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화성 행궁 앞에서 열리는 무예24기 시범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명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에 기록된 무예 6종은, 후일 조선에도 전해져 <무예제보>에 실렸다. 이 무예제보의 내용은 이후 <무예도보통지> 까지 이어지면서 조선 무예를 극대화시킨다. 기효신서에는 6가지 무기의 장, 단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장창은 길어 원거리에서 적을 처리하기 좋으며, 낭선은 길이와 더불어 가지의 철붙이로도 공격하니 장창은 낭선을 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낭선은 그 기법이 등패를 뚫지 못하고

등패는 낭선을 이기지만 곤방의 음양수에 당해내지 못한다.

곤방은 장도를 당해내지 못하며

장도는 당파를 당해내지 못한다.

당파는 길이에 있어서 장창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렇게 장창과 낭선, 등패, 곤방, 장도, 당파의 무기들의 장, 단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로 모아 진으로 구성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병력을 극대화 시킨 것이 바로 원앙진이다.

 


 무예 24기 시범단들이 활쏘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백발백중을 자랑한다.

 

서로를 보호해가면서 적을 공격해

 

원앙진(鴛鴦陣)’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고안한 진법이다. 원앙진이라 함은 진형을 이룬 형세가 마치 원앙의 모습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원앙은 암수 한 쌍 중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가 따라죽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원앙진은 12명이 1개 대를 이룬다. 우선 등패와 요도를 든 등패수 2명이 앞에 서고, 그 뒤로 10명의 갖가지 무기를 든 병사가 2열종대로 진을 갖춘다. 이 원앙진은 명나라 중기 절강성을 비롯한 동중국해 연안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만든 진법이다.

 

위는 무예24기 시범단이 '원앙진'을 펼치기 위해 도열해 있는 모습

아래는 KBS TV '원앙진'의 방송 자료화면


 

 

원앙진은 근접전 무기인 낭선, 당파, 장창, 등패 등을 채택하여, 왜구의 장기인 큰 칼을 이용한 근접전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앙진을 사용하기 전에는 왜구는 먼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조총으로 선제공격을 한 뒤, 장검을 갖고 근접전에 대응을 하여 언제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군이 원앙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병학지남연의>라는 병서에는 원앙진의 위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명나라 군대가 평양으로 진입한 다음 먼저 화포를 발사하고 이어서 화전을 발사하니,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 듯했다. 화포와 화전의 공격에 왜적들은 기가 꺾였다. 적이 먼저 돌진해오면 낭선부대를 집중시켜 대기하고, 적이 움직이지 않으면 등패수들이 먼저 공격해 들어간다. 왜적이 패하여 도망가니 가히 천하무적이다

 

 

12명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

 

원앙진은 6가지 무기를 장비한 12명을 1대로 편성한다. 한 대에는 지휘자인 대장 1명과 등패와 표창을 가진 등패수(이하 요도수) 2, 낭선을 가진 낭선수 2, 장창을 든 장창수 4, 당파와 화전(火箭)으로 무장한 당파수 2, 그리고 취사 등 잡일을 담당하는 화병(火兵) 1명이 편성되어 있다.

 

전투시에는 이 대의 군사 중에서 화병은 빠지고 대장을 선두로 하여 등패수-낭선수-장창수-당파수의 순으로 서서 적군을 향해 나아가 낭선, 장창, 당파 등을 이용하여 격투를 벌이게 된다. 접전시 진형은 2열 종대로써 등패와 요도로 무장한 요도수 2명이 장창 4명을 보호한다. 좌측의 요도수는 작고 둥근 등패를, 우측은 대형방패인 장패를 들고 표창이나 요도로 접근을 차단한다. 낭선수는 적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견제를 한다. 대열 후미에는 당파를 든 당파수가 화전을 이용하여 마찬가지로 근접하는 적을 막는다.

