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며 하는 고찰답사로 여름을 난다

 

날이 무덥다, 올 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길다고 한다. 아침부터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16일부터 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온다고 하더니 그래서인가 날도 꽤 습한 듯하다. 이렇게 날이 무덥고 습해 온몸이 끈적거리는 날은 그저 어디 바닷가로 찾아가 시원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다.

 

그런 더위에도 햇볕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저 잠시라도 어디 시원한 그늘로 피하고 싶어 한다. 일을 하다말고 팔달구 우만동에 소재한 봉녕사에 볼일이 있어 들려보았다. 이 무더위에도 절을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인다. 꼭 그 사람들이 종교적인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불자 같으면 당연히 절 입구를 들어서면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할 텐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구경을 한다. 요즈음 봉녕사는 많은 불사를 했다. 종각 앞에는 금라라는 문화원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봉녕사 용화각에 들려 볼일을 보고 돌아 나오려다가 숲길로 잠시 접어들었다.

 

숲속에 들어서자 그동안 맡지 못했던 풀내음과 숲의 독특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몇 발 걷지 않았는데도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듯하다. 한 여름철이 되면 유난히 산과 계곡을 좋아해 찾아가는 나로서는 광교산 계곡을 몇 번씩 찾아가고는 한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의 맛을 알기 때문이다.

 

 

 

고찰 답사에서 만나는 숲의 시원함

 

이 더위에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는 한 여름철 고찰답사(古刹踏査)를 많이 하는 편이다. 우선 고찰을 찾아가면 주변 경관이 일품이다. 대개 산 속에 위치한 고찰들은 주차장에서 얼만 큼을 걸어야 한다. 차로 이동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남들보다 몇 배의 거리를 더 걸어야하고 그만큼 더 많은 땀을 흘린다.

 

걷는 동안은 당연히 힘이 든다. 일반적인 평지를 걷는 것도 아니고 산길을 걸어야 한다. 기거다가 비라도 온 뒤에는 습한 기운이 가득한 숲길에서는 땀이 몇 배로 흐른다. 사람들은 비가 오고 난 뒤 숲속으로 들어가면 더 시원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숲속은 습하기가 짝이 없다. 그래서 더 많은 땀을 흐른다.

 

 

그렇게 땀을 비 오듯 흘린 후 절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시원한 물이 솟는 샘이다. 어느 절이 되었던지 산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에는 대개 지하에서 샘솟는 물이 있게 마련이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상수도가 있을 리 없으니 암반이나 지하에서 샘솟는 물은 필수로 마련해야 한다.

 

그 물을 한 잔 마시면 내장에 다 정화가 되는 느낌이다. 땀을 비 오듯 쏟고 나서 그렇게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면 마치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든다. 거기다가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까지 불어온다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그런 여름철의 시원함을 아는 나로서는 늘 여름이 기다려진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고 한다. 자난 주부터 시작한 고찰답사. 찾아갈 때는 비록 숨이 턱에 닿을 듯 힘이 들고 흐르는 땀으로 인해 옷이 다 젖을 정도이긴 하지만, 오르고 나서 시원한 물 한 대접과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면 그보다 좋은 여름 피서는 없을 듯하다. 그래서 주말이면 카메라 한 대를 챙겨 메고 고찰을 찾아 나선다.

 

 

사람들은 여름이면 바닷가로 떠난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닷가. 난 그런 바닷가보다 시원한 계곡과 푸른 숲, 그리고 문화재를 만날 수 있는 고찰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만나는 문화재의 이야기도 좋고, 운 좋은 날에는 맛깔스런 절집 밥까지 한 그릇 대접받을 수 있어 더욱 좋다.

 

유난히 무덥고 더위가 길다고 하는 이런 여름 무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면 고찰답사로 이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태화산 백련암 부도를 만나는 길, 제대로 정비해야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정말 힘들 때가 있다.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들 때는 중간에 포기라도 하고 싶지만 도대체 어떤 문화재가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중도 포기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은 맥이 풀리기도 한다. 힘들게 길을 따라 험난한 산길을 올랐는데 문화재라는 것이 기대치 이하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문화재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마음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2, 주말이라 일찍 길을 나섰다. 몇 곳을 돌아보아야 하는 답사 여정을 잡아놓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 산25-1에 소재하는 대한불고조계종 태화산 백련암이다. 백련암 입구를 지날 때마다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된 부도탑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이는데 그 부도의 모습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인가 한 여름에 백련암을 찾아 오르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다. 용인에서 광주시 곤지암으로 나가는 98번 도로에서 1.8Km라는 이정표를 보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 길이 우리가 흔히 보아온 산길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걸어도걸어도 줄지 않는 길이다. 1시간 정도 산을 오르다가 숨이 턱에 차 결국 포기를 한 적이 있다.

