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도 그냥 더위가 아니다. 며칠 째 계속되고 있는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사람들도 지쳐갈 때쯤. 토요상설 공연이 끝난 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 무대에, 조선시대 무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수원문화재단 소속인 무예24기 시범단원들이다. 마당 공연이 아닌 무대공연으로 이루어진 이날 공연은, 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기창 등 창류의 시연이 끝나고 나자, 각종 검을 든 무사들이 무대에 올랐다. 그 중 붉은 전복을 입은 시범단 사범인 최형국 박사가 쌍검을 들고 무대 중앙에 섰다. 바람소리를 내며 쌍검을 휘둘러 대더니 이내 무대 밑으로 뛰어 내린다. 무대 위가 비좁아 마음대로 시연을 펼칠 수가 없었는가 보다.

 

 

숨소리도 죽였던 관람객들의 탄성

 

순간 사람들은 숨소리도 죽인 듯 긴장을 한다. 두 개의 검이 좌우로 상하로 교차되면서 쌍검의 진수를 보여준다. 쌍검은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쌍검을, ‘칼날의 길이는 2자 5치, 자루의 길이는 5치 5푼. 무게는 8량이나 구별하지 않고 요도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을 택해서 썼다’고 적고 있다.

 

빠른 몸놀림에 허공을 가르며 바람소리를 내는 쌍검. 시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자 순간 박수가 쏟아져 나온다.

 

“정말 놀랍습니다. 쌍검의 위력이 저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 분 정말 달인 같습니다. 대단합니다. 조선 무예의 정수를 보는 듯해요.”

1박 2일을 보고 별러서 화성을 관람 왔다가 찾아왔다는 김아무개(남, 48세. 공주거주)는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이날 쌍검의 시연을 보여준 최형국 박사는 조선시대의 전통무예를, 수원 화성에서 20여 년 간 수련해온 실제 무예인이다. 자신이 연마해 온 무예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전공하여 중앙대에서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에 대한 내용을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형국 박사는 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기까지 온 몸으로 마상무예를 연마한 무예인이다.

 

쌍검은 ‘쌍검’과 ‘마상쌍검’으로 구분 돼

 

<무에도보통지>에 보면 쌍검의 동작은 모두 19가지가 전한다.

1. 지검대적세 2. 견적출검세 3. 비진격적세 4. 초퇴방적세 5. 향우방적세 6. 향좌방적세 7. 휘검향적세(1) 8. 휘검향적세(2) 9. 휘검향적세(3. 연속동작) 10.향우방적세 11. 향좌방적세 12. 진전살적세(1) 13. 진전설적세(2, 연속동작) 14. 오화전신세 15. 향후격적세 16. 지조염익세 17. 장검수광세(1) 18. 장검수광세(2. 연속동작) 19. 항장기무세 등이다.

 

 

마상쌍검보에는 모두 10가지의 자세가 도보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쌍검의 위력과 날렵한 동작을 본 관객들은 이어지는 등패시연 등에도 큰 박수를 보냈다.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300여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어, 토요상설공연과 무에24기 시범을 보면서 즐거워 한 사람들.

 

“정말 수원이라는 곳,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오늘 무예 24기 시범을 보면서 과거에 이 화성과 정조가 직접 명을 내려 편찬했다는 무예24기를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날이 무덥기는 하지만 오늘 화성을 제대로 한 번 돌아보고 가야겠습니다.”

 

 

멀리 강원도 태백에서 왔다는 이아무개(남, 43세)는 상기된 듯 이야기를 한다. 더워서 돌아보기를 포기했던 화성관람을, 무예24기를 보고나서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수원을 상징하는 화성과 무예24기. 이 두 가지를 떼어놓고 말할 수가 있을까?

 

처음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때, 무예24기를 함께 지정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지금이라도 무에24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을 수 있도록 수원이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앞으로도 그런 일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문화컨텐츠진흥원 작가, PD들도 24기 무예시범 관람

 

화려하다. 그리고 보는 이들이 연신 환호를 한다. 그저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하기만 하다. 11일 오전 11시, 화성 행궁 앞에서는 무예24기의 시범이 펼쳐지고 있다. 평일이라 관람인원은 주말에 미치지 못했지만, 외국인을 비롯하여 특별한 관람객들이 이날 행궁 앞 무예 시범 공연장을 찾았다.

