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삼막사 남녀근석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조금은 해괴한 것들을 보면 처음엔 다들 낯을 붉히고는 한다. 참 묘하게 남녀의 성기를 닮은 나무나 바위, 아니면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 삼막사 경내에 소재한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이 바로 그런 자연암석이다.

 

삼막사 대웅전이 있는 곳에서 남쪽 산 위로 500m 정도를 올라가면 삼막사 칠성각 서북편에 있는 2개의 자연 암석을 만날 수 있다. 그저 무심히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겠지만 그럴 염려는 없다. 근처에 가면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기 때문이다. 두 기의 바위의 모양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 녀 근석’이라 부른다.

 

지금은 이 남 녀 근석으로 오르는 길이 말끔하게 돌계단으로 정리가 되어있어 다니기에는 편리하지만, 그래도 옛 흙길을 터벅거리며 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 때가 더 자연 속을 걷는 것 같아 좋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 삼막사 남녀 성기석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기석을 만들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할 때는 돌을 다듬어 조성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막사의 남녀근석은 자연적인 바위가 성기를 닮았다. 이러한 성기 숭배 사상은 풍농과 풍어, 다산과 무병장수를 목적으로 하여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던 민속신앙의 하나이다.

 

성기숭배 풍속은 고려,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과 풍수신앙, 마을의 각종 제의식과 미륵신앙 등에 이어지고 있다. 삼막사의 남, 녀 근석은 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원효대사 등이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토속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해 왔다고 전해진다.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그 옆으로 칠성각을 둔 것은 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진 우리나라 민간 신앙의 한 형태가 불교와 습합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이 삼막사 성기석은 사실적으로 성기를 닮은 바위이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만짐으로써 다산과 출산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4월 초파일이나 7월 칠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공을 드린다고 한다. 그 기원의 방법으로 동전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는데 남근석은 높이 1.5m 정도이며 여근석은 높이 1.1m 정도이다.

 

 

 

남근석에 성혈이 있었네

 

자고로 남자는 뿌리가 깊어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 뜻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중점적으로 조사를 했던 것도 학술적인 것보다는 그 문화재에 숨겨져 있는 주변의 이야기에 더 매료를 당했다. 문화재를 보고 주변의 토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을 했던 것도 남들이 모르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 때문이다.

 

남근석의 높이가 땅 위로 솟은 부분은 1,5m 정도이지만, 실제로 그 높이는 4m 정도나 된다. 그 밑으로 이어지는 바위의 높이가 상당하다. 그 바위의 뿌리 부분이다. 그런 뿌리가 있어 다산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남근석에 두 개의 성혈이 보인다. 오느 시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성혈을 팠다는 것을 보아도 이 남근석은 오래전부터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혈이란 마음속에 염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돌로 돌을 갈아 그곳에 둥그런 구멍을 파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바위나 건조물의 기단 등에는 이 성혈이 새겨져 있다.

 

 

 

 

여근석에 물이 마르면 무슨 일이 날까?

 

삼막사의 여근석을 보면 참 묘하게도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옆에서 보면 그리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위에서 내려다볼수록 더 묘하다는 생각이 깊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여근석의 중앙에 깊게 골이 나 있는데 그 가운데 고여 있는 물이다. 몇 번을 이곳에 와 보았지만 항상 이렇게 물이 고여 있었다. 일부러 이곳에 누가 물을 부어 놓은 것일까?

 

유난히 가물었던 해에도 여근석 파인 부분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안양 인근에 비가 내린지가 꽤 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곳에만 물이 고여 있는 것일까? 삼막사 남녀근석을 찾아갔을 때는 한 낮의 더위가 며칠 째 30도를 넘나들었다. 아무리 산이라고 해도 벌써 말라버렸어야 할 바위에 고인 물이다. 이곳에 물이 마르면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누가 일부러 물을 갖다 붓지는 않았을까?

