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판도 없이 광고물까지 걸어놓다니

 

수원에는 두 기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지난 해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91일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은,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구 수원문화원과 제598호 구 수원시청사이다.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19에 소재한 이 등록문화재들은 현재 수원시가족여성회관의 건물로 사용중이다.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구 수원문화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금융회사인 조선중앙무진회사 사옥으로 건립된 벽돌조 2층 건물이다. 광복 후 오랫동안 수원문화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평면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이 건물은 창호몰딩을 조적벽체보다 돌출시켜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구 수원문화원 건물의 특징은 정면 창호에 꽃봉우리 모양을 장식했다는데 있다. 이 건물은 정면성을 강조하는 등,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장식적요소가 많고 건축 기법이 우수한 건물로 가치가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 제598호로 지정된 구 수원시청사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건축물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기에 건립된 관공서 건물이다. 구 수원시청사 건물은 서양의 기능주의 건축에 영향을 받은 한국 근대 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구 수원문화원과 함께 지난 해 91일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는 우리 역사의 단면

 

등록문화재는 우리 사회의 진화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2001년도에 처음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하였다. 등록문화재는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등록문화재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을 이루며, 그 가치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을 지정한다, 또한 한 시대 조형의 모범이 되는 것이나, 건설기술이나 기능이 뛰어나고 의장 및 재료 등이 희소하여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등록문화재의 지정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며, 건조물이나 시설물뿐만 아니라, 역사 유적, 생활문화 자산, 동산문화재 등으로 등록 대상을 확대하고 있는 추세이다. 수원시의 등록문화재는 당 시대의 건조물로서, 건축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내판도 없이 광고물까지 거치해

 

구 수원문화원 건물과 구 수원시청사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지 벌써 1년이 가까워온다. 하지만 아직도 건물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 건물이 등록문화재인 것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다. 등록문화재란 보존가치가 큰 역사적인 건물을 지정하는 것이다.

 

문화재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고, 보도 등을 통해 이 두 동의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음을 알리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하기에 문화재에는 안내판을 세워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려야 하는 것이다.

 

특히 <옥외광고물등관리법>에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문화재 및 문화재보호구역에는 광고를 제한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문화재는 원형보존을 중요시한다. 지정이 되기 전에 광고물 거치를 했다고 해도, 이제는 광고물 거치대를 철거해야 한다.

 

 

 

하지만 구 수원문화원 건물 정면 입구를 막아 게시를 한 광고물은, 이 건물이 등록문화재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늘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직도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등록문화재에 게시한 광고물 때문이다.

 

문화재란 모든 사람들이 그 소중함을 알고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더구나 등록문화재는 그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해놓고, 제대로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광복 70주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루 빨리 조치를 취하기를 바란다.

 

 

 

절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삼사순례(三寺巡禮)’란 하루 만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일이다. 이는 자신이 지은 죄업을 소멸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자신이 마음속에 서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6일 오후 230분에 출발한 삼사순례는 먼 곳을 갈 수 없어 경기도 내의 절을 찾아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가 자리한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번지에 소재한 용화사이다. 이곳은 예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이천에서 장호원읍을 향해 가다보면 자석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작은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용화사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하는데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길이 나있다.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들어가면 예전 조림지인 듯한 숲길로 접어들게 된다.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용화사. 절 안이 너무 조용하다 절은 그리 크지 않지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눈앞에 축대가 보이고 그 위에 서 있는 자석리 석불입상이 보인다. 대웅전 문이 잠겨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내에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미륵세상을 꿈꾸며 머리를 조아리다

 

어차피 이 용화사를 찾은 것도 미륵불인 석불입상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던가. 미륵은 후천세계의 부처님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든지 567천만 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부처님이다. ‘용화사(龍華寺)’라는 명칭도 미륵불의 세상에서 용화삼회설법에서 기인한 명칭이다.

 

미륵불이 출현하면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해 설함으로써, 중생들이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번뇌의 업을 끊는다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불교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널리 신봉되었으며, 경기도 일대에는 많은 미륵불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나라가 온통 메르스 공포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석불입상 앞에 머리를 조아린 까닭도 바로 이런 고통스런 세월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가진 자들이야 무엇을 걱정하랴. 하지만 민초들은 그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두려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을 한다,

 

 

 

 

두 개의 석재로 조성한 고려 말기의 석불입상

 

자석리 석불입상은 두 개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머리에는 커다란 둥근 갓을 올렸으며 그 아래 얼굴과 가슴부분까지 한 개의 돌을 올리고, 그 아래 하반신 부분을 또 하나의 돌로 조성했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이마에는 세상을 비춘다는 백호가 뚜렷하고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를 표현했다.

 

두 귀는 일반적인 석불입상에 비해 짧게 조형되었으며, 얼굴 크기에 비해 눈, , , 귀 등 모든 것이 작게 표현을 하고 있어 조화와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미륵의 법의는 통견으로 아래로 흘러내리게 했으며, 두 손과 함께 마멸이 심해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석불입상의 뒷면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이목구비의 조형과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 간략하게 표현한 옷 주름 등으로 보아 이 석불입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준다. 마음속으로 서원을 하고 난 뒤 석불입상을 찬찬히 돌아본다. 비록 커다란 돌을 이용해 조성한 석불입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오랜 세월을 간구하지 않았을까?

