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역을 답사를 하다보면, 자주 만나는 작은 전각들이 있다. 들판에 외롭게 덩그마니 서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대문에 걸려있는 것들도 있다. 바로 부모님께 효를 다한 효자에게 내리는 효자비와 효자정려이다. 비석에 효자임을 새긴 것은 효자비, 대문 위나 전각 안에 현판으로 걸어 놓은 것은 효자정려이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자 중에서도 효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나, 충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들이 부지기수이다. 영모정, 사모정, 기영정 등, 이런 것들은 모두 충효에 관한 이야기 한 자리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충(), (), ()이기 때문이다.

 

 

불효자를 엄격하게 다스렸던 옛 풍습

 

효자에게는 비를 세우거나 정려를 내려주었던 것과는 달리, 불효자는 그에 상응한 벌을 내리기도 했다. 옛날 마을에 망나니가 있으면 사람들이 관청에 끌고 가는 대신, 멍석에 말아놓고 뭇매를 가하던 사형(私刑)’이 있었다. 이를 흔히 멍석말이라고 한다. 전라남도나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이를 두고 '덕석마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멍석을 덕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멍석말이는 멍석으로 감은 사람을 때리는 형벌로 주민들에 의해 행해진다.

 

멍석말이는 한 집안이나 동네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가 있으면, 문중이나 동네의 회의를 거친 뒤 어른 앞에 끌고 간다. 그리고는 멍석을 펴서 눕히고 둘둘 말거나 뒤집어놓고, 온 집안 식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뭇매를 가해 버릇을 고쳐주는 습속이다.

 

 

합천 물산마을의 8가지 죄목

 

이 멍석말이는 관청에 신고하는 대신 이 같은 방법을 썼으므로 오히려 문중의 형벌이나 동리법(洞里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으며, 마을의 사회규범을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사용을 했다. 합천 영암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선도대가 바로 그런 옳지 못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멍석말이 장소였다.

 

물산마을이라는 곳에서는 옛 마을 규약인 향약에 이르기를 마을의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벌을 주게 하였는데, 모두 8가지의 죄목을 나열해 규범을 삼았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一曰 불효지형이오(효를 행하지 않은 불효자를 벌하다)

二曰 불목지형이오(친척 간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三曰 불인지형이오(남녀사이(부부를 말하는 듯)에 화목하지 못함을 벌하다)

四曰 불제지형이오(윗사람에 대해 공경하지 않음을 벌하다)

五曰 불임지형이오(책무와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벌하다)

六曰 불휼지형이오(불쌍한 사람을 돌보지 않음을 벌하다)

七曰 조언지형이오(거짓말을 하는 자를 벌하다)

八曰 란민지형이라(주민을 괴롭히는 자를 벌하다)

 

 

수원에 유일하게 남은 효자정려

 

이때도 가장 먼저는 바로 불효였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는 효를 중히 여겼다. 수원에도 많은 효자들이 있었겠지만, 이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수원박물관 마당 한 편에 서 있는 정려각이다. 정려각이란 전각을 짓고 효자나 충신, 열녀 등의 덕을 칭송하고자 세우는 붉은 문을 말한다.

 

이 정려각은 전주 유씨 가문에서 기증한 것으로, 영조 19년인 1743년 우승지 류태명과 순조 12년인 1812년 류태명의 증손자인 호조참판 류의의 효자정려이다. 한 집안에서 이렇게 대를 이어서 정려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집안의 내력이라는 뜻이다. 류태명(16661716)의 자는 도휘, 호는 현산웅, 본관은 전주이다.