 

의학적으론 잘 모르겠다. 들은 바로는 여성의 질이 마르면 생산성이 그만큼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만일 이것이 누가 일부러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는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삼막사 남녀근석, 이곳에 물이 마르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는 전설 하나쯤 있을 법도 하다. 다음 이곳을 찾아오를 때는 그 연유를 한 번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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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외산면 반교리는 요즈음 찾아드는 발길들이 잦아졌다고 한다. 커다란 카메라를 둘러메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든다는 것이다. 마을이 생긴 지가 오래되었지만, 요즈음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겨울철이라 좀 뜸한 편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이 되면 꽤 몰려온다고 이야기를 한다.

 

반교마을에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은, 바로 마을 집들이 쌓아놓은 돌담장 때문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집집마다 길가에 쌓은 돌 축대며 담장이 보인다. 조선조에 쌓았다고 하니,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일 추운 날 돌담장을 만나러 가다니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 움츠리고 밖으로 나가기도 싫은 날씨지만, 부여군의 많은 문화재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몸살기운이 영 가시지를 않아 병원신세를 진 몸이지만, 그 역마살은 이런 날씨에도 사람을 밖으로 몰아내는가 보다. 참 세상에 이런 팔자도 드물 것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발길은 어느새 반교마을을 향하고 있다.

 

부여를 출발하여 40번 도로를 이용해,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를 찾아가다가 만날 수 있는 반교마을. 도로에서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돌담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등록문화재 제28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부여 반교마을 옛 담장이다. 이 담장들은 조선조에 축조가 되었다고 하니, 세월이 연륜이 묻어있는 담장이다.

 

물론 그 동안에 많은 보수를 하였겠으나, 그래도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모습에서 반가움을 느낀다. 수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나러 다니는 것도 부족해, 이젠 돌담까지 이 추운 날 만나러 가느냐고 어느 분이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정말 돌에 무엇이라도 홀린 것이 아니고서야, 이 추운 날 사서고생을 하다니.

 

 

 

 

 

호박돌로 쌓은 돌담장을 만나다

 

반교마을 옛 돌담장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마을의 밭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막돌인 호박돌을 이용해 쌓은 담장이다. 호박돌이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말한다. 이런 호박돌은 마을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돌을 이용해 길을 따라 늘어선 담장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다.

 

담장은 밑의 폭이 90cm 정도이고, 위는 60cm 정도의 폭으로 위가 좁아져 안정감이 있다. 초입에는 옛 돌 축대가 무너질 것을 대비했는지, 시멘트로 발라 놓은 곳도 있다. 그 축대 역시 막돌을 이용해 쌓은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만 담을 쌓았다. 흙 한 덩이 이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아 올린 담이, 이렇게 견고하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소통을 할 수 있는 높이의 담장

 

담장의 높이는 약간씩 다르지만, 길가에 쌓은 담장은 어른 키보다 조금 낮다. 담장 너머로 울안이 들여다보일 정도이다. 이렇게 담장을 어른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소통을 하기 위함이다. 양반가의 담장들이 폐쇄적이라면, 민초들의 담장은 누구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도록 낮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가의 담장이 갖고 있는 멋이기도 하다.

 

손이 곱을 정도로 매서운 날씨다. 그래도 마을 안을 이리저리 돌아본다. 돌이 참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괜한 걱정을 해본다. 그저 척척 올려놓은 듯한 돌들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다니. 반교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저 담장에 넝쿨 꽃이라도 타고 올라가는 날,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겨울철 담장은 너무 차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국보 제120호 용주사 동종의 조형에 반하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에 소재한 용주사. 일 년이면 4~5차례 이곳을 들린다. 용주사에 들리면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는 것이 바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이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종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범종인 이 동종은 높이1.44m에 입지름 0.87m, 무게는 1.5톤이다.

 

용주사 경내로 들어가면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이 범종각은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종의 윗부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음통이 있다. 용뉴는 용이 정상부의 보주를 물고, 발톱을 세워 종의 상륜부 철판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비천인들은 바로 날아오를 듯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는데,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종의 어깨 부분은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으며 아래 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문양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사방에 조성한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를 조형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새겨 넣고 사방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종 밑 입구에 돌린 하대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연속 된 당초문양으로 장식하여 멋스러움을 더한 것이 이 동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했다고 후대에 새겨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한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을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종에 새겨진 이 명문은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고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120호인 이 용주사 동종은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비천도인은 손목에 묶은 ‘표대’(혹은 복대라고도 한다)를 바람에 날리며 그 표대로 하늘을 날면서 바람의 방향과 이동하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생명에 없는 차디 찬 금속에 새겨진 비천도로 인해 종이 생명을 얻는다. 아마 비천인들을 새겨 많은 화공이나 조각을 하는 장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천도는 범종에 많이 장식되지만, 법당의 천정이나 석등, 부도, 불단, 또는 전각의 외부 단청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국(佛國)’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춘다. 때로는 두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기도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한다.