 

이날은 일행이 있기에 다시 한 번 오르리라 마음을 먹었다. 도로에서 주차장까지 1.4km 정도.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400m 정도를 오르면 된다. 그런데 이 400m라는 거리가 그냥 산을 오르는 길이 아니다. 경사는 40도에 가까워 한편에 묶인 줄을 잡고 올라야 한다. 이틀 동안 내린 비 때문인지 바닥을 밟을 때마다 푹푹 빠진다.

 

지그재그로 난 길을 숨을 헐떡이며 몇 차례를 쉬었지만 백련암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내리다가 멈춘 탓인지 숲 속은 습기가 차서 땀까지 더 많이 흐른다. 40여분은 족히 걸었나 보다 태화산 정상 바로 아래 자리하고 있는 백렴암에 도착을 했다. 비안개가 자욱한 백련암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석종형부도 1기가 자리하고 있는 700년이 지난 고찰

 

백련암은 고려 때의 절이라고 한다. 백련암에는 경기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3호인 추곡리백련암부도 1기가 자리하고 있다, 부도는 승려의 무덤으로 사리나 유물을 모셔놓은 석물이다. 백련암 부도는 석종형으로 네모난 바닥돌을 기단으로 삼고 종 모양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기단부인 바닥돌은 앞면에 풀꽃무늬를 새기고 양 옆에는 안상을 새겼다.

 

위받침에는 연꽃을 두르고 있으며 탑신의 아래편에도 대칭되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꼭대기에는 둥근 받침대 위로 작은 머리장식이 얹혀있다. 머리장식은 꽃봉오리 장식을 하고 있는 평범한 석종형 부도이다. 부도의 몸돌에는 6,25 전쟁 통에 탄환자국이 났는지 시멘트를 발라 놓은 자국이 보인다.

 

이 석종형 부도탑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부도탑의 모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도탑 옆에는 오래지 않은 부도탑이 한 기 서 있고 요사를 향해 가는 길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마침 물탱크를 보고 있는 주지 광진스님을 뵐 수 있었다. 스님은 장성 백양사에서 출가를 하신 큰 스님으로 이곳 백련암에 오신지는 4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태화산 비탈에 층층이 마련한 백련암

 

두 동의 요사를 지나면 뒤편에 바위 암벽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놓은 곳이 있다. 절이 워낙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은 암반에서 나오는 물을 이용해 물탱크에 저장을 해 놓는다고 한다. 커다란 물탱크가 4기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에서 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고려 때 처음으로 창건이 되었다는 백련암은 두 번이나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한 번은 산불로 인해 전소가 되고, 또 한 번은 산사태로 인해 절이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절 축대를 마치 성벽을 쌓듯 견고하게 쌓아놓았다. 오르는 길에 깔린 돌 틈에도 와편이면 사기 조각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더 많은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사 뒤편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안에 들어가 삼존불에 참례를 하고 나오니 한 칸짜리 집이 한 채 눈에 띤다.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걸려있는데 대웅전 옆에 장작더미를 쌓아놓았다. 이곳에선 나무가 없다면 겨울철 난방을 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태화산 산비탈에 마련한 가람이기 때문에 모든 곳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불사를 마련했다. 대웅전 뒤편 바위벽 밑으로는 움푹 들어간 바위 안에 산신을 모셔놓았다. 백련암 곳곳에 쌓아놓은 장작더미며 여기저기 널린 바위들을 보니 이 절을 이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지 짐작이 간다.

 

 

 

이 절에서 법관이 여러 명 나왔데요

 

절 구경을 마치고 아직 비안개가 다 가시지 않은 요사 툇마루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주지 광진스님이 다가온다. 합장을 하고난 후 초파일 불사로 모노레일을 설치하겠다는 권선문에 대해 질문을 했다. 모노레일을 설치하지 않으면 그 먼 가파른 산길을 일일이 지게를 지고 올라야 하기 때문에 불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웅전 옆 한 칸짜리 집은 누가 기거하시나요?”

