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자리한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다음해인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웠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이 절은 현륭원의 건립과 때를 같이하여 세운 왕실의 원찰이다.

 

용주사의 각 부재의 사용이나 문양, 공간배치 등은 궁궐의 형식과 유사하다. 용주사는 창건 당시 140여 칸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창건당시의 규모나 형태가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는 18세기 말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려한 장식의 대웅보전

 

용주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존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35호이다. 대웅보전은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내부와 외부를 모두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규모는 정면 3· 측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로, 사일스님이 팔도도화주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는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다.

 

 

대부분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주련 글귀는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 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 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 총섭이 중수하고, 1931년에는 주지 강대련이 1965년에는 주지 전관응이, 그리고 1987년 주지 서정대가 수리하였다.

 

융릉과 동일한 양식의 대우석

 

대웅보전의 기단은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다. 대우석은 일반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나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과 비운, 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이 대우석의 문양으로 보아 용주사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웠다. 대웅보전의 창호는 빗살꽃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의 전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젖혀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아름다운 닫집을 조성해

 

대웅보전의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이 있다. 이 닫집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불전이다. 과거에는 불전(대웅전)에는 참배객이 들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으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 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으며 불단과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대웅보전의 기록으로는 홍천호가 찬한 대웅전상량문, 닫집내부에서 발견된 대웅보전 원문이 남아있다.

 

학자무사 최형국 박사 논문에서 오류 지적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 수석단원이자 공부하는 학자무사 최형국 박사가 지난 7일 오후 430분부터 서울 고등교육재단 세미나실에서 열린 한국사학회 제3회 정기발표회에서 <TV 역사물의 考證 한계와 그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KBS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무예사·군사사 고증을 중심으로 발표를 했다.

 

이날 최형국 박사의 발표는1. 머리말 2. KBS 다큐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배경과 壯勇營의 창설, 3. KBS 다큐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무예사·군사사 고증 오류 4. TV 역사물 고증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그 대안 5. 맺음말로 이어졌다. 이 발표에서 최형국 박사는

TV에서 방영하는 역사물은 한국이 향유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창구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계에서도 단순히 논문이나 저술로 한정되어 있었던 연구 발현의 영역을 TV를 비롯한 대중 영상매체의 발달에 따라 조금씩 확대하는 추세에 있다.

 

특히 사극이나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TV 역사물을 학생들의 수업시간에 활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역사교육에서 그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머리말에서 TV 등의 사극이나 다큐멘터리가 역사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대작 다큐멘터리인 <의궤 8일간의 축제>의 오류 꼼꼼하게 따져

 

제작 기간 2, 총 제작비 15억 원의 대작 다큐멘터리인 KBS 1TV<의궤 8일간의 축제>를 꼼꼼하게 따지고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에 수록된 내용을 기반으로 한 이 8일간의 축제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1795년 열었던 회갑잔치를 조선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극적인 축제중 하나로 꼽고 있다.

 

1795년은 정조 재위 20년이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탄생 60(舊甲)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현재 가치로 약 70억 원에 이르는 예산 10만 냥과 수행원 6000여명, 1400필을 동원해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행렬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성까지 8일간 계속됐다. 총 제작비 15억 원, 거기다가 2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제작된 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이 축제>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들은 대작이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거론된 장용영의 군사들의 직제를 살펴보면 장용영이 내외영 이중 구조의 영으로 성장한 후, 군제의 상황을 보면 내영 안에 마보군은 기병인 선기대의 ··3초와 보군인 오사의 각 5, 아병의 6초를 합한 34초와 각표하군이 83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3초의 선기대는 모두 345명으로 각 115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경군은 615명이며 향군 2,540, 사후군 52, 공장아병 26, 치중복마군 40, 배봉아병 245, 고성아병 439, 노량아병 144명으로 장용영 전체 군사의 수는 5,245명으로 훈련도감에 버금가는 병력규모를 구축하였다. 특히 장용영 전체 기병 숫자는 853명으로, 당시 중앙군영인 오군영에 배속된 기병 숫자 중 가장 많은 인원이 편성되었다.