 

 

 

아름다움의 상징 비천인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인 허균의 글에 따르면(2005, 1, 14 불교신문)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될 때 비천도도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불교의 중국 전래의 통로였던 돈황 막고굴 벽에 그려진 비천상은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모습이 아닌 도교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반신은 배꼽을 드러낸 나체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다. 표정 또한 요염하고 손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이 4세기 말경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 불교와 함께 전해졌다. 불교미술에 수용이 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적 변천을 거치며 한국적 비천상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불교의 모든 곳에서는 비천상이 불교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정착한 것으로 본다.

 

나는 절마다 찾아다니며 비천도를 유심히 보고 사진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가 절집에 들리면 먼저 벽화며 탱화에 그려진 비천도를 찾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천도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천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비천인상에 빠져들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천인상이라는 비천도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요즈음 현실적으로 많이 발전한 비천도를 보면 비파를 타거나 횡적을 불거나 아니면 춤을 추는 비천도도 있다. 심지어는 무당춤을 추는 비천도까지 그려질 정도니 나날이 변화를 해가는 천인상인 비천도는 이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장르로 발전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 비천상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기분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비천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시의 느낌이 바로 나란 생각이다. 불교의 교리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전각에 들어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참례를 한다. 그리고 비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 비천인의 모습에서 굳이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불국토가 따로 있겠는가? 그 비천상을 따르는 마음 하나가 불국토가 아닐는지. 오늘도 마음 한 자락 허공에 띄워 비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세속의 답답함을 훌훌 떨쳐내고, 어디론가 겨울 찬바람에 실려 떠나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인가 보다.

 

 

오산 외미거북진놀이’, 어떤 놀이일까?

 

뚫어라 뚫어라 물구멍을 뚫어라. 물줍쇼 물줍쇼 사해용왕 물줍쇼

 

거북이를 몰고 나온 질라래비가 우물 앞에서 하는 덕담이다. 놀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한다. “물주쇼 물주쇼, 사해용왕 물주쇼거북놀이는 우리나라 한수 이남의 놀이로,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에 연희되던 놀이이다. 수수잎과 짚 등을 이용해 만든 거북놀이의 거북이는 두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연희를 한다.

 

경기도 이천의 거북놀이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0호인 이천 거북놀이로 지정이 되어있다. 본 기자는 이천 거북놀이를 직접 이천시(당시 이천군) 전역과, 근동 안성, 평택, 용인, 광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발굴 해, ‘이천의 민속 거북놀이라는 책을 펴낸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다. 아마 이 조사보고서 형식으로 꾸며진 소책자가, 그동안 써온 20여권의 책을 엮게 된 기폭제가 되었는가 보다.

 

거북놀이는 기원성민속이다. 가내의 안과태평과 풍농 등을 기원하는 놀이이다. 거북놀이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날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짚과 수수깡으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즐기던 놀이이다. 거북이는 장수동물이요 부귀를 상징하기 때문에, 놀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놀이

 

거북놀이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연희를 하는데, 집 대문 앞에서는 문굿을 먼저 치고, 마당에 들어서면 우물굿(용왕굿)과 마당굿을 한다. 마당에서 굿을 하는 도중 거북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거북이 곁으로 몰려들게 된다. 이때 질라래비는 이 거북이가 동해를 건너(지역에 따라서는 서해를 건넌다고도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배가고파 쓰러졌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십쇼하고 소리를 치면 주인이 먹을 것을 내준다.

 

그렇게 밤새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준다. 대개 정월에 하는 거북놀이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가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한다고 하면, 추석에 하는 거북놀이는 풍농에 대한 감사로 행해진다. 경기도 남부 일원에서 연희가 되던 거북놀이가 거개가 동질의 형태로 나타났었다.

