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있어서 문명을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불이다. 인류가 불을 일으키고 이용하면서부터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이 불을 사용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불을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추측할 따름이다. 불은 어둠을 밝히는 조명으로서의 불과 추위를 막아주는 난방으로서의 불, 그리고 점차 음식물을 조리하고 흙을 빚어 굽고, 쇠붙이를 녹여 각종 기물(器物)을 만들고, 국가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어둠을 밝힌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이 밤에도 이루어질 수 있게 함으로써 삶의 폭을 그만큼 넓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낮 시간을 이용해 모든 생업활동을 마감해야 했지만 어둠을 밝히는 조명이 가능하면서부터 밤까지 시간을 연장하여 생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조명으로서의 불은 관솔불, 횃불, 촛불, 등잔불, 전기불 등 다양하게 열거할 수 있다.

 

 

 

 

용인시 모현면에 자리한 등잔박물관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258-9에 소재한 등잔박물관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지켜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등잔들을 한곳에 모아 개관하였다. 김동휘 선생이 40여 년간 틈틈이 모아 온 자료들을 중심으로 19979월에 경기도 테마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박물관은 수원 화성 봉돈의 이미지를 따서 건축되었다. 지하 1, 지상 3층 가운데 1, 2층은 전시공간이며, 지하층은 세미나 및 각종 공연을 위한 휴식공간이다. 800평 규모의 야외 전시장은 자연석과 다양한 종류의 나무, 그리고 연못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등잔박물관은 전 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층은 '생활 속의 등잔'을 주제로 우리 조상들의 삶 속에서 등잔들이 어떻게 쓰여 졌는가를, 그 시대의 민속품들과 함께 전시하여,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부엌, 찬방, 사랑방, 안방 등에 있는 많은 자료들은 모두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2층 전시실은 '역사 속의 등잔' '아름다움 속의 등잔' 그리고 '특별기획실'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시대별, 형태별, 재질별, 용도별 및 제작기법상의 대표적인 것들을 비교. 감상 할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 특히, 특별기획실에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그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보여줌으로써 한층 재미를 더하고자 하였다.

 

우리의 실생활에 쓰인 각종 가구들

 

야외전시장인 박물관 뜰에는 석등을 위시하여 물확, 연자매 등의 여러 가지 석물과 민속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편안히 쉬어갈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상우당(尙友堂))이라 불리는 박물관의 지하층은 무대공연과 전시기획, 세미나 및 심포지엄 등을 위한 150석 규모의 다목적 문화공간이다.

 

 

 

 

등잔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은, 서울 판교에서 오는 길은 분당동과 태재고개, 오포터널 통과 후 150m 지점에서 능평 2(이정표 우측)로 빠져서 직진, 능골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300m 지점에서 좌회전을 하면 된다.

 

수원, 수지, 죽전에서는 43번 국도로 광주로 가다 능원리(이정표 우측)로 빠지면 바로 레이크사이드 후에 박물관 이정표가 나온다. 주말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관람을 하기에도 적당하고,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불 문화가 발전되어 온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추천할만한 테마박물관이다.(글 자료/등잔박물관. 사진/박구원)

 

국보로 지정이 된 대웅전.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지은 전각이라고 한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먼저 화려함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 제49호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우리의 그런 편견을 깨고 있다. 어디에도 칠을 한 흔적이 없이 목재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재위 시에 창건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위덕왕은 44년 동안의 재위 기간 중에, 왕흥사라는 호국사찰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관한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전사를 하자, 아들 창(위덕왕)은 승려가 되려고 하였으나, 즉위를 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의 주심포 양식인 대웅전

 

하지만 덕숭산 수덕사는 백제 후기에 숭제법사가 처음으로 절을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덕숭산 수덕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대웅전에 대한 기록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 된 묵서의 내용으로 인해 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져,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잘 다듬은 8단의 바른 돌쌓기로 쌓은 장대석 위에 올려 세웠다. 양편으로는 난간을 놓은 계단이 있으며, 건물은 고려 때의 양식인 주심포 양식이다. 정면 3,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꾸민 대웅전은, 사각형의 자연석 주초를 이용했다. 기둥은 배흘림 기둥으로 조성했으며, 정면에는 빗살 삼분합문으로 꾸몄다.

