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미륵입상을 만나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을 말한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입상 1기가 서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의 불상들의 형태가 일반적인 불상에 비해 크게 조형인 하였는데 매산리 미륵입상 역시 상당히 크게 조성한 석불입상이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조화를 이룬 미륵입상, 그런데 영험하다고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미륵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가을철은 여행을 하기에 최적의 날씨이다. 산과 들에 형형색색으로 단풍이 들어 사진촬영을 해도 무엇인가 남다른 멋을 표현할 수 있다. 매산리 미륵입상 역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이 미륵당의 석불을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아마 이 미륵입상이 자비로운 모습을 띠우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조금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륵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간구하는 서원을 이루어준다는 미륵입상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미륵당 부처님은 영험하세요.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부처님 덕을 많이 보고 살았죠. 간구를 하면 다 이루어지니까요. 그래서 이 부처님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요

 

우연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에 염원한 서원을 간구해서 이루어졌다는 데야 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천년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그런 서원을 이룬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도 오늘 이 미륵입상 앞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를 위해 손을 모아야겠다.

 

용주사 범종에 미쳐 자릴 못 떠나다

 

사람이 살면서 가끔은 미칠 때가 있다. 난 그렇게 내가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무엇엔가 미칠 때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유람을 하면서 문화재를 만났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 미칠 때가 있다. 난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화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오랜 시간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아마 그동안 길거리에 쏟아 부은 돈만 해도 엄청나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짧게는 12일이지만 길게는 몇 날을 길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그동안 답사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사용한 경비만 해도 넓은 아파트 한 채는 사고도 남을 만하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는 곧잘 나에게 문화재에 미친 정신병자라고 놀려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어도 내 미친병은 나아지지를 않았으니 미쳐도 곱게 미친 것은 아닌 듯하다.

 

며칠 전인가? 8일이었나 보다.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를 찾아갔다. 벌써 다녀온 지가 2년이 훌쩍 지났기에 그동안 무슨 변화라도 있을 듯해 찾아간 절이다. 절 입구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 현수막에 얼굴 붉힐만한 사연들이 적혀있다.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절 안으로 향했다. 문화재를 찾아온 발길이기 때문이다.

 

오색 등과 함께 빛나는 용주사 범종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절 마당에는 오색 등이 걸려있다. 부처님 오신 날 준비를 하느라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정면 중앙에 자리 잡은 대웅보전 계단 아래는 꽃으로 장식한 아기탄생불이 놓여있고 불자들은 그 앞에 머리를 숙여 합장을 한 후 물을 작은 바가지에 퍼 탄생불을 씻어내는 관욕 의식을 행하고 있다.

 

잠시 머리를 숙이고 난 뒤 계단을 올라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좌측 범종각으로 향했다. 늘 용주사를 찾을 때마다 둘러보는 범종이지만 볼 대마다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라보는 내 마음이 늘 같지 않음을 뜻한다. 어느 날은 종 앞에서면 평온한 종소리가 울리는 듯하고, 어느 날은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마음이 평온한 날과 번뇌가 가득한 날의 차이란 생각이다.

 

범종각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한다. 왜 이 범종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일까? 그동안 수많은 범종을 만나면서 꼭 이 범종 앞에만 서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날 역시 범종을 바라보고 섰지만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무슨 일일까? 절 삼문을 들어서기 전 눈에 띤 현수막 때문이었을까?

 

 

범종 하나가 주는 교훈

 

종각 안에 놓인 범종을 둘러본다. 종각을 몇 바퀴 째 돌면서 하나하나 훑어본다. 도대체 국보와 보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히려 이 종보다 더 멋진 종을 본 기억이 나는데 보물이었다. 그런데 이 종은 왜 국보로 지정된 것일까?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범종의 높이 1.44m, 입지름 87cm의 신라 범종의 양식을 따른 용주사 범종. 명문에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주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신라의 종과는 일치하지 않아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맨 위에는 음통이 있고, 용 모양으로 조형한 종을 걸 수 있는 용뉴가 있다. 조형은 세심하게 되어있으나 다른 종과 다를 것은 없다. 종의 몸통에는 여의두문과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그 조각한 솜씨를 보니 그저 화선지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 정교하다. 왜 지금까지 이런 정교함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다시 당초문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마치 금방이라도 종에서 자라난 당초문이 종각을 타고 위로 타고 오를 듯 생동감이 넘친다. 어떻게 쇠붙이에 이런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머리 띠 아래로는 4개의 유곽과 9개의 유두, 그 아래는 천의를 날리고 있는 비천상과 심존상, 그리고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와 소용돌이 모양으로 새겨 넣은 연꽃문양, 신라 문성왕 때 주조했다는 명문 등이 있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종이 보인다. “~ 그래서 국보였구나?”