 

무예사와 군사사 고증 오류 부분 일일이 대안제시

 

 

위 사진(다큐멘터리 영상화면)에서 보이 듯 정조의 호위무관인 선전관은 전형적인 日本刀를 허리띠 혹은 전대에 꽂아 움직이고 있다. 이는 마치 일본 사무라이가 정조를 지키는 형국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몇몇 부분에서는 아예 환도를 손에 들고 다니며 척후를 나선 장용영 군사들의 모습도 확인된다. 이러한 환도패용의 오류장면은 거의 모든 역사물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고증상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園行乙卯整理儀軌의 반차도 중 환도 패용 방식을 보면 조선후기 군사들의 환도패용 방식은 평시에는 환도의 손잡이가 뒤를 향하게 패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장형태는 정조의 주변을 호위했던 선전관들 역시 동일하다. 그래서 유사시 전투 상황이 발생하면 360도 회전형 고리인 띠돈이 있기에 손쉽게 손잡이를 앞으로 돌려 칼을 뽑아 사용하였다고 오류를 지적했다.

 

 

다음으로는 장용영 군사들이 사용하는 등패의 오류도 지젇하였다. 비교 사진에서도 확인 되듯이 본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된 등패의 크기는 마치 머리에 쓰는 삿갓을 연상시킬 정도로 작은 모습이다. 심지어 다른 장면에서는 등패가 아주 얇게 만들어져 앞이 보이는 정도의 장면까지도 연출되었다. 조선후기 군사무기로 활용된 등패의 경우는 기존 조선군들이 사용하는 무거운 장패가 아니라 화살이나 표창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견고하게 가공한 가벼운 등나무로 만든 패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최형국 박사는 이 논문에서 <의궤 8일간의 축제>에서는 다음의 6가지가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KBS 다큐멘터리<의궤 8일간의 축제>에 드러난 고증 상의 문제점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첫째 정조의 호위무관인 선전관이 일본도를 일본도 패용방식으로 차고 근밀 경호에 나선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장면에서는 환도를 손에 덜렁덜렁 들고 다니며 척후근무를 한다는 치명적인 고증오류를 확인하였다.

둘째, 신궁이라 불렸던 정조가 전통 엄지걸이 깍지사법이 아닌 깍지 없이 검지와 중지에 화살을 걸어 쏘는 지중해 방식의 사법으로 활을 쏘는 장면이다.

셋째, 정조대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국왕 친위부대인 壯勇營의 군사들이 고증과는 동떨어진 무기와 전술운용을 한다는 점이다.

넷째, 정조대 군사신호체계를 무시한 手旗의 활용과 夜操시 명령전달체계 고증의 오류였다.

다섯째, 불이 활활 타며 날아가는 夜操火箭의 모습은 고려중기 이전에 사용한 무기로 정조대 당시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무기가 신무기인 것처럼 묘사되었다.

여섯째, 위와는 반대로 佛狼機紅夷砲와 같은 화약무기의 경우 당시에는 발사체가 충격신관이 발명되지 않은 때라 폭발할 수 없음에도 장용영이 화력시범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억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화성 야조 시에는 아예 화포훈련 자체가 없었음에도 정조의 군사력을 드높이기 위하여 날조된 역사내용을 첨가하기도 하였다.고 지적했다.

 

교육용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사극 등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형국 박사의 논문은 한국사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실릴 예정이라고 한다.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펴내

 

지난 해 <조선 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를 펴낸 박사무사인 최형국이 이번에는 송일훈과 공저로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정조대왕의 실학사상과 무예사상, 그리고 수원화성을 탐하여 전통무예에 빛을 발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최형국은 현재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의 일원이다.

 

598쪽에 달하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는 모두 4편으로 구분되어 기술하였다. 1부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사상관의 거시적 관점으로 본 무예도보통지의 복원 재현 연구, 2부는 정조대왕 무예 신체사상관과 연구동향으로 바라 본 전통무예의 정체성 제시, 3부 전통무예와 군사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연구, 4부 정조대왕 궁술무예 사상관의 신체지와 현시대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관한 연구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무예 연구가가 심혈을 기울인 연구서

 

<정조대왕 무예 신체관 연구>는 송일훈, 최형국 두 사람의 무예연구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저서이다. 송일훈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무예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무예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용인대학교 무도대학 무도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일훈은 2008년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1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인 <한중일 격투무예 연구>, 2011<무신 장보고의 꿈>, 2012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 도서 <신유론 강독서> 외 다수가 있다.