 

이날은 한국문화컨텐츠진흥원에서 우리 무예에 관한 강의(강사 최형국 박사)를 듣는 작가 및 PD 등 40여명이 관람을 하기 위해 행궁 광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 화성과 무예 24기는 좋은 문화컨텐츠로 많이 알려야 할 관광상품입니다. 요즈음은 이렇게 좋은 문화컨텐츠를 잘 활용하여 상품화를 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죠. 이번에 문화컨텐츠진흥원에서 작가들과 PD들이 이곳을 찾은 것도, 알고 보면 화성과 무예24기를 좋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의 하나입니다”

 

이번에 문화컨텐츠진흥원에서 무예24기와 화성 관람을 하러 온 작가와 PD들도, 최형국 박사가 연결을 한 것이다.

 

 

호국무예로 발전시킨 무예 24기

 

무예 24기는 정조임금이 실전에 맞게 집대성한 것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어 있는 무예를 말한다. ‘무예24기(武藝二十四技)’는 조선시대 군사무예교범인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의 무예로, ‘무예이십사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 무예도보통지 속에는 무예이십사기로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각종 외침을 겪었던 조선이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무예 중 정수만을 집대성한 실전무예이다. 더욱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나라의 무기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사용하던 무기들까지도 그 동작 등을 실어 실전의 교범으로 삼고 있다는 데에서, 가히 당대 최고의 무예지라고 볼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는 무예 24기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본국검 2. 예도 3. 제독검 4. 쌍수도 5. 쌍검 6. 마상쌍검

7. 등패 8. 왜검 9. 왜검교전 10. 월도 11. 마상월도 12. 협도

13. 장창 14. 기창(騎槍) 15. 죽장창 16. 기창(旗槍) 17. 당파 18. 낭선

19. 권법 20. 곤봉 21. 편곤 22. 마상편곤 23. 격구 24. 마상재 등이다.

 

내년에 개봉될 사극 '역린' 젊은 정조 역에 현빈 

 

이날 행궁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무예 24기를 관람한 조용득(작가)씨는, 시범단의 관람을 마친 후

 

“그동안 우리 무예에 관해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오늘 시범단의 시범을 보고 새롭게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 등에서 무사들이 칼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도 제대로 알았고요. 지금까지 잘못 된 동작 같은 것도 제대로 알았습니다.”라면서 “저는 이번 무예 24기 강의를 듣기 전에도 개인적으로 화성 행궁 잎에서 펼쳐지는 무예 24기 시범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관람으로 제가 글을 쓴다면 정말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라고 한다.

 

 

화성과 무예 24기가 문화컨테츠로서 좋은 소재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자원을 갖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내년에 개봉을 하기 위한 이재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사극 ‘역린’은, 현빈이 주인공 역을 맡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린은 정조시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혼란한 조선 시대를 다룬 작품으로, 현빈은 극중에서 비운의 왕 젊은 정조 역을 맡는다고 합니다. 이 역린에서는 무예 24기도 선보인다고 하니 기대할만 합니다.”

 

 

무예 24기 시범을 마친 최형국 박사는 문화컨텐츠진흥원의 수강생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수원의 자랑인 화성과 무예 24기, 문화컨텐츠 상품으로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화성과 무예 24기가 행궁을 찾은 작가들과 PD들에 의해 재조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보물 제402호인 수원 화성의 팔달문이 3년 가까운 중건 공사를 마치고, 201353() 오후 2시에 중건 준공식을 가졌다. 팔달문은 화성 축성 당시인 17942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3개월 만에 옹성이 완공되면서 공사를 마쳤다. 팔달문은 장안문보다 약 3개월 정도 공사기간이 더 길었으며, 공사에 들어간 비용 역시 더 많았다.