 

 

무예24기 시범단 활성화 방안 마련해야

 

26일 오후 3. 수원 화성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는 수원문화재단 소속 무예24기 시범단의 무예시범이 펼쳐졌다. 권법, 활쏘기, 창검술 등의 시범을 보인 후 뒤에 원앙진이 시범을 보였다. 11명의 인원이 각자 6가지의 무기를 들고 이리저리 치고 빠지면서 시범을 보여준 원앙진. 진법이 끝나고 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수원 화성이 유형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면, 무예24기는 무형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화성과 무예24기는 떼어놓을 수 없는 수원의 자랑이다. 하지만 무예24기 시범단은 열악한 환경에서 매일 오전,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시범을 보이고 있다.

 

무예24기 시범단 단원이 실제 검으로 베짚베기를 실연하고 있다 

 

수원이 세계적인 위상에 걸 맞는 도시로 도약하려면, 많은 문화예술 단체의 자랑도 필요하지만 화성과 연계가 되어있는 무예24기의 활성화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이들이 생계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무예24기의 연마와 시범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금선무일 듯하다. 정조와 화성, 그리고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외영과 무예24기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용주사천보루 (龍珠寺天保樓)’.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정조 14년인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그 전각의 배치나 규모 등이 다르다. 이것은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찰로사의 모습보다는 궁의 한 면을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꾸몄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기에 용주사는 절의 입구인 출입문도 일반적인 문이 아닌 삼문으로 조성하였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인 1790년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천보루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이다. 천보루의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쾌성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팔정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석조기둥으로 받친 천보루

 

천보루는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동편의 나유타실과 서편의 만수리실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의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용주사가 딴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이렇게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석주는, 용주사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회랑과 자연스럽게 연결해

 

천보루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다. 바로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와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용주사의 창건당시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인데, 천보루는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중앙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천보루와 연결이 되어있는 회랑인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그대로 받아 조성한 것이다. 특이하게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대웅보전에서 바라보면 차우 김찬균의 글씨로 쓴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마음이 담긴 홍제루에서 배워라

 

밖에서 보면 천보루요, 안에서 보면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 진 것이다. 이 누각은 원래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홍제루란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정조의 호인 백성을 사랑하는 홍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호인 홍제는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에서 따온 것으로, 넓고 큰마음과 굳센 의지를 뜻한다.

 

 

용주사를 다녀온 지는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 이 천보루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월호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실종자들을 향해 거북한 소리를 해대는 모자라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천보루를 지나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뭇 낮아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 땅의 모든 높은 자리라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용주사를 찾아 홍제루를 지나면서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깊게 머리를 숙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 교리 효수의 아들이다.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선 선정비

 

선정비란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베푼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 혹은 불망비라고 부른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에 소재한 수원화성박물관 경내에는 10여기의 선정비가 서 있다. 리 선정비는 중동 사거리를 비롯한 수원시내 곳곳에 서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런데 리 선정비를 보면 이상한 비가 하나 서 있다. 바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이다. 1831년에 건립된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성혈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자신이 서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파놓은 기원성 표시라고 한다. 성혈은 커다란 바위나 선돌 등 다양한 곳에 나타나고 있다.

 

수원의 대문격인 장안문의 기단석에도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아마도 한양으로 향하는 관문인 장안문에 성혈을 파는 것으로 많은 기원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왜 유독 많은 선정비 중에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만 많은 성혈을 판 것일까? 역사의 기록에서 서유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정조와의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서유린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을 화성으로 개칭하고, 수원부사를 유수 겸 장용외사 행궁정리사로 겸직을 시키고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한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죄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를 한다. 용인과 진위, 안산은 화성에 속읍으로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화성 장용외영에 속해 있고 세금도 화성유수부로 납입됐다. 하지만 시흥과 과천은 총융청에 속해 있어 모든 세금을 총융청이 다스리는 남양부로 세금을 내야 했다.

 

 

지금의 화성시 남양동이 당시는 남양도호부라고 하는 화성유수부로부터 독립된 지방 고을이었다. 정조는 상대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총융청의 병사들을 서유린의 주청에 의해 화성유수부로 편입을 시킨다. 이로써 화성 인근 5읍인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이 화성유수부에 속하면서 이곳에 있는 부대 역시 장용외영으로 모두 속하게 됐다.