 

 

단청을 하지 않은 고졸한 건축양식

 

국보라서 칠을 하지 않았나?”

아냐, 국보도 칠을 한 것이 있던데

그럼 왜 이렇게 그냥 놓아두었지? 이러면 오래가지 않을 텐데

 

대웅전을 구경하던 관광객들이 하는 말이다. 요즈음은 주말을 맞아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점점 문화재에 관심이 높아진 듯하다. 수덕사 대웅전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졸한 멋을 풍긴다.

 

9일 오전에 찾아간 수덕사 대웅전에는 수능을 볼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이 찾아들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괜히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 남들이 열심히 자녀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방해라도 될까해서이다.

 

 

조성을 한 형태가 아름다운 수덕사 대웅전, 맞배지붕 안으로 보이는 장식적인 요소가 색다르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아가니 3칸 벽면에 모두 문을 내었는데 양편에는 문을 장식하고 가운데만 널문을 달았다. 외부로 나타난 목재는 그대로 나무의 재질이 들어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백제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수덕사 대웅전. 건축 당시의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웅전 안을 들여다본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아미타와 약사불을 협시불로 모셔놓았다.

 

대웅전 안에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서원을 위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데, 사진을 찍기가 죄스러워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다가 뒤돌아선다.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만난 신라 때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지는 삼층석탑에도 누군가 합장을 하고 열심히 탑돌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단풍이 짙게 든 경내에서 여기저기 모여 사진촬영을 하기에 바쁜데, 천년세월을 그렇게 버텨 온 고졸한 멋을 풍기는 대웅전은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일부터 12일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49에 소재한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전통단청강좌 수료생 작품전인 오색빛깔의 미전이 열리고 있다. 멋스러운 전통 한옥의 전각에 화려한 옷을 입히는 단청은 우리나라 전통 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 전통 한옥이 점차 사라지면서 멋스러운 전통 단청 역시 그 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화성박물관에서는 그러한 아름다운 단청의 멋을 이어가고자 우리나라 단청의 문양과 그 위에 칠해지는 오방색의 조화를 배우는 실기강좌를 개설한 바 있다. 지난 3월부터 5개월 간 전통 단청 실기강좌를 통해 수강생들은 몸소 우리 단청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몸소 배우고 체험하였다.

 

 

수강생들이 그동안 닦은 기량으로 정성을 들인 그 결과물인 작품을 모아 작은 전시회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일반 집에서는 찾아보기조차 힘든 아름다운 오방색의 향연인 단청은 사찰이나 궁궐과 같은 곳에서나 만날 수 있다.

 

광물성 안료인 진채로 채색하는 단청

 

단청은 광물성 안료인 진채로 건조물이나 조상품, 또는 공예품에 색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단청은 단호, 단벽, 단록, 진채, 당채, 오채, 화채, 단층 등의 별칭이 있으며, 이에 종사하는 사람도 화원, 화공, 가칠장, 도채장이라 했다. 승려의 경우에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는데 금어, 또는 화승(畵僧)이라 불렀다.