 

석불입상 뒷면을 보니 누군가 몸체에 동전을 붙여놓았다. 흔히 속설에 동전을 바위나 석불의 몸체에 붙이면 서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속에 간구하는 바가 간절했으면 이렇게라도 위안을 얻으려고 했을까? 오후에 세 곳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석리 석불입상 앞에 머리를 조아려 다시 한 번 간구를 한다. 이 험한 세월이 하루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는 늘 그리운 곳이다. 젊었을 때 그곳에서 잠시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던 나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 한편에 싸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지금이야 다들 어른이 돼서 벌써 손자, 손녀들을 본 나이이니 이제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하기에 제자라고 해도 당시에 20대 초반이던 나에게는 불과 7~8세의 차이밖에 나질 않았던 제자들이다.

 

몇 년 전인가 경주에 들렸을 때 제자들을 잠깐 만나본 것을 끝으로 그 이후 연락을 하지 못했다. 살아간다는 것이 바쁘다가 보면 내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버거울 수가 있다. 하물며 벌써 40년 이상이나 지난 옛 이야기를 끄집어내어야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경주는 지금에 와서는 아예 눌러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늘 눈에 밟혀

 

경주에 그런 그리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주는 늘 머물고 싶은 곳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 그리고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 두 곳을 비교하자면 문화도 다르고 그들이 조성해 놓은 많은 문화재 역시 다르다. 하지만 내가 경주를 더 선호하는 것은 1천년 세월을 지켜 낸 신라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유적이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문화재 중에서 경주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포석정이다. 포석정은 사적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시 배동 454-3에 소재한 포석정은,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알려진 곳이다. 굳이 이곳까지 와서 포석정이라는 석조 구조물을 만들어 놓은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때로 본다. 경주 남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불교유적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신라는 당대의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자리한 포석정은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어무상심(御舞詳審)’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의 춤을 추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신비의 인물이다. 재위는 10년 남짓이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이 아닌 신들과의 조우이다. 헌강왕 2년인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헌강왕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했을 때, 어디서 왔는지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남산의 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 혹은 어무산신이라 한다.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라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신라의 멸망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외에 처용설화도 전한다. 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처용가(處容歌)>가 만들어졌다. 이 처용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이슬람 상인이나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기도 한다.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역시 헌강왕 때의 일이다.

 

()과 한()의 장소 포석정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셨다고 한다. 이런 잔치를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했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것이다.포석정에는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나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경애왕 4년인 927년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한 곳인 포석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935년에 즉위를 마쳤으니,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최후를 맞이한 지 8년 만에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이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 포석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저 편 남산 아래로 누군가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나타날 것만 같다.

 

5월 말 수원의 행사가 마무리가 되는 날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 길을 떠나야겠다. 경주로 달려가 그동안 보고 싶었던 경주를 낱낱이 돌아보고 싶다, 아마도 며칠간은 남산일대를 돌아치겠지만 말이다. 그 중에는 포석정을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날이 따듯해지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저 할 일없이 떠나는 것은 아니다. 오래도록 문화재 답사를 해오면서 이 계절이 되면 문화재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요즈음 날씨가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기온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산은 연두색과 초록색이 적당히 섞여 있으며 여기저기 꽃이 피어있기 때문이다.

 

수원시의 문화재를 하나하나 답사를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서운한 것은 바로 불교문화유적 많지 않다는 점이다. 수원은 광교산과 여기산, 숙지산, 칠보산 등 주변이 산에 들러 쌓여 있으면서도 정작 불교와 관련된 문화재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보물로 지정된 진각국사 탑비와 팔달문 동종, 봉령사 석조삼존불, 봉령사 불화, 청년암 영산회상도와 탱화 등이다.

 

이 외에 수원시 향토유적으로 지정 된 창성사지와, 수원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는 동래정씨 약사불 정도이다. 한때 광교산에는 89개의 사암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그에 비해 문화재가 별로 많지 않아 늘 아쉽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85% 정도가 불교관련 문화재라는 것을 감안하면, 수원의 불교관련 문화재는 극소수라는 점이다.

 

 

 

동래정씨 약사불은 왜 문화재가 아니죠?

 

아는 지인 한사람과 수원박물관을 찾아가 문화재 촬영을 하고 있는데 질문을 한다.

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돌에 조각을 해 놓은 것들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데, 왜 이 동래정씨 약사불은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어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일일이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답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한번으로 답사를 마치는 것이 아니고, 그 문화재에 대해 속속들이 알 때까지 찾아다녀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현장에 가서 직접 문화재를 보면서 설명을 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못할 때는 부득이 혼자라도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가, 그 문화재와 비교를 할 수 있게 글을 쓰는 방법도 있다. 늘 이렇게 문화재를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일이 바로 내일이란 생각이다.

