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장을 가다

 

팔달구 우만동에 소재한 비구니 사찰 봉녕사. 2일과 37차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이 열리는 봉녕사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가는 곳마다 넘쳐나는 인파로 인해 시끌벅적하다. ‘아름답고 청정한 절이라는 봉녕사는, 일 년에 한 차례 10월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주차장서부터 사람들은 차를 대놓고 절 안으로 뛰듯 바삐 걸어간다.

 

절 경내는 여기저기 늘어놓은 부스마다 잔뜩 물건을 진열해 놓았다. 사찰에서만 판매를 한다는 별별 상품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점차 목소리가 높아진다.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자연 목소리가 높아지는가 보다. 천천히 경내를 돌아본다. 언제나 그렇듯 우화궁 앞 너른 잔디에는 세계사찰음식 먹거리촌이 자리 잡고 있다.

 

 

 

 

너무 이른 시간에 온 것 같아요. 저희들은 아침 일찍 청주에서 올라왔는데 사찰음식 전시를 한다고 해서 남들보다 서둘러 왔더니 아직 우화궁 2층은 개방을 하지 않았네요. 오후까지 음식도 좀 먹어보면서 천천히 기다려야죠.”

 

충북 청주에 소재한 절에서 왔다고 하는 한 불자는 매년 이곳을 찾아오지만 금년이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것 같다고 한다. 우화궁 앞 특설무대 앞에는 불교TVBTN이 방송제작을 위해 몇 대의 카메라를 받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늘어선 부스 한편에 체험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찬찬히 돌아보면서 마음껏 즐겨야

 

눈이 피곤해 오후에 병원 예약을 해 놓은 터라 바삐 움직여야 구경을 제대로 할 듯하다. 하지만 10시도 안된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몰려와 경내는 온통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만원이다.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을 찾을 때마다 들리는 소요삼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불교 꽃꽂이 작품 전시를 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돌아보세요. 꽃꽂이 밑에 보시면 제목 밑에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꼭 확인하세요.”

 

불교 꽃꽂이 전시를 하고 있는 소요삼장 입구에서 안내를 하는 사람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동안 보아오던 꽃꽂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꽃꽂이가 눈을 환하게 만들어 준다. 한편에는 단을 만들고 그 위에 꽃으로 치장을 해놓았다. 그야말로 연화세계가 열린 것이다.

 

저도 꽃꽂이를 좋아해서 많은 곳을 구경 다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꽃꽂이는 처음입니다. 정말 아름다워요. 사월 초파일에 관욕을 하는 애기부처님을 치장해 놓은 것도 색다르고요. 연꽃차를 꽃꽂이로 이용을 했다는 것도 색다르네요.”

 

 

 

 

3일 오후까지 다양한 즐길거리 마련되어 있어

 

봉녕사 불자라고 하는 조아무게(, 43)씨는 꽃꽂이 전시를 돌아보면서 연신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기에 바쁘다. 생각 같아서는 오후까지 남아 더 많은 것을 둘러보고 싶지만 약속된 시간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걸음을 재촉한다. 봉녕사 경내에서 낯익은 인물들을 왜 그렇게 만나는 것인지.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에 수원사람 모두가 구경을 나온 듯하다.

 

오늘과 내일 많은 행사가 열립니다. 특히 이번 제7차 세계사찰음식 대향연에는 혜성스님과 법송스님 등의 사찰음식에 대한 강의도 있어서, 사찰음식에 대한 좋은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7차나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찰음식들을 판매도 하고 있고요.”

 

 

 

 

안내를 맡은 한 신도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한다. 곳곳에 이렇게 안내를 하는 신도들이 있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있다. ‘자연의 맛, 나눔의 마음이라는 봉녕사 세계사찰음식 대향연,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좋은 먹거리까지 곁들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일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봉녕사에서 하루를 보내야겠다.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진목리 산 7-3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대각사(주지 정호스님). 절 주변을 돌아보면 지명들이 재미있다. 산골, 가마골, 생골, 팔무당골 등이다.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커다란 대웅전이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대각사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28일은 음력 715일 백중절이다.

 

백중 때가 되면 체소와 과일 등이 수확을 할 수 있는 시기로, 100가지 과실이 나온다고 하여 백종(百種)일이라고도 했다. 이날은 망혼일, 혹은 불가에서 우란분절이라고 부른다. 우란분절에 불가에서는 하안거를 해제하고, 망자들을 위한 제를 올린다.