그곳 기운이 좋다고 해서 제가 사용하고 있어요

평소에는 사람들 만나기가 힘들겠네요?”

예전에 이곳으로 등산로가 나 있었는데 유정리 쪽으로 등산로 입구가 옮겨갔죠. 가금 특전사 장병들이 이곳을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오르고는 해요

대웅전 옆 그 집이 정말 마음에 드네요. 앞으로 보이는 경치가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 백련암이 기운이 좋아서 이곳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여럿 법관이 되었다고 해요. 전하는 말에는 추미애 의원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고요

 

 

절의 기운을 보니 그 말이 허황된 말은 아닐 듯하다. 오르기는 힘이 들지만 다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 아래쪽에서 바람이 길을 따라 올라온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바람도 힘이 드는가보다. 백련암에서 키우고 있는 진돗개 한 마리가 멀찍이 떨어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산 위라 불편한 점이 많으시겠네요?”

한두 가지가 아니죠. 올라오는 길 보셨죠. 이틀 동안 비가오더니 그렇게 다 파였어요, 며칠을 작업을 해놓았는데 헛수고가 된 것이죠. 이곳은 화장실이 없어요. 광주시에 도로보수와 간이화장실이라도 설치해 달라고 해도 매번 예산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오죠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태화산 정상부근에 있는 백련암에 화장실이 너무하단 생각이 든다. 문화재를 찾아 올라온 나도 그 화장실을 사용하기가 께름칙하다. 절에 거주를 하는 사람이라야 주지스님과 공양주보살, 그리고 일을 맡아오는 처사 한 명뿐이다. 요즈음은 냄새가 나지 않는 간이화장실도 많은데 그것 하나 놓아주는 것이 무슨 큰 예산이 들까? 그저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다가 보면 이런 불편한 일들을 자주 당하게 된다.

축축한 비구름이 가신다. 잔득 흐렸던 날씨도 개이고 있다. 다음 약속장소로 자리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인사를 하고 사문을 나선다, 뒤에서 일을 보는 처사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절을 올라오는 길에 가로등이 없어서 해가 지면 꼼짝을 할 수 없어요. 가로등과 화장실이 가장 급해요. 하루빨리 개선될 수 있도록 부탁드려요

 

 

고성 현내면 산학리 정수암이 심상치 않다

 

이 작은 암자가 서울 북한산 밑 커다란 집과 기운이 비슷하다고 해요. 신을 모신다는 사람이 한 이야기니까 그저 믿기로 했어요. 아니라도 손해 볼 것은 없잖아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277(산학리)에 소재한 인법당인 정수암. ‘금강산 정수암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마을 맨 위에 작은 암자를 만날 수가 있다. 암자를 들어서면 40여개의 장독이 먼저 반긴다. 벽면에 벽화로 커다란 연꽃을 그린 암자는 법당과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가 한 건물에 들어앉은 토굴이다. 흔히 이렇게 소규모로 편리하게 지은 암자를 인법당이라고 부른다.

 

정수암(주지 진관스님)은 뒤편에 금강산 줄기가 뻗어있고 좌우로는 물이 흐른다. 전형적인 명당의 조건이라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앉은절이다. 법당 앞으로는 연못을 마련하였는데 옆으로 흐르는 맑은 물을 끌어들여 용의 입에서 물이 연못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조합으로 인해 이 절이 기운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작은 암자에 서린 기운 심상치 않아

 

절을 들어서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즐비하게 늘어선 장독들이다. 그 중에는 장이 담겨있는 듯 뚜껑 아래 천이 보인다. “속가 모친이 담근 장이라고 설명하는 진관스님은 이곳에 터를 잡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다.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하던 중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아픔을 당하기도 했다는 스님은 이런저런 꼴을 보지 않고 이 좋은 곳에서 수행만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한다.