 

 

 

 

오산 외미거북진놀이가 궁금하다

 

이번 18일과 19일 오산에서 열리는 제20회 경기도민속경연대화에 참가하는 오산 외미거북진놀이’. 오산에서는 서랑동, 금암동, 금곡리, 내삼미동 등 에서 정월 초하룻날부터 대보름날, 추석전후로 하여 마을의 각 가정에 거북이와 남생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놀이문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금암동과 서랑동에서만 소수로 추석전후로 거북놀이가 행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오산외미걸립농악보존회에서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놀이 문화를 다시금 복원하기 위하여, 마을별 어르신들을 찾아가 얘기를 듣고 연구 및 발굴하여 오산만의 특징을 지닌 거북진놀이를 재현시켰다고 한다.

 

 

오산외미거북진놀이는 걸립과 농악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거북이 5마리와 남생이 4마리가 노는 모습은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농악에 쓰이는 다양한 진을 이용하여 팔괘진, 오방진, 십자진, 가새치기 등 신명의 한마당을 만든다고 한다.

 

오산외미거북진놀이에 쓰이는 악기로는 꽹과리3, 2, 장구3, 3명이 있으며, 거북놀이를 위한 편성은 거북이, 남생이, 양반, 마님, 아낙, 기수, 법고, 남정네, 동네아이들 등 40~5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경기도남부 지역의 거북놀이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거북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풍물은 기본적으로 구성이 된다. ‘오산 외미거북진놀이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를 받아보고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민속경연대회는 그 특성상 철저한 고증이 제일 중요하다. 오산 거북놀이를 눈여겨 보아야하는 이유이다.

 

오산을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그저 웃는다. 오산을 자랑하라고 하면 한 시간 넘게 자랑을 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빠트리지 않는 것은 백제 때부터 우리고장을 지켜온 독산성을 든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적을 물리친 지혜가 서린 세마대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다음을 궁금해 한다. 그 크지 않은 도시 오산에 무슨 자랑꺼리가 있겠는가?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산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 한 마디로 한양을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남대문의 문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산은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 오산을 사람들은 자랑을 하지 못한다. 왜 그런 것일까?

 

 

 

 

오산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고인돌 공원.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상한 고인돌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인 이곳 일대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근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취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금암리 지석묘군 인근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한편 야산을 끼고 조성된 고인돌 공원이다.

 

이곳을 공인돌 공원이라고 명칭을 붙여 사람들이 우리 선사유적과 함께 힐링의 공간으로 삼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선사유적지이다. 공원이기 보다는 사적 등으로 지정을 했어야 마땅한 곳이다. 하지만 주변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이곳에서 건강과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하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찾아와 높지 않은 산을 돌아보면서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거기다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곳. 더구나 우리나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어 이곳에서 문화재 사랑과 우리 옛 풍속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처럼 자랑할 만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고인돌 공원에는 현재 개석식 고인돌 9기가 소재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고인돌 형태로 보이는 돌들이 있어, 앞으로 더 정밀발굴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 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금암리 고인돌의 형태를 보면,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형태이다. 그렇기에 그 아랫부분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바위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난 이곳을 자랑하고 싶다

 

26일 지난 밤 내린 비가 그친 후 금암동 고인돌 공원을 찾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덮여있는데, 공원 안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근처 어디 유아원에서 바람을 쐬러 온 모양이다. 고인돌 공원 안쪽에 커다란 할아버지 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뒤편에 몇 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보인다.

 

2호 지석묘 상단에 성혈이 있다고 하여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동안 풍우에 씻긴 듯 식별할 수가 없다. 4호 고인돌을 촬영을 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높게 자란 숲으로 인해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숲길에는 시원한 바람마저 분다. 아이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산길을 내려오는 모습에서, 이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숲길 가에도 지석묘와 같은 돌 한 기가 놓여있다. 근처에 표지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확인이 된 것은 아닌 듯하다. 산길을 걷다가 숲속에 놓인 쉼터 안에 다리를 뻗는다. 초가을 오전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도심 인근에 아파트촌과 학교, 그리고 숲에 쌓인 고인돌 공원. 어찌 이 좋은 곳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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