 

우란분절의 의미는 이러하다. 예전 목력존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부처님은 백가지 과일과 꽃을 차려놓고 스님들을 청해 우란분회를 열어주라고 일렀다. 신라나 고려 때는 이 우란분절을 민가에서도 행했으나, 조선조에 들어 민가에서는 사라지고 사찰에서의 풍습만 남게 되었다,

 

 

 

 

 

스스로 작은 깨달음을 얻다

 

대각사.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절일까? 28일 아침 대각사를 찾아갔다. 대각사의 주지정호 스님은 ‘()나눔과 비움의 이사장직을 맡고 계시면서 오산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위탁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대각사의 신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산에 거주하고 있다. 60평 정도의 대웅전을 가득 채우고, 자리가 부족해 대웅전 앞에도 신도들이 자리를 잡았다.

 

천수경으로 시작한 우란분절 예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호스님의 독경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미 불교계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분이다. 우란분절을 취재하겠다고 찾아 나선 대각사에서 괜히 코끝이 시큰해진다. ‘나는 그동안 남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해왔을까?’ 절로 고개를 떨어트리게 된다.

 

정호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에 그동안 살아왔던 날들을 참회한다. 꼭 참회진언을 외워야만 참회가 되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나의 모자람이 더 더욱 마음 아프다. 우란분절 예식이 시작되기 전,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스님과 나눈 대화에서 정호스님이 다문화가족을 비롯해 주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나눔을 실천했는가를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우란분절의 장엄을 만나다

 

우란분절은 조상들을 위하는 예식이다. 신도들은 제사상에 나아가 절을 올린 후, 향을 한 개 피씩 손에 들고 정호스님의 뒤를 따라 대웅전을 한 바퀴 돈 다음 대웅전 앞마당을 지그재그로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상차림의 향로에 향을 꽂은 후, 모두 합장을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한다.

 

장엄,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우란분절 법회는 말 그대로 장엄이었다. 우리 민가에서는 백중일이 되면 김매기가 다 끝나게 된다. 하기에 이 절기에는 호미를 잘 씻어 다음해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호미를 씻어 낭대(=農旗)의 버레줄에 매달아 놓는 호미걸이를 한다.

 

 

 

 

이날은 집집마다 농사를 짓느라 고생한 머슴들에게 돈을 나누어 준다. 이 돈을 백중돈이라고 했다. 돈을 받은 머슴들은 장으로 나오는데, 이날 열리는 장을 백중장이라 불렀으며 머슴장이라고도 한다. 이날 장터에서 열리는 많은 놀이를 백중놀이라고 했으며, 백중놀이의 가장 큰 놀이판은 역시 씨름판이었다.

 

백중장을 볼 수도 있는 날인데 그 모든 것을 마다하고 굳이 찾아간 대각사. 절 이름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부처의 마음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 정호스님. 대각사 우란분절에서 난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바로 나눔과 비움이라는 화두를 가슴에 품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금오산 황덕사를 찾아 칠석불공을 보다

 

우리나라의 풍속에는 양수가 겹치는 날을 길일로 삼았다. 음력으로 11, 33, 55, 77, 99일은 모두 양수가 겹치는 날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오늘이 음력 77일로 바로 칠석이다. 칠석은 속설에 견우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날로 이 날은 비가 온다고 한다.

 

이날 견우와 직녀는 일년 동안 떨어져 있다가 까마귀와 까치들이 놓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설은 중국 주나라에서 발생하여, 한대를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지금까지 구비전승으로 남아있다.

 

음력 7월이 되면 농촌에서는 본격적인 수확기로 접어든다. 세벌메기를 마친 농촌에서는 그동안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던 호미를 씻어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놓는데, 이 때 호미걸이라는 민속놀이도 전해진다. 이 날은 술과 떡,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농사꾼들을 위로하곤 했는데, 이는 모두 일 년의 노고를 치하하는 행위이다.

 

 

 

칠석에는 비가 온다.

 

칠석날에는 보통 비가 내린다. 일 년 동안 떨어져있던 견우와 직녀가 만나 기쁜 나머지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이다. 우리 풍속에는 걸교라 하여 처녀들이 견우성과 직녀성을 보고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다. 또한 선비와 학동들은 견우와 직녀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으면 문장을 잘 짓게 된다는 속설도 전한다.