 

조용하고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이잖아요. 전혀 오염이 안된 곳입니다. 지척에 화진포가 자리하고 있어 한 바퀴 돌아오면 수행을 하기에는 최적의 암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 가까이에 옛 산학산성 터가 있고요,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커다란 노송 한 그루가 서 있죠. 금강산 정기가 흘러내리는 곳이라 그런지 강한 기운이 있다는 것을 느껴요

 

 

 

진관스님은 그저 이 작은 암자에서 중생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한다. “스님이 중생들의 안녕을 위해 열심히 불공을 드리는 일이 몫이 아니냐며 웃으며 말하는 스님은 흡사 어느 절에서 만난 동자승 같은 모습이다. 그저 얼굴만 마주하고 앉아있어도 마음에 편해지는 상이다.

 

우리 절 옆을 흐르는 작은 개울에는 가재가 바글거려요. 이 냇물에 발을 담구면 한 여름에도 오장육부가 다 시원해지는 듯하고요. 가재가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은 이 물이 청정수라는 것을 뜻하고요. 많은 생명이 살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땅이란 생각입니다. 거사님도 법당에 들어가 절 한 번 해보세요. 새로운 기운이 솟아날 것입니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준 아기장수 이야기

 

정수암이 자리하고 있는 뒤편 산을 노인봉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강한 바람과 심한 경사로 나무들이 살지 못하고 벌거숭이 인데다가 돌바위가 산을 덮어 그 모양이 마치 늙은 노인의 머리처럼 보인다해서 노인산(老人山)’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정수암 앞으로 난 소로를 따라가면 넓은 들판이 나온다. 이곳 정수암 일대가 모두 옛 절터라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 탄압으로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 절터에는 전설이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찾아 기도하며 소원성취 되기를 빌어 왔다고 하는데, 어느 해 이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노총각이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 백일동안 노인산과 절터를 찾아 기도를 한 끝에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고 이야기가 전한다.

 

 

 

마침 정수암에는 이 마을에 산다는 신도 한 분이 와 계셨다. 박기선(, 72) 할머니는 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중에 아기장수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보라고 한다.

 

이 정수암 건너 편 앞에 옛날에 절이 있었데요. 그곳을 마을에서는 절터라고 불러요. 그 절에서 자식이 없는 한 부부가 열심히 치성을 드려 아이를 하나 점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니 양편 어깨 밑에 날개가 있었데요, 나중에 크면 큰 인물이 될 아이죠.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장수가 나면 바로 죽여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걱정을 하다가 아기장수의 아버지가 날개를 인두로 지져버렸다고 하네요. 아이가 뜨거우나 당연히 온 동네가 떠날 듯 울어 젖혔겠죠. 그때 화진포 바닷물 속에서 천마가 한 마리 튀어나오더니 아기를 태우고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 절이 퇴락해 버렸단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한 3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기도생활을 했는데 이상하게 오래들 있지 못하고 자주 떠났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이 절이 있는 인근의 지기가 상당히 세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을 한다.

 

 

이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렵니다

 

주지 진관스님과의 인연으로 인해 이곳을 찾은 것이 몇 번째이다. 18일 찾아간 정수암은 한 겨울이면 창문 위까지 눈이 쌓여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못한 곳이지만 스님은 이곳이 최고라고 한다. 한 마디로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하룻밤을 이 작은 암자에서 잠을 청했다. 한 밤중 바람소리가 잠을 설치게 만든다. 6월 중순인데도 이렇게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을 보면 이 절터에 또 다른 기운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아침에 일어나 경내를 한 바퀴 돌다보니 인법당 한편에 바위하나가 덩그마니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바위 평평한 면에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착각이다. 왜 그런 착각을 하게 된 것일까? 진관스님께 그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절을 찾는 사람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마애불은 바위에 부조나 선각으로 조형을 하는 부처님을 말한다. 이 강원도 금강산 줄기 아래 자리하고 있는 정수암에 마애불을 조성한다면 그 기운은 어느 정도일까? 천년세월을 지켜낸다는 마애불이 아닌가? 아마도 천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런 염원을 갖고 마애불을 조성했다면 앞으로 천년 이상 그 기운이 전해지지 않을까? 나도 이참에 정수암 마애불 조성불사에 동참을 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한다.