 

특히 용인과 진위, 안산의 3읍 협수군 12, 새로 이속된 시흥, 과천 속오군 5, 안산과 시흥 장초군 2, 용인, 진위, 안산 수어아병 8초 등, 도합 27초 병력을 확보해 기존의 화성유수부의 25초와 합쳐져 42초로 조선 최대의 정예부대가 됐다. 당시는 군제는 1초에 125명으로 이뤄졌으니 화성을 지키는 군사가 무려 5,250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참배를 하고자 화성 행궁으로 행어를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28일 전에 화성 유수 서유린을 부른다. 정조는 서유린에게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서유린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조는 화성을 만든 목적을 설명한다.

 

정조는 농업의 활성화 등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 8도에 보급해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말한다. 하지만 환궁을 한 정조는 28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렇게 정조는 화성 유수인 서유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벽파의 눈에는 가시 같았을 서유린

 

이 외에도 사초에는 서유린과 정조의 대화가 상당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서유린이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순조가 등극을 하자 벽파에 의해 귀향길에 올랐다. 화성유수는 정조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을 임명했을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벽파의 눈에는 서유린이 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00년 정조가 화성 행궁에서 환궁을 한 뒤 세상을 뜨자, 순조 2년인 1802년 집권 벽파는 시파의 군사기반인 장용영 외영의 군제를 없애고, 대신 규모가 훨씬 축소된 총리영을 둔다. 이로써 정조와 함께 강한 국권의 상징인 장용외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유린의 선정비에 많은 성혈이 있음은 결코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시파가 큰 탄압을 받았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 정조의 측근이었던 윤행임 등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시파의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로 간택이 되자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반대했던 권유, 김노충 등 벽파 쪽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켰다. 이로 인해 1807년 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지방으로 흩어져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화성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딴 비가 유수를 마친 이듬해나 수년 내에 조성을 한데 비해,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선정비를 세운 것도 벽파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 무수히 새겨진 성혈. 사람들은 서유린의 선정비를 세우고 정조가 드나들던 장안문에 많은 성혈을 판 것처럼, 정조가 운명을 할 때까지 화성유수로서 선정을 베푼 화성유수 서유린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성혈을 판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무수히 많은 성혈을 그에 비 받침돌에 새기면서 화성유수 서유린의 충정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백성을 사랑한 정조와 그에게 신임을 받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서유린의 마음을 기억해 내고자 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말없는 선정비가 아쉽기만 하다.

 

정조대왕이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3(매향동)에 나타났다. 손을 든 정조대왕은 팔달구청의 개청을 선포하노라라고 외쳤다. 신축한 수원 팔달구청의 낙성연이 베풀어진 자리이다. 5일 오전 11, 그동안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세를 들러 살던 팔달구가 새롭게 청사를 마련하고 낙성연을 베푸는 자리이다.

 

낙성연이란 조선시대 국가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이나 새로운 관아가 생길 경우 낙성연이라는 잔치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대왕은 17941월부터 17969월까지 화성을 축조했다. 화성의 축성 공사를 마친 한 달 뒤인 17961016일 화성 행궁 낙남헌에서 백성들과 함께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환경적인 청사

 

낙성연을 가진 팔달구 신청사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면적 12628.11로 단순한 관공서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주변에는 충분한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전시공간과 북카페, 소통의 공간과 저탄소 녹색환경의 수도 수원에 걸 맞는 태양광 발전, 옥상녹화, 자연환기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신청사 1층에는 종합민원과, 세무과, 기업은행, 당직실, 어린이집이 자리를 잡고 있고, 2층에는 구청장실을 비롯해 행정지원과, 안전주민자치과, 건설과, 건축과, 정보화교육장 및 의원실이 자리하고 있다. 3층에는 대회의실을 비롯해 사회복지과 경제교통과 환경위생과 교통상황실과 휴게실, 매점, 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팔달구청은 20121123일 공사를 시작해 2014331일에 공사를 마쳤다. 낙성연에 참가를 한 시민 임성희(, 45)씨는

오늘 이렇게 새 청사를 마련하고 낙성연을 갖게 되어서 구민의 한사람으로 정말 기쁘다. 그동안 월드컵 경기장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구청에 갈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수원천과 화성박물관, 그리고 화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에 청사가 마련이 되어 마음이 뿌듯하다고 했다.