 

29세 때 별시에 합격해 출사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우승지를 지냈다. 이 정려각은 원래 호매실 택지개발지구내에 위치했으나, 그의 후손인 류원상이 기증하여 수원박물관으로 이전 복원했다. 요즈음처럼 사회가 각박해져만 갈 때 이 효자정려가 더 빛을 발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효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정조가 부친인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가 남다르듯, 지금은 수원을 상징할 수 있는 효에 관한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수원박물관의 효자정려를 아이들의 효에 관한 교육장소로 알려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저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슴이 먹먹하다고 한다. 그리고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절로 욕이 튀어나온단다. 이 나라 어디 한 곳 성한 곳이 없다는 느낌이다. 어째 나라가 이토록 비리로 얼룩져 잇는 것인지. 이젠 뉴스조차 보기가 싫다. 뉴스마저 신뢰가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아파해야 이 아픔이 끝날 것인가?

 

세상이 다 아프다고 하는데, 이 통에도 자신과 사고가 맞지 않는다고 물어뜯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미친개들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 아파하는데 그 아픔에 상처를 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인지도 의심스럽다. 아침 일찍 산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신을 좀 차려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들, 불빛으로 치유가 되었으면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잠시 쉬어본다. 하지만 잠깐 틀어놓은 TV화면에서 또 세월호의 아픔이 보인다. 괜히 책상머리에 앉아 이것저것 뒤적여본다. 그러다가 문득 석등이 눈에 들어온다.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석등과 나란히 서 있는 석등.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대웅전의 앞에 자리한다. 대웅전이란 절의 중심 전각이다. 그 앞에 석등을 세우는 것은,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등은 부처나 보살의 지혜를 밝혀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탑 앞에 조성한 석등의 불을 밝히면, 33천에 다시 태어나 허물이나 번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석등은 흔히 광명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간주석과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찰에서 보이는 석등은 이러한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석등을 그렇게 대웅전 앞에 배치를 한 것도, 알고 보면 수많은 중생을 어둠에서 깨우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답사를 한 수많은 석등의 자료를 뒤적이면서 마음속으로 간구를 해본다.

 

정말 미안합니다. 석등의 불빛 따라 편히 가시길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일꾼들을 뽑는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악에서 지켜야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한 것이다. 제몫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 잃고 외양간 수도 없이 고쳤다그러면 무얼 하겠는가? 소만 들여놓으면 또 잃어버리는 것을. 처음부터 튼튼한 외양간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겉만 번지르르하면 손 툭툭 털고 일어나버렸다. 그런 사람들의 관습이 이렇게 커다란 비극을 몰고 온 것이다. 초파일에는 가까운 곳을 찾아가 석등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겠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용주사천보루 (龍珠寺天保樓)’.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정조 14년인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그 전각의 배치나 규모 등이 다르다. 이것은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찰로사의 모습보다는 궁의 한 면을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꾸몄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기에 용주사는 절의 입구인 출입문도 일반적인 문이 아닌 삼문으로 조성하였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인 1790년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천보루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이다. 천보루의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쾌성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팔정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석조기둥으로 받친 천보루

 

천보루는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동편의 나유타실과 서편의 만수리실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의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용주사가 딴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이렇게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석주는, 용주사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회랑과 자연스럽게 연결해

 

천보루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다. 바로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와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용주사의 창건당시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인데, 천보루는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중앙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천보루와 연결이 되어있는 회랑인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그대로 받아 조성한 것이다. 특이하게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대웅보전에서 바라보면 차우 김찬균의 글씨로 쓴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마음이 담긴 홍제루에서 배워라

 

밖에서 보면 천보루요, 안에서 보면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 진 것이다. 이 누각은 원래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홍제루란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정조의 호인 백성을 사랑하는 홍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호인 홍제는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에서 따온 것으로, 넓고 큰마음과 굳센 의지를 뜻한다.

 

 

용주사를 다녀온 지는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 이 천보루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월호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실종자들을 향해 거북한 소리를 해대는 모자라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천보루를 지나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뭇 낮아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 땅의 모든 높은 자리라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용주사를 찾아 홍제루를 지나면서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깊게 머리를 숙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에 소재한 사적 제207호인 홍, 유릉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능침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있는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그의 부인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다. 고종은 재위기간 중에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겪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비운의 왕비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은 처음에 청량리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고종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광무 원년인 1897년 대한제국 선포로, 홍릉은 지금까지의 무덤 제도와 다르게 명나라 태조 효릉의 무덤 제도를 본뜨게 되었다.