 

칠석날은 수명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에게 자손들의 수명장수와 부귀공명을 기원한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주부들이 분주하게 하루를 보낸다. 밀전병과 햇과일 등 제물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족의 무병장수와 가내의 평안을 빌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칠석날 이루어지던 풍속이다.

 

가정에 따라서는 무당을 찾아가 칠성맞이 굿을 하기도 하고. 절을 찾아가 칠석불공을 드리기도 한다. 농사꾼들은 농작물의 풍작을 위해 밭에 나가서 밭제를 지내기도 했는데, 이러한 칠석의 풍속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변해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자손들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금오산 황덕사를 찾아가다.

 

오산시 경기대로 416번길 27에 소재한 금오산 황덕사(주지 수산스님).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의 오산지회이다. 칠석날 오전 10시 사시불공이 시작되기 전에 찾아간 황덕사는, 예불을 올리기 위해 신도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관음보전 입구에 있는 종무실에 들려 칠석예불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후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황덕사는 1987515일 회관건립 추진위원회를 발기한 후, 1987123일 화성시 오산읍 오산4878-18에 천막을 치고 가건물을 지어 오산지회를 창건했다. 1988824 일에는 봉불식을 거행하였으며(주정산 부원장, 도건, 용문, 진달, 법성스님), 1991720일 대충 대종사로부터 사찰명을 황덕사로 임명받았다.

 

 

 

 

현재 법당은 2000626일 총대지 1,154평에 건평 3400평 규모의 사찰건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1차적으로 1200평을 낙성하여 법회를 열고 있다. 칠석날이라 그런지 법당 안에 자리를 잡고 예불에 참석한 불자들은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들과 보살님(여자 신도)들이 대부분이었다.

 

황덕사는 한마음 문화제를 비롯해 지역을 위한 각종 행사를 하는 곳이다. 연세가 드신 노보살님들을 위해 법당 뒤편에 의자로 자리를 마련한 것만 보아도, 스님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절에서 자손들을 위한 칠석불공을 드린다면 자손들이 부귀공명하고 수명장수하지 않을까? 괜히 예불을 드리는데 방해를 하는 것 같아 조용히 법당을 빠져나왔다.

 

 

호랑이에 얽힌 창건설화 전하는 곳

 

날마다 찜통이다. 국가안전처에서는 연일 <폭염특보>를 발령하고 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시원한 파도가 치는 바닷가로 향한다. 한 낮의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선호하는 곳은 다 다르다. 누구는 바닷가를 선호하는가 하면, 누구는 시원한 숲이 있는 계곡을 선호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바닷가보다는 산을 선호하는 편이다. 울창한 숲이 우거지고 주변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다고 하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다. 공기도 좋거니와 바닷가에서 흔히 썼다는 바가지요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늘진 숲에 들어가 앉아있으면 심신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폭포와 고찰이 어우러진 곳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317·4에 소재한 희방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두운(杜雲)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소백산 남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희방사는 절을 오르기 위해서는 높이 10m 정도의 희방폭포 옆에 설치한 철 계단을 올라야 한다.

 

희방사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만 주차장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차를 대면 빈 주차공간이 없어 애를 먹기도 한다. 희방사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물보라를 날리며 폭포가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습만 보아도 심신이 편해지는 곳이다. 희방사에 오르려면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폭포에서 날린 물방울이 얼굴을 시원하게 만든다.

 

굳이 바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계단 중간에서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고 난리들이다. 희방폭포는 암반을 따라 흐른다. 폭포 위에도 아래에도 단단한 화강암 암반위로 흐르는 물이 맑다. 소백산 오염되지 않은 곳을 흐르는 물이다. 아래편 계곡 또한 여름철 피서하기에는 제격이다.

 

 

 

 

호랑이의 전설이 전하는 희방사

 

희방사 창건주인 두운은 태백산 심원암에서 이곳 천연동굴로 옮겨 수도하던 중, 겨울밤에 호랑이가 찾아 들어 앞발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무엇인가를 호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호랑이를 살펴보니 목에 여인의 비녀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두운은 호랑이 목에 꽂힌 비녀를 뽑아주었다.

 

두운이 열심히 수도를 하고 있던 어느 날, 동굴 밖에서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어여쁜 처녀가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두운은 정신을 잃은 처녀를 정성껏 간호하여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경주 계림의 호장 유석의 무남독녀로, 혼인을 치른 첫날 밤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 하더니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하였다.