 

 

최형국은 중앙대 대학원 역사학과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경기대학교에서 Post-doc연구원으로 문화사, 전쟁사, 무예사를 연구해 왔다. 현재 중앙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수원문화재단 무예24기 시범단 수석으로 조선무예를 수련하고 있다.

 

저서로는 2007<친절한 조선사>, 2009<조선무사>, 2013<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2013<조선전기 무과에서의 격구 도입배경과 그 실체>, 2011<조선후기 진법 원앙진의 군사무예 연구> 외 다수가 있다.

 

 

정조대왕의 무예 신체관의 결집서

 

이 저서는 정조대왕의 무예 신체관의 결집서라고 볼 수가 있다. 역사적 고증을 들어 신체관 연구를 한 본 저서는 무예실체의 움직임에 관한 체험을 통해 새로운 신체기법을 습득하여 다시 몸()에서 얻는 것()으로 완성을 시키고자 했다.

 

특히 부록으로 많은 양이 수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조무예신체관의 활쏘기에 관련된 원전기사해석은 이 책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완성이 되었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활쏘기의 기초에서부터 신궁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모든 비법 및 기법들이 서술되어 있는 <사법비전공하> 소개서부터, 무과 갑과와 을과의 문답풀이 등도 빠트리지 않았다.

 

 

책 말미에 도록은 저자 최형국이 무예24기의 시범 중에서 칼, , 활 등의 시연을 하는 사진과 마상무예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도록은 저자가 우리무예에 관해 얼마나 많은 애착을 갖고 심혈을 들여 연마를 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발행일 : 2014228일 발행

발행처 : 레인보우북스

정 가 : 30,000

 

화성 가까이에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일 수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일부러 화성을 찾아가지 않아도 일을 보러 드나드는 길에 늘 만나는 것이 화성이고 보면, 화성과 함께 살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성의 동편 마을, 마음이 따듯한 곳 지동에 살고 있다는 것은 행복 그 이상이다.

 

눈이 오고나면 화성은 변화를 시작한다. 사철 어느 계절에 화성을 돌아보던지 화성은 늘 새롭다. 철에 따라 느끼는 바가 틀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화성을 백번만 돌아보면, 숨어있던 화성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엊그제 꽤 많이 내린 눈이 녹기 전에,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남수문을 지키던 동남각루

 

각루란 성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한다. 주변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정자와 같은 건물을 지을 때 ()’()’로 구분을 한다. 정은 땅의 지면에 붙여지은 건물을 말하고, 루는 아래로 사람들이 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중층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남수문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동남각루가 있다. 이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지켜내기 위한 구조물이다. 동남각루는 남공심돈(지금은 유실되어 버린 화성의 구조물 중 하나이다)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으며, 그 중 동남각루가 가장 규모가 작다. 동남각루는 화성에 설치한 각루 중에서 가장 시야가 넓은 곳으로, 비상시에는 군사지휘소로도 사용한 곳이다.

 

 

동남각루에 깃든 정조의 애민정신

 

화성을 돌아보면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가 있다. 화성을 축성할 때 정조대왕은 성을 일부러 설계번경까지 해가면서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화성을 쌓는 노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이나,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준 것 등은 모두 정조의 애민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심지어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도 정조의 애민정신의 하나이다.