 

한 시간 동안 다양한 행사 베풀어

 

낙성연은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가 취타대를 앞세우고 식장에 입장을 하면서 시작을 했다. 정조대왕의 낙성연 선포에 이어 예기보존회의 태평무, 사물과 탈춤이 어우러진 사자놀이, 그리고 여성민요그룹 아리수의 공연으로 이어졌다. 낙성연장에는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하여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 시민 천여 명이 함께 자리를 했다.

 

이날 낙성연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그동안 팔달구가 단독 청사가 없이 월드컵 경기장의 한편에서 구 업무를 보고 있어 늘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이렇게 신축을 하고 낙성연을 갖게 되어 팔달구민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내려놓게 되어 한 없이 기쁘다. 팔달구청의 신청사는 수원천과 화성박물관 그리고 주변에 행궁 등이 자리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문화와 생태가 어우러지는 수원시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청사라고 생각한다. 오늘 팔달구민들과 함께 마음껏 낙성연을 즐길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낙성연에 참석을 한 팔달구 구민이라고 밝힌 주민 한 사람은

정조대왕의 개혁정신과 효를 상징하는 화성과 행궁, 그리고 소통의 중심이 되는 장안문서부터 팔달문까지, 또한 성곽의 대표적인 동문인 창룡문과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풀어 마련한 장시, 이 모든 것이 팔달구에 소재해 있다. 이렇게 버젓한 청사를 마련하고 보니 이제야 사통팔달의 팔달구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정말 기쁘다고 한다.

 

낙성연 행사를 마친 후에는 주민들이 참석한 단심줄 엮기와 청사 입주 테이프 커팅, 내빈들의 청사순회 시간도 함께 가졌다.

 

5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수원천 위에 걸린 매향교로 파발마들이 달려왔다.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으로 납신다는 파발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세 필의 말은 그렇게 대로를 달려 행궁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뒤이어 많은 무리들이 행궁을 향해 열을 지어 행진을 했다.

 

218년 전 정조대왕은 개혁정신과 당대 과학의 힘을 집대성하여,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성을 축조했다. 이 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으며, 사적 제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개혁사상의 산물이다. 강한 국권을 지향하던 정조대왕은, 가장 강한 군대인 장용외영의 무사들을 훈련시켜 이 화성을 지키게 만들었다.

 

 

수시로 화성 행궁으로 행행을 한 정조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행을 하였다. 이는 1년 평균 약 3회 정도를 행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행행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을 참배하였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현릉원으로 원행을 할 때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수원 현릉원의 원소재실까지의 지명과 행궁, 교량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으로 지역 경계나 지역 간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원행정례에 의하면 시흥로의 경우 전 노정의 길이는 83, 교량 24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행궁 앞 상설 한마당 개막

 

5일 수원 화성 행궁일대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능행차반차도에 기록된 8일간의 화산릉 행차가 재현이 된 것이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어가행렬로 인해, 주변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가 묻힌 화성 현릉원을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또는 화성행차도라고도 한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례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1795년 음력 윤 2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이루어진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어머니인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동행하였다. 그 외에 우의정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천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반차도에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파발 뒤에 이루어진 어가행렬

 

5일 이루어진 어가행렬은 연무대에서 화성 행궁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행렬 또한 약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은 그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당시의 모습을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먼저 말 3필이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행차함을 알리는 파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뒤이어 경기감사, 훈련대장 등 말을 탄 정조대왕 당시의 인물들이 지나고, 뒤편에는 말을 탄 정조대왕과 어머니인 가마에 오른 혜경궁 홍씨가 이어졌다. 주변에 구경꾼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행궁을 행해 가는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외국의 방송사들까지 촬영에 열심이다.

 

정말 멋있습니다. 이런 행렬은 수원이 아니면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수원시민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만 합니다. 정말 행복하네요.”

 

길에게 어가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한 시민의 말이다. 이렇듯 행궁 앞 상설한마당의 개막일에 만난 정조대왕. 2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대왕의 백성사랑과 그 품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최신 댓글