 

단청의 무늬에는 긋기단청, 모루단청, 금단청, 모루긋기단청, 금모루단청, 갖은금단청 등이 있다. 무늬의 종류에는 화문, 쇄문, 비선문, 비조문, 주수문, 운문, 훈문 등으로 구분된다. 이 종류는 또 다시 여러 형태로 구분이 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단청은 천변만화의 극채색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이 된 단청장 김종욱(, 77)옹이 거주하고 있다. 김종욱 단청장은 19991018일자로 단청장 보유자로 지정이 되었다. “내 나이가 77세니 꼭 65년을 단청에만 매달려 왔다면서 어머님이 한양 용화사 신도회 일을 보셨기 때문에 그동안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단청에만 매달려 왔다.”고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렇듯 단청은 오랜 습학을 거쳐야만 온전한 기술로 아름다운 채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거나 색을 입히는 단청, 지도강사들과 함께 전시를 하고 있는 수강생들의 단청 전시는 한 마디로 오색빛깔의 아름다움이었다.

 

 

다양한 단청 모습을 만나볼 수 있어

 

2일 아침 박물관이 문을 열기가 무섭게 전시실을 찾았다. 마침 박물관 앞에는 타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듯 많은 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형태를 띤 단청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그 중 수강생들이 연합으로 제작을 했다는 기와에 그린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고기와에 그림을 그리는 단청장들을 몇 명 보아온지라 그 그림들이 반갑다. 요즈음에는 기와에 단청으로 그림을 그린 아름다운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가 있다. 지도강사인 최윤경의 ‘108 동자도가 눈길을 끈다. 김현순의 귀면궁창초(부조)의 아름다움이 발길을 붙든다. 비천도, 흉배를 응용한 단청, 손거울, 목어 등 많은 단청 작품을 만날 수가 있다.

 

 

단청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어요. 정말 우리나라의 단청은 채색의 극치란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전시를 하고 있는 것들이 수강생들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정말 아름다워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한 번 배워보고 싶어요.”

 

아이와 함께 단청의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고 하는 신아무개(, 44. 정자동),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에 빠져들 것 같다고 하면서 이 가을에 화성박물관을 찾아 우리 단청의 조화로운 미를 마음껏 느껴보시라고 권유한다.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가 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깨어져 사라졌던 몸돌을 복원시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과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담아 놓은 비가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귀부와 이수의 중간에 사라진 몸돌인 탑비가 이번에 복원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몸돌의 비문은 부러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의 판독이 가능했다고 한다. 탑비에는 원종대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전액을 썼다. 또한 비문은 해서로 바둑판같은 선이 그어진 네모 칸 안에 썼으며, 글자는 이정순이 새겼다.

 

 

이렇게 원종대사 탑비의 몸돌이 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러진 부분의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종대사탑비. 비록 그 색깔이 달라 조금은 어색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복원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830일 찾아간 고달사지. 이렇게 복원이 된 원종대사탑비를 돌아보니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제들이 훼파가 되었나? 사고가 틀리다고 종교성향이 틀리다고, 거기다가 나라가 부실한 탓에 수많은 문화제들이 제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훼손이 되어있던 더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공존을 하고 있다. 이런 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다. 15일 일찍 오산을 찾았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보고 난 후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성한 오산금암리 지석묘군을 찾아보았다.

 

이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 일대는 주변에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도로가 뚫려있지만, 아파트까지 인 듯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돌 공원이라고 명명한 공원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누구나 돌아보기 좋게 조성을 하였다.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이곳을 나와 한 바퀴 돌아보고 갑니다. 공기도 좋고 아이에게 잘 모르는 것이지만 자료를 보고라도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기도 하죠. 우선은 역사적인 곳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뒤편 휴먼시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아무개(, 38)씨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 하는 말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돌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고인돌공원

 

고인돌을 촬영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낮은 목책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아 밖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개석식 고인돌이라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촬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작 외형만 촬영을 할 것을 안으로 들어가 공원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사람들을 그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공원을 와도 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가 무슨 큰일이나 치르는 양 덮개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꼭 저렇게 촬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왔을 때는 모두 11기의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덮개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9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여기저기 만들어진 정자, 그리고 수로와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경관 등 참 좋은 공원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오산 금암동 고인돌공원.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원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이 공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지석묘군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 혹 이 바위로 인해 금암리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서면서 초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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