화재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여 20세에 출가를 하였다. 906년에는 당으로 건너가 도건대사 밑에서 수행을 하다가, 고려 태조 7년인 924년에 귀국하여 국사로 추대되었으며 정토사를 창건하였다. 63세인 태조 24년인 941년에 입적을 하자, 생전의 업적에 따라 법경(法境)’이라는 호를 내렸다. 비는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최언위가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구족달이 썼다.

 

법경대사 자등탑비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초로 넘어가는 비분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받침인 거북이의 모습은 당시의 전통적인 형태인 용머리에 거북 몸을 갖고 있으며, 비위에 얹은 머릿돌에도 금방이라도 살아나올 듯한 용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에는 볍경대사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충주호변에 자리한 동량면 하천리 마을에 자리한 법경대사 자등탑비를 보면서, 그 비 하나에도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머리인 용두는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뒤의 발은 대지를 웅켜 잡듯 힘이 넘친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를 보면서 문화적인 자긍심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라다고 알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팔달산, 수원박물관, 광교박물관 등에서 고인돌 만날 수 있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그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처럼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북방식은 땅 위에 넓적한 돌 판석(板石)을 세워 긴 직사면체의 무덤 칸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뒤, 위를 널빤지 같은 큰 돌인 상석(덮개돌)으로 덮는다. 그래서 탁자 모양이라고 해서 탁자식이라고 부른다.

 

남방식은 땅을 파고 그 곳에 돌로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시신을 넣는다. 그리곤 그 위에 여러 개의 작은 받침돌을 놓고 다시 커다란 상석(덮개돌)을 얹어 마무리한다. 그 모양이 바둑판과 흡사하다고 해서 바둑판식이라고 부른다. 개석식은 남방식과 비슷하지만 받침돌이 없이 아예 상석(덮개돌)을 직접 올려놓은 것이다. 개석식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 확인된다.

 

 

수원 팔달산에서 만날 수 있는 고인돌

 

고인돌을 흔히 지석묘라고도 부르는데 수원에도 지석묘를 만날 수 있다. 요즈음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부담스럽다면 혼자 조용히 수원의 곳곳에 자리한 지석묘들을 찾아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가장 먼저 찾아가볼 곳은 수원 팔달산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시립중앙도서관을 좌측에 놓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석묘군이다.

 

경기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팔달산 지석묘군은 수원시립도서관을 좌측에 두고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4기가 소재한다. 팔달산 지석묘군 1호와 2호 고인돌은 7미터 거리를 두고 비교적 낮은 구릉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팔달산 정상의 화성이 있는 쪽을 향해 5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오솔길의 왼편으로 3호와 4호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달산 지석묘군은 경기도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로 한강 유역의 선사문화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몇 번이고 이곳 지석묘를 찾아가 자세히 돌아았다. 이곳에 지석묘가 소재하고 있다는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 이곳 인근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점이다.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대부분 강 언저리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팔달산 지석묘군이 소재하고 있는 수원 일대에도 집단 거주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원박물관과 광교박물관의 지석묘

 

수원박물관 출입구 앞에 자리하고 있는 금곡동 고인돌은 수원 칠보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던 고인돌로, 잘 다듬은 받침돌을 세워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경기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덮개돌을 얹은 탁자식 고인돌이다. 이 금곡동 고인돌은 권선구 호매실지구 택지개발에 따라 2009년 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금곡동 고인돌은 원형 그대로를 옮겨온 것은 아니다. 복원하면서 원래 있었던 좌우 받침돌과 동일한 형태와 질감으로 앞뒤 받침돌을 모형 제작하여 보완 설치한 것이다.

 

광교박물관에도 야외 측면에 두기의 고인들이 있다. 그 중 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 한 기는 광교박물관 주치장에서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추위가 기시면서 나들이하기에 적합한 날씨다. 코로나19로 인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수원은 메르스 사태부터 방역을 철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들이하기에 좋은 계절, 수원 곳곳에 있는 고인돌(지석묘)을 찾아 청동기시대로 과거 역사를 찾아 떠나보자.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삼일중학교 교정애는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인 아담스 기념관이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3625일에 지은 건물로 재단법인 삼일학원 소유로 되어있다. 이 삼일중학교 운동장 맨 앞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은 미국 아담스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지은 건물로 아담스 기념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삼일학원은 1903년 미국인 선교사 W.스웨어러(W.swearer:18711916, 한국명 서원보)15명의 소년들을 모아 시작한 교회부설학교이다. 처음에는 자체 건물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건물을 빌려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목사 W.A 노블이 이 사정을 미국 아담스 교회에 알려 교인들로부터 건립기금 2만 엔을 기부 받아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 최초의 삼일학원 학교 건물은 미국 아담스교회 선교부에서 설계하고,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전해진다. 우진각 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현관은 건물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지하층은 거칠게 다듬은 돌로 쌓았고 1층과 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위에 목조 트러스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천연슬레이트를 올렸다.

 

 

 

 

192357일에 기공식 가져

 

아담스기념관은 192357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1212,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가졌다. 교회건물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70~80명 밖에 가르칠 수가 없었지만, 아담스 기념관이 건립됨에 따라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이 아담스 기념관은 1940년대 고 최태영 기념관을 신축하여 교사로 사용하기 전까지 삼일학교의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후 아담스 기념관은 본관으로 사용하며 삼일학교를 상징하는 명물이 되었다. 현재는 솔로몬 도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11일 찾아간 아담스 기념관. 학업을 마친 후라 그런지 교정에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문화재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아담스 기념관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건물을 바라보고 우측 한 편에 ‘1923 삼일학교(三一學校)’라는 글이 쓰여 있는 석패가 보인다. 기단은 돌 위에 장대석을 가지런히 놓았다.