 

그런데 몇 바퀴를 종각을 돌아보다가 희한한 것이 보인다. 천의 자락을 날리는 비천상과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를 한 채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삼존상이 달라 보인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종을 벗어난 비천상과 삼존상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느낌이다. 범종의 그 딱딱한 쇠붙이에서 어떻게 튀어 나온 것일까?

 

왜 늘 그 자리에 조각되어 있던 비천상과 삼존상이 갑자기 종 밖으로 날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을까? 눈을 부비고 다시 들여다본다. 이번에는 자리가 달라진 듯하다. 분명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도 없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미친 짓을 했기 때문인가 보다.

 

 

아무래도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늘 답사를 떠날 때마다 마음을 졸이며 경비를 사용하려고 돈을 움켜잡고 있다가 며칠 만에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오는 답사를 계속하다 보니 이젠 헛것이 보이는 게 틀림없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길가에 뿌려댄 돈이 이젠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들이 하늘을 날아오를 것인가?

 

처사가 이젠 보는 눈이 열린 게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주변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비용이 딸려 답사를 오래도록 하지 못했더니 이젠 정신까지 달아났는가 보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하늘을 나는 비천상과 종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다. 누가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판단이다. 나는 이렇게 문화재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산 6-1에 소재한 ‘세중(世中) 돌 박물관’. 20000년 6월에 설립자 천신일에 의해 개장한 세중 돌 박물관을 찾아가면 선조들의 혼이 깃든 석조 작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짓고 있는 석조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선조들의 마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석조미술은 돌을 이용해 만든 작품을 말한다. 돌은 세월이 지나도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많은 석조작품들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만큼 석조 미술품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우리와 함께 호흡을 했으며 우리 실생활 속에서도 함께 해왔다.

 

세계적인 추세로도 석조 조형물들은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한 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세계의 유수한 문화유적이 대개 석조물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것도, 석조의 재질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운간 석굴과 동문 석굴,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싼치탑,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등은 모두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석재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석조 문화유적

 

세중 돌 막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열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5천여 평 너른 경내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돌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돌 조각품들은 도시화,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으며, 일제치하를 비롯해 광복 후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 사라져버린 것이 부지기수이다.

 

세중 돌 박물관은 1만 여점의 다양한 석조미술품들을 연구보존하기 위하여 설립이 되었으며, 경내에 있는 수많은 석조작품들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전국각지를 돌며 수집해 온 소중한 것들이다. 당시 설립자 천신일은 수많은 소중한 문화재가 해외로 밀반출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옛 돌조각의 예술성을 인식하고 유물의 방출을 막고자 돌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세중 돌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 진 돌 박물관으로 희로애락의 언덕, 탐라국의 동자들, 생활 속의 돌, 돌짐승과 함께, 민속신앙 속의 돌, 한국 불교와 돌, 벅수, 등대, 동자들의 마을, 십이지신상 조형탑 등 10개의 야외전시장을 마련했다. 실물로 전시된 돌조각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심미안을 만족시킴은 물론, 선인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돌 하나하나가 갖는 예술성 놀라워

 

돌은 말은 없으니 철학자에겐 철학으로, 음악가에겐 음악으로, 예술가에겐 예술로, 종교가에겐 종교로, 시인에겐 시로, 삶, 그 존재의 진리로 있나니

아, 그렇게 돌은 천년, 만년, 억년, 수억년, 세월없이 놓여있는 그 자리에서 침묵으로, 깊은 침묵으로, 삶, 그 존재의 말로 있나니...