 

 

기존의 역대 어제실과는 다르게 조성해

 

고종황제의 능침인 홍릉을 바라보고 그 좌측에 보면 어제실이 있다. 어제실이란 홍릉에 제를 모실 때 제관들의 제사 준비와 휴식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고급스런 사대부가의 살림집처럼 마련한 제실은 행랑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마련하였다. 이곳은 능참봉을 파견해 능을 관리하게도 했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함에 따라 모든 제도를 혁신하였다. 이에 따라 능의 구조와 돌로 만든 석물의 배치 등도 달라졌으며, 재실의 건축 또한 많이 달라졌다. 하기에 홍릉과 유릉의 어제실은 기존의 왕릉에 딸린 재실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유릉의 경우에는 홍릉의 재실보다 더 웅장하게 조성하였다.

 

 

석물을 많이 사용한 어제실

 

어제실의 문을 들어서면 앞에 7칸의 전각이 보인다. 이 전각을 장대석을 이용해 세 칸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7칸으로 된 건물을 마련하였다. 전각을 바라보고 좌측에 두 칸의 방을 드리고, 중앙에 두 칸은 대청을 꾸몄다. 우측으로는 세 칸의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맨 우측의 방은 마루방인 듯하다.

 

이 건물은 벽을 돌과 벽돌을 이용해 꾸몄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양편으로 모두 자로 꺾어지었는데, 좌측은 두 칸의 광과 방, 대청, 안방, 부엌 순으로 나열했다. 우측 역시 좌측과 똑 같은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우측의 담장에는 작은 문을 내어 제관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에도 9칸의 건물이 있어

 

중앙에 제관들이 사용하는 전각 뒤편으로도 9칸으로 된 또 하나의 건물이 있다. 이 전각 역시 한 칸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자로 지은 이 집은 좌측에 두칸을 내달아 부엌과 방을 드렸으며, 이어서 두 칸의 부엌과 두 칸의 방, 그리고 두 칸의 대청과 한 칸의 방이 있다.

 

이 건물 역시 외벽은 돌과 벽돌로 조성하였다. 일반적인 역대의 재실보다 그 규모가 더 커졌음은 물론 장대석으로 높이 쌓아올린 후에 맞배지붕의 전각을 지어 황제로서의 위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왕들의 능침에서 보아오던 제실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꾸며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어제실. 보기에는 더 웅장하게 지어진 어제실이지만, 그 안에 고종황제의 슬픔과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역사의 아픔은 아직도 가시지를 않고 있다.

 

화성시 송상동 188에 소재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국권을 흔들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다.

 

 

현륭원을 수호하던 용주사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용주사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가다가 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원래 사찰에는 홍살문을 세우지 않지만, 이곳은 현륭원을 지키는 사도세자의 원찰이기 때문에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홍살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효행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효행박물관 앞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용주사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사람들은 간혹 천보루 앞에 서 있는 높이 4m의 오층석탑을 유형문화재로 잘못 알고 소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된 오층석탑은 높이 4.5m의 이 화강암으로 조성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특이한 오층석탑

 

효행박물관 앞에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간략화 된 기단부와,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 등의 양식과 치석 수법을 볼 때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석탑의 기단부 면석부에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점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오층석탑은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오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오층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점이나, 처마가 수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한 것은 여느 탑과 다름이 없으나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다. 1. 2. 3층의 머릿돌의 옥개받침은 4단이나, 4층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밑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에는 사방에 귀꽃모양의 인상을 3구씩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기단면석에는 위패형의 사각을 모각하였다. 부분적으로 훼손이 된 곳은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 중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로 조성하였다.

 

용주사를 찾아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오층석탑. 그 탑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무리들을 벌하시고, 선한 사람들이 제발 마음 편하게 사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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