 

 

 

 

보물 제982호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을 찾아가다

 

28, 길을 나섰다.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장암리)에는 고려 때 마애불인 보물 제982호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애불은 큰 길에서 안으로 들어가 논길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쪽 논을 마을 사람들은 넘어새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큰 바위를 미륵바우라고 부른다,

 

이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을 한 때는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이라고 불렀다. 넓적한 화강암에 새긴 이 보살상은 고려 경종 6년인 980년에 조성이 되었다. 마애불에 조성 연대가 새겨진 것은 흔치가 않다. 이 마애보살반가상은 바위 뒷면에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경우이다

 

이렇듯 문화재는 그 조성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지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 이 반가상의 경우도 처음에는 그 조성연대 때문에 태평흥국명이라고 연대를 문화재명에 넣어 지정을 했다가, 후에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으로 정정을 한 경우이다.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전체적으로 조형이 잘 맞지 않는 듯도 하다. 그런데 보관의 양편 끝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아마 이곳에 쇠막대 등을 집어넣은 후 그곳에 보관의 장식을 하였을 것 같다. 즉 보관을 아름답게 치장을 하기 위해, 막대에 구슬 등을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래정씨 약사불

 

수원박물관 경내에서 만날 수 있는 동래정씨 약사불. 오래도록 동래 정씨들이 섬겨왔다는 마애불은, 중앙에 약사여래좌상을 두고 양편에 협시불을 조성했다. 일석에 삼존상을 조성하였는데 중앙 본존인 약사불은 연화대좌위에 좌상으로 새겨져 있고, 양쪽에는 협시상은 입상으로 조각하였다.

 

본존의 높이는 120cm 정도로 두광을 조성하고, 육계가 평평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의 흔적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를 조각하였으나 많이 마모가 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양편에 조각한 협시상은 입상으로, 높이가 100cm 정도이다. 흔히 동자상이 민머리인데 비해 이들 협시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동자가 아닌 보살상으로 조성을 한 듯하다

 

같은 일석에 조성을 한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보물)과 수원박물관 동래정씨 약사불(수원시 향토유적)은 조각을 한 바위의 크기나 상태, 그리고 조성연대 등을 알 수 있는가? 등의 차이가 있다. 문화재를 일일이 비교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조성연대의 정확도이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36-54(우만동)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봉녕사. 비구니 사찰인 봉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광교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여 성창사라 하였고, 조선시대 1469년 혜각국사가 중수하고 봉녕사라 사명을 개칭하였다.

 

봉녕사는 1971년 묘엄스님이 주석하신 이후, 40여 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의 요람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74년도 봉녕사 강원(승가대학)을 개원하였으며, 19996월 세계 최초로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금강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하였다. 봉녕사는 승가교육과 율학연찬을 통한 수행도량으로서 사격을 갖추고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23일 오후 봉녕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이 환영을 한다. 경내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여기저기 잘 가꾼 꽃밭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어 마치 연화세계에 들어온 듯하다. 피안이 따로 있을까? 이곳이 바로 부처의 세계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를 찾아 봉녕사를 가다

 

봉녕사를 찾은 것은 꽃구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봉녕사의 중심인 대적광전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약사보전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에는 용화각이 자리하고 있다. 봉녕사에는 두 점의 문화재가 있다. 용화각에는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석조삼존불이 자리하고 있으며, 약사보전에는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봉녕사 불화 2점이 일괄 지정되어 있다.

 

약사보전에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는 바로 신중탱화와 현왕탱화이다. 봉녕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현왕탱화를 보기 위함이다. 탱화란 불교의 신앙 대상이나 내용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약사전 안의 탱화들은 약사 정토의 특성을 그대로 도설화하고 있다. 약사 신앙은 <불설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한 신앙이다.

 

봉녕사 약사보전의 신중단에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조선 고종 28년인 1891년 화사 광조가 그린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아래쪽에는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다.

 

 

 

 

염라대왕인 현왕탱화를 만나다

 

현왕은 염라대왕을 말한다. 염라대왕은 사람이 죽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면 3일 만에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때 현왕 앞에 나아가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 명부전 벽화 등으로 나타나는 시왕도와 비슷한 배열을 하고 있다. 다만 지옥도가 생략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고종 15년인 1878년 화사 완선이 제작한 봉녕사 현왕탱화는, 가로 131cm, 세로 104cm의 크기로 비단에 채색하였다.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와 아래편에 판관, 녹사 등을 배치하였다. 현왕탱화에는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어, 일반적인 탱화와는 구도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염라대왕은 저승 10대왕 중 다섯 번째 왕이다. 흔히 염라대왕을 여래화한 보현왕여래의 그림들도 전하는데, 일반적으로 보현왕여래와 권속 4명 등을 그려놓는다. 그에 비해 봉녕사 현왕탱화는 많은 인물을 묘사하였다.

 

불교에서는 시왕(十王)’이라고 해서 사람이 죽으면 시왕 앞에 차례로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의 경중을 따져 심판을 받고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고 한다. 저승 10대왕은 제1전에 진광대왕, 2전에 초강대왕, 3전에 송제대왕, 4전에 오관대왕, 5전에 염라대왕, 6전에 변성대왕, 7전에 태산대왕, 8전에 평등대왕, 9전에 도시대왕, 10전에 오도전륜대왕이 관장을 하고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