 

혹 누가 알 것인가? 기운이 남다른 금강산 정수암에 마애불을 조성하고 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장수한 명이 집안에 태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며 혼자 허공을 바라보면 웃는다. 이 작은 암자가 사람에게 주는 즐거움이 이리 큰 줄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피안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만난 피안이라는 것이 결국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오늘 이 작은 암자에서 또 하나를 깨우치고 간다.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는 조선조에 조성한 석탑.

 

4월 초인데도 낮 동안에는 땀이 흐르는 날씨이다. 2일 휴일을 맞아 꽃놀이를 가는 차량들로 인해 가는 곳마다 차들로 북적인다. 이런 날은 고속도로를 피해 국도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성시 바우덕이 남사당 전수관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그저 한가하게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해 국도를 택했다. 답사란 시간을 쫒기면서 하는 것보다는 여유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오산을 지나 평택으로 들어가기 전에 안성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용인 남사면을 지나 안성 원곡면 방향으로 접어드니 차들도 많이 다니지 않고 한가한 편이다. 길가에 이정표 하나가 눈에 띤다. 청원사라는 절이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정표다. 동행을 하는 지인이 그 절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 절에 문화재도 있다고 하니 굳이 길을 지나칠 이유가 없다.

 

좁은 산 밑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니 저수지가 보인다. 주말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다. 저수지를 비켜서 산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니 목탁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을 보니 아침 사시예불 시간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절을 돌아본다. 대한불교 조계종인 청원사는 화성 용주사의 말사이다.

 

 

 

고즈넉한 사찰에 울리는 목탁소리

 

절은 크지 않다. 옛 건물은 대웅전과 대웅전 앞에 서있는 칠층석탑 정도이고 남은 전각들은 지은지가 오래지 않은 듯하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대웅전과 칠층석탑이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속 작은 절이지만 그래도 문화재가 두 점이나 된다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답사 길에서 만나는 문화재는 늘 기쁘기 때문이다.

 

청원사는 안성시 원곡면 성은리 397 천덕산에 자리한다.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봉우리 아래편에 넓지 않은 절이 자리하고 있다. 사시예불 시간인데도 대웅전 안에는 스님 한 분이 앉아 예불을 드리고 있고 공양주 인 듯한 여인이 대웅전 문을 나선다. 아마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를 올리고 나오는 듯하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칠증석탑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탑은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보이는 탑의 기교면도 돋보이지 않는다. 높이 3.5m의 탑은 단층 기단 위에 7층 답신을 올렸는데 지대석은 여러 개의 돌로 마련하였다. 기단의 갑석에는 상하면에 연화문을 새겼고 각 측면에는 4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는 청원사

 

청원사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대웅전 삼존불상에서 발견 된 복장유물 중에 고려 충렬왕 6년인 1280년에 국왕이 국태민안을 위하여 발원한 사경(寫經)과 묵서가 발견되어 고려 말 국가의 원찰로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원사는 조선조에도 법등이 이어져 철종 5년인 1854년에 대웅전의 중수가 이루어졌고, 1998년에는 산신각을 옮겨짓고 요사를 보수하였다.

 

청원사 칠층석탑은 조선 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받침돌과 몸돌은 각각 1장의 돌로 마련했으며 낙수면은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해진다. 각층 탑신에는 모서리에 양우주가 새겨져 있으나 몸돌마다 많이 마모가 되었다. 전체적인 탑의 모형은 7층이라는 높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대웅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청원사 7층 석탑. 7층 석탑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 아니다. 우선 기단부가 낮게 자리하고 있으며 상륜부에 올린 보주 역시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았다. 지붕돌의 아래편에는 받침을 조성했으며 몸돌은 낮게 꾸며 탑의 높이를 줄였다. 이렇게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석탑이다.

 

석탑 지붕돌의 처마 끝에는 녹물이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지붕돌 사방에 풍경 등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나면서 옛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문화재들. 비바람에 씻겨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그렇게 조금씩 달라져버린 모습에서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렁 고마움 때문에 답사를 이어가는가 보다.

 

 

화성 당항성 인근 신흥사 일대가 유력하다

 

신흥사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 72-15에 소재한다. 이 신흥사는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사적 제 217호인 구봉산 당항성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신흥사는 당항성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절은 사라지고, 한영석 거사의 시주로 1934년 덕인 스님이 창건하였다.