 

 

박물관 경내에서 만난 석비에 시인 조병화가 지은 ‘돌’이란 시가 적혀있다. 그 시 한편으로도 돌 박물관 안에 있는 돌들이 갖고 있는 내면세계를 읽을 수가 있다. 내 마음이 편하면 석인(石人)들도 함께 미소를 띠우고,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석인들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돌 박물관에서 만나는 많은 석조물들은 그렇게 나와 함께 울고 웃는다. 그래서 돌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는가 보다. 봄 쳘, 온 들과 산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용인 세중 돌 박물관을 찾아 신록에 함께 물들어가는 돌들의 군상을 만나보자.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답사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14일 오후 찬바람이 불어 옷깃 안으로 싸한 바람이 스며드는 날 오산시 외삼미동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211호인 고인돌을 찾아 나섰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주변을 정리해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고인돌이 소재한 앞에는 차들이 주차할 수 있도록 주차시설까지 갖추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까지 제공하고 있다. 한 기의 고인돌이 소재한 곳치고는 주변 환경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는 곳이다.

 

외삼미동 고인돌은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 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이었던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여 밝혀졌으며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중앙을 손질한 듯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 누워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주변 경관 잘 정리된 외삼미동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은 경수도로에서 통탄 방향으로 나가다가 북오산IC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곳 입구에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우측 길로 접어들면 지하차도가 나온다. 지하차도를 벗어나면 바로 좌측에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곳에 고인돌이 자리한다.

 

고인돌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고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오산은 몇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곳으로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고인돌군은 대개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인돌 군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산이라는 지역이 예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오산 인근인 수원, 화성, 용인 등에도 골고루 고인돌 군이 조성되어있어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소재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앞으로 지역의 문화유산에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정말 아까운 문화재들이 제 자리를 떠나, 먼 이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리고 돌아올 줄을 모른다. 그 중 일부가 돌아오긴 했지만, 찬탈당한 수많은 문화재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아까운 문화재 한 점이, 비록 제자리는 떠났지만 그래도 우리 땅에 남아있어 안도의 숨을 쉬게 만든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수많은 석등 중에서 유일하게 간주석에 조각을 한 석등이 있다. 바로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 소재한 발산초등학교 교정 뒤뜰에 서 있는, 보물 제234호 발산리 석등이다. 이 석등은 이곳에 대규모 농장을 가지고 있던 시마타니 야소야, 일본으로 갖고 가기 위해 전북 완주에 있는 석등을 자신의 농장으로 옮겨 온 것이다.

 

뛰어난 석등, 절로 안도의 숨을 쉬다.

 

높이 2.5m의 이 석등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원래는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 터에 있던 이 석등을, 시마타니가 이곳으로 옮겨 일본으로 반출을 시도했던 걸작품이다. 석등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동안 보아왔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조형이 되었다. 만일 이것이 시마타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더라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잃을 뻔했다.

 

 

 

 

 

이 석등은 색다르다. 우선 불을 켜는 화사석의 창이 사각형이 아닌, 타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팔각으로 꾸민 화사석에는 사방에 타원형의 창을 내고, 폭이 좁은 남은 네 곳의 기둥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양각으로 조각한 사천왕상의 발밑에도 밟힌 사악한 무리들을 표현한 뛰어난 작품이다.

 

사천왕은 사왕, 혹은 호세사왕이라고도 한다. ‘호세사왕(護世四王)’이란 세상을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경에 사천왕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등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고 보면, 단순히 불을 밝히는 목적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이 석등은 세상을 밝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간주석에 용틀임, 뛰어난 작품

 

일반적인 석등의 간주석은 각이 지게 조성을 한다. 그러나 발산리 석등의 간주석은 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리고 그 기둥 돌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구름 속에서 요동치는 용은 비늘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조각을 하였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은 뛰어난 조각술이다.

 

이런 석등을 조성한 봉림사라는 절은,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에는 꽤나 번창한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용을 새긴 간주석 밑으로는 여덟 개의 연꽃을 새긴 받침돌이 자리한다. 사각형의 기단돌 위에 모서리를 둥글게 마감한 받침돌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하였는데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지붕돌 역시 팔각으로 꾸몄는데, 처마 밑에 서까래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지붕돌 위에 올리는 보주 등은 사라져버렸다. 통일신라 사대에 조성한 발산리 석등. 엄밀하게 따지자면 발산리 석등이기보다는 봉림사지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일본으로 밀반출을 하기 위해 자리까지 옮겨진 석등이, 이름까지 변해버렸다는 것에 또 한 번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이렇게 남아 우리 땅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주변에 늘어서 있는 석조물들과 함께 자리를 지켜주고 있음이 정말로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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