 

 

 

 

학생들도 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있다니.

 

출입구가 건물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치우쳐진 이 건물은 좌측의 일부는 붉은 벽돌로 쌓아 막아 놓았으며, 아래 위층에 세 칸으로 된 창문을 내었다. 우측 측면에는 네 칸의 창문을 내었다. 건물 뒤편은 모두 붉은 벽돌로 막혀있어서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은 지 90년이 지난 건물이지만 상당히 견고해 보인다.

 

한참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여학생 하나가 쫓아와서 무엇을 찍는 것이냐고 묻는다. 아마 낯선 사람이 학교를 찍고 있으니 이상했는가 보다.

문화재 촬영하고 있어요.”

문화재가 어디 있어요? 학교를 찍으려면 전경을 찍어야죠.”

이 건물이 바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건물예요

정말요?”

 

 

 

 

 

학생을 데리고 건물 앞으로 가서 문화재 안내판을 가르쳐주니, 그때서야 알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학교 교정에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된 건물이 있는데도, 중학교 3학년이라는 학생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 이런 정도였나 싶다. 3년을 학교에 다니고, 이 건물을 수도 없이 출입을 했을 텐데도 건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학교자랑에 여념이 없는 여학생을 뒤로하고 교정을 빠져나온다. 삼일상고로 반 배정을 받고 왔다는 여학생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가 최고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신의 학교를 사랑할 줄 아는 만큼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높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꼭 그런 학생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자경전 굴뚝, 아미산 굴뚝은 아름다움의 정점

 

요즈음에 짓는 집들은 무엇인가 하나가 허전하다. 집을 아무리 줄러보아도 이가 빠진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요즈음 집의 구조상 예전과 같이 집 뒤 켠 처마에 맞닿아 있는 굴뚝이 없기 때문이다. 굴뚝은 아궁이나 화실(火室)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연소된 물질을 외부로 내보내는 불연성(不燃性)의 연결체이다.

 

연소에 필요한 공기를 공급하고 연도(煙道)를 통하여 나온 연기나 가스 등을 하늘 높이 뿜어내게 만든 구조물로써 독입굴뚝과 벽붙이굴뚝이 있다. 구조재에 따라 분류하면 토관류굴뚝·벽돌굴뚝·철재굴뚝·철근콘크리트굴뚝 등이 있다. 굴뚝은 원형으로 하는 것이 공기학상으로도 바람직하고, 정사각형도 많이 쓰이며, 직사각형은 정사각형보다 강한 소용돌이가 생기므로 좋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또 굴뚝에는 다른 열기구가 접속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 집은 대개 온돌을 사용한다. 하기에 적당한 산소 공급과 연소가 원활하게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기가 아궁이로 새어 나오기 때문에 굴뚝을 높게 만들어서 연기를 위로 올려 보내야 한다. 연기는 기체이며 기체의 성질은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바람이 부는 원리와도 같은데, 태풍은 기압이 매우 낮은 지역에서 발생한다.

 

   

경복궁에 잇는 자경전 굴뚝은 그러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물 81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자경전 십장생굴뚝은 자경전 뒤꼍 담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 단 앞으로 돌출시켜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여 놓았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와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면 위에는 10개의 연가(煙家)를 얹어,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여기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시설하였다.

 

굴뚝은 너비 381cm, 높이 236cm, 깊이 65cm이고, 제일 아랫부분 좌우에는 불가사리로 알려진 서수를 만들어 배치하였고, 그 위로 장방형 공간을 구획하여 해··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바다·포도·연꽃·대나무·백로·불로초 등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가운데에 용(나티), 그 좌우에 학을 새겨 놓았다. ·바위·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長壽),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富貴),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으로 상징되고 있다.

 

십장생을 이와 같이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도자기·문방구류·베개모·자수·회사 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원단에 궁궐에서 십장생도(十長生圖)를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이 십장생굴뚝은 교태전(交泰殿) 뒤뜰 아미산(峨嵋山) 굴뚝과 같은 종류의 무늬를 갖고 있으나 아미산 굴뚝이 평면이 6각형인 독립 굴뚝임에 비해 이 굴뚝은 담장에 딸린 장방형 굴뚝인 점이 다르다. 현재 굴뚝 상부에 반투명한 소재를 사용하여 보호시설로 지붕을 꾸며 놓았다.

 

 

보물 811호인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寢殿)이었던 교태전(交泰殿)의 구들과 연결되었던 굴뚝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中宮殿)으로 태조 3(1394)에 창건되었다. 그 후 명종 8(1553)에 소실되어 1555년에 재건되었으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 4(1867)에 재건되었다. 고종 13(1876) 또 다시 소실되었고 고종 25(1888)에 복구되었다. 원래의 교태전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현재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것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일곽 뒤뜰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가산(假山)이다. 아미산에는 2벌 대의 장대석 석축이 네 층으로 쌓였고, 그 위에 괴석(怪石)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수석 1기는 1단에, 석분석지는 123단에 있고, 굴뚝은 3단에 있다. 굴뚝 3기는 3단에 나란히 있고, 나머지 한 기는 동쪽 조금 뒤편에 있으며, 주위에는 화초들이 심어져 후원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기의 육각형 평면을 한 굴뚝들이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또는 31단으로 쌓였고, 육각의 각 면에는 당초무늬··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각 무늬는 조형전(造形塼)을 구워 배열하였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하였다. 육각의 각 면은 네 가지 종류의 무늬로 구성되었는데, 굴뚝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闢邪像)으로 불가사리를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사군자 또는 만자문(卍字文)을 조각했으며,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唐草文)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煙家)를 각 4기씩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정원과 어우러져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이 굴뚝은 우리나라의 축조물에서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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