 

두운은 굴속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따로 거처하며 겨울을 넘긴 뒤 처녀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유호장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해주었으며, 무쇠로 수철교를 놓아 도를 닦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 그 다리로 인해 이곳이 수철리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희방사는 그리 크지 않은 절이다. 절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사시예불을 마친 후라 그런지, 경내는 소리 하나 나지 않고 조용하다. 심호흡을 한 번 해본다. 주변 숲에서 번지는 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듯하다. 석조에 받아놓은 물을 한 바가지 떠 마셔본다. 찬 물이 들어가면서 내장은 물론 등골이 다 시원해진다.

 

올 여름 사람들이 붐비는 바닷가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영주 희방사를 한 번 찾아가보자. 시원한 계곡과 폭포, 그리고 전설이 서린 고찰이 함께 하는 곳. 여름철이면 늘 그리워지는 소백산 희방사이다. 찡그러진다.

 

 

영원사 약사여래좌상, 신라시대 조성했을까?

 

이천시 송말리는 도립리, 경사리와 함께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산수유가 피는 곳이다. 이곳은 매년 봄 산수유축제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는 한다. 도립리에는 여섯 명의 명현이 모여 세상을 논했다는 육괴정이 자리하고 있다. 육괴정은 이천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고, 주변에는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서있다.

 

백사면 소재지에서 도립리로 들어가기 전 마을인 송말리에서 원적산으로 난 길을 한참이나 올라가면 송말리 435번지에 소재한 영원사를 만날 수 있다. 영원사(주지 성원스님)는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7년인 638년에 혜호선사가 수마노석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하고 현 영원사 뒷산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영원사에 전해지는 사적기를 보면 영원사는 이미 개창한 지 1378년이나 된 고찰이다. 그 뒤 고려 문종 때 화재로 전소된 것을 현재의 자리에 혜거국사가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영원암이라 개칭한 후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문종은 고려 제11대 왕으로 재위는 1046~ 1083년이다.

 

 

 

 

 

수령 800년의 느티나무와 영원암

 

문제는 고려 문종 때 혜거국사가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고 절 이름을 영원암이라고 칭했다고 했는데, 절 안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은행나무는 보이질 않는다. 대신 수령 800년이라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1982년에 지정이 되었으니 현재는 수령이 830년 정도가 되었다.

 

수고 25m, 가슴높이의 둘레가 4.5m에 달하는 영원사 느티나무는 영원사 경내로 오르는 계단 위에 소재하고 있는데, 주변에서도 나무가 눈에 띨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거대한 굵기를 자랑하는 밑동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많은 가지가 좌우로 퍼져있어 수형이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영원사 경내를 오르면 단청을 한 전각들이 여기저기 서 있다. 산비탈에 층이 지게 조성한 전각들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산신각, 명부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영원사 대웅전은 꽃 창살로 화려하게 창호를 제작했으며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꾸며졌다.

 

 

 

 

신라시대 조성했다는 약사여래좌상

 

영원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난 계단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다. 바로 이천시 향토유적 제12호인 영원사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안내판이다. 이 안내판에 따르면 영원사 약사여래불은 1985년 새로 연화대좌를 조성하여 유리광전에 안치를 해 놓았다고 한다. 당시 목 위의 두상 부분을 새롭게 조성했으며, 구 두상은 연화대좌 한편에 모셔놓았다.

 

약사여래불의 높이는 118cm, 어깨 폭은 71cm, 무릎 폭은 105cm이며 대좌의 높이는 94cm이다. 새로 조성한 두상은 나발에 육계를 표현했고, 상호는 원만하여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부드러운 어깨는 넓고 당당하다. 법의는 우편견단으로 옷섶에 걸쳐 조형한 주름이 독특하다.

 

 

 

 

 

약사여래불의 오른발은 왼쪽무릎에 얹어 결과부좌를 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오른쪽 발바닥 위에 약단지를 받쳐 들고 있어 이 불상이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영원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 7년인 637년에 해오선사가 절을 창건하고 수마노석으로 약사여래를 조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약사여래불의 표현기법을 보면 통일신라와 고쳐 초기에 걸쳐 나타나는 불상의 특징이 보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약사여래불이 삼국시대인 선덕여왕 때에 조성하기 보다는, 고려 문종 때 조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벌써 영원사를 다녀온 지 10여일이 훌쩍 지났다. 영원사의 창건과 약사여래불의 조성, 그리고 중창연대 등 그 어느 것도 시원한 해답이 없다. 하긴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은 허상을 둘러 쓴 조립품이라고 했는데, 연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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