 

신흥사에는 큰법당을 바라보고 좌측에 석불입상이 유리상자 안에 서 있다. 이 석불은 당항성 내에 있던 옛 절터에서 찾은 석불이다. 옛 절터에 파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1999년에 이 석불입상을 찾아냈다는 것. 이 약사여래불은 옛 절터에서 좀 아래편 작은 계곡 둔덕에 반듯이 누워있었다고 한다.

 

 

 

이 약사여래불은 앞가슴에 약병을 들고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가 되었으면서도 비교적 신체부위는 깨끗한 편이다. 야외에 모셔진 이 약사여래불은 2000416일에 모신지 일 년 만에 점안식을 가졌다고 한다.

 

이 약사여래입상은 오른 손은 허리춤에 부쳐 약병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리고 있다. 법의는 허리 아래에서 양편으로 갈라져 U자형으로 주름을 잡고 있다. 무릎 아래는 통으로 내리닫는 모습이다. 두상이 사라져 아쉬움은 있지만, 신체의 부위로만 보아도 당당한 체격을 가진 약사여래입상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교화공원이 있는 신흥사

 

신흥사의 자랑은 요사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부처님 교화공원이다. 이곳은 부처님이 수많은 중생들을 교화시켜 불도에 귀의시키는 모습을 조각으로 조성하였다. 모든 조각물에는 센서가 부착이 되 인기척이 나면 설명을 하도록 하였다. 산길을 따라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조각상군이 바로 1차 경전 결집이다.

 

경전결집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그해 6월에 라자그리하의 칠엽굴에서 아자타샤트루왕의 보호 아래 마하캬사파를 중심으로 500 아라한이 모여 첫 번 째 경전결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경전 결집을 팔만대장경이 세상에 나타난 시초로 본다.

 

경전결집을 지나면 세상에서 자식을 가장 사랑한 부모인 말맄타 왕비와 바사잌왕의 석조물이 자리한다. 팔만대장경에 여성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리카왕비는 코살라국 바사잌왕의 왕비로 왕의 총애에도 항상 겸손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자비심을 베풀었으며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산의 정상 쪽으로 걷다가 보면 승만공주와 승만경, 살인마 앙굴리마라 제도, 기원정사와 수닷타장자, 빔비사라왕의 귀의와 죽림정사, 바보 쥬디판타가 제도, 육방예경, 어린 라훌라 교화, 사리불 목건련 존자, 가섭 3형제 제도, 청소년 아사교화, 그리고 맨 정상부분에는 부처님께서 최초로 녹야원에서 5비구에게 설법을 하신 초전법륜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곳을 지나 반대편으로 길을 잡아 신흥사로 내려오는 길에는 팔상성도와 부모은중경이 석판에 조각되어 있다. 모두 화강암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부처님 교화공원은 또 하나의 걸작으로 많은 불자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원효스님이 해골의 물을 마신 곳(?)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원효스님이 해골에 있는 물을 마신 곳은 여기저기 많이 있다. 그러나 어느 곳 하나 정확한 지역을 알기는 어렵다. 일부는 중국이라고 하지만, 기록에는 성의 밑에 있는 무덤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깨어나고 보니 무덤 안에 있는 해골에 모인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만큼 큰 봉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효가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옛 산성 터 밑 무덤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이 산성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현 구봉산 당항성 밑이 유력하다. 지금은 신흥사 뒤편으로 오르면 그 뒤편으로는 지금은 육지가 되었지만 원래는 바닷가였기 때문이다. 현 신흥사는 주변이 산으로 쌓여있고, 그 가운데 아늑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주변을 몇 차례나 돌아보았지만 원효스님 해골에 있는 물을 마셨다는 곳이 이곳이 가장 유력하다. 현 신흥사 일대를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곳은 지역적으로 백제의 봉분이 있을 수 있는 지역이라는 곳. 중국으로 건너기 전에 성 밑에서 잤다고 하면 당시 중국과의 가장 가까운 곳의 성인 당항성이 유력하다는 점 등이다.

 

앞으로 이곳에 대한 더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곳 화성 서신면의 당항성 아래 현 신흥사 일대가 원효가 해골에 물을 마신 곳으로 가장 유력한 곳이란 생각이다. 신흥사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이곳 옛 절터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약사여래불, 그리고 원효스님과 당항성 등의 연관이 지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앞으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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