 

노역자들이 더위에 일을 한다고 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척서단이라는 환약을 지어 공사를 하는 인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은 그런 하나하나에서 엿볼 수가 있는 대목이다. 동남각루라는 건조물 하나를 보아도, 정조대왕이 얼마나 화성을 지키는 장용외영의 군사들을 자식처럼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온돌방을 드린 동남각루

 

남수문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남각루로 향했다. 요즈음은 동남각루의 중층 누각의 문을 열어놓기 때문에 안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사방을 돌면서 동남각루를 촬영한 후 그 밑에 있는 벽돌로 쌓은 곳을 살펴본다. 동남각루 한 편에 굴뚝이 서 있다. 연도는 땅에 묻혀 보이지가 않지만, 그렇게 벽돌로 삼면을 쌓은 곳이 바로 온돌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궁이도 보인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누각 위에서 쉴 수가 있고, 날이 찬 겨울이 되면 온돌방에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따듯하게 보낼 수 있도록 마련을 한 것이다. 화성의 건축물들은 대개가 이렇게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지금과 같은 시절에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정조대왕은 꼼꼼하게 따져 계절에 따라 병사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화성을 다 돌지 않아도, 동남각루 하나만 보아도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 수가 있다. 모처럼 돌아보려고 마음먹은 화성. 가장 먼저 눈에 띤 동남각루 앞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과연 이 시대에 정조대왕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의 초상화 3

 

아마 우리나라에서 역대 군왕을 제외하고 한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세 점이나 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번암 채제공 한 사람뿐일 것이다. 채제공은 10여 년을 정조와 함께 했다. 홀로 재상의 지위에서 그 오랜 세월을 지낸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 하자 채제공은 그에 반대를 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정조임금이 채제공을 중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달 28일부터 20142월까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49에 소재한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개막을 한 번암 채제공전. 이곳에 가면 자신의 속한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 인물인 채제공의 초상화 3점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초상화들은 3점 모두가 보물 제1477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채와 행낭을 든 시복본

 

수원시 소장 시복본1792년에 그려진 것으로, 채제공이 73세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사모에 관대를 한 옅은 분홍색의 관복 차림에, 손부채와 향낭을 들고 화문석에 편하게 앉은 전신좌상을 그렸다. 초상화의 우측 상단에는 聖上 十五年 辛亥(1791) 御眞圖寫後 承 命摸像 內入 以其餘本 明年 壬子(1792) 이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이명기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우측 상단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도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정조임금으로부터 부채와 향낭을 선물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선물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을 노출시켜 부채와 향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시복본은 보물 제1477-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시복본 초상화는 120x79.8cm이며, 전체 크기는 173x90cm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금관조복본

 

보물 제1477-2호로 지정이 된 금관조복본1784년 작으로, 65세 때 그린 초상이다. 초상의 왼편에는 채제공의 자찬문을 이정운(1743- ?)이 썼다. 이 금관조복본은 서양화법을 따른 명암법을 적절히 구사하여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금관조복을 금박과 선명한 채색, 명암법 등으로 화려하게 표현했다.

 

이 금관조복본은 사실성과 장식성을 어우러지게 하여, 조선 초상화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화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입체감이 두드러진 안면과 옷주름의 표현, 그리고 바닥의 화문석 표현기법으로 볼 때 이 금관조복본 역시 당대의 화공인 이명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조복본은 그림부분 145x78.5cm, 전체영정은 202.9x 91.6cm이다.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진 흑단령포본

 

보물 제1477-3호로 지정이 된 흑단령포본은 오사모에 쌍학흉배의 흑단령포를 입은 전신의좌상이다. 이 흑단령포본은 본래 부여 도강영당에 모셔져 있던 것이다. 그 안면의 기색으로 볼 때 부여본은 앞에 살펴본 73세상과 흡사하다. 안면과 옷주름의 입체감 표현, 투시도법에 의한 화문석과 족좌와 의자의 사선배치는 이명기의 초상화법으로 보인다. 흑단령포본은 그림 크기 155.5x81.9cm이고, 전체길이는 210x94cm이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그려진 번암 채제공의 초상화는, 조선후기 채제공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상화를 그린 화가 이명기의 회화적 수준이 당대 최고임도 알 수 있다. 채제공의 3점의 영정은 조선후기 문인 초상화의 각종 유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유지초본까지 전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 학술적 가치도 높다.

 

화성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는 보물로 지정이 된 채제공 초상화. 정조시 10년간이나 재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강한 국권을 형성하기 위해 애쓴 정조를 도와 화성축성 등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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