 

이러한 팔달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처음으로 팔달문을 보수를 한 것은 도광 26년인 1846년이었다. 이 해 69일부터 내린 비로 수원천의 물이 크게 불어나, 북수문 아래 전돌이 떠내려갔고 문루도 무너졌으며, 남수문과 매향교까지 파괴가 되었다고 수원부 판관 겸 중군인 채학영이 보고를 한 것이다. 이때 폭우로 무너진 팔달문을 중수하고 옹성을 수보하였다.(수원부계록) 이 이후에도 팔달문은 28차례나 보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팔달문의 해체보수

 

팔달문의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같은 형태로 축조가 되었다. 하지만 그 크기 면에서는 숭례문보다 크다고 하였다. 20082월 숭례문이 화재로 인하여 소진되었을 때, 수많은 국민들이 불타고 있는 숭례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화성의 팔달문은 일제의 치하와 6, 25 한국동란 때에도 화서문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내었다.

 

이러한 팔달문을 해체 보수를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안전진단 결과, 팔달문 상층 문루 일부의 서까래가 빠지고 보가 처지는 등 목부재의 변형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더 이상 방치를 하면 원형의 훼손이 온다고 판단하여, 2010625일 팔달문을 해체, 보수를 시작했다.

 

 

팔달문을 해체 공사 이전에도 주요부재의 균열 및 대량의 기울어짐, 평고대 파손과 공포의 이완, 평바의 이완, 상층 종도리 및 서까래 탈락, 상층 외기도리 뻘목 파손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주요 부재의 균열 및 부식, 부재 결구부 이완 및 이격현상에 대한 보수가 2010625일 시작을 하여, 2013331일까지 29개월 정도 이루어진 것이다.

 

팔달문 다시 돌아오다.

 

팔달문은 옹성의 문이 성문과 일직선으로 놓여있다. 그것은 이 팔달문의 홍예를 지나 옹성을 거쳐 곧게 사통팔달하라는 뜻이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팔달문을 들어서야 한다. 팔달문의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모이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 있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문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화성이 축성될 당시 축조 된 팔달문은 220년 만에 첫 해체 보수공사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53일 마침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팔달문은 조선 초기 건물의 수려함과 건물의 멋스러움을 갖추고 있으며, 군사적 기능의 방어기능까지 겸비하고 있다. 하기에 팔달문은 성문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행사는 2시가 지나서 시작이 되었으며, 고유제로 먼저 팔달문의 복원을 마쳤음을 고하였다. 식전공연 시조시인 정수자의 축시와 화성사업소장의 경과보고 등으로 이어졌고, 염태영 수원시장의 기념사와, 노영관 수원시의회 회장과 국회의원 남경필 의원의 축사가 이어졌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이렇게 팔달문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팔달문의 해체보수 중건을 하는데 모두 47억이라는 예산이 들었으며, 국비가 70%, 도비가 15%, 시예산 15%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팔달문이 지금까지 우리들의 곁에 남아있어 우리는 행복하다고 기념사에서 말을 했다.

 

축사가 끝난 후 성문 안에 놓여있던 대북을 여덟 번을 울려 개문을 하고, 팔달문의 누각에 올라 돌아보는 것으로 준공식을 마쳤다. 팔달문을 해체보수하면서 교체된 부재들은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라는 제목으로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가 된다. 53일부터 72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에 가면, 220년 전의 팔달문의 목재와 부토, 잡상 등 부재를 만날 수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이 된 파장동 노송지대.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이곳이 요즈음 더럽혀진 주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전국 파워소셜러 팸투어 둘째 날에 지난 317일에 찾아간 노송지대에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효행기념관 부근 9, 삼풍가든 부근 21, 송정초등학교 부근 8)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이 자연경관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노송지대 주변 정비 아쉬워

 

이번 파워소셜러 팸투어에 찾아간 노송지대 주변은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주변이 어수선 해 이곳이 문화재 지역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문화재는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소나무 길 사이로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소나무의 생육에도 지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는 매연에는 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차량. 그리고 정리가 안 된 주변 환경. 정조대왕의 효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낯이 뜨겁다. 500주나 심었다는 소나무는, 당시에 심은 것들은 이제 겨우 40주 정도이다. 남은 소나무는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지금도 몇 그루의 나무는 생육이 좋은 편이 아니다. 파워소셜러들은 이구동성을 이야기들을 한다. 이곳의 차도를 변경하고 아스팔트를 걷어낸 후, 흙길로 조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소나무 주변에 모든 잡목을 옮겨, 소나무들을 온전히 괸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 가을 막걸리라도 부어 주어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에 소재한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훨씬 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처진소나무는 매년 봄, 가을에 운문사의 스님들이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리 주변에 뿌려준다. 그래서인가 항상 푸른빛을 띠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파장동 노송지대에 소재한 소나무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려줄 수 있는 귀한 나무들이다. 이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수원도 봄, 가을로 소나무에게 막걸리를 주는 날을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영양분을 빼앗겨버려, 제대로 생육하지 못하고 있는 노송지대의 소나무들.

 

 

더 이상 이 나무들이 주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5월과 10월 날을 정해, 믹걸리를 주는 날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런 행사 하나로도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이 더 잘 자라날 수 있으며, 이 행사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지대를 알릴 수도 있어, 모두에게 나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화성은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되었다. 28개월 만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동원된 모든 인부들에게 적정한 노임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아보는 많은 사람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된 화성

 

화성의 축성시에는 많은 기물이 동우너되었다. 거중기와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해 사용하였고, 이런 장비를 이용해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은 축성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그 뒤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의 성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하였다. 성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못한 시설물은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등이다.

 

공사실명제로 축성을 한 화성은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화성을 그냥 돌아보았다니

 

요즈음 들어 날씨가 풀리면서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와 성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 관광객에게 물어보았다, ‘화성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돌아보았노라고.

 

그래서 화성을 좀 더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화성에서 이것들은 꼭 찾아보라고. 1. 공사실명제판 2. 성벽 위에 거대한 연못 3. 장안문의 성혈 4. 성벽에 남긴 야질흔적 5. 성을 지탱하는 적심돌 등이다.

 

화성은 철저하게 실명제에 의해서 축성이 되었다. 공사구간마다 책임자들이 그들의 주도아래 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성벽에 그곳을 축성한 자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이 축성실명제의 표시는 화서문과 창룡문 등의 성문의 바깥쪽 벽에 새겨져 있다.

 

장안문의 옹성 위에 마련한 소방시설인 다섯개의 구멍인 오성지 

 

'화성성역의궤'‘<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낸다. 오성지를 설치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14, 너비는 5,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안문의 북옹성에 설치한 오성지를 설명한 글인데, 팔달문의 남옹성에도 오성지를 설치하였고 그 크기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성지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는데, 옹성문이 없는 창룡문과 화서문에는 오성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규모지만 중요한 암문 중에서 동암문과 북암문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성지 뒤편 위에 커다란 저수통을 만들고, 그곳에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옹성문 위에 설치한 것이 오성지이다. 적의 화공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한 방법이다.

 

장안문의 기단석에는 많은 성혈이 파여져 있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다. 이 장안문은 사실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장안문이라는 상징성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정조대왕이 한양에서 화성행궁으로 오갈 때 이 장안문을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안문의 안쪽 왼편 기단석에 보면 성혈(性穴) 이 보인다. 대개 성혈이란 아주 오래 전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신앙이라고 하지만, 화성은 200년 전에 축성되고 난 후 이 성혈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양에 과거라도 보러 가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다 해 성혈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성돌을 쪼개내기 위해 파 놓은 야질의 흔적들

 

화성을 밖으로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돌에 야질의 흔적이 보인다. 야질이란 성을 쌓을 돌을 쪼개낼 때, 커다란 바위의 계획선 위에 띄엄띄엄 원뿔형의 구멍을 정으로 파낸다. 그 다음 바짝 마른 밤나무나 소나무 따위를 그 구멍에 맞게 깎아서 박아 넣은 후에 물을 뿌린다.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말로 야질이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써 오던 기술이다. 이 야질의 흔적이 성벽 곳곳에 남아있다.

 

가운데 큰 돌이 성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돌인 적심돌이다

 

화성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기울어져 있다. 2~3% 정도 안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 그 성이 단단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성벽의 중간중간에 적심돌을 하나씩 끼워놓는다. 적심돌은 크고 깊게 박혀있는 돌로 그 길이가 5m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성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돌이다. 이 적심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있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걷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다. 앞으로 화성을 걷는 일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진정한 화성을 멋스러움에 